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벨로 숲에서 일어난 일(2)
율리어스를 향해 다가가던 일리안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숙여 숨었다. 어린 몸집은 커다란 나무 사이로 쉽사리 숨겨졌다.
율리어스와의 거리는 조금 좁혀져 그의 모습은 일리안에게도 선명히 들어왔다. 자신이 주변의 암살자들에게 둘러싸였다는 것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헷갈릴 정도로 그는 고요했다.
그의 주변을 둘러싼 암살자들은 기척을 조금만 살펴도 바로 알 수 있을 만큼 수가 많았다.
일리안이 만약 헤이븐 윈터의 몸이 아니라 원래의 몸이었더라 하더라도 모두 처리할 수 있을지조차 미지수일 정도의 수였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율리어스에게 달려가야겠노라 생각했다. 그에게 자신이 봤던 사실을 알려주고 조심하라 말해준다면, 어떻게든 대처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율……”
그 순간이었다.
검은 복장의 이들이 그를 둘러싸고 순식간에 달려들었다. 뒤에서 지켜보던 일리안은 자신도 모르게 목검을 들고 그를 향해 달려가려 했다.
그리고 그녀가 달려가기도 전에, 모든 상황은 종식됐다.
퍼억, 하는 소리가 잠깐 들렸던 것도 같았다.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단지 넝마가 된 옷가지와 핏자국이 전부였다.
그를 향해 달려들었던 모든 이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일리안은 직접 보고도 그 사실이 믿기지 않아 눈을 크게 치떴다.
인간의 것이 아닌 것 같았다.
그는 일리안의 앞에서 이렇다 할 마법을 보여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녀의 눈치로 율리어스가 마법을 사용하기를 꺼려하는 것 같아 굳이 부탁하지도 않았다.
그러다 헤이븐 윈터로서 그를 만났을 때, 율리어스는 마법을 사용했다. 일리안의 생각보다도 더 엄청난 실력으로, 손쉽게.
마법에 무지한 그녀도 마법사들이 얼마나 어렵게 마법을 펼치는지는 알고 있었다. 수식을 외우거나 고대어를 읊조려야만 겨우 발동되는 것이 마법이었다.
그런데 율리어스는 그런 것조차도 없이 늘 계단을 만들고, 하늘을 날게끔 했다. 그것만 보아도 그가 대단한 마법사란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리고 그 순간, 일리안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율리어스의 등 뒤로 나무 위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고민할 새가 없었다. 일리안은 놀란 마음을 미뤄둔 채 손에 들었던 활을 들어 올렸다. 꼭 장난감 같은 크기의 목검을 활에 끼우자 언뜻 화살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 작은 활로는 저곳까지 닿지 않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런 것까지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시간은 여유롭지 못했다.
그녀는 활대를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시위를 힘껏 잡아당겼다.
피잉ㅡ.
시위를 놓는 순간, 일리안은 자신의 힘이 부족해 사내에게 화살이 닿지 않을 것을 직감했다. 그것은 직감이었지만 본능과도 같았다. 수십 년을 활잡이로 살아온 이의 본능이었다.
일리안의 화살이 날아감과 동시에 사내가 던진 단검이 율리어스를 향해 날아들었다. 말을 타고 있던 율리어스는 그제야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채앵!
가속도가 입혀진 목검이 단검과 공중에서 맞부딪치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무 위에 있던 남자는 자신의 마지막 보루가 실패하자 도망치려 들었지만, 이미 율리어스의 눈에 들어온 뒤였다. 그 사내 또한 퍽, 하는 소리와 함께 형체조차 사라졌다.
그리고 율리어스는 목검이 날아든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는 단지 그곳에 서 있는 일리안을 주시할 뿐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자그마한 핏자국이 튀어 있었다.
일리안을 바라보는 건지, 그녀가 손에 쥐고 있는 활을 바라보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단지 그녀는 올가미에 묶인 짐승처럼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고 그를 바라봐야만 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활을 쥔 손에 꽈악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 * *
사내가 던진 단도를 화살로 맞춘 것은 순전히 우연에 불과했다. 그녀가 아무리 수십 년 동안 활을 잡은 사람이더라도 던져지는 단도를 조준해 화살을 맞힐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니, 일리안 하인리히의 몸에다 제대로 갖춰진 활만 있다면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일리안은 율리어스에게 우연히 맞았다며 허둥지둥 설명하기 바빴다.
“그 활은.”
“예, 예? 아, 이거…….”
율리어스는 그 작은 어린아이용 활에 눈을 떼지 않고 물었다.
