31. 리하르트 가문 아닙니다.
파티의 시작 시간보다 조금 더 이르게 도착한 리트릭과 에릭은 일리안의 파티 준비를 도왔다. 덕분에 파티는 순조롭게 준비되고 있었다.
“헤이븐, 인마. 넌 나가서 손님맞이를 해야지!”
“그래?”
그중 들뜨지 않은 사람은 일리안밖에 없었다. 리트릭과 에릭이 제 데뷔탕트라도 되는 마냥 그녀의 등을 떠밀자 그제야 일리안은 옷차림을 정돈하며 밖으로 나갔다.
몇 년간 문이 닫혀있던 윈터 가문의 대문이 활짝 열렸다.
타피아는 시녀 몇 명과 함께 저택의 앞에서 연이어 도착할 영애들을 기다렸다. 일리안 또한 그녀들의 앞에서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마쳤다.
“조금… 늦으시네요.”
“뭐, 늦을 수도 있는 거지.”
일리안과 타피아는 저택 앞에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영애들을 기다렸지만, 시간에 맞춰 도착하는 이들이 없었다. 그럼에도 일리안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그들을 기다렸다.
그렇게 얼마나 밖에서 사람들을 기다렸을까.
첫 번째로 도착한 영애는 마리엣이었다. 일리안이 파란 화원에서 알게 된 백작 영애였다.
“초대에 응해주어 고맙군요, 마리엣.”
“……별말씀을요.”
일리안의 인사에 마리엣의 양 볼이 붉게 달아올랐다. 마리엣은 서둘러 치맛자락을 조금 들어 올려 짧게 인사를 하고는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뒤로 서너 명의 영애들이 연달아 도착했다. 그중에서는 비앙카도 있었는데, 새침한 얼굴의 비앙카는 일리안의 인사조차 받지 않고 저택으로 들어갔다.
일리안은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그녀의 눈에는 비앙카가 아무리 못되게 굴어도 고작 새침한 열다섯 살 여자아이로 보일 뿐이었다.
그리고, 저택의 손님은 비앙카가 끝이었다.
그 뒤로 몇십 분을 더 기다렸지만 더 이상 오는 손님은 없었다. 일리안이 아무리 데뷔탕트를 작게 열었더라도 발송된 초대장에 비하자면 이상할 정도로 적은 수였다.
아무리 기다려도 오는 이가 없자 일리안의 뒤에 서 있던 타피아가 발을 동동 굴렀다. 초대한 인원에 맞추어 음식들을 준비해 두었는데, 이대로라면 모두 쓰레기가 될 것이었다.
아니,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하나밖에 없는 제 주인님의 데뷔탕트가 엉망이 될지도 몰랐다. 타피아가 초조한 말투로 일리안에게 물었다.
“헤이븐 님,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요……?”
“뭐, 일단 안으로 들어가 보자. 타피아, 너무 걱정하지 마. 난 괜찮으니까.”
그렇게 대답한 일리안은 타피아와 함께 저택으로 들어갔다. 예상대로 텅텅 빈 파티장에는 영애들 몇몇이 모여 앉아 있었다.
일리안은 그나마 초대에 응해준 영애들에게 다가갔다. 그들에게나마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다가갈수록 그들의 분위기가 좋지 않다는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상당히 불쾌한 얼굴의 마리엣이 누군가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게 소문인지, 진실인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 아닌가요?”
“어머, 순진한 마리엣. 당신은 그럼 고작 남작 영애가 리하르트 가문, 그것도 율리어스 공작 전하의 후원을 받는다는 이야길 믿으셨던 건가요?”
“전 처음부터 믿지도 않았어요. 보세요, 이런 싸구려 장식물이라니.”
영애들 중 1명이 비소를 지으며 테이블 위에 장식된 장미꽃 1송이를 손에 들었다. 그녀는 가시가 제거된 장미꽃의 목을 뚝 분질렀다.
일리안은 그 모습을 아무 말 없이 바라보았다. 그녀가 방금 꺾어버린 장미꽃은 게릭과 정원사들이 그녀의 데뷔탕트를 위해 열심히 준비해 준 꽃이었다.
뒤에서 일리안을 따라가던 타피아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들을 바라봤다.
“처음부터 이상했어요. 애초에 비앙카 양이 말했던 것처럼, 만약 후원을 받고 있다면 1주일에 한 번만 파란 화원에 왔겠어요?”
“돈이 부족했던 거죠. 아는 사람도 없고. 그렇지요, 비앙카 양?”
