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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죽음을 바칠 시간-29화 (29/123)

29. 호의는 호구다

편지의 내용은 간단했다. 오랫동안 얼굴조차 보지 못했으니 한 번쯤 세르앙 가문으로 와 식사를 하라는 이야기였다.

다정한 인사로 끝난 편지는 언뜻 보기엔 매우 각별한 친척으로 보일 정도였다. 그러나 세르앙 자작 부인이 그럴 인사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일리안과 타피아는 머리를 맞대었다.

물론 타피아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세르앙 가문에 가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었다.

“타피아, 걱정하지 말라니까.”

“헤이븐 님, 그래도요…….”

“이미 마차는 거의 도착했어.”

마차 안에 앉아 있던 일리안은 제 옆에 눈가를 글썽이고 앉아 있는 타피아의 머리를 조심스레 매만졌다.

“타피아.”

“……네.”

“두려워할 것 없어.”

네 곁에는 내가 있잖아. 일리안이 덧붙여 말하고는 타피아의 머리를 지나가듯 매만졌다. 어딘지 두려운 기색으로 눈을 내리깔고 있던 타피아가 잠시 놀라 고개를 들었다.

곧이어 바깥으로부터 마부의 도착했다는 말이 들려왔다.

일리안은 마차에서 내리기에 앞서 제 목에 멘 스톡 타이를 다시금 조였다. 눈물을 글썽거리던 타피아도 허둥지둥 일어나 그녀의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치장을 지고 들어가서는 안 된다며 외관에 한껏 힘을 준 상태였다. 일리안은 와인빛 정장에 금색 자수가 들어간 화려한 옷을 입고 있었다. 돈을 들인 보람이 있는지, 옷은 그녀를 귀공자로 보이게끔 만들었다.

마차에서 내리자 마부와 함께 탑승하고 있던 디노가 제법 의연한 얼굴로 목례를 해왔다. 세 명만 있었더라면 절대 하지 않을 행동이었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일리안의 품위를 위해 모두 힘쓰고 있는 것이었다.

디노가 큰돈을 주고 특별히 빌려온 마차와 마부에게 언질을 하자, 세 명은 제법 당당한 걸음으로 세르앙 저택에 입성했다.

“아, 오늘 오기로 하신 윈터 가문 영애이신가요?”

시녀로 보이는 여자가 그들에게 다가와 빙긋 웃으며 물었다. 일리안이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려는 순간, 타피아가 재빨리 뒤에서 치고 나와 시녀의 말에 응대했다.

“그렇답니다. 윈터 남작 가문의 유일한 영애, 헤이븐 님이세요.”

흔히 시녀의 말에 귀족이 직접 대답하는 것은 품위가 떨어지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개념이 없는 일리안이 별생각 없이 그녀의 말에 대답하려 하자 타피아가 일리안의 품위를 생각해 먼저 나온 것이었다.

일리안은 그런 타피아를 잠시 놀란 눈으로 바라보다 이내 묵묵히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 모습이 어엿한 귀족 소년처럼 보였다.

“그럼, 응접실로 안내해 드릴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시녀는 다른 시녀를 불러와 일리안 일행의 안내를 맡기고는 복도로 떠났다.

응접실의 소파에 앉아 일리안이 연습한 대로 귀족들의 에티켓에 맞춰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 찻잔의 아래를 받친 새끼손가락이 잠시 부들부들 떨리기도 했다.

디노와 타피아는 딱딱하게 굳은 자세로 그녀의 뒤에 시립해 있었다. 곧 도착한 세르앙 가문의 사람들을 상대할 생각에 긴장한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긴장한 것과는 달리, 세르앙 자작 부인의 두툼한 살집은 조금도 볼 수 없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가문의 사람들 중 모습을 드러내는 이가 없기 때문이었다.

결국 참다못한 타피아가 밖으로 나가 시녀들을 불러 세웠다.

“준비 중이시라뇨?!”

응접실 바깥으로부터 들려온 것은 타피아의 성난 목소리였다. 미처 문을 닫지 않은 모양인지 안에 있던 디노와 일리안 또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정말 죄송해요. 자작 부인께서 오늘 오전 내내 바쁘셨던 터라, 옷을 갈아입으셔야 해서…….”

“그럼, 자작 부인께서는 바쁘시고 우리 헤이븐 님께선 시간이 많다는 뜻인가요?! 약속을 잡아놓고 이렇게 나오는 건 아니지요!”

누가 보아도 그들을 홀대하는 모습이었다. 타피아는 자신의 주인이 당한 일에 몹시도 화가 나 한 발 더 시녀에게 다가서며 그녀를 나무라려 했다.

그런 타피아를 말리는 목소리가 들린 것은 응접실에서였다.

“타피아, 그만.”

