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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죽음을 바칠 시간-21화 (21/123)
  • 21. 연습이 많이 필요한 아이

    “뭐야?”

    정적을 가른 것은 한 기사의 외침이었다. 일리안은 이미 검집에 목검을 다시 넣는 중이었다.

    수군거림은 계속됐다. 기사들은 아직도 그녀가 리트릭을 이긴 게 믿기지 않는지 자신들이 본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리트릭은 아직도 차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제 이마를 붙잡은 채 멍하니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다 이를 악물더니 일리안에게 다가왔다.

    “다시 해!”

    “싫은데.”

    고개를 슬쩍 돌려 리트릭을 한 번 바라보던 일리안은 그대로 필립에게 달려갔다. 필립은 매우 자연스러운 자세로 일리안을 품에 안아 들어 올렸다.

    누군가에게 안기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는 그녀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대로 있다간 심술이 난 리트릭이 계속해서 다시 하자고 할 것 같아 필립에게로 도망쳐야만 했다.

    리트릭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자신이 저렇게 작은 아이에게 졌다는 게 조금도 믿기지 않는지 쿵쿵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필립은 그런 리트릭으로부터 일리안을 숨기기 위해 몸을 돌려세웠다.

    “야! 다시 하자고, 내가 실수했으니까!”

    “결투에 다시 하자는 말이 있다고 생각하나 보군. 머리를 친 게 검집이 아니라 검이었다면 다시 하자는 말을 할 수도 없었을 텐데.”

    칼처럼 냉정한 말이었다.

    단지, 그걸 말하는 일리안이 필립의 어깨 너머로 고개를 빼꼼 내밀고 해서 위엄이 떨어질 뿐이었다. 리트릭은 부글부글 끓으면서도 그녀의 말에 대답할 말이 없었는지 입을 다물었다.

    “그래, 리트릭 인마! 패배를 인정해라. 낄낄.”

    “여자애한테 졌다고 창피해하지 말고!”

    주변에 있던 기사들은 그런 리트릭을 놀리기 바빴다. 그러나 그들 중에서도 놀리지 않고 심각한 이야기로 대화를 나누는 이들도 있었다.

    리트릭은 준비생인데도 불구하고 기사들 사이에서 제법 유명한 축에 속했다. 준비생들 중 기사로 뽑히는 것은 손가락에 꼽힐 정도며, 리트릭은 그중에서 유망주였기 때문이었다.

    그 어수선한 분위기를 끝낸 것은 리하르트 기사단의 단장, 렉스였다.

    “지금 다들 뭐 하고 있는 거야! 개인 훈련하라고 시간을 줬더니 놀아? 다들 잘리고 싶나 보지!”

    그러자 기사들은 놀랍게도 하나같이 단정한 자세로 렉스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난잡했던 분위기는 렉스 1명으로 순식간에 종결됐다.

    얼굴을 한껏 찌푸린 렉스는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싶어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다 발견한 게 필립의 품 안에 안긴 일리안과 그 앞에서 어딘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리트릭이었다.

    “으응? 리트릭, 네 놈이 여기 왜 있는 게냐. 수업은 이미 끝났을 텐데?”

    렉스의 질문에 기사들 중 1명이 발 빠르게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곤 천천히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하는 동안 렉스의 시선이 일리안을 향했다.

    “그러니까, 저 아이가 리트릭을 이겼다고?”

    “예. 아무리 리트릭이 방심했다고는 해도…….”

    “결투에 방심? 흥, 그런 걸 가르쳐 준 적은 없어!”

    리트릭은 억울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우락부락한 몸집의 렉스가 리트릭에게 다가가 머리를 꽉 눌렀다. 힘은 들어갔지만 크게 아플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억울하냐?”

    “……예.”

    “이기고 싶어?”

    “예!”

    렉스는 그런 리트릭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그리고는 필립에게 다가왔다. 아니, 정확히는 필립의 품 안에 안겨 있는 일리안을 향해서였다.

    “그렇다는데. 한 번만 더 해주지 그러냐?”

    일리안은 필립의 어깨를 두드려 자신을 내려 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두 발로 땅에 뛰어내린 일리안이 자신보다 키가 한참은 큰 렉스를 올려다봤다. 어린아이의 눈동자는 렉스의 눈을 피하지 않고 있었다.

    “전쟁터에서도 다시 해달라고 해보시죠.”

    “허? 으하하하! 그래, 그 말도 맞다!”

    렉스는 일리안의 그런 당돌한 태도가 마음에 들었는지 그녀의 머리도 슥슥 매만졌다. 리트릭을 대할 때와 마찬가지로 손길에는 힘이 실려 있었다.

