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죽음을 바칠 시간-30화 (30/123)
  • 30. 열다섯 살의 헤이븐 윈터

    “우리 실비아가 저번에 파란 화원에 우연히 들렀다가 듣게 되었는데, 네가 리하르트 가문의 후원을 받고 있다지 뭐니. 그게 사실이니?”

    일리안은 파란 화원에서 실비아를 마주친 적이 없었다. 그녀가 검술 수업으로 바빠 파란 화원엔 고작 1주일에 한 번 가는 게 전부인 탓이었다.

    아마도 실비아가 들은 것은 일리안이 없을 때 영애들끼리 떠드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리라.

    일리안이 대답을 하지 않자 애가 탄 자작 부인이 그녀의 대답을 재촉했다. 일리안은 탐탁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 어머! 정말이니? 헤이븐, 그런 일이 있었으면 이 고모한테 말을 했어야지! 응?”

    “어째서입니까?”

    “응?”

    “어째서 제가 고모님께 말을 했어야 하냐는 말입니다.”

    자작 부인은 생각보다 차가운 반응에 떨떠름한 눈치였다. 그럼에도 자작 부인은 개의치 않고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난 네 고모니까. 당연한 소리를 하는구나.”

    그 말에 일리안이 입꼬리를 끌어 픽 웃었다. 평소의 해맑은 미소만 보여주던 일리안의 모습과는 몹시도 달랐다.

    “그래서 타피아가 고모님께 도와달라고 했을 때, 그 이야길 당신에게 왜 하냐며 매질을 하셨나 봅니다.”

    일리안의 뒤에 시립해 있던 타피아는 갑작스레 제 이름이 나오자 고개를 들었다. 타피아가 고개를 들어 제 주인을 바라보았을 때, 그녀는 처음 보는 서늘한 얼굴로 자작 부인을 응시하고 있었다.

    타피아는 윈터 남작 부부가 남기고 간 열두 살 여자아이를 진심으로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어떻게든 그녀를 돕고자 하나뿐인 친척 세르앙 자작 부인에게 찾아간 것이었다.

    세르앙 가문으로부터 온 초대장을 읽은 타피아가 일리안을 몹시도 말린 것은 자신이 이 저택에서 몹쓸 짓을 당한 기억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일리안 또한 자신처럼 매를 맞을까 두려워했다.

    일리안도 타피아가 자신이 의식을 되찾기 전에 그런 일을 당했다는 것은 직접 들은 게 아니었다. 타피아의 성격상 그런 일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디노로부터 전해 들어야만 했다.

    “……뭐?”

    “도와달라는 말을 나한테 왜 하냐, 그런데 리하르트 가문으로부터 후원을 받는 건 이야기 하라?”

    “그, 그때에는 내가 오라버니가 돌아가신 게 너무도 슬퍼서……! 그리고, 리하르트 가문에서 도움을 받는 김에 우리 가문도 도와주면 좋잖니? 연줄이 있으면 소개를 시켜줘서 실비아도 파티에 불러주면…….”

    “그러니까, 왜요.”

    일리안은 심드렁한 얼굴로 자작 부인을 바라봤다.

    “제가 왜 그렇게 해야 하냐는 말입니다.”

    “우, 우린 사촌이잖니? 더군다나 우리 가문은 딱히 지위가 높지도 않고, 아는 귀족 가문도 그다지 없어서…….”

    “아아, 세르앙 가문은 할 줄 아는 게 없다?”

    그 말에 자존심이 상한 모양인지 자작 부인이 입을 꾹 다물었다. 언뜻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그런 자작 부인을 말린 것은 실비아였다. 그녀는 돌아가는 상황을 눈치채고는 제 어머니의 허리를 콕콕 찔렀다.

    잘만 하면 리하르트 가문에서 열리는 파티를 데뷔탕트로 삼을 수도 있는 기회였다. 실비아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무너지는 자존심도 뒤로하고 제 엄마를 재촉했다.

    그러자 헛기침을 두어 번 한 자작 부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작 부인은 자리에 앉아 있는 일리안에게 다가와 양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헤이븐, 분명 예전 일은 용서해 주겠다고 하지 않았니? 그러니 우리 실비아의 데뷔탕트만 조금 도와주렴.”

    “제가 분명히 용서를 해드린다고는 했었죠. 그렇다고 해서 실비아양의 데뷔탕트인지, 뭔지를 도와준다고 한 적은 없습니다만.”

    “헤이븐, 너! 정말 이렇게 나올 거니?!”

    일리안이 꿋꿋한 자세로 나오자 결국 화를 참지 못한 자작 부인이 노성을 질렀다.

    그러나 일리안은 신경도 쓰지 않는 얼굴로 제 어깨에 얹어진 자작 부인의 손을 떼어냈다. 그리곤 자리에서 일어나 자작 부인을 마주 바라봤다.