일리안의 목소리는 청량했지만 소녀의 것처럼 청아하진 않았다. 어쩌면 보통 여성들보다 조금은 낮은 목소리가 들려오자 타피아는 움찔, 제가 하려던 말을 멈췄다.

단호한 목소리로 타피아의 행동을 멈추게 한 일리안은 그 목소리와는 달리 다정한 손짓으로 타피아의 어깨를 감쌌다. 그리곤 그녀를 제 뒤로 밀어두며 자신이 직접 시녀를 마주했다.

“세르앙 자작 부인께서는 바쁘십니까?”

“네, 네……. 정말 죄송합니다. 부인과 더불어 영애께서도 아직 치장이 한창이신지라…….”

“그렇군요.”

일리안은 짧게 미소 지으며 시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너무도 순해 어쩌면 가만히 기다리겠다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어진 이야기는 그렇지 못했다.

“타피아, 디노 경. 그럼 이만 돌아가도록 하죠.”

시녀가 화들짝 놀라며 일리안의 앞에 다가왔다.

“도, 돌아가시다니요?! 아직 얼굴도 뵙지 않으셨는데……!”

“죄송합니다만.”

일리안은 씩 웃으며 제 손목에 차여진 시계를 톡톡 두드렸다.

“오후에는 제가 바쁠 예정이라.”

시녀는 파랗게 질린 얼굴로 짧은 인사와 함께 응접실 앞을 떠났다. 달려갔다는 말이 더 옳았다.

* * *

세르앙 자작 부인이 응접실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10분이 채 흐르지 않았을 때였다. 그녀의 옆에는 처음 보는 얼굴의 붉은 머리 소녀가 서 있었다.

“어머, 헤이븐! 정말 오래간만이구나. 응.”

자작 부인은 몹시도 반가운 얼굴로 일리안에게 다가왔다. 응접실에서 일리안 일행을 몇십 분이고 기다리게 한 이처럼 보이진 않을 정도였다.

성큼 다가온 자작 부인은 살이 출렁거리는 팔을 들어 그녀를 껴안으려 했다.

“오랜만이군요, 세르앙 자작 부인.”

재빠르게 한발 물러선 것은 일리안이었다. 자작 부인이 한쪽 눈썹을 찡그리며 멋쩍어진 팔을 다시금 내렸지만 그녀를 나무라지는 않았다.

“자작 부인이라니, 헤이븐. 난 네 고모지 않니? 고모라고 부르렴.”

타피아는 생각과는 다르게 흘러가는 분위기에 눈을 둥그렇게 떴다. 틀림없이 열두 살 헤이븐을 만났을 때처럼 멸시할 줄 알았는데, 꼭 오랜만에 만나는 친척지간처럼 굴었다.

일리안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로잔 고모. 그런데 이쪽은…….”

“그렇게 부르니 참 보기 좋구나. 으응, 너는 처음 보겠구나. 여긴 내 딸, 실비아 세르앙이란다. 실비아?”

“만나게 되어 영광이에요, 헤이븐 윈터 님.”

얼굴에 주근깨가 나 있는 실비아는 자작 부인과는 달리 빼빼 말라 있었다. 자작 부인이 제 딸의 음식을 빼앗아 먹는 게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일리안이 파란 화원에서와 마찬가지로 부드러운 얼굴로 말없이 인사했다. 불쑥 끼어든 것은 자작 부인이었다.

“어머, 실비아. 헤이븐은 너와 나이가 같단다. 헤이븐 님이 뭐니? 헤이븐이라고 부르렴.”

“음……. 그럼 편하게 말할게, 헤이븐.”

친척지간이더라도 얼굴을 자주 보는 사이가 아닌 이상 귀족 사이에 말을 편하게 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더군다나 그 당사자인 일리안의 의사조차 묻지 않고 멋대로 말을 놓는 것은 매우 무례한 일이었다.

아무리 그들이 살갑게 맞이하더라도 그 아래에 깔린 무시는 선명했다. 애초부터 일부러 약속 시간까지 오라 해뒀는데도 응접실에 나타나지 않은 것은 일리안의 기를 죽이겠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그들의 얄팍한 수를 알고 있던 일리안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그래요, 세르앙 영애. 저도 무척이나 반갑군요.”

그 순간 분위기가 쩍 얼어붙었다.

멋대로 반말을 해온 실비아와 달리 존댓말로 응수한 일리안의 태도는 결국 나는 네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자작 부인과 실비아는 그런 그녀의 태도를 나무랄 수 없었다. 일리안의 태도를 지적하는 순간 자신들의 잘못이 더 두드러질 테니까.

자작 부인은 가면 같은 미소에 금이 간 얼굴로 말했다.

“그래, 인사는 이만하고 식당으로 가자꾸나.”

