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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죽음을 바칠 시간-28화 (28/123)
  • 28. 스승이 누구세요?

    파란 화원의 여러 영애들과 친해지는 일은 제법 순조롭게 흘러갔다.

    영애들은 사내의 옷을 차려입고 검술을 배우는 일리안을 자신의 경쟁 상대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거기다 재미있는 입담과 더불어 눈길을 끄는 외모는 그녀를 파란 화원에서 가장 유명한 이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문제가 일어난 것은 그녀가 파란 화원에 나간 지 1달쯤 되었을 때였다.

    “윈터 영애께서는 어떤 경로로 우리 파란 화원에 들어오신 건가요?”

    질문을 던진 것은 비앙카였다. 그녀는 일리안이 들어온 첫날, 수모를 당한 것을 아직 마음에 담아둔 것 같았다.

    2층에 있던 무리 또한 일리안에게 호기심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라서, 그동안 그들 대부분이 그녀에게 말을 걸어왔는데도 비앙카만이 꼿꼿이 자리를 지켰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비앙카는 그날따라 왜인지 2층으로 올라가지 않고 1층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데, 일리안이 파란 화원에 도착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다가왔다.

    일리안은 다른 영애들처럼 파란 화원에 매일같이 들락거리진 못했으니, 아마도 일리안과 대화하기 위해 며칠을 1층에서 기다린 것이 분명했다.

    “부모님의 도움?”

    “아뇨, 제 부모님께선 이미 신의 품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어머……. 신의 보살핌이 있기를.”

    비앙카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지만, 주변 이들 사이에선 파문이 일었다.

    가문의 부모님이 돌아가시다니. 그 말인즉슨, 결국 윈터 가문은 이미 망한 가문이나 다름없다는 것 아닌가.

    헤이븐 윈터라는 인물이 재치 있고 매력 있는 인물이라는 것과는 별개로, 가문이 망해 버렸다면 더 이상 그녀와 대화를 나눌 가치가 없었다.

    비앙카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질문을 이어갔다.

    “그럼 이 파란 화원에 이렇게 매번 찾아오시는 게 쉬운 일은 아니겠어요. 저야 잘 모르는 일이지만, 회원제 화원이다 보니 몇몇 영애분들께서는 매일같이 들리는 게 힘들다고 하시던걸요.”

    결국엔 빙 둘러 일리안을 낮추는 말이었다.

    곧 열다섯 살 소녀들의 데뷔탕트 기간이 다가오는 만큼 영애들의 파란 화원 활동은 왕성해져 있었다. 일리안은 매일같이 들리진 않았지만 주에 한 번 정도 들리고 있었는데, 그게 결국은 가문의 힘이 부족해 오지 못하는 게 아니냐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세 개로 나누어진 화원의 무리 속에서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았다. 그들이 제 무리로 받아주지 않는다기보다는, 그녀를 특별한 사람으로 취급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1달간 일리안이 쌓아온 특별한 위치가 사라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글쎄요……. 그것보다는, 아무래도 검술 수련을 받고 있다 보니 매일 오는 것은 힘들더군요.”

    일리안이 처음에도 말했듯 검술 수련 때문이라고 했지만 주변에서는 그 말을 믿어주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이미 분위기는 비앙카에게로 기울어져 일리안의 말이 변명처럼 들리고 있었다.

    비앙카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검술 수련이라……. 혹, 어느 경에게 받는지 물어봐도 될지요. 제가 아는 기사분들이라곤 에반 경, 에디움 경 정도밖에 없지만요.”

    에반, 그리고 에디움은 현재 헤라프 제국에서 대단히 명성이 높은 기사들이었다. 비앙카의 말 기저에는 그 정도 기사가 아니라면 자신은 모른다는 비웃음이 담겨 있었다.

    일리안은 순순히 제 스승을 말했다.

    “제 스승은 가이우스 렌 경이십니다.”

    그러자 경악과 함께 질문이 튀어나온 것은 비앙카가 아닌 다른 영애에게서였다.

    “렌 가문의 가이우스 경이요?!”

    “가이우스 경? 리하르트 가문으로 들어가신, 그 가이우스 경……?”

    “말도 안 돼. 그분은 더 이상 검을 잡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아마도 일리안의 곁에 리트릭이 있었더라면 그는 자신이 더 우쭐한 모습으로 배를 내밀었을지도 몰랐다.

    일리안은 자신이 한 말에 거의 모든 화원에 있는 이들의 시선이 모아지자 제 볼을 긁적였다.

    비앙카는 일리안이 한 말에 잠깐 경악을 했다가, 순식간에 표정을 정리하고선 입가를 비틀었다. 그리고 고개를 기울인 그녀가 천연덕스럽게 질문했다.

