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그 영애와 시중과 기사
마리엣은 수도에서 제법 유명한 백작 가문의 딸이었다. 권력이나 명예가 대단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수도에서 상당한 재력가로 유명한 이였다.
올해로 열다섯이 된 그녀는 오늘도 ‘파란 화원’을 찾았다. 파란 화원은 요즈음 그녀 또래의 영애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장소였는데, 곧 데뷔탕트를 치러야 한다면 꼭 한 번쯤은 찾아야만 하는 곳이었다.
사교계에 정식으로 발을 들이지 않은 영애들이 모두 모이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바라는 초대장을 보내고 받으려면 누구보다도 왕성한 활동을 해야만 했다.
그렇게 해서 파란 화원에 다니게 된 지가 벌써 1달여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리고 이 파란 화원은, 이곳을 찾는 영애들 사이에서도 급이 나누어져 있었다.
“마리엣, 괜찮다면 2층으로 커피를 가져다주겠어요?”
“어머, 곧 시녀에게 말해 전해 드릴게요.”
“그럼 부탁할게요.”
첫 번째로, 부모님의 작위가 아주 높거나 엄청난 재력, 혹은 그에 걸맞은 전통을 가진 가문의 무리. 이들은 대체로 2층에 머물며 아래에 있는 이들을 구경하곤 했다.
보통은 아래로 내려오는 일이 없기 때문에 이들은 그들만의 관계를 형성했다. 1층에 있는 영애들 사이에선 이 속으로 들어가는 게 꿈인 이도 종종 있었다.
“마리엣, 어서 와. 오늘은 북부 가문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어.”
“그곳에 있는 영식들은…….”
두 번째는 돈은 많지만 작위가 낮거나, 작위는 높지만 권력이 조금 부족한 이들. 마리엣이 속한 무리가 바로 이곳이었다. 이들은 대체로 서로의 부족한 점을 채워주기 위해 친목을 다지는 게 목적이었다.
“실례가 아니라면 제가 앉아도 될까요?”
“처음 보는 얼굴이시네요. 혹시, 어디 가문의 영애이신가요?”
그리고 마지막, 작위도 돈도 부족하지만 인맥으로 겨우 파란 화원에 입장한 이들. 파란 화원은 회원제 카페이기 때문에 아무나 출입할 수 없는 곳이었다.
세 번째에 속한 이들은 매일매일 출입할 수 없어 그 날마다 다른 이들이었고, 때문에 무리를 형성하기도 힘들었다.
고작 열다섯, 많아야 열일곱의 영애들이 있는 곳이지만 이곳은 전쟁터나 다름없었다. 소녀들 또한 자신의 미래, 그리고 가문을 위해 매일같이 치장하고 이곳을 드나들고 있는 것이었다.
“정말이지, 아버지께서는 너무하세요. 제가 아직 어린아이인 줄 아시는걸요.”
“시틴 영애의 미모가 대단하시니 남작께서도 걱정하시는 것 아니겠어요?”
물론 열다섯 살의 영애들이니 마음이 맞는 친구를 찾는다면 가벼운 주제의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가끔은 이곳 파란 화원에서 친구를 찾아 좋은 관계로 남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자신이 여는 파티, 혹은 가벼운 티타임을 알리기 위한 장소로 쓰였다. 사교계의 초대장이 가장 많이 오가는 곳인 것이다.
마리엣은 오늘도 자신이 지을 수 있는 가장 예쁜 미소를 지으며 제 주변에 앉은 이들의 이야기에 조용히 귀 기울였다. 가끔은 입을 열어 그녀들의 이야기에 공감하기도 했다.
그래야만 이번 봄에 열리는 자신의 데뷔탕트를 무사히 치를 수 있을 테니까. 한편으로는 마리엣이 무엇보다도 기대하고 있는 행사이기도 했다.
“마리엣, 데뷔탕트는 귀족 여성에게 가장 중요한 자리란다. 사교계에 이름을 알리는 첫 번째 단계니까. 그러려면 높은 가문의 파티에서 데뷔탕트를 치러야만 하겠지? 엄마는 널 믿는다.”
어머니의 말씀을 다시금 새겨 넣은 마리엣은 잠시 흐트러진 미소를 다잡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자 요즘 유행을 따라 하느라 틀어 올린 무거운 머리에 슬금슬금 두통이 오고 있었다. 마리엣은 목을 조금 움직이며 힘이 들어간 근육을 풀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차랑, 하는 소리와 함께 파란 화원의 문이 열린 것은.
“남자… 애?”
영애들 중 1명이 속삭이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누가 그랬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특이한 행색에 내부에 있던 이들의 시선이 모두 모여들었다. 그것은 2층에 있던 무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파란 화원은 영애들만의 장소였다. 물론 가문에서 붙여주는 기사나 시중이 따라와 남자가 아주 없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영식들이 드나드는 장소는 아니었다.
그런데 방금 들어온 이는 베이지색의 정장에 흰 크라바트를 매치해 언뜻 보기엔 소년처럼 보였다. 부푼 크라바트 때문에 가슴팍이 보이지 않는 것도 중성적인 겉모습에 그 몫을 더했다.