“글쎄요. 그렇게 궁금하시면 당사자에게 직접 물어보면 되는 것 아닌가요?”
제 이름이 나오자 비앙카는 고개를 기울이며 그들에게 물었다. 비앙카에게 질문을 던진 영애는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야기를 잠자코 듣던 일리안은 조용히 그 테이블에 다가갔다. 그녀의 존재를 알아차린 영애들이 흠칫하며 일리안을 바라봤다.
그러나 일리안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테이블 중 빈자리에 착석했다.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결국 호기심을 참지 못한 영애 1명이 일리안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윈터 영애, 대답해 주시겠어요? 영애가 리하르트 가문에서 후원을 받고 있다고 거짓말을 한다더군요.”
“그래서 모두 안 오셨군요.”
“다들 그래서는 아니겠… 지만, 어쨌든, 대답해 주세요. 우린 그걸 확인하러 왔으니까요.”
침묵하던 일리안은 취조하듯 물어오는 영애를 직시했다.
“누가 그런 말을 했습니까?”
“……세르앙 영애요.”
윈터 가문에서 파티가 열리기 며칠 전, 실비아는 또다시 화원으로 향했다. 마침 일리안이 파란 화원에 가지 않았을 때였다.
실비아는 파란 화원에서 그다지 영향력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늘 돈을 모아서 겨우 파란 화원에 들어가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입을 여는 경우는 적었다.
고작 다른 영애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정도가 실비아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때문에 파란 화원에서 실비아를 기억하고 있는 영애들은 드물었다.
그러나 그날은 달랐다.
어딘지 의기양양한 태도로 파란 화원에 들어온 실비아는, 자리에 앉자마자 모두의 시선을 끌어모았다.
“헤이븐 윈터 영애를 아시나요?”
요즘 들어 파란 화원 내에서 가장 뜨거운 인물이기도 했다. 한 영애가 호기심을 가지고 실비아의 질문에 대답했다.
“그럼요, 리하르트 가문의 후원을 받으시는 분 아닌가요? 며칠 전에도 오셨는걸요.”
“어머, 걔가 여기서도 그런 말을 했나요? 정말이지…….”
실비아는 얼굴을 찌푸리며 짧게 혀를 찼다. 그녀의 그런 반응에 더욱 궁금해진 영애들이 실비아를 주목했다.
파란 화원에서 그런 주목을 받는 것은 처음이었던 실비아는 과장된 제스처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무슨 뜻이죠?”
“저와 윈터 영애는 사촌지간이에요. 옛날부터 그랬지만, 그 아이가 정말 능청스럽게 거짓말을 하지 뭐예요? 자기가 리하르트 가문의 후원을 받는다고요. 감히.”
실비아의 그 이야기는 빠르게 퍼져 나가 파란 화원에 있는 모든 영애들의 귀에 들어갔다. 그중에서는 일리안을 믿는 사람도 몇몇 있긴 했지만, 대부분이 실비아의 말을 믿었다.
“정 안 믿기시거든, 윈터 가문에서 열리는 파티에 가보세요. 어찌나 가난하게 꾸몄는지 눈물이 날 정도라니까요.”
실비아는 자신이 보기라도 한 마냥 웃으며 확신했다. 그 때문에 몇몇 영애들은 탐탁지 않더라도 사실을 확인하고자 일리안의 파티에 참석한 것이었다.
일리안은 실비아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었다. 그녀의 반응이 너무도 담담해 오히려 설명해 주던 영애가 더 멈칫할 정도였다.
이야기가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 파티장으로 영애들 몇 명이 들어왔다. 하지만 부러 뒤늦게 도착한 그들 중에서 일리안을 곱게 바라보는 이는 몇 명 없었다.
“그럼, 저들도 제 이야기가 맞는지 확인하러 온 거로군요.”
“……음, 그렇겠죠.”
이야기를 모두 들은 일리안은 이내 자리에서 일어섰다. 조용히 일어나 테이블을 떠나는 그녀를 비앙카가 흥미롭다는 듯 바라봤다.
“헤, 헤이븐 님…….”
타피아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일리안의 옆에 붙어 섰다. 누구보다도 열심히 준비한 그녀의 데뷔탕트가 완전히 망가졌다는 사실이 타피아를 울먹이게 만들었다.
일리안은 고개를 돌려 그런 타피아를 바라봤다. 글썽이는 그녀의 모습에 일리안이 씩 웃으며 타피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울지 말라니까.”
“죄송, 죄송해요……. 제가 조금 더 잘 준비했더라면…….”
“이게 어디 타피아 탓인가?”
