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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죽음을 바칠 시간-25화 (25/123)

25. 죽지 않고 돌아온다면

벨로 숲에서 돌아온 뒤로도 일상은 다름없이 흘러갔다. 일리안은 검술 수련과 학업을 병행하며 하루도 허투루 보내지 않고 수업을 들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공작성에 들락거린 것이다.

그런데 묘하게 공작성 내부의 분위기가 이상했다.

“바쁘시다고요?”

“예, 외부 일정도 많을뿐더러 돌아오시면 집무를 보느라 바쁘십니다. 전할 말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요, 그냥……. 할 말이 있었습니다.”

“제가 전해 드릴까요?”

벌써 율리어스의 얼굴을 보지 못한 지 2주가 흘렀다. 자주 만나진 않았어도 그간 율리어스와 주기적인 교류가 있었다. 복도를 지나치다 만나거나, 그가 잠이 들지 못할 때면 가이우스가 수면을 부탁하기도 했던 탓이다.

벨로 숲에서의 일로 그가 피하는 것인가 싶기도 했지만 바쁘다는 이야기가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점심시간이면 사라 주방장, 펜서 집사장과 함께 식사를 하던 가이우스는 밥을 먹으면서도 종이를 보기 바빴다.

“면목 없습니다. 약속을 부탁드렸던 것은 저인데, 지키지 못하였으니…….”

“별말씀을요. 바쁜 게 가이우스 씨 때문은 아니죠.”

“이해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가이우스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야기를 전한 것도 잠시, 아무래도 다시 일을 하러 가야 하는 모양이었다.

그런 가이우스의 옷자락을 붙잡은 것은 일리안이었다.

“저, 가이우스 씨. 요즘 펜서 집사장께서도 바쁘시던데……. 혹시 이유라도 있습니까?”

“예? 아아…….”

바쁜 것은 가이우스와 율리어스만이 아니었다. 공작성에 오래 종사한 이답게 늘 기품 있는 걸음으로 다니던 펜서가 최근 들어 복도를 빠르게 뛰어다닐 정도로 바빠 보였던 것이다.

덩달아 사라 또한 일리안에게 말을 걸 시간도 없이 바쁜 이들의 도시락을 챙겨야만 했다.

“다름이 아니라……. 율리어스 님께서 곧 떠나기 때문입니다.”

“떠난, 다고요?”

“예. 현재 핀튼 왕국와 싯투르 공국이 전쟁 중인 건 아시지요? 그곳에 가게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이렇게 오래 공작성을 비우시는 건 드문 일이니, 펜서 집사장께서도 분주하신…….”

“전쟁이… 아직도 진행 중이라고?”

일리안이 망연한 얼굴로 가이우스의 말을 뚝 끊고 질문했다. 질문보다는 중얼거림에 가까웠지만 가이우스는 하려던 말을 관두고 그녀를 내려다봤다.

한쪽 무릎을 꿇고 일리안과 눈을 마주한 가이우스는 차근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예, 전쟁이 예상보다 길어지고 있습니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설명해 드리기 힘들지만, 이건 우리 제국의 입장에서도 그리 좋은 일이 아닙니다. 때문에 율리어스 님께서 가게 되신 겁니다.”

일리안 하인리히는 핀튼 왕국과 싯투르 공국의 전쟁에 직접 참여했던 이였다. 때문에 그 전쟁이 언제 끝나는지, 그녀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전쟁은 가을이 오기 전에 끝났었다.

성의 복도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던 가이우스와 일리안의 옆으로는 커다란 창이 나 있었다. 그 창 너머에는 정원사들이 관리했을 법한 나무들이 자라고 있었는데, 이미 개중 이른 것은 잎이 떨어지고 있었다.

함께 공작성에 들어왔던 디버튼 분재원의 정원사들은 슬슬 공작성으로 출근하는 날이 줄어들고 있었다. 올해 공작성의 ‘여름’을 책임지기로 했던 이들이었으니 출근하는 날이 줄어드는 것은 당연했다.

헤이븐 윈터로 사는 것이 바빠 새까맣게 잊고 있던 현실이었다. 원래의 일리안 하인리히는 이맘때쯤 전쟁을 끝내고 수도에 잠시 들렀다 다른 나라로 향할 때였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미래가 바뀌었다.

“헤이븐 님, 괜찮으십니까? 표정이…….”

“가이우스 씨.”

“예, 말씀하십시오.”

늘 여유로운 얼굴이었던 그녀가 아니었다. 딱딱하게 얼굴이 굳은 일리안은 가이우스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율리어스 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 * *

제 방 침대에 누워 있던 일리안은 멍한 얼굴로 천장을 바라봤다. 처음으로 가이우스와의 검술 수업도 거르고 일찍 돌아와 자리에 누운 상태였다.

