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죽음을 바칠 시간-26화 (26/123)
  • 26. 3년이라는 시간

    전신 거울 앞에 선 일리안은 거울 속의 제 얼굴을 바라봤다. 말랑한 젖살이 아직 떨어지지 않은 얼굴, 제 또래의 여자아이답지 않게 짧게 잘라낸 머리…….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두드러지는 건,

    “키가 안 자랐다…….”

    일리안이 망연한 얼굴로 제 머리를 헝클였다. 무언가 몹시도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율리어스가 떠난 지 3년이 흘렀다.

    열두 살이었던 헤이븐 윈터는 벌써 열다섯 살이 되었다. 열네 살이 되기 전까지 헤이븐 윈터의 키는 조금씩 자라 160센티를 조금 넘었지만, 그게 끝이었다.

    열다섯 살이 된 오늘, 다시금 측정한 그녀의 키는 1년 전에 비해서 조금도 자라지 않았다. 일리안 하인리히일 때만 해도 180센티가 다 되어가는 장신이었던 그녀는 아직도 자그맣기 짝이 없는 제 손을 바라봤다.

    검술을 배우며 하얗고 말랑하기만 했던 제 손에 조금은 굳은살이 생겼지만 일리안 하인리히 시절에 비하자면 우스울 수준이었다.

    “헤이븐 님, 계세요?”

    “들어와도 좋아, 타피아.”

    조심스럽게 문을 연 타피아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겨울용 시녀복을 챙겨 입은 타피아는 일리안에게 케이프를 건넸다.

    남색 계열의 케이프는 중성적이었다. 짧은 머리의 일리안이 두르자 그녀를 미소년처럼 보이도록 도왔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어요? 기분이 안 좋아 보이시는 걸요, 헤이븐 님.”

    “……작년에 비해서 키가 조금도 자라지 않았어.”

    일리안이 고개를 모로 돌리며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듣기로 윈터 남작 부부의 키도 그다지 크지 않다는 것을 듣기는 했었다.

    그래도 그녀는 자신이 장신으로 자랄 줄 알았다. 키 성장에 도움이 된다는 음식을 잘 챙겨 먹었고, 검을 배우며 운동도 하지 않았던가.

    “으음, 보통 여자아이들은 열다섯 살 즈음에 키가 멈추니까요. 더 이상 큰 변화는 없지 않을까요? 더군다나 헤이븐 님은 1년 전에 키가 확 성장하셨으니…….”

    열세 살까지만 해도 135 언저리에 불과했던 일리안은 1년 사이에 키가 단번에 자라났다. 매일 밤마다 무릎을 붙잡고 심각한 성장통을 겪어야만 할 정도였다.

    가까이에서 지켜보던 디노와 타피아조차도 하룻밤만 지나면 그녀에게 키가 자란 것 같다고 말할 정도였다. 매일같이 만나는 공작성의 사람들도 그렇게 말을 했으니, 그녀는 자신의 키가 매우 클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리고 그것은 아주 큰 오산이었다.

    “왜, 왜……. 리트릭은 아직도 매일 크는 중이고, 에릭은 벌써 키가 180에 다다랐다고.”

    “그분들은 아무래도 아직 성장기니까요.”

    “타피아, 나 급소를 맞은 것 같아…….”

    “네?”

    제 가슴팍을 잡고 과장스럽게 어깨를 움츠렸던 일리안은 한숨을 쉬며 허리를 폈다. 걱정스레 다가오던 타피아와 눈이 마주치자 일리안이 씩 웃었다.

    “그래, 키야 좀 작으면 어때. 난 배포가 큰 사람이라고.”

    재치 있는 일리안의 말에 타피아가 생긋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매만졌다. 아무리 머리가 짧더라도 머릿결은 좋아야 한다며 타피아가 매일같이 오일을 발라줬다.

    거울 앞에선 타피아는 문득 생각난 것을 물었다.

    “율리어스 님은 많이 자라셨을까요?”

    “……율리어스?”

    그를 보지 못한 지 벌써 햇수로 3년이 흘렀다. 기간으로 따지자면 2년이 조금 넘는 시간에 불과하겠지만, 성장기의 아이라면 충분히 못 알아볼 만큼 변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일리안은 이미 성장한 율리어스의 모습을 알고 있었다. 이전 생에서 일리안 하인리히가 가끔 수도에 돌아올 때면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율리어스가 귀신같이 그녀를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그때에도 이미 170센티는 넘어 보였으니까, 에릭이랑 비슷하지 않으려나. 나이도 똑같고.”

    그래도 열여덟 살인 율리어스의 키까지는 기억할 수 없었기에 일리안은 말끝을 흐렸다. 타피아는 율리어스의 이야기가 나온 김에 궁금했던 것을 몇 가지 더 물었다.