“일리안의 것일 텐데.”
“그렇… 죠? 그때 금고에서 같이 가져왔으니까.”
일리안은 집요하다 못해 부담스러운 율리어스의 눈빛을 슬며시 피하며 제 볼을 긁었다. 활을 한 번도 못 쏘아본 어린아이가 우연히 날린 화살에 단도가 맞았다는 건, 조금 억지인가…….
율리어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입을 다문 채 말에 올라타 그녀를 지그시 응시할 뿐이었다.
일리안에게 있어선 영겁과도 같은 침묵이 얼마나 흘렀을까, 율리어스가 입술을 달싹였다.
“타라.”
“아? 아……. 고맙습니다.”
겨우 시선을 떼고 정면으로 고개를 휙 돌린 율리어스에 일리안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든 이 상황이 일단락되었다는 것에 한시름 놓았다.
그리고 율리어스의 명령대로 말에 올라타려 했던 일리안은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벌써부터 성인 남성의 평균 키에 다다른 율리어스와는 달리 일리안의 키는 너무도 작았다. 때문에 등자에 발을 걸치는 것조차도 어려워 보였다.
그러나 이미 말에 타고 있는 율리어스는 말에서 내려 그녀를 도와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율리어스의 성격상 지금 말을 타지 않는다면 이 숲속에 그녀를 버려두고 출발할지도 몰랐다.
일리안은 다리를 한계까지 올려 겨우 등자를 밟고 올라섰다. 짧은 양팔을 쭉 내뻗어 말의 등 위를 붙잡아 아슬아슬하게 매달릴 수 있었지만, 그게 끝이었다.
도저히 말에 올라탈 수가 없었다. 엉덩이를 내민 채 간신히 말에 매달려 있던 일리안의 머리 위로 냉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탈 셈인가?”
설마요.
안전은 둘째 치고서라도, 엉덩이를 쭉 내밀고 말에 매달린 채 숲의 입구에 도착한 자신의 모습은 상상하는 것도 끔찍했다.
일리안은 어떻게 해서든 말의 등 위로 올라가기 위해 발을 굴렀다. 그러나 그런다고 해서 짧은 몸이 말 위로 성큼 올라설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 일리안의 허리로 무언가 닿더니 순식간에 그녀의 몸이 들렸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율리어스의 앞자리에 안착한 뒤였다.
일리안은 멍한 눈으로 앞을 바라보다 고개를 들어 제 뒤에 있는 이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그는 늘 그렇듯 싸늘한 얼굴로 앞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율리어스가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아 위로 올려준 것이었다.
“앞을 봐라.”
“도와줄 거면서…….”
“뭐라고 했나.”
일리안이 퉁명스럽게 중얼거린 것을 용케도 들은 율리어스가 그녀를 내려다봤다. 그녀는 내밀었던 입을 집어넣고 허리를 곧게 폈다.
“어서 가자고요!”
“누구 때문에 말이 느려졌는지 모르나 보군.”
내가 무거우면 얼마나 무겁다고!
금방이라도 대꾸하려던 일리안은 말을 목구멍으로 다시 삼켰다. 그가 벨로 숲에 자신을 버리고 가 숲의 미아가 되는 일만은 없어야 했다.
일리안은 말을 다루고 있는 그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입을 꾹 다물었다. 먼저 말을 걸어온 것은 의외로 율리어스였다.
“활은…….”
“예?”
“일리안에게 배운 건가.”
다시 고개를 들어 힐끔 그를 바라봤지만 율리어스는 역시나 그녀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일리안은 그가 단순한 짐작으로 묻는 것인가 싶어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설마요. 일리안과 함께 지냈던 것도 아니고……. 거기다 그녀는 바쁘니까.”
“그래, 그녀는 바쁘지. 한곳에 머무르지도 못할 만큼.”
웬일인지 순순히 제 말에 호응해 주는 율리어스에 일리안은 눈을 반짝이며 대화를 이어가려 했다. 그러나 이어서 흘러나온 말에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활을 잡는 일리안의 자세와 네 자세가.”
“…….”
“똑같더군.”
쿵.
그의 단호한 한 마디에 일리안의 심장이 아래로 떨어졌다. 자신이 일리안 하인리히라는 사실을 그가 언제든지 알아챌 것만 같았다.
일리안의 등은 율리어스의 앞섬과 붙어 있었다. 그 탓에 일리안은 터질 것처럼 두근대는 제 심장 소리가 그에게 들릴까 봐 걱정해야만 했다.