* * *

“황성에서 일한 적이 있는 쉐프의 다람쥐 요리란다.”

자작 부인은 상당히 기고만장한 얼굴로 자랑하듯 말했다.

제 몫으로 나온 다람쥐 고기를 포크로 대강 뒤적이던 일리안은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리고 그 순간 자신도 모르게 눈썹을 찡그렸다.

타피아는 원래 주방 일을 담당하던 시녀였다. 아주 어렸을 적부터 윈터 가문의 주방에서 일하던 타피아의 음식 솜씨는 대단했다.

때문에 거기에 익숙해진 일리안은 형편없이 냄새가 나는 다람쥐 고기가 입맛에 맞지 않았다. 그녀가 이전 생까지만 해도 대충 아무거나 먹고 살던 용병이었으니 겨우 삼킬 수 있는 음식이었다.

황성에서 일한 적이 있다는 요리사의 경력이 의심스러워졌지만, 일리안은 구태여 질문하지 않았다.

치졸하게 세르앙 자작 부인을 괴롭혀 주려고 이곳까지 온 것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조용히 식기 움직이는 소리만이 들리고 있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식사 내내 어딘지 안절부절못하던 자작 부인이었다.

“헤이븐, 네가 열두 살 때에는……. 내가 조금 실수했던 것 같구나.”

“……예?”

“하아, 그때에는 나도 내 오라버니가 돌아가셨다는 생각에 너무도 슬퍼서 그만…….”

자작 부인은 지금도 그 일이 몹시 슬프다는 듯 제 눈 아래를 손수건으로 톡톡 찍어냈다. 물론, 눈물이 흐른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그러셨군요.”

“그러니 그때의 일은 용서해 주지 않겠니? 정말,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단다.”

생각지도 못한 사과에 식사를 멈췄던 일리안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뭐, 알겠습니다. 없던 일로 해드리죠.”

“정말이니?! 어머, 헤이븐. 못 본 새에 정말 잘 성장했구나.”

일리안은 그 뒤로 이어지는 자작 부인의 칭찬 세례에 성가신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식사를 이어갔다. 사실, 어서 식사를 끝마치고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가득했다.

이상함을 감지한 것은 거의 식사가 끝나갈 때였다. 연신 일리안의 칭찬을 하기 바쁜 자작 부인의 허리춤을 실비아가 쿡쿡 찌르며 무언가를 지시하고 있었다.

곤란한 눈으로 땀을 줄줄 흘리던 자작 부인이 이내 조심스럽게 화두를 꺼냈다.

“저, 헤이븐. 네가 요즘 파란 화원에 다닌다는 소식을 들었단다.”

드디어 할 이야기를 꺼내는군.

일리안은 그제야 식사를 마쳤다. 눈을 내리깐 채 입가를 냅킨으로 닦는 모습은 어딜 봐도 자작 부인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러나 별 상관없는 모양인지 자작 부인은 연신 일리안의 눈치를 보면서도 살살 이야기를 이어갔다.

“파란 화원에는 어떻게 다니게 된 거니?”

“뭐, 가벼운 인연이 생겨 들어갔습니다.”

일리안도 처음엔 어떻게 해야 파란 화원에 들어갈 수 있을지 고민했었다. 명색이 회원제 화원인 탓이었다.

그런 그녀를 도와준 것은 의외로 리트릭이었다. 파란 화원을 알려준 리트릭은 그녀가 파란 화원에 어떻게 들어갈지 고민하자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멍청아, 내가 그것도 생각 안 하고 널 데려갔겠냐?”

“아니, 그래서 네가 어떻게 날 거기 넣어줄 건데.”

“나? 나 그 화원 주인 아들인데.”

그의 부모님은 파란 화원뿐만 아니라 비앙카가 말했던 두 블록 떨어진 영식들의 가게 또한 소유하고 있었다. 리트릭은 자신의 아버지가 정식 귀족은 아니지만 준귀족이라고 설명했다.

“그렇구나. 그럼, 혹시……. 우리 실비아도 파란 화원에 가입시켜 줄 수 있겠니?”

“…….”

“응? 정식 회원은 기존 회원 중 아는 사람이 있어야만 할 수 있다고 하고, 그렇다고 지금처럼 가끔씩 일회용 티켓을 끊기에는 금액이 너무…….”

거기까진 일리안도 예상했던 바였다. 자작 부인이 갑작스레 자신을 부른 것은 무언가 부탁을 할 일이 생겼을 때밖에 없을 테니까.

“그러죠. 어려운 일은 아니니.”

그렇게 호의를 베푼 순간, 자작 부인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그리고 말이다, 듣기로 네가 리하르트 가문으로부터 후원을 받는다더구나.”

일리안의 호의가 호구로 변한 것은 그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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