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죽음을 바칠 시간-23화 (23/123)

23. 벨로 숲에서 일어난 일 (1)

“뭐야, 이건 또.”

“……이거? 말 다 했냐? 넌 누군데?”

리트릭이 불편한 얼굴로 일리안과 함께 온 에릭을 바라봤다. 에릭 또한 당연히 일리안과 단둘이 무술 대회를 구경하리라 생각해 인상을 구기며 그를 내려다봤다.

리트릭은 리트릭대로 자신보다 키가 훨씬 큰 에릭이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일리안이 둘 사이를 막아서자 겨우 험악한 기운이 가라앉았다.

“이쪽은 리트릭. 기사 준비생. 여긴 에릭. 게릭 아저씨 아들.”

“얌마, 게릭 아저씨가 대체 누군데?!”

“……야, 헤이븐. 기사 준비생이랑 네가 왜 아는 사이야?”

더 이상 설명하기 귀찮았던 일리안은 대충 손을 흔들며 먼저 걸어갔다. 누구랑 갈지 조금 고민하다 별생각 없이 둘 모두에게 같이 가자는 말을 한 터였다.

누구랑 가든 그다지 상관은 없었으니까.

리트릭과 에릭은 서로를 한번 훑어보다 결국 빠르게 일리안의 양옆으로 다가섰다. 그녀를 따라 걸어가던 리트릭은 일리안이 메고 있는 노란색 가방을 툭툭 건드렸다.

“넌 나이가 몇 살인데 이런 걸 메고 있냐.”

“……열두 살이다, 왜.”

햇병아리 같은 가방은 순전히 타피아의 취향이었다. 일리안은 괜히 민망한 마음에 퉁명스러운 어조로 대답했다.

“안에 별거 안 든 모양인데? 뭐 넣은 거야?”

에릭도 그녀의 가방을 쿡쿡 찌르며 물었다. 사실 그녀의 가방 바깥으로 안에 든 물건이 삐죽 튀어나와 있었지만 에릭은 괜히 그녀에게 한 번 더 물었다.

사실, 무엇이 들었는지보다도 그녀가 왜 이런 물건을 들고 다니는지가 더 궁금했을 뿐이었다.

“알 것 없다.”

일리안은 단호하게 에릭의 관심을 끊어냈다. 그러자 에릭도 순순히 가방에서 시선을 돌렸고, 그는 대신 손가락으로 사람들이 둥그렇게 원을 그리고 있는 곳을 가리켰다.

“와, 헤이븐. 저기 봐. 격투 대회 하고 있다.”

“미, 미친. 저 아저씨 주먹은 살이 아니라 돌 같은데?”

에릭이 가리킨 곳에선 그 말대로 격투 대회가 진행 중이었다. 한 남성의 돌려차기에 상대의 몸이 날아가자 에릭은 몸을 움찔 떨기도 했다.

리트릭도 실제 격투 경기를 가까이에서 보는 건 드물었는지 흥미로운 얼굴로 경기장을 바라봤다. 피가 튀는 경기는 리트릭과 에릭의 손에 땀을 쥐게 만들었다.

그러나 일리안은 따분한 얼굴로 작게 하품을 했다. 아무래도 격투 대회다 보니 여러 규정이 있는 모양인지 실전과는 조금 다른 구석이 있었다.

더한 진창에서 굴렀던 그녀에게는 가벼운 대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야, 야. 들어보니까 저건 본 대회도 아니래. 예선전이라더라.”

대체 어디서 구해온 것인지 리트릭의 손에는 전단지가 들려 있었다. 리트릭은 상기된 얼굴로 전단지에 적힌 행사 순서와 장소들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에릭도 제법 궁금했는지 리트릭의 주위를 기웃거렸다.

일리안은 그사이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기사 검술 대회와 용병 검술 대회는 따로 열리니, 시간이 나면 용병 검술 대회에 가서 아는 얼굴이 있는지 둘러볼 생각이었다.

옆에 있던 리트릭이 눈을 반짝이며 일리안을 붙잡은 것은 그때였다.

“인마, 헤이븐!”

“왜?”

“우리……. 개막식에 가보자!”

개막식이라는 말에 일리안은 한쪽 눈을 찡그렸다. 듣기만 해도 높으신 분의 재미없는 식전 연설이나 할 것 같은데, 거길 왜 가자는 건지.

“이것 봐봐, 개막식에 귀족 사냥 대회가 열린다잖냐.”

“그래서?”

“거기엔 당연히 율리어스 님도 참석할 거고, 그러면…… 가이우스 경도 검술을 쓰실 것 아니냐!”