    “하, 가이우스 경이라면 3년 전에 리하르트 공작 전하와 함께 싯투르 공국으로 떠나셨을 텐데요?”

    “어머, 그러고 보니 아직 돌아오지 않으신 걸로 아는데…….”

    “거짓말인가 봐요.”

    리하르트 공작, 율리어스가 현재 헤라프 제국에 없다는 사실은 거의 모든 귀족들이 알았다.

    무엇보다도 영애들 사이에서 가장 뜨거운 주제이기도 했는데, 제국 내에 있는 모든 여자들이 그를 노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비앙카의 날카로운 질문에 일리안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가이우스에게 검술 수련을 들은 것은 열두 살, 몇 달이 전부였기 때문에 자신도 스승이라 말해도 될지 고민한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가이우스는 율리어스와 떠나기 전, 마지막 검술 수업에서 리하르트 가문의 기사단장인 렉스에게 그녀의 수련을 맡기며 일리안에게 말했었다.

    “헤이븐 님, 비록 지금은 떠나지만 누가 헤이븐 님께 스승이 누구냐고 묻거든 저라고 대답하셔야 합니다.”

    “예? 어째섭니까?”

    가이우스는 한쪽 무릎을 꿇고 일리안과 눈을 맞추었다.

    “그야, 헤이븐 님이 제 하나뿐인 제자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로 렉스 또한 기꺼이 일리안의 수련을 맡아주면서도 그녀를 자신의 제자라 칭하지 않았다. 때문에 일리안은 늘 자신의 스승은 가이우스라고 말하고 다녀야만 했다.

    비앙카는 일리안의 얼굴 위에 나타난 곤란을 읽었는지 기회를 잡았다는 듯 말했다.

    “거짓말은 좋지 않답니다, 윈터 영애.”

    따스하게 웃음 짓는 비앙카는 겉으로 보기엔 천사 같았다. 그러나 주변에 있던 영애들은 그 말이 상대를 완전히 이겼다는 뜻임을 알기에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가이우스와 있었던 일련의 일들을 비앙카를 비롯한 영애들에게 모두 설명할 수 없었던 일리안은, 곤란한 얼굴로 볼을 긁적였다.

    고민하던 일리안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제가… 리하르트 가문으로부터 후원을 받고 있습니다.”

    “어머, 어머!”

    “헤이븐 님, 리하르트 가문이요?! 정말, 그 리하르트 가문에서 후원을 받으신다고요?”

    파란 화원은 순식간에 떠들썩해졌다. 철옹성 같은 리하르트 가문은 그 어떤 가문보다도 폐쇄적이기 때문에 어떤 방식으로든 연이 닿기가 힘들었다.

    율리어스는 공식 행사가 아닌 이상 어떤 사교 파티에도 참여하지 않았고, 공작성에 종사하는 이들은 누구보다도 무거운 입을 가졌다.

    그런 리하르트 가문으로부터 후원을 받는다니.

    그 이야기를 들은 비앙카는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머리로 리하르트 가문에게 압박을 받는 제 가문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비앙카는 제 치맛자락을 꼭 움켜쥐고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그, 그럼 윈터 영애의 후견인은… 가, 가이우스 경이라는 말인가요?”

    비앙카는 초조했다. 가이우스가 누구던가. 리하르트 가문의 두 번째 실세라고 칭해도 부족하지 않을 이였다.

    렌 가문의 장남인 가이우스가 가주의 자리를 버리고 리하르트 가문으로 들어간 이야기는 귀족가에서도 제법 유명한 이야기였다.

    그, 그래도 가이우스 경이라면 우리 가문 선에서 어떻게든 해결되겠지.

    떨리는 손으로 치맛자락을 붙잡은 비앙카는 이 일을 아버지께 어떤 식으로 이야기 드려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비앙카의 머리 위로 망치가 아니라 번개가 내려친 것은, 그다음이었다.

    “아뇨, 제 후견인은 가이우스 경이 아니라 리하르트 공작 전하십니다.”

    털썩.

    비앙카는 제 이마를 붙잡고 뒤로 쓰러졌다.

    그런 비앙카를 간신히 받아낸 것은 일리안이었다. 그녀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제 품에 안긴 열다섯 살 꼬마 여자아이를 내려다봤다.

    * * *

    비앙카와의 일 뒤로, 일리안은 2층에도 출입할 수 있는 몸이 되었다. 물론 그녀의 의지는 아니었다.

    그다음 주에 파란 화원을 찾아간 일리안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2층에 있던 무리였다. 그들은 일리안이 도착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우르르 몰려와 그녀를 2층으로 데려갔다.