어깨를 으쓱였다. 화려하게 꾸밀 수 없던 것은 가문의 재정이 그리 넉넉하진 못하기 때문이었고, 일리안도 성대하게 열 생각이 없다고 밝혔으니 당연한 것이었다.
준비한 파티가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은 것은 아쉬웠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 데뷔탕트에 대해 크게 기대하고 있던 것도 아니었다. 일리안은 담담한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향한 곳은 리트릭이 있는 곳이었다.
“야, 헤이븐…….”
리트릭도 대충 눈치로 파티가 순조롭게 돌아가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듯했다. 그는 그답지 않게 웬일로 머뭇거렸다.
“네가 그러니까 좀 웃긴데.”
“야 인마, 넌 이 상황에 그런 말이 나오냐?”
“지금이 어떤 상황인데?”
리트릭은 자신이 겪은 일이기라도 한 것처럼 미간을 구겼다.
“넌 네 데뷔탕트인데……!”
“데뷔탕트?”
“그래!”
“리트릭.”
일리안은 피식 웃으며 리트릭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오히려 그녀가 그를 위로하는 것 같기도 했다.
“살아가다 보면 이것보다 뭣 같은 일은 제법 많이 일어나거든.”
“……뭐?”
구겼던 표정조차 풀고 멍한 얼굴이 된 리트릭을 가만히 내버려 둔 일리안은 2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1층보다 조금 높게 마련된 2층은 아래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을 받기에 충분했다.
일리안이 2층에 올라간 이유는 당연했다. 파티의 주최자가 참석해 준 이들에게 초대에 응해주어 고맙다는 인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텅텅 비어 보이는 파티장을 향해 할 수 있는 인사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일리안은 2층으로 올라가 조명을 담당하는 시녀에게 손짓했다.
시녀가 버튼을 누르자, 파티장에는 일리안이 서 있는 2층의 불이 밝혀졌다.
“먼저, 초대에 응해주신 분들에게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
보통이면 박수가 터질 말이었다. 1층에 있던 이들은 모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고 일리안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제가 리하르트 가문의 후원을 받는지 알고 싶어 파티에 참석하셨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혹은 리하르트의 사람들을 볼 수 있을까 싶어 참여한 이들도 있을 겁니다.”
이 말에 술렁거린 것은 영애들이었다. 리하르트 가문을 기대하고 참석했던 영식들이나 귀족 몇 명 또한 뜨끔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하지만, 여긴 윈터 가문입니다.”
침묵이 맴돌았다.
“또한 제 이름은 리하르트 가문으로부터 후원을 받는 이가 아니라, ‘헤이븐 윈터’입니다. 그러니 윈터 가문이 아닌 리하르트 가문의 파티를 기대하셨다면 지금 나가셔도 좋습니다.”
흔들림 없이 이야기하는 일리안은 조금도 기죽어 있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리하르트 가문이라는 배경이 없더라도 반짝일 수 있노라고,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야기가 마치자 조금의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자그마한 박수가 한 곳에서 터져 나왔다.
비앙카였다. 그녀는 자리에 앉아 일리안의 이야기를 들으며 우아한 모습으로 느리게 박수를 쳐주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곁에 있던 영애들이 함께 박수를 쳤다. 초대받은 다른 귀족들 또한 머뭇거리면서도 일리안에게 박수를 보냈다.
일리안은 씩 웃으며 그런 그들에게 짧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거기에 맞추어 꺼졌던 파티장의 모든 조명에 다시 불이 들어왔다.
계단을 걸어 다시금 1층으로 내려간 일리안은 아직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던 리트릭과 눈이 마주쳤다. 그의 곁에는 어딜 다녀온 것인지 에릭도 함께 있었다.
리트릭과 에릭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내려오는 그녀를 향해 헛웃음을 보냈다.
이 문제를 해결할 줄은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파티가 끝나면 그녀를 위로해 주어야겠다고, 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진짜 인정하기 싫은데…….”
“뭐?”
“너 좀 멋있다.”
리트릭은 불만스러운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일리안은 그 이야기를 듣더니 픽 웃으며 그의 머리를 헝클였다.
공들인 머리가 망가지자 리트릭이 그녀를 향해 온갖 짜증을 부리기 시작했다. 누가 보면,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일리안은 리트릭과 에릭을 뒤로하고 다시 영애들에게 다가가려 했다. 그런데 그녀가 다가서기도 전에 영애들 사이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세르앙 실비아 양?”
실비아와 함께 자작 부인이 파티장으로 들어섰다. 그녀의 고모가 도착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