소녀인지, 소년인지 모를 이는 싱그러운 웃음을 지으며 제 뒤에 따라오는 기사에게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들은 자연스럽게 파란 화원의 빈 테이블 중 하나로 향해 앉았다.
그때까지 파란 화원에는 제법 정적이 감돌았다. 영애들은 뒤늦게 흠흠, 하며 멈췄던 이야기를 이어갔다. 물론 그들을 흘낏거리는 시선들은 멈추지 않았다.
그것은 마리엣도 마찬가지였다. 마리엣은 처음 보는 얼굴에 호기심이 생겼지만 애써 그 궁금증을 감췄다. 그러나 그녀의 옆에 있던 한 영애가 마리엣에게 몸을 가까이 붙이며 속닥였다.
“마리엣, 혹시 아는 영식이신가요?”
“글쎄요……. 저는 처음 보는 이인걸요. 무엇보다도 데뷔탕트를 치르기 전까지는 가문에서 아는 영식 외에 가까이하지 않으니까요.”
말을 걸었던 영애는 실망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그럴 만한 것이, 영애들이 있는 파란 화원은 영식들의 출입이 암묵적으로 금지된 곳이었다.
그런데 소년의 옷을 입은 사람이 출입하다니. 거기다 무엇보다도 그자의 뒤로 따라온 기사와 시중으로 보이는 자의 외모가 눈에 띄었다.
까만 피부를 한 남자는 어려 보이는 얼굴과는 달리 다부진 체격으로 벌써부터 수컷의 향기가 잔뜩 나고 있었다. 시중 같지만 어딘지 무뚝뚝해 보이는 얼굴은 꼭 한 번 말을 걸어보고 싶게 생겼다.
그리고 기사 제복을 차려입은 소년은 언뜻 보기엔 흰 피부와 귀여운 얼굴로 귀공자처럼 보였다. 그러나 허리에 찬 검과 틈이 보이지 않는 자세는 그가 정식 기사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영애들의 힐끗거리는 시선이 멈추지 않자, 결국 움직인 것은 2층에 있던 무리 중 1명이었다.
“어머, 비앙카 양이 직접 움직이시다니…….”
“정말 드문 일이네요.”
비앙카라 불린 영애는 파란 화원에서 유일한 후작 가문의 딸이었다. 그녀가 천천히 1층과 이어진 원형 계단을 타고 내려와 베이지색 정장의 소년 앞에 멈춰 섰다.
화원 내에 있는 영애들은 모두 안 그런 척하면서도 비앙카와 소년의 이야기에 귀를 쫑긋 세웠다.
“제가 처음 보는 영식이시군요.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헤이븐 윈터입니다.”
윈터라는 단어에 대부분의 이들이 고개를 기울였다. 처음 들어보는 가문의 이름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비앙카도 마찬가지인 눈치였다. 그녀는 자신이 모르는 가문이기에 적어도 제 가문보다는 아래라고 생각했는지 다소 편안해진 기색으로 그를 바라봤다.
“윈터 가……. 그렇군요. 그런데 윈터 경, 주변을 둘러봐 주세요. 이곳에 다른 영식이 계신지요?”
즉, 영식은 없으니 이곳은 당신이 있을 자리가 아니란 소리였다. 마리엣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키며 헤이븐을 바라봤다.
“아무도 없군요.”
그런데 놀랍게도 그는 씩 웃으며 비앙카의 질문에 대답했다. 소년이 웃자 마리엣은 왜인지 떨리는 심장에 자신도 모르게 제 입을 가렸다.
대단히 잘생긴 얼굴은 아니었지만 소년은 분명히 어딘지 눈길을 끄는 구석이 있었다. 부드러운 탁한 붉은색 머리는 특별하진 않아도 관리가 잘되어 손을 가져다 대면 매끄러울 것 같았고, 붉은 기가 도는 갈색 눈동자는 순한 얼굴과 달리 묘하게 고양이의 것 같았다.
아마도 머리를 기르고 젖살이 조금 더 빠진다면 대단한 미인이 될 것이었다. 그러나 헤이븐에게서 흘러나오는 분위기가 마냥 예쁘기보다는 장난스러운 소년처럼 보이게끔 만들었다.
“안타깝게도 이곳은 영식분들이 이용하는 곳이 아니랍니다. 두 블록 떨어진 곳에 영식들이 자주 드나드는 가게가 있으니, 그곳으로 가보는 게 어떠실까요?”
비앙카는 높은 가문의 영애답게 얼굴 위로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설명했다.
그러나 미소에는 친절함뿐만 아니라 단호함도 있었기 때문에 마리엣은 그가 기죽은 얼굴이 되리라 생각했다. 또한, 곧 자리에서 일어나 화원을 떠날 것이라고.
그 생각이 완전히 무너진 것은, 소년의 다음 말에서였다.
“영애의 친절에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영애의 말씀처럼 영식들이 드나드는 가게에 갈 수는 없겠군요.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윈터 가문의 유일한 영애, 헤이븐 윈터입니다.”