    “전쟁은 이미 끝났다고 들었는데, 율리어스 님은 왜 안 돌아오시는 걸까요?”

    “아직 해야 할 일이 있다던데. 펜서 집사장님이 그러셨어.”

    전쟁이 끝난 것은 1년 전이었다. 원래의 생에서보다 1년은 더 길어진 전쟁이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싯투르 공국이 승리하는 것으로 무사히 전쟁은 끝났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자마자 율리어스가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그는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올해로 열다섯 살이 된 일리안에게 아무도 그가 왜 돌아오지 않는지 이유를 말해주진 않았지만, 그녀는 제 나름대로 그 이유를 예상하고 있었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수도에서 처형당했던 싯투르 공국의 교황이 아직 죽지 않았다.

    아마도 율리어스는 그 일을 마무리하느라 돌아오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그가 떠나기 전에 교황을 조심하라고 짚어주기까지 했으니 교황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자체가 이상했다.

    “그러면……. 역시 봄이 되기 전에 오시는 건 힘드실까요?”

    제 생각에 빠져 있던 일리안은 타피아의 질문에 고개를 들었다. 거울 속의 타피아가 짐짓 심각한 얼굴로 고민에 빠져 있었다.

    “그것까진 나도 잘 모르겠어. 왜, 봄이 되기 전에 율리어스가 돌아와야 할 이유라도 있어?”

    “물론이죠!”

    타피아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올해 봄에는 헤이븐 님의 데뷔탕트가 있을 테니까요.”

    “……그래?”

    일리안은 그제야 타피아가 요즘 들어 가문의 재산 중 꽤 많은 돈을 옷에 사용한 이유를 깨달았다.

    그녀가 처음 헤이븐 윈터의 몸에 들어왔을 때, 분명 타피아가 그런 말을 했던 것도 같았다. 열다섯 살이 되면 데뷔탕트를 해야 할 텐데, 세르앙 자작 부인 없이는 아는 지인이 없어 힘들 것이라고.

    그때에는 나중에 가서 생각하자며 미뤘던 일이 벌써 코앞으로 다가온 것이었다.

    “그런데 내 데뷔탕트와 율리어스가 돌아와야 하는 건 대체 무슨 상관이야?”

    “이런 말씀 드리긴 그렇지만……. 아무래도 헤이븐 님이 유일하게 아는 귀족 지인은 리하르트 가문밖에 없으니까요. 리하르트 가문에서 열리는 파티에 참여하게 되면, 무사히 데뷔탕트는 치를 수 있으실 거예요.”

    타피아의 설명에 일리안은 제 턱을 붙잡았다. 짧게 고민하던 그녀는 유쾌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면 내가 파티를 열면 되겠네.”

    “네, 네? 그러기에는 우리 가문의 재정이……. 아니, 무엇보다도 초대할 분들도 안 계신걸요.”

    “돈이야 마련하면 되는 거고, 초대는……. 타피아, 잊었어?”

    거울 속의 타피아와 눈이 마주친 일리안은 씩 웃어 보였다.

    “내 특기는 친화력이라고.”

    * * *

    “그래서, 여기가 요즘 귀족 영애들 사이에서 가장 뜨거운 곳이라고?”

    “그래! 몇 번을 말해? 그래서 귀족 영애 눈에 띄어 보려는 뺀질이 기사들이 이 근방을 왔다 갔다 하잖냐.”

    “그걸 너는 어떻게 알고 있는데.”

    “…….”

    요즘 귀족 영애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라며 일리안을 이끈 리트릭이 도착한 곳은 한 카페였다. 인공 화원으로 꾸며진 카페는 소녀들의 취향에 맞게 동화 속에 나올 것처럼 아늑했다.

    카페는 전면이 유리창인 덕분인지 내부가 훤히 보였는데, 그곳에는 화려한 드레스를 차려입은 영애들이 모여 있었다.

    리트릭은 일리안의 시선은 신경조차 쓰지 않고 유리창 너머로 비치는 영애들의 옆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리트릭을 한심한 눈으로 바라보던 일리안은 문득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이 녀석이 이렇게 컸었나.

    리트릭은 수련을 마친 직후였는지 제대로 제복을 차려입은 모습이었다. 분명 작년까지만 해도 저와 비슷했던 키였는데, 어느새 제법 성장한 데다 제복까지 차려입자 어엿한 성인으로 보였다.

    리트릭은 그런 일리안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제 옆에 선 그녀를 힐끔 바라봤다. 일리안이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그를 향해 손을 내저었다.

    하긴, 자란 것은 리트릭 뿐만이 아니었다. 에릭 또한 그사이에 한참 자라 이제는 웬만한 성인 남자들보다 키가 클 정도였다.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일리안을 누군가 부른 것은 그때였다.

