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죽음을 바칠 시간-22화 (22/123)

22. 함께 가고 싶은 사람

“그러니까 타파, 내가 검술에 재능이 없는 걸까?”

일리안이 유리컵을 탕 내려두며 억울한 목소리로 물었다. 비어 있는 유리잔에는 주황빛의 오렌지 주스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미친놈.”

오늘도 두 눈을 감고 있던 타파가 여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미 그녀의 손은 비어버린 일리안의 유리컵을 다시금 주스로 채워주고 있었다.

“왜! 대체 왜 내가 미친놈이야?!”

“칼부림으로 돈 벌어먹고 있는 녀석이 검술에 재능이 없느니, 마니. 헛소리할 거면 썩 나가, 이 녀석아!”

일리안이 뚱한 얼굴로 입술을 댓 발 내밀었다. 타파의 눈이 보이지 않으니 이런 표정을 해도 그녀는 모를 터였다.

“입술 도로 집어넣어라.”

……모를 거라고 생각했다. 일리안은 민망한 얼굴로 입술을 집어넣어야만 했다.

“그래도 내가 검술을 해온 게 있으니 다른 검술을 배워도 곧 잘할 줄 알았다고.”

“그러게 이제 와서 뭘 새로 배우긴 배워! 이제껏 잘하던 거 하면 되지.”

슬슬 일리안의 투정이 귀찮아진 타파가 버럭 화를 내자 일리안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자신이 두 번째 삶을 살 줄 알기나 했겠냐고. 만약 죽지 않았더라면 그 자신도 새로운 검술을 배우려는 미친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타파는 조용해진 일리안에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늘 버럭 화만 내고, 그녀를 성가셔하는 것 같지만 타파에게 있어 일리안은 딸과도 같은 아이였다.

“어차피 네놈 주 종목은 검이 아니라 활 아니냐.”

타파의 말 한마디에 일리안이 구겨졌던 어깨를 펴며 똑바로 앉았다. 번잡스럽게 유리잔을 만지작거리던 손길도 뚝 그쳤다.

“그렇… 네?”

“쯧쯧, 활잡이면 활이나 더 신경 써라. 무슨 검술을 더 배우겠다고 지랄이야!”

가이우스의 재능이 없다는 말에 근 몇 주간 시무룩해져 있던 일리안이 눈을 반짝이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면 그랬다. 자신이 주로 사용하던 것은 검이 아니라 활이지 않았던가.

아주 어린 시절 부모님과 함께 세상을 돌아다닐 때도 그러했고, 임무를 나가도 보통은 검사가 아니라 궁사의 역할로 고용되곤 했었다.

그러니 이제 와서 의기소침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그런데 일리안. 갑자기 검술을 어디서 배우는 게야? 네가 배울 곳이 어디 있다고.”

“아이고, 타파. 나 이제 밥 먹으러 갈 시간이야. 저녁 먹으라고 찾을……. 아니, 약속이 있어서.”

“그러고 보니 목소리도 안 돌아왔고. 감기가 아직도 낫지 않은 게냐?”

타파가 슬금슬금 다가와 일리안의 손을 잡으려 들자, 그녀는 다급하게 몸을 뒤로 뺐다. 아슬한 차이로 타파가 일리안의 손을 놓치자 그녀는 뒷걸음질을 치며 소리쳤다.

“타파, 그러면 다음에 또 올게. 나 한동안 수도에 머무를 거거든!”

“뭘 또 와! 뒤지기 전까지는 오지 말라고 안 했냐!”

“또 그런다. 다음엔 맛있는 거 사 들고 올게!”

일리안이 먼지가 나부끼는 천을 들고 줄행랑을 치자 타파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유리잔을 치우기 시작했다.

저 아이는 늘 저런 식이었다. 제멋대로 찾아왔다가, 갈 때조차 제 마음대로다.

그래도 일리안을 나무랄 수는 없었다. 그녀는 타파의 딸이었으며, 손녀였고, 유일한 친구였다. 제 허리를 두드리며 분주하게 자리를 치우던 타파는 문득 드는 생각에 고개를 기울였다.

일리안이 다음에 또 온다는 말을 하다니.

늘 다음을 기약하지 않고 사라지던 아이였다. 일리안 자신도 언제 떠날지 몰라 섣불리 다음에 또 오겠다는 말은 죽어도 하지 않던 아이였는데.

이상함을 느낀 타파는 결국 다음에는 꼭 그녀의 손을 잡아봐야겠노라 결심했다.

* * *

“검술… 대회요?”

“예. 늘 여름이 끝나가는 이맘때에는 검술 대회를 비롯해 각종 무술 대회가 열립니다.”