결국엔 가이우스를 보러 가고 싶다는 이야기였다. 일리안은 슬슬 이 자식이 동경의 마음이 맞는 건지 의심되어 리트릭을 한번 흘겨봤다.

그렇지만……. 율리어스?

전단지를 읽어보니 귀족들의 사냥 대회는 이곳과 좀 떨어진 벨로 숲에서 이루어진다는 모양이었다. 벨로 숲은 작지만 제법 울창한 숲으로 유명했다.

그녀는 율리어스가 제대로 마법을 사용하는 것도, 검술을 쓰는 것도 본 적이 없었다. 경호로 고용되었던 것이니 당연한 이야기였다.

“한번… 가볼까?”

* * *

“여기 맞냐?”

“…….”

일리안의 질문에 리트릭이 입을 꾹 닫았다. 리트릭이 자신만 따라오면 된다며 전단지를 아무에게도 주지 않고 앞장선 지가 벌써 1시간 전이었다.

격투 대회를 관람하던 곳에서 출발해 점차 주변에 사람이 사라지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울창한 나무밖에 없었다.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개막식이 열리는 장소로 보이지는 않았다.

제 머리를 헝클인 에릭이 한 마디 덧붙였다.

“아니, 일단 무엇보다도……. 우리가 원래 있던 곳에서 개막식이 열리는 곳까지는 길어야 20분이라며.”

우리 1시간째 걷고 있거든?

리트릭의 고개가 더더욱 숙여졌다. 기고만장한 태도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풀이 죽은 모습에 일리안은 그의 머리를 툭툭 두드렸다.

그리고서 그녀는 옮기던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훑기 시작했다. 잠시 동안 나무와 땅을 매만지던 일리안은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에릭과 리트릭에게 다가갔다.

“대충 봤는데, 벨로 숲속인 것 같다.”

“어떻게 알아?”

“자이언트 세콰이어가 많잖아. 벨로 숲에 가장 많은 나무니까.”

리트릭과 에릭은 멀뚱한 얼굴로 ‘그래……?’ 라며 되물었다. 벨로 숲은 어려운 행로 탓에 보통 다른 도시로 넘어가려는 이들이나 오는 곳이니 잘 모르는 것이 당연했다.

리트릭에게서 전단지를 뺏어 든 일리안은 결국 먼저 앞장서서 걸어갔다. 아무래도 숲의 입구가 아닌 엉뚱한 곳으로 들어온 모양인지 길이 험하기 짝이 없었다.

연신 리트릭과 에릭에게 아래를 잘 보고 걸으라고 말하고는 천천히 숲을 헤쳐가기 시작했다.

“야, 헤이븐. 너 길은 알고 가는 거냐?”

“알긴 뭘 알아. 대충 서쪽으로 가는 거지.”

“여기가 서쪽인 건 어떻게 아는데……?”

“경험.”

무뚝뚝한 얼굴로 대꾸한 일리안은 거침없이 길을 나아갔다. 질문을 던진 리트릭은 그녀의 경험이라는 대답이 이해가 되지 않았는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더 캐묻지는 않았다.

“……사람이다.”

“뭐?! 어디, 어…….”

“잠깐, 조용히 해봐.”

흥분한 리트릭의 입을 틀어막은 일리안은 곧장 나무에 기대 몸을 숨겼다. 리트릭과 에릭도 영문은 알지 못했지만 그녀를 따라 몸을 숙이고 숨소리를 낮췄다.

“……래서 리하르트 공작은…….”

“고용한 이들이 곧 움직일 겁니다.”

가장 가까이에 서 있던 일리안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자신의 귀로 들은 이름이 익숙했던 탓이었다.

아무리 좋게 보아도 율리어스를 향해 좋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끊겨서 들리는 이야기에도 눈치 빠른 그녀는 돌아가는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일리안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가기 시작했다.

한 발 뒤에 서 있던 리트릭은 눈썹을 구기며 그녀에게 속삭이듯 물었다.

“야, 뭐래? 잘 안 들리는데?”

“조용히 하라지 않냐, 이 자식아!”

“뭐? 이 자식? 말 다 했냐?”

뒤에 붙어 있던 리트릭과 에릭은 이마를 맞대며 으르렁거리기 바빴다. 그들의 앞에 서 있던 두 남자는 어느새 이야기를 다 마쳤는지 자리를 떠났다.

“어? 어어? 저 사람들 저렇게 가게 둬도 되냐? 우리 길 잃었잖아!”

“움직이지 마.”

눈을 내렸던 일리안이 싸늘하게 식은 얼굴로 리트릭에게 명령했다. 당장이라도 그들을 따라가기 위해 발을 내디뎠던 리트릭은 그녀의 얼굴을 보고서 멈칫했다.

