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이마 때리기
연무장을 달리는 것은 제법 빠르게 익숙해진 터였다. 일리안이 수업을 듣기 전 아침마다 달리다 보니 체력은 자연스럽게 늘어갔다.
그리고 아침마다 연무장을 이용하다 보니 친해진 이들이 있었는데, 리하르트 가문의 기사들이었다. 아침 이슬이 채 떨어지지 않은 아침부터 달리는 그들과 함께 연무장을 돌다 보니 친해질 수밖에 없었다.
열을 맞춰 달리는 기사들의 가장 뒤에서 짧은 다리를 열심히 움직이고 있는 그녀를 보자면, 누구든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공작성에서 보기 힘든 어린아이였으니 더더욱 그러했다.
“뭐? 진짜 검술을 배운다고?”
“예, 필립 경. 진짜라니까요. 왜 못 믿어요?”
“그야, 당연히 넌 여자애니까……. 내가 여동생이 있어서 아는데, 그 나이 때는 보통 검보다는 꾸미는 데에 더 관심 가지지 않나?”
오늘도 아침부터 연병장을 함께 달리고 있는 기사들 중 그녀의 옆에 있는 이는 필립이었다. 최근 들어 친해진 이 중 하나인 필립은 대열에 맞춰 발을 움직