“글… 글쎄요. 활을 잡는 자세야 다 거기서 거기니까,”
“일리안은 활을 잡을 때 검지와 중지를 시위에 걸어 당긴다. 때문에 늘 약지로 담배를 폈지. 그녀의 나머지 손가락은 닳아 있으니까.”
“……예?”
“그리고 꼭, 활시위에 입술을 부딪친다.”
일리안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 순간, 숲속으로 커다란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 소리가 너무도 커서 바로 뒤에 있는 율리어스의 말소리가 비교적 줄어들었다.
그러나 바로 앞에 앉아 있던 일리안만큼은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넌……. 누구지.’
* * *
“야, 헤이븐!”
율리어스의 말을 타고 천천히 숲의 입구로 빠져나온 일리안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에릭과 리트릭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허, 헉. 리하르트 공작…님……?”
리트릭은 뒤늦게 일리안의 뒤에 탄 이의 모습을 발견했는지 얼굴색이 하얗게 변했다. 고작 기사 준비생이 만나기엔 그의 지위가 너무도 높은 탓이었다.
에릭만이 어딘지 불편한 얼굴로 목례를 하고는 말을 향해 다가왔다. 아니, 정확히는 일리안을 향해 다가온 것이었다.
이미 그녀는 말에서 올라탈 때와 마찬가지로 짧은 다리를 내뻗어 겨우겨우 커다란 말에서 내리는 중이었다.
“헤이븐! 기다려, 내가 밑에서 받아줄 테……!”
말에 비하자면 한없이 작은 몸집 탓에 그 모습은 몹시도 위태로워 보였다. 에릭이 다급히 다가와 뒤에서 그녀를 받아 들려는 순간이었다.
일리안은 올라탈 때와 마찬가지로 허리에 닿는 익숙한 촉감에 그것의 주인이 에릭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왜인지 제 허리를 잡은 손이 뒤보다는 위에서 뻗어 나온 것 같았다.
고개를 들어 손의 주인을 확인했을 때는 이미 율리어스가 그녀를 품에 안은 채 말에서 내린 뒤였다. 내리고 나서도 율리어스의 손에 허리를 잡혀 있던 일리안이 허둥지둥 그 품을 빠져나왔다.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한 에릭만이 얼굴을 구기며 빠져나온 일리안의 옷을 정리해 줄 뿐이었다.
갑작스러운 친절에 일리안은 영문을 모르는 얼굴이었고, 리트릭은 공작 전하가 그녀를 안았다는 사실에 더욱더 입을 크게 벌렸다.
정작 모든 일의 원흉인 율리어스만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의 옆자리를 차지한 것은 가이우스였다.
“율리어스 님! 무사히 다녀오셨습니까.”
내내 그를 찾고 있던 모양인지 다급하게 다가온 가이우스는 허리를 숙여 율리어스에게 무언가 이야기를 전했다. 가이우스의 말을 들은 율리어스는 표정의 변화 없이 몸을 돌려 자리를 빠져나갔다.
가이우스와 율리어스가 동시에 사라지자 리트릭이 겨우 그녀에게 다가와 물었다.
“헤이븐, 너 무슨 일이라도 있었냐? 리하르트 공작님이랑 왜 같이 와?”
“……우연히 만났어.”
“숲속에 뭔가 찾아야 하는 게 있는 것 같던데. 찾아야 하는 물건은 찾았고?”
리트릭의 연이은 질문에도 일리안은 멍한 얼굴로 율리어스가 사라진 자리를 바라볼 뿐이었다. 처음 말을 탈 때야 제대로 오르지 못하는 자신이 성가셔 도와준 것이라 치더라도, 내릴 때에는 그렇지 않았다.
에릭이 자신을 받아주기 위해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지 않았던가. 일리안은 이유가 없으면 절대 도와주지 않는 율리어스가 대체 왜 자신을 도와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찾아야 하는 거……. 찾았어.”
“그래? 다행이네.”
일리안은 멍한 얼굴로 대답했지만 리트릭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찾아야 하는 것, 그것은 분명히 율리어스였다. 사내들이 떠드는 말을 듣자마자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를 찾아 달려야 했으니까.
일리안은 율리어스가 자신에게 어째서 그렇게 구는 건지, 자신은 어째서 율리어스를 위해 달려갔는지가 조금도 이해되지 않아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
“뭘… 찾으러 간 건데?”
에릭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그녀에게 물었다. 그러나 일리안은 그의 말을 미처 듣지 못했다. 그저 멍하니 점점 멀어지는 율리어스와 가이우스의 등을 바라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