    “돈이 부족하시면 어디 가게의 설거지라도 하시고, 인맥이 부족하시면 다른 귀족 가문 앞으로 가서 무릎이라도 꿇어보지 그러십니까.”

    “이, 이익……!”

    “제가 해드릴 수 있는 조언은 이게 전부군요.”

    치욕스러운 말이 이어지자 결국 자작 부인은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결국 그녀가 자신의 화를 참지 못하고 또다시 손을 들어 올렸다. 아니, 들어 올리려는 순간이었다.

    일리안은 허리춤에 차고 있던 제 롱소드를 빠르게 꺼내 들었다. 발도한 검은 손을 치켜든 세르앙 자작 부인의 투실한 목 바로 아래에 닿았다.

    “자작 부인.”

    “…….”

    “폭력을 쓸 수 있는 건 당신만이 아닙니다.”

    * * *

    일리안과 타피아, 그리고 디노는 들어갈 때와 마찬가지로 천천히 세르앙 가문을 빠져나왔다. 가문의 저택 앞에는 거금을 들인 마부와 마차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타고 올 때와 마찬가지로 디노는 마부의 옆자리에, 타피아는 일리안을 따라 마차 안에 탑승했다. 문이 닫히고 마차가 출발하자 타피아가 제 가슴을 부여잡고 크게 숨을 내쉬었다.

    “정말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는 줄 알았어요.”

    저택을 나가는 내내 그들을 쏘아보는 자작 부인의 시선은 따가울 정도였다. 실비아 또한 자신의 데뷔탕트가 글렀다는 것을 알았는지 엉엉 우느라 저택의 분위기는 엉망진창이었다.

    “후회하게 될 게다, 헤이븐!”

    끝내 밖으로 나가는 일리안의 뒤에서 자작 부인은 제 치맛자락을 구기며 말했다. 일리안은 고개만 슬쩍 돌려 그런 자작 부인을 힐끔 바라보곤 아무런 대꾸도 없이 걸음을 옮겼다.

    조금이라도 기가 죽을 법도 하건만, 일리안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살면서 그런 협박을 수없이 많이 받아보았기 때문이었다.

    “헤이븐 님,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아무리 그래도 헤이븐 님의 유일한 혈연이기도 하시고, 세르앙 자작 부인이 만약 잘못된 소문이라도 내면…….”

    “타피아.”

    타피아의 말에 일리안은 씩 웃었다.

    “내가 뭣 때문에 검술을 배운 줄 알아?”

    “네?”

    “내 몫은 내가 지키고 싶었으니까.”

    물론, 아직 롱소드는 잘 못 다루지만…….

    일리안이 머쓱한 얼굴로 제 머리카락을 긁적였다. 롱소드로는 아직 기사는커녕 용병 1명을 이기기도 벅찼다.

    자신의 것을 지키려면 강해져야 했다는 말은 비단 롱소드를 두고 한 말이 아니었다. 처음 쌍검을 배울 때에도 그러했다.

    열 살짜리 아이가 제 몫의 일당을 빼앗기지 않으려면 어떻게든 강해져야만 했다. 일리안은 지나온 제 삶을 떠올리고는 짧게 비소했다.

    그러니 세르앙 자작 부인의 협박쯤은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이미 숱하게 많은 협박들을 받아왔기 때문이었다.

    “정말……. 잘 성장하셨네요.”

    “음? 그런가.”

    일리안은 자신이 보기엔 아직도 어려 보이기만 한 타피아가 그런 말을 하자 일리안은 가볍게 웃었다. 그리고 마차의 자그마한 창문을 열자 시원한 바람이 그녀의 볼을 간질였다.

    “저, 헤이븐 님. 이번 파티에 초대할 분들 말이에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그동안 타피아는 일리안이 받아온 초대장을 일일이 읽어보며 파티에 어떤 가문을 초대할지 고심하고 있었다. 꽤 오랫동안 고민해 온 모양인지 그녀의 계획은 제법 성대했다.

    일리안은 흐음, 하며 타피아의 성대한 파티 계획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 곰곰이 고민하던 일리안이 말했다.

    “꼭 데뷔탕트를 그렇게 크게 해야 할까?”

    “네?”

    “타피아, 네가 걱정이 많아서 파란 화원에 다니고, 초대장을 여러 개 받아오긴 했지만……. 나는 사교계에 큰 뜻이 없어.”

    데뷔탕트를 하지 않으면 사교계에 발을 들일 수 없고, 그건 명예에 치명적이라는 이야기에 열심히 움직이기는 했지만 그게 끝이었다.

    일리안은 사교계에서 명성을 드높이는 것에 큰 뜻이 없었다. 차라리 지금 하고 있는 분재농원 사업이나 검술 수련이 더 흥미로웠다.

    그런 일리안의 의견에 타피아가 크게 반대하리라고 생각한 것과는 달리 그녀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헤이븐 님의 뜻이 그러시다면 알겠어요. 전 헤이븐 님이 무사히 데뷔탕트를 치르는 것만으로도 정말 뿌듯한걸요.”