    일리안은 그 손길을 느끼며 미세하게 눈썹을 꿈틀거렸다.

    렉스, 이 개자식이. 감히 누구 머리를 만져?

    그녀의 기억 속 렉스는 일리안과 동갑이었다. 호탕한 그의 성격이 그녀와 제법 맞아 종종 술친구 역할을 하기도 했을 정도로 친하게 지냈었다.

    한참을 웃던 렉스는 다리를 굽혀 쪼그려 앉으며 그녀와 눈높이를 맞췄다. 겨우 고개를 올리지 않아도 되는 일리안은 렉스의 두 눈을 응시했다. 그는 웃고 있지 않았다.

    “그래도 말이야. 여긴 전쟁터가 아니지 않냐? 내가 보고 싶어서 그러니까, 한 번만 더 해줘라.”

    일리안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가 알기로 렉스가 웃지 않고 부탁을 하는 때는 진심밖에 없었다. 여기서 거절했다간 일이 더 커질 것 같았다.

    한숨을 푹 쉰 일리안은 눈을 피하며 대답했다.

    “예, 알겠습니다.”

    “리트릭! 이리 와라.”

    자리에서 일어선 렉스는 제 자리에 리트릭을 대신 세웠다. 그리곤 둘에게서 멀찍이 떨어지며 기사들과 함께 그들을 구경했다.

    일리안은 하는 수 없이 다시 목검과 검집을 각각 양손에 쥐어야만 했다. 그녀가 할 줄 아는 검술이라곤 쌍검밖에 없으니 달리 방법도 없었다.

    호오, 쌍검이라.

    렉스는 일리안의 쌍검을 쥔 자세가 생각보다 훨씬 그럴듯하다는 것을 깨달으며 점점 더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다. 지금이야 몸의 힘을 풀고 있지만 저기서 제대로 힘만 준다면 일리안 하인리히와 자세가 비슷할…….

    일리안 하인리히?

    렉스는 그 이름을 생각해 내고는 웃는 낯을 굳혔다. 묘하게 익숙해 보인다 싶던 자세는 그녀 특유의 준비 자세였다.

    기사들 중에서는 쌍검을 이용하는 이가 없었다. 일반적으로 쌍검의 길이가 짧아 대련에서는 불리할뿐더러, 제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기술도 없는 탓에 용병들이 사용하는 검이었다.

    리트릭과 일리안의 전투가 다시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렉스는 다급한 얼굴로 그녀를 불러 세우려고 하던 참이었다.

    “헤이븐 윈터 님? 여기 계십니까?”

    다시 한번 달려오던 리트릭은 걸음을 멈추고 문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거한의 남자, 가이우스가 서 있었다.

    “검술 수업 시간이 되었는데도 오질 않으셔서 찾아왔습니다. 본 수업은 이미 끝났다더군요.”

    “아, 예. 죄송합니다. 잠깐 들린다는 게 그만.”

    가이우스는 렉스에게 눈짓으로 한 번 인사했다. 그리곤 일리안에게 성큼성큼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그런 가이우스를 멍한 눈으로 지켜보던 리트릭이 쑥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아, 안녕하십니까! 가이우스 님, 저는 리트릭입니다.”

    “반갑군요.”

    리트릭에게 짧게 인사한 가이우스는 일리안이 제 손을 잡자 렉스를 바라봤다. 리트릭은 이미 안중에도 없는 눈치였다.

    “그럼, 렉스 단장. 이만 가봐도 되겠습니까.”

    “아이고, 예. 그럼요. 어서 가보십시오.”

    일리안의 손을 잡은 가이우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연무장을 빠져나갔다. 일리안만이 힐끗 고개를 돌려 렉스를 바라봤을 뿐이었다.

    그런 일리안과 눈이 마주친 렉스는 자신이 하던 생각을 떠올리고 다시 얼굴을 찌푸렸다.

    그건 아무리 봐도 일리안의 쌍검이었는데…….

    그러나 고개를 저어야만 했다. 일리안은 이미 2달 전 공작성을 떠나 전쟁터로 향하지 않았던가. 저 아이에게서 그녀를 떠올릴 이유는 아무것도 없었다.

    * * *

    “어서 검술을 배우고 싶으셨습니까. 그렇다 하더라도 기사들이 훈련하는 연무장에 가시다니요. 다치기라도 하면 어쩔 뻔했습니까?”

    “……죄송합니다.”

    가이우스는 혼을 낼 때조차도 엄한 얼굴이 아니었다. 다정하기 짝이 없는 얼굴에 외려 더 미안해진 일리안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러면, 오늘부터는 제대로 검술 수업을 시작하겠습니다.”

    “예? 진짜요?”