일리안이 눈을 끔뻑거리며 가이우스를 올려다봤다. 검술 수업을 마치고 땀을 흘리고 있던 일리안에게 슬며시 다가온 가이우스가 갑작스레 검술 대회 이야기를 꺼낸 탓이었다.

“검술에 관심이 많으셨지 않습니까. 마침 표가 남았으니, 헤이븐 양도 관심이 있다면 검술 대회를 관람해 보는 건 어떠십니까? 도움이 될 겁니다.”

가이우스가 내미는 2장의 티켓을 일리안이 공손하게 받아 들었다. 티켓에 적힌 시간과 장소를 읽던 일리안이 문득 가이우스에게 물었다.

“가이우스 씨는 같이 안 가시는 건가요?”

“예, 저도 율리어스 님을 따라 움직일 계획이라……. 관람은 다른 분과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일리안은 고민스러운 얼굴로 나머지 1장의 티켓을 바라봤다. 같이 갈 사람이라…….

편하게 생각하자면 디노 경이지만, 그가 있다면 편안하게 관람을 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기사로서 자신을 지켜야 한다며 과보호할 것이 분명했다.

타피아는 이런 대회에 관심이 없을 것 같고……. 제 좁은 인간관계에 미간을 찌푸리고 고민하던 일리안에게 가이우스가 먼저 인사를 해왔다.

“그럼, 헤이븐 님. 오늘 수업은 이만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예, 가이우스 씨. 오늘도 고생하셨습니다.”

가이우스가 성큼성큼 연무장을 걸어 나가자 일리안은 목에 둘러진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손에 쥐어진 티켓을 주머니에 넣으려 했다.

그러나 티켓은 미처 주머니 속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가이우스에 의해 닫힌 연무장 문이 다시금 쾅 열린 탓이었다.

“……리트릭?”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리트릭이었다. 그쪽도 막 수업을 끝낸 참인지 수련복을 입고 있던 리트릭이 일리안에겐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주변을 휙휙 둘러봤다.

“가이우스 경은?!”

“이미 퇴근하셨다.”

그러면 그렇지. 일리안은 짧게 고개를 저었다. 가이우스와 자신이 이곳에서 수업을 한다는 것을 안 리트릭은 종종 수업이 마칠 때마다 가이우스를 찾아오곤 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가이우스와 따로 이야기할 시간이 마련되지는 않았다. 가이우스만 보면 긴장을 하며 얼어붙어 버리는 리트릭 탓에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다.

“하아……. 오늘도 망했네.”

“어차피 가이우스 씨만 보면 얼어붙는 놈이.”

“조용히 해. 그분 얼굴만 봐도 나는 뿌듯하니까.”

이 정도면 대체 리트릭이 들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궁금할 정도였다. 대체 어떤 일이 있었기에 가이우스를 이다지도 따르는 건지.

일리안의 시비에도 아랑곳하지 않던 리트릭은 건들거리는 걸음으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첫 만남은 좋지 않았지만, 그 후로 자주 마주치다 보니 슬슬 묘한 친밀감까지 생기고 있었다. 대개는 수업을 마친 리트릭이 가이우스가 가르치는 모습을 보기 위해 달려오다 보니 마주친 것에 불과했지만.

“어? 뭐야, 이거 무술 대회 티켓 아니냐?”

일리안의 곁에 선 리트릭이 그녀의 손에 쥐어진 티켓을 발견하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가이우스 씨가 구경해 보라고 주더라고.”

“가이우스 경이? ……야. 이거 나랑 가자.”

“내가? ……너랑?”

일리안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고개를 들어 올렸다. 리트릭의 키도 그 나이대치고는 작은 편에 속했지만 일리안의 키가 한참은 더 작았다.

“그래, 나랑! 어차피 준비생들끼리 가기는 할 텐데……. 그러면 자유롭게 보진 못하니까.”

“차라리 혼자 가는 게 나을 것 같은데.”

“뭐? 너 뭐라고 했냐?!”

그녀의 자그만 중얼거림을 용케도 들었는지 리트릭이 발끈했다. 일리안은 슬금슬금 제 짐을 정리하고 연무장을 나설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리트릭과 함께 가도 좋겠지만,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조금은 더 고민해 봐도 될 터였다. 연무장을 나서는 일리안에게 리트릭이 뒤에서 소리치듯 물었다.

“야, 그래서 같이 갈 거야?!”

“생각해 보고.”

“뭘 생각해 봐! 나랑 가자니까?”

* * *

“사라 주방장님께서 가져다 드리래요!”

일리안이 호밀 빵이 가득 들어 있는 바구니를 게릭에게 내밀었다. 게릭은 자연스럽게 그것을 받아 들며 흩어져 있던 정원사들을 불러 모았다.