미래가 바뀌었다니. 조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일이었다.

그 말인즉슨, 이전의 미래에선 죽지 않았던 누군가가 죽을 수 있게 되고 태어나야 할 누군가는 태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뜻이 아니던가.

율리어스는 자신이 전쟁터에 있는 내내 한 번도 그곳에 온 적이 없었다.

아니, 자신이 살았던 40년간 율리어스는 공작성이 있는 수도 드발릭을 떠난 적이 없었다. 그런 그가 공작성을 떠날 정도로 잔뜩 뒤바뀐 미래라면,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자신의 아들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일리안은 가방 하나를 챙겨 그 안에 물건을 마구잡이로 쑤셔 넣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이곳을 떠나 일리안 하인리히를 만나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제 눈으로 확인해야만 했다.

“헤이븐 님, 계세요?”

무거운 얼굴로 가방을 내려다보던 일리안이 느리게 고개를 돌려 문을 바라봤다. 타피아가 자신을 찾고 있었다.

“오늘 하루 종일 표정이 안 좋으시던 걸요……. 공작성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어요?”

그제야 일리안은 가방을 잡았던 손을 놓았다.

이번 생을 살며 결심하지 않았던가. 떠돌이의 삶은 관두겠다고, 다시는 혼자가 되지 않겠다고. 그녀는 가방을 들어 침대 아래로 밀어 넣었다.

“들어와도 좋아, 타피아.”

끼익거리는 소리와 함께 타피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들어왔다. 그러나 걱정한 것과 달리 타피아의 눈에 들어온 것은 침대 위에서 씩 웃고 있는 얼굴의 일리안이었다.

“그게, 오늘 쪽지 시험을 쳤는데 점수가 안 좋지 뭐야. 기분이 영 안 좋더라고.”

“어머. 헤이븐 님, 공부에 너무 스트레스받지 마세요. 단 거라도 준비할까요?”

“괜찮아. 대신 혼자서 공부를 더 하고 싶어서……. 괜찮지, 타피아?”

타피아는 썩 괜찮아 보이는 일리안의 얼굴에 안심한 눈치였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응원한다는 말과 함께 나가자 일리안은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다시 한번 떠날까,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은 자신이 할 일이 아니었다. 지금은 그저, 헤이븐 윈터로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야만 했다.

오전엔 디버튼 분재원의 정원사들을 돕고, 오후에는 파르타 남작에게 수업을 들으며, 끝나고 나서는 가이우스와 함께 검술 수련을 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면 디노와 타피아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요 근래 들어 늘 반복하고 있던 생활이었다. 의뢰를 받아 처리하기 급급했던 이전 삶과는 몹시도 다른 인생이었다. 그 편안함에 익숙해져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잊어버린 것이었다.

5년 뒤 겨울이 오기 전에……. 쏟아지는 눈밭 위에서 안타깝게 죽어간 그 아이를 살려내야만 했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하나 있었다. 이전 삶과는 달리 갑작스럽게 전쟁터로 떠나게 된 율리어스였다.

미래가 바뀐다는 것, 죽지 않아도 될 이가 죽을 수도 있다는 것……. 일리안의 머릿속으로 율리어스가 죽는 미래가 스쳐 지나갔다.

그것이 가이우스를 붙잡아 율리어스를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한 이유였다.

* * *

“오늘은 공작성에서 집무를 마무리한다고 하시는군요. 잠시 이야기할 시간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럼, 어서 들어가 보십시오.”

율리어스의 집무실 앞에 선 일리안은 가이우스가 문을 열어주자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문을 열어주기만 할 뿐 안으로 들어올 생각은 없었는지 그녀의 등 뒤로 문이 닫혔다.

그녀가 안으로 들어서자 언제나처럼 율리어스가 집무를 보고 있었다. 그는 종이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무슨 일이지?”

“곧 떠난다고… 들었습니다.”

“그게 너와 무슨 상관인가.”

일리안은 잠시 멈칫했지만 그의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율리어스라면 충분히 그녀가 다가왔음을 알 수 있겠지만, 그는 일리안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언제 갑니까.”

“사흘 뒤.”

짤막하게 던져지는 답변에 일리안은 이내 짧게 미소 지었다.

“예전처럼 ‘그걸 왜 묻지?’라고 하지는 않네요.”

“……뭐?”

생각지도 못한 의견에 율리어스가 바쁘게 움직이던 펜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책상 하나를 두고 그녀와 눈이 마주친 율리어스는 이내 펜을 내려뒀다.