    “어서 배우고 싶으셨던 게 아닙니까.”

    일리안은 화색에 찬 얼굴로 주섬주섬 제 검을 꺼내 들었다. 체력 단련을 하는 것도 좋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계속 같은 자세로 베기나 찌르기만 연습하는 것은 재미가 없었다.

    그녀가 목검을 나무 검집에서 꺼내 들자 가이우스가 다가와 그것을 잡아 들었다. 목검의 날을 손에 쥔 채 유심히 보던 그가 물었다.

    “대련을 하셨습니까?”

    “……그게.”

    “검이 상한 정도를 보아하니 상대방의 힘이 제법 세었나 봅니다.”

    일리안이 멋쩍게 웃었다. 차마 목검으로 진검을 상대하느라 그랬다고는 답할 수 없었다. 사실, 진검에 상대한 목검이 부러지지 않은 것만으로도 그녀가 얼마나 대단한 검사인지 알 수 있었다.

    가이우스는 덤덤한 얼굴로 그것을 보더니 이내 새로운 목검을 가져와 건네었다. 이미 상할 대로 상해 버린 목검은 연습용으로 쓰기에도 부족했다.

    “그래서, 이기셨습니까?”

    “예?”

    “처음으로 가져본 내 제자입니다. 어디서 지고 와서는 안 되지 않습니까.”

    말없이 검술을 지도하던 가이우스가 문득 물었다. 차마 아이를 상대로 이겼다고 대답할 수는 없던 일리안이 어색하게 웃자 가이우스는 아무래도 그 웃음을 패배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다음번에 만나실 때는, 부디 이기십시오.”

    그 말에 검을 쥐고 앞을 바라보던 일리안이 가이우스를 올려다보았다.

    “제가 그렇게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그 뒤로 가이우스는 사적인 대화를 하지 않았다. 대신, 평소보다 조금 더 열정적인 태도로 수업에 임할 뿐이었다.

    수업이 끝났을 때는 이미 사방이 어두워져 있었다.

    “……헤이븐 님.”

    “예, 가이우스 씨.”

    수업을 마친 가이우스는 어딘지 곤란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일리안은 영문을 알지 못해 의문스러운 얼굴로 그의 눈빛을 마주했다.

    “헤이븐 님은… 연습이 많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예?”

    그의 곤란한 얼굴이 말해주고 있었다. 헤이븐에게는 검술의 재능이 없다고. 그것이 돌려 말한 것임을 일리안은 눈치 좋게 깨달았다.

    가이우스로서는 어쩔 수 없는 판단이었다. 몸에 새겨진 쌍검술은 그대로 흘러나왔고, 그것을 강제로 기사식 검술로 바꾸려니 힘든 점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그녀가 쌍검술을 했는지 모르는 가이우스는 그것이 아무리 고쳐도 고쳐지지 않는 습관으로 보였다. 때문에 그녀에게는 검술에 대한 능력이 없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제가… 검술에 재능이 없어요?”

    “애석하지만, 그런 것 같군요.”

    그녀가 얼마나 검술 수업에 기대를 하고 있었는지 아는 가이우스도 썩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계속 연습하신다면 재능을 꽃피우실 수 있을 겁니다. 벌써 포기하기엔 이르니 걱정 마세요.”

    일리안은 어딘지 충격받은 얼굴로 사용하던 연무장을 떠났다. 특별히 검술을 잘하는 편은 아니었더라도 20년이 넘도록 검을 사용해 왔는데, 자신에게 재능이 조금도 없다니.

    그녀가 살아온 40년의 인생을 한 번에 뒤흔들 정도로 충격인 이야기였다.

    곧이어 가이우스도 연무장을 떠나자 빈 공터가 되었다. 뒤늦게 그곳을 찾은 이가 있었는데, 기사단장인 렉스였다.

    “가이우스 님, 가이우스 님! 계십니까?”

    불이 꺼진 연무장에서 혹시나 싶어 그를 불렀던 렉스는 제 머리를 긁적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오후에 보았던 아이의 준비 자세가 걸려 그녀의 스승인 가이우스에게 이야기해 줄 참이었다.

    그런데 기사단의 훈련을 끝내고 부랴부랴 찾은 시간이 바로 지금이었다. 혹시나 싶어 연무장에 왔던 렉스는 헛걸음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내일 다시 올까, 생각하던 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자신이 너무 예민한 것 같았다. 그 자세를 조금 보았기로서니 일리안 하인리히를 떠올리다니.

    아이라 뭣 모르고 그렇게 잡았을 수도 있지 않은가? 가이우스에게 그녀의 검술 실력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려던 렉스는 결국 그렇게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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