    * * *

    시간은 흘러 어느새 일리안의 데뷔탕트가 다가왔다.

    그 바람에 윈터 가문의 저택은 웬일로 떠들썩했다. 그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응접실과 여러 방을 청소하고, 파티 준비를 하느라 새로운 고용인들을 들인 덕분이었다.

    그 덕분에 타피아는 외부에서 고용한 이들을 부리기 바빴다. 디노 또한 보안을 위해 임시로 고용된 용병들을 담당했다.

    초대장은 무사히 발송되어 일리안이 친해진 몇몇 영애들의 가문에 도착했다. 초대장을 받은 그녀들은 일리안에게 다가와 수줍게 웃으며 꼭 가겠노라 말해왔다.

    의외로 초대장은 비앙카에게도 전해졌다. 일리안과의 그 일이 있은 후 데면데면했던 비앙카는 어쩐 일인지 일리안에게도 초대장을 보냈다. 그 답장으로 일리안도 보낸 것이었다.

    초대를 받은 영애들 중에서 그렇게 물어오는 이들도 있었다.

    “혹시, 리하르트 공작 전하께서도 파티에 오시나요?”

    무언가를 기대하듯 반짝이는 눈은 무엇을 바라는지 명확했다. 사교 파티엔 일절 참여하지 않는 율리어스의 얼굴이라도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리라.

    일리안은 그런 그들에게 웃으며 고개를 저어야만 했다.

    “아직 싯투르 공국에서 돌아오지 않으셨으니, 참석하지 못하실 겁니다.”

    그런 일리안의 대답에 더러는 실망하는 기색을 보이기도 했다. 만약 그녀의 파티에 율리어스가 참석한다는 소문이 돌았더라면 윈터 가문이 터져 나가도록 손님이 들이닥쳤을 것이다.

    “그럼, 타피아. 이건 여기 두면 될까?”

    일리안은 제법 값비싸 보이는 화분을 번쩍 들어 올렸다. 이리저리 움직이며 일용직 시녀들에게 지시하기 바쁘던 타피아가 화들짝 놀라며 성급히 다가왔다.

    “헤이븐 님! 왜 헤이븐 님이 이런 일을 하세요. 이럴 게 아니라 조금이라도 더 치장을……!”

    “타피아. 옷도 입었고, 머리 손질도 받았고. 심지어 피부 관리도 받았어.”

    “아무리 그래도 흙이 묻은 화분을 드는 건 안 되죠!”

    일리안은 금색으로 포인트를 준 흰색 정장을 입고 있었다. 물론 그녀도 요령 있게 자신의 옷에 흙이 묻지 않도록 화분을 안고 있었지만, 타피아가 보기엔 어림도 없어 보였다.

    “알겠어, 이것만 할게.”

    타피아의 타박에 짧게 웃은 일리안이 화분을 자리에 가져다 두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저택은 오늘따라 유난히 장식물이 많았다. 때문에 일리안은 그만 발아래에 놓인 꽃가루를 보지 못하고 발을 헛디뎠다.

    품에 안겨 있던 화분이 그녀의 품을 벗어나 땅바닥으로 떨어지려 했다. 그것을 막은 것은 일리안의 허리를 껴안은 누군가의 손이었다.

    “조심해야 할 것 아니야.”

    에릭이었다.

    그는 일리안의 허리를 한 손으로 붙잡고 나머지 손으로 화분 아래를 받치고 있었다. 일리안이 고개를 돌려 제 허리를 감싸 안은 에릭을 확인하고는 서둘러 그 품을 빠져나왔다.

    “……언제 온 거야?”

    “방금. 바쁠 테니까.”

    에릭은 웬일인지 그답지 않게 검은색 프록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체격이 좋은 그가 옷을 차려입자 그 품새가 살아났다.

    평민인 에릭이 일리안의 데뷔탕트 파티에 참여할 수는 없을 터였다. 그런데도 그가 옷을 차려입고 온 것은, 단지 그녀의 열다섯 살을 진심으로 축하하기 때문이었다.

    “인마, 헤이븐!”

    “리트릭?”

    “손님이 왔으면 마중을 나와야지!”

    “……너한테 초대장을 보낸 적은 없는 것 같다만.”

    리트릭 또한 다른 날과 달리 기사 제복도, 편한 옷도 아니었다. 청록색과 금색이 어우러진 정장을 입은 리트릭은 귀족가의 막내 도련님 같았다.

    “친구 좋다는 게 뭐냐. 이런 날에 우리가 빠지면 안 되지!”

    다가온 리트릭이 일리안의 등을 툭툭 두들겼다. 일리안은 잠시 귀찮은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에릭과 리트릭을 바라보며 짧게 웃었다.

    그녀의 열다섯 살이 시작되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