일리안의 키는 율리어스가 사용하는 책상보다 겨우 머리 하나 정도 더 큰 것에 불과했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래도 우리가 조금은 친해졌다는 뜻인데요.”

“또 헛소리를 하는군.”

“이제 꺼지라고는 안 하잖습니까.”

그 언젠가 율리어스가 책상 아래로 유리잔을 밀어 넘어뜨리며 꺼지라고 했던 때를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일리안은 집무실 책상 위를 양 손바닥으로 짚고서 뛰어올라 그 위로 앉았다. 책상 아래로 발을 내리느라 율리어스에겐 등을 돌린 상태였지만, 아무래도 괜찮았다.

일리안이 책상 위로 올라앉으며 종이들이 흐트러지자 율리어스는 미간을 좁혔다. 그러나 내려가라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들이 처음 만났을 때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전쟁터로 가면……. 일리안을 만날 생각입니까?”

율리어스로부터 등을 돌린 일리안은 제 이름을 남의 것처럼 부르는 게 어색해 입술을 달싹였다. 율리어스는 눈치채지 못한 듯 여상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니.”

“어째서요?”

“그녀는 남부 최전방에 있을 테고, 나는 고작해야 싯투르 공국의 왕성에 있을 테니까.”

바로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나가는 남부, 그리고 그곳에서도 지옥이라고 불리는 최전방. 일리안이 현재 있는 곳이었다.

그의 말대로 율리어스는 일리안 하인리히를 절대 직접 만날 수 없을 것이다. 그의 직위와 위치상 타국의 전쟁에서 최전방에 갈 수는 없을 테니까.

“꼭… 가야 하는 겁니까.”

등을 돌리고 있던 일리안이 고개를 푹 숙였다. 어린아이의 작은 등이 굽어졌다.

일리안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 그런 질문을 한다는 것이 우스웠다. 이전의 삶에선 몇 번이고 들었던 이야기였다. 다른 누구도 아닌, 율리어스에게.

전쟁터로 향하겠다는 자신에게 율리어스는 꼭 가야 하냐는 질문과 함께 떠나지 말라는 말을 몇 번이고 전해왔었다. 최근 알게 된 율리어스의 성격을 생각해 보자면, 아마 그로서는 상당히 어렵게 말해온 부탁이었을 것이다.

나름대로 율리어스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부했던 일리안은 인정해야만 했다. 자신은 율리어스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었다고.

“가야 한다.”

“예, 그렇겠…….”

“누가 보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 줄 알겠군.”

일리안은 뒤따라온 말에 번뜩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와 눈이 마주쳤지만 율리어스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그답지 않은 배려였다.

“언제, 돌아오십니까?”

“전쟁이 끝나면.”

“만약 전쟁이 몇 년간 더 지속된다면…….”

“그럼 몇 년 뒤에 오겠군.”

그의 말에 그녀는 짧게 웃었다. 율리어스답지 않은 배려에 놀랐지만 그는 그였다. 그러나 그의 냉정한 태도가 오히려 익숙했다.

“편지라도 쓸까요?”

“찢어 버려져도 상관없다면.”

그녀는 픽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벨로 숲에서 있던 일로 이제껏 고민하던 자신이 우스웠다. 그와 자신의 관계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일리안은 한결 가벼워진 얼굴로 앉아 있던 책상에서 내려섰다. 그리곤 진지한 눈빛으로 율리어스를 마주 바라봤다.

“교황을 조심하세요.”

처음부터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 그를 찾은 것이었다.

이전 생의 일리안 하인리히는 정치에 무지했지만, 단 1가지 사실은 알고 있었다. 전쟁이 끝난 뒤 교황이 싯투르 공국의 수도 한복판에서 교살된다는 것.

전쟁을 꾸미고 핀튼 왕국을 도왔던 교황은 끝내 모든 일이 발각되어 처형당하게 된다. 미래가 아무리 바뀌었더라도, 그 사실만큼은 바뀌지 않았으리라.

율리어스는 그녀의 교황을 조심하라는 이야기에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럼, 잘 지내시죠.”

“죽으라는 소리로 들리는군.”

“죽지 말고 돌아오라는 뜻입니다.”

일리안이 씩 웃으며 말하자 율리어스는 말없이 그 미소를 바라봤다. 오랫동안 조용히 그녀의 눈을 응시하던 율리어스가 입을 연 것은 제법 시간이 흐르고 나서였다.

“죽지 않고 돌아온다면, 그때는 이야기할 건가?”

“넌… 누구지.”

무엇을, 이라고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의 눈이 벨로 숲에서처럼 자신을 한 치도 움직이지 못하게끔 주시하고 있었으니까. 그 순간 율리어스의 눈동자가 뱀의 것처럼 변했다고 느껴진 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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