    그 이후로 일리안은 파란 화원 내에서 혜성과도 같은 존재였다. 특별한 겉모습, 재치 있는 입담, 그리고 그녀와 닿아 있는 리하르트 가문이라는 매력적인 연줄까지.

    그렇게 시간은 흘러 겨울이 지나고 봄이 찾아왔다.

    모든 열다섯 살 영애들의 데뷔탕트가 열릴 시기라는 뜻이었다.

    “헤이븐 님, 제 첫 파티에 꼭 참석해 주실 거죠?”

    “제 데뷔탕트가 치러질 파티랍니다. 참석을 부탁드려요.”

    “헤이븐 님, 헤이븐 님…….”

    봄이 되어 찾아간 파란 화원에서는 영애들이 수줍은 얼굴로 헤이븐에게 하나둘씩 초대장을 건네주고 갔다. 일리안은 그녀들의 이름을 하나씩 불러주며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초대장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그 무수히 많은 초대장을 품에 껴안고 윈터 가문으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길에 보다 못한 에릭이 그녀의 초대장을 대신 들어줄 정도였다.

    타피아와 디노는 그런 초대장들을 보고 기함했다. 특히 타피아는 놀라다 못해 눈물을 뚝뚝 흘릴 정도였다.

    “타, 타피아. 왜 울어. 울지 마, 내가 미안해. 응? 젠장, 디노! 티슈 좀 들고 와!”

    일리안은 그런 타피아 주위를 빙빙 돌며 어쩔 줄 모르겠다는 몸짓으로 그녀를 달래기 바빴다. 디노는 그런 둘의 모습에 미소 지으며 티슈를 챙기러 다녀왔다.

    디노로부터 티슈를 받고서야 눈물을 닦아낸 타피아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헤이븐 님의 데뷔탕트로 걱정을 해온 게 벌써 3년이라……. 헤이븐 님이 이렇게 멋지게 성장하실 줄은, 흑…….”

    “타피아, 그만 울어. 헤이븐 님께서 걱정하시잖아.”

    디노가 웃으며 타피아의 등을 약하게 두드려 주자 타피아는 일리안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벌써 셋이 함께 저택을 지켜온 지 3년이 흐르고 있었다.

    율리어스가 후견인이 되며 윈터 가문의 빚을 해결해 주자 일리안은 국가에 빼앗겼던 윈터 남작의 분재농원을 되찾았다. 그리고 차분히 돈을 굴려 디버튼 분재원을 사들였고, 요즘은 그들과 함께 분재농원 사업으로 돈을 모으고 있었다.

    처음엔 고기도 함부로 사지 못할 정도로 가난했던 그들이 이제는 데뷔탕트 파티를 어떤 식으로 열면 좋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아마도 타피아는 그런 자신들의 모습에 감격한 것이리라. 일리안은 아직 제 눈엔 어리기만 한 타피아의 마음이 이해되어 픽 웃었다.

    “그럼, 언제가 좋을까? 슬슬 우리도 파티를 열어야겠지.”

    “아마 봄이 막 시작된 지금은 너무 많은 영애들이 파티를 열 거예요. 제 생각엔 봄이 지나가기 몇 주 전이 좋겠어요. 이것도 눈치 싸움이니까요!”

    타피아는 주먹을 꼭 쥐며 선언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일리안의 데뷔탕트에 대해 꽤나 오래 생각해 온 듯, 계획들 모두가 상당히 구체적이었다.

    타피아, 일리안, 그리고 디노 3명이 머리를 맞대고 저택에서 열리는 첫 사교 파티를 위해 열심히 구상하기 시작했다.

    이번 기회에 저택의 고용인들을 늘려보자, 파티에 디버튼 정원사들을 초대하는 건 안 될까, 누굴 초대하는 게 좋을까…….

    그런 고민들을 하고 있을 때였다.

    “어머, 이 시간에 찾아오실 분이 계신가?”

    누군가 저택을 방문했다는 벨 소리가 들려왔다. 막 해가 저물어 저녁이 된 이때, 윈터 가문을 찾아올 이라곤 없었다.

    타피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밖으로 나가 손님을 맞았다.

    디노와 일리안은 서로를 마주 보다 응접실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다른 귀족 가문과는 달리 고용인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직접 움직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응접실에서 차분히 기다리던 일리안과 디노를 찾아온 것은,

    “편지가… 왔어요.”

    타피아 혼자였다. 그녀는 왜인지 입을 꾹 다물고 일리안에게 그 편지를 건네었다.

    그리고 편지 위에 적힌 이름은 단 하나.

    「세르앙 가문으로부터.」

    그녀의 고모, 로잔 세르앙 자작 부인이 보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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