“야, 너 표정이 왜…….”

리트릭이 그녀의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감지했는지 어깨를 붙잡으려던 순간이었다. 그들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린아이?”

“아니, 애들이 여기 왜 있어? 얘들아! 여긴 지금 사냥 중이라 위험하니 이리 나와라!”

황성의 기사들로 보이는 이들이 그들을 발견했는지 손짓하고 있었다. 리트릭은 기사들과 일리안을 한 번씩 바라보고는 곧장 움직이지 않고 멈춰 섰다.

일리안은 발이 땅에 붙은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서 있었다. 그러다 겨우 발걸음을 떼었다. 기사들이 있는 곳이 아닌 남자들이 사라진 방향을 향해서였다.

에릭이 일리안의 손목을 덥석 붙잡았다.

“어디가?”

“찾아야 하는 게 있어. 너희 먼저 가.”

“무슨 말도 안 되는……! 갈 거면 같이 가!”

가만히 있던 리트릭은 일리안을 붙잡은 에릭의 반대쪽 팔을 제 쪽으로 당겼다. 그리곤 일리안을 향해 가보라는 듯 턱짓했다.

“얌마. 다음엔 안 된다. 어서 가봐.”

“고맙다, 리트릭.”

리트릭에 의해 에릭의 손이 떨어지자 일리안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의 에릭에 그녀는 먼저 가지 않고 그를 바라봤다.

“나가는 길쯤은 알고 있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그래도…….”

“에릭.”

일리안의 몸은 나무에 가려져 기사들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먼저 기사들을 향해 가고 있는 리트릭을 한 번 바라본 일리안이 에릭의 등을 떠밀며 말했다.

“가봐.”

그녀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씩 웃었다. 그 웃음을 바라보던 에릭은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겨우 옮겨야만 했다.

* * *

“나 참. 이거 챙겨오길 잘한 건지…….”

일리안은 복잡한 눈으로 제 손에 쥐어진 작은 활을 바라봤다. 그녀가 일리안 하인리히의 금고 안에서 찾았던 그 활이었다.

무술 대회를 가기 전, 그녀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가방에 자신의 활과 목검을 챙겼었다.

복잡한 눈으로 활과 목검을 바라보던 일리안은 어린이용의 작고 얇은 목검을 화살처럼 활에 끼워 맞췄다. 활은 자신의 금고에서 가져왔지만 화살을 구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목검으로 나무를 깎아 화살을 만들 재주는 일리안에게도 없었다. 어린이용 목검이 얇아 활에 빠듯하게 끼워진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1발밖에 쏘지 못하는 활이라니……. 작게 한숨을 쉰 그녀는 양손에 활과 검을 쥔 채 바쁘게 움직였다.

“그나저나, 동물이 왜 이렇게 없어?”

귀족들의 사냥 대회란 자고로 작은 동물이나 잡아대는 것이었다. 그런데 숲속을 30분째 걷고 있는 일리안의 눈에는 작은 토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조금 전 일리안이 이야기를 훔쳐 들었던 두 사내는 말을 타고 있던 탓에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얼굴이라도 확인할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나무 뒤에 숨느라 얼굴은 보지 못한 채였다.

그녀 또한 자신이 이곳에서 왜 이러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제는 일리안 하인리히가 아니었고, 율리어스의 용병도 아니니 이럴 이유는 없을 텐데…….

그러나 그녀의 마음에 걸려 도저히 숲을 나갈 수가 없었다. 어린아이의 몸이니 그를 지켜주진 못하더라도, 적어도 율리어스의 건방진 얼굴이라도 확인하면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일리안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걸어갔다. 그리고 그때였다.

“유리…….”

꽤나 먼 곳에 서 있는 율리어스의 모습이 새끼손가락만 한 크기로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그를 보며 픽 웃었다.

사냥 대회에 참여한 이답지 않게 동물을 쫓는 기색이라곤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고고한 태도와 시건방진 모습은 역시나 여유롭기 짝이 없었다.

그녀가 천천히 그를 향해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숲 전체에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솨- 하는 소리와 함께 나뭇잎이 흔들리고, 아래에 난 풀잎들이 바람결에 나부꼈다. 나무 뒤에 숨어 있던 토끼 1마리가 귀를 쫑긋대다 재빠르게 도망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일리안은 어째서 숲에 동물 1마리 찾기가 힘든 건지 깨달을 수 있었다.

나무 위, 나무 아래. 율리어스를 둘러싼 주위에는 살기를 흉흉하게 내뿜고 있는 이들이 즐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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