그날, 몇몇의 영애들은 첫사랑을 잃어야만 했다. 그것은 마리엣 또한 마찬가지였다.
* * *
일리안이 영애라는 사실을 밝히자 비앙카는 미소 짓던 얼굴에서 순식간에 멍한 표정이 되었다. 틀림없이 소년이라고 생각했던 이가 소녀라는 사실에 놀란 것 같았다.
“제가 놀라게 해드렸나 봅니다. 저는 단지 드레스를 즐겨 입지 않을 뿐입니다.”
비앙카는 그 말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그리곤 얼굴을 붉히며 짧게 인사하곤 다시 2층으로 올라갔다.
일리안은 올라가는 비앙카를 향해 여유롭게 손을 들어 인사했다. 그러자 비앙카의 얼굴이 더더욱 붉어졌다.
“야, 헤이븐. 너 이래도 되는 거냐? 내가 알기로 이렇게 굴면 영애들 사이에선 완전 왕따라던데?!”
뒤에 붙어서 있던 리트릭이 자리에 앉아 있는 일리안에게 허리를 숙여 귓속말을 했다. 그 모습이 아무리 봐도 잘생긴 소년이 귀여운 소년에게 말을 거는 걸로밖엔 보이지 않았으니 문제였지만.
“……내가 봐도 좋은 방법은 아닌 것 같은데.”
뒤에 부복하고 서 있던 에릭은 눈만 내려 앉아 있는 일리안의 뒤통수를 바라봤다.
그러자 일리안은 고개를 휙 돌려 에릭의 눈을 마주했다. 그녀의 얼굴 위에는 즐거워 보이는 웃음, 그것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에릭은 자신을 바라보며 웃는 일리안에 고개를 모로 돌리며 얼굴을 붉혔다.
“잘 봐둬. 리트릭, 에릭.”
“아니, 이제 어쩔 거……!”
리트릭은 하려던 말을 멈추고 다시 몇 걸음 물러서야만 했다. 테이블에 혼자 앉아 있던 일리안에게 여러 영애들이 몰려왔기 때문이었다.
“처음 뵙는 영… 애시네요. 혹시 어디 가문이신가요?”
“윈터 남작가입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영애를 만나 뵈어 영광이군요.”
“어머…….”
자리에서 일어난 일리안은 자연스럽게 영애들이 앉을 의자들을 빼내었다. 그 모습이 너무도 당연해 보여 꼭 1명의 영식이 영애들을 에스코트해 주는 것만 같았다.
다섯 명만이 앉을 수 있는 작은 테이블이 꽉 차자 화원의 직원들이 달려와 마법으로 테이블과 자리를 늘렸다.
“처음 뵈었을 때에는 꼼짝없이 어느 가문의 영식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 오해를 종종 사곤 합니다. 아무래도 드레스를 입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검술을 배우기 위해서 드레스와 긴 머리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검을 배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그녀에겐 그것들이 귀찮았을 뿐이다. 그러나 일리안의 청량한 음색과 매너 있는 말투가 합쳐지자 그녀를 자신의 꿈을 위해 노력하는 이로 보이게끔 만들었다.
“주변에선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나요?”
“물론, 걱정을 표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래도 제 꿈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포기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대화는 매끄럽게 흘러갔다. 일리안의 처세술은 영애들 앞에서도 무리 없이 펼쳐졌다. 고작 열다섯 살에 불과한 소녀들을 입담으로 상대하는 것은 그녀에게 쉬운 일이었다.
배를 타고 다른 나라를 갔던 이야기, 산을 넘으며 만났던 몬스터들……. 미묘하게 각색된 이야기에 소녀들은 일리안의 말에 귀 기울였다. 물론, 모두 이전 삶의 경험에 의한 것이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듣자 어느새 화원은 마감할 시간이 되었다. 일리안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소녀들 중 몇몇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헤이븐, 다음엔 또 언제 오시나요?”
“하하,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아직 검술에 매진하느라…….”
“만약 오시게 된다면, 제 가문으로 연락을 주세요.”
“제 가문에도 부탁드려요!”
영애들에게 완전히 둘러싸인 일리안은 곤란한 얼굴로 볼을 긁적이면서도 그들의 질문에 하나, 하나 대답해 주고 있었다.
그 모습에 에릭과 함께 뒤로 빠져 있던 리트릭이 하, 하며 실소했다. 그리곤 제 옆에 있는 에릭을 팔꿈치로 툭툭 치며 말했다.
“저거 완전 바람둥이 아니냐?”
“……어차피 다 여자잖아.”
“아니, 근데 왜 내가 기분이 나쁘냐고.”
“나도.”
리트릭은 농담처럼 한 말에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 들려오자 뭐? 라고 다시금 물었다. 그러자 에릭이 무뚝뚝한 얼굴로 친절히 대답했다.
“나도 기분 나쁘다고.”
묘한 그 대답에 리트릭이 눈썹을 구기며 에릭을 바라봤다. 그러나 에릭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일리안의 뒤통수를 묵묵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