    “헤이븐!”

    “뭐야, 에릭이잖아. 넌 어떻게 알고 여기까지 찾아왔냐?”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한 리트릭이 놀랍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율리어스가 떠난 사이, 3명의 관계는 변해 있었다. 처음에는 으르렁거렸던 리트릭과 에릭은 시간이 흐르자 제법 죽이 맞는 친구가 되었다.

    늘 리트릭이 사고를 치면 에릭은 짜증이 섞인 얼굴로 무던하게 처리하고, 일리안은 귀찮은 얼굴로 모른 척하는 게 그들의 일상이었다.

    “……둘이서 여긴 왜 왔는데?”

    “일하러.”

    “내가 아니라 리트릭만?”

    “넌 기사가 아니니까.”

    에릭의 연이은 질문에 일리안은 심드렁한 얼굴로 그의 얼굴을 바라보지도 않고 말했다. 에릭만이 어딘지 불편한 얼굴이었다.

    “꼭 기사여야 하는 거냐?”

    그 질문에 일리안은 고개를 돌려 에릭을 위아래로 살폈다. 에릭의 피부는 까만 편이었지만 키 덕분인지 건장한 체격이었다. 무엇보다도 쌍꺼풀 없이 길게 째진 눈은 제법 매력적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금 고개를 반대로 돌려 제 옆에 선 리트릭을 바라봤다. 리트릭은 키가 작았지만 피부가 희고 얼굴이 작았다. 거기다 기사단 제복을 입고 허리에 검을 차고 있자 언뜻 고귀한 도련님처럼 보였다.

    일리안은 그런 둘의 어깨 위로 팔을 둘렀다. 자신들보다 키가 한참은 작은 일리안이 어깨동무를 하자 2명은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뜬금없는 접촉에 리트릭과 에릭은 동시에 그녀를 바라봤다.

    “같이 일 좀 하자.”

    “뭐야, 데려다주기만 하면 된다면서? 이건 이야기가 좀 다른데.”

    “도와달라는 뜻이야.”

    리트릭은 투덜거리면서도 벌써부터 재밌어하는 눈치였다. 그는 일리안의 얼굴 가까이 제 얼굴을 가져가선 눈을 반짝이며 그녀의 이야길 기다렸다.

    그런 리트릭과 대조되는 것은 에릭이었다. 리트릭보다도 키가 한참은 더 큰 에릭은 허리를 거의 접다시피 숙여야만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두드러지는 건, 목까지 붉어진 그의 얼굴이었다.

    “……불편하니까 놓고 말해라.”

    에릭의 나지막한 말에 일리안은 순순히 손을 놓았다. 에릭은 뜨겁게 달아오른 제 목덜미와 얼굴을 식히기 위해 손을 들어 목 부근을 매만졌다.

    “딱히 할 건 없어. 내 뒤로 적당히 따라와서 내 아랫사람인 척 좀 하자.”

    “아랫사람?”

    “그래. 리트릭은 제복이니까 되었고, 에릭 넌……. 뭐, 나름 깔끔하게 차려입었네.”

    에릭의 것은 좋은 천으로 만들어지진 않았지만 무난한 디자인의 옷이었다. 일리안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에릭의 뛰어오느라 망가진 옷매무새를 만져줬다.

    “리트릭 너는 내 수행 기사, 에릭 넌 내 시종인 거다.”

    “내가 왜 네 수행 기사냐?!”

    “……시종?”

    둘 다 제 신분에 불만이 가득한 눈치였다. 일리안이 둘의 어깨를 토닥였다.

    “부탁 좀 하자. 친구 좋다는 게 뭐냐.”

    “아니, 우리 신분이랑 옷은 그렇다 치자. 일단 네가 드레스가 아니잖아!”

    리트릭의 지적은 정확했다. 카페 안에 있는 영애들은 모두 제각기 화려한 드레스, 하다못해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일리안은 그렇지 못했다.

    무려 치마도 아니고 바지였다. 베이지색의 바지와 외투, 그리고 가슴팍에 놓인 흰색 크라바트는 소년들의 전유물이었다. 일리안의 중성적인 외모는 그녀를 단번에 소년으로 보지 못하게 만들었지만, 소녀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잘 봐라. 너처럼 입은 영애가 어디 있어?”

    리트릭은 과장스러운 몸짓으로 유리창 너머를 바라봤다. 그의 말마따나 카페 내부에는 영식이 없었기 때문에 그녀처럼 입은 이는 없었다.

    에릭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리트릭의 의견에 동의하는 눈치였다.

    “리트릭.”

    “왜 불러?”

    일리안은 제 크라바트를 한 번 더 확실히 조였다. 그리곤 당당한 걸음으로 카페의 문을 향해 걸어갔다.

    “바로 이 모습이 내 무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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