“어이! 헤이븐이 빵을 가져왔어!”

“그래? 그러면 잠깐 쉬었다 할까.”

수업이 일찍 마칠 때면 사라나 정원사들을 돕는 일을 하는 게 요즘 일리안의 일과였다. 디버튼 분재원에서 나오긴 했지만 게릭을 비롯해 여러 정원사들과 정이 들어 종종 밥을 같이 먹기도 했다.

“그래서 헤이븐, 수업은 들을 만하냐?”

게릭이 빵을 먹기 위해 쉬는 시간을 가진 사이 물어왔다. 호밀 빵을 집어 들던 일리안은 갑작스레 자신에게 시선이 모이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수업이 조금 어려워서 그렇지…….”

“아니, 들어보니 귀족가에서 받는 개인 수업은 엄한 경우가 많다더라고. 매를 맞기도 한다나.”

“예? 설마요.”

자신을 가르치던 파르타 남작을 떠올리던 일리안은 고개를 저었다. 그 앙상해 보이는 팔뚝으로는 회초리를 휘둘러도 그다지 아프지 않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파르타 남작은 소심하기 짝이 없었다. 일리안의 성적이 조금이라도 낮아지면 자신의 성적이 못 나온 것처럼 속상해하곤 했는데, 그 탓에 그녀가 더 열심히 하는 것도 있었다.

“무척이나 잘해주시는걸요.”

“그래? 그러면 다행이고.”

빵을 베어 물던 게릭이 일리안의 머리칼을 거칠게 휘저었다. 머리가 엉망진창이 된 일리안이었지만 그다지 기분 나빠 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그런 이들을 찾아온 것은 잠시 자리를 비웠던 디버튼 분재원의 원장이었다.

“게릭, 네 아들 녀석이 널 찾아왔는데?”

“에릭 놈이?!”

“거참, 아버질 찾아온 게 아니라니까요!”

원장의 뒤에서 자못 불만인 얼굴로 튀어나온 에릭은 원장의 말을 대번에 반박했다. 아들의 모습을 보자 빵을 내려두고 번개같이 일어난 게릭이 에릭에게 다가갔다.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찾아와?!”

“아, 내가 아부질 찾아온 게 아니라고 했잖아요! 괜히 성질이야. 아! 왜 때려요!?”

결국 게릭에게 머리를 맞은 에릭이 제 정수리를 부여잡았다. 에릭은 불퉁한 얼굴로 제 아버지를 흘겨봤다.

괜스레 화를 내고 있는 게릭이었지만 점심시간이었던 터라 불편해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외려 동료의 아들이 찾아왔다고 반가워하는 눈치였다.

게릭도 화를 낸 게 언제냐는 듯 동료들에게 제 아들을 소개시켜 주기 바빴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된 것은 시간이 제법 흐르고 나서였다.

“그래서 에릭. 여기까지는 왜 온 거냐?”

“그게!”

입을 열었던 에릭은 잠시 머뭇거리다 일리안의 눈치를 봤다. 그리곤 슬며시 눈길을 돌리며 게릭에게 물었다.

“……아부지, 점심시간은 언제까지야?”

“이제 곧 끝난다.”

“그래? 그러면 슬슬 가볼게.”

“뭐야. 이 자식아, 그래서 왜 온 거냐고.”

잔디에 앉아 있던 에릭이 제 엉덩이를 털며 일어섰다. 에릭은 어쩐지 조금 붉어진 듯한 귓가를 움찔거리며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야, 헤이븐. 나 나가는 길 좀 알려줘라.”

에릭은 그 말을 끝으로 휘적휘적 정원을 빠져나갔다.

갑작스레 지목당한 일리안은 눈을 둥그렇게 뜨며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은근히 눈치 빠른 게릭만이 낄낄 웃으며 일리안의 등을 밀었다.

에릭은 제법 빠른 속도로 걸어갔다. 일리안이 그를 따라잡기 위해 거의 달려야 할 정도였다.

“에릭, 아니, 왜 이렇게 빨리 가는 거야.”

일리안의 불만 섞인 투정에 에릭이 걸음을 우뚝 멈춰 세웠다. 게릭을 포함한 정원사들이 있는 곳과는 벌써 제법 멀어진 뒤였다.

일리안을 향해 몸을 돌려세운 에릭이 제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흰 종이로 보이는 물건을 일리안에게 내밀자 그녀가 그것을 바라봤다.

“이거 같이 가.”

“……무술 대회?”

가이우스가 건넨 것과 똑같은 티켓이었다. 에릭은 어서 받으라는 듯 티켓을 내밀며 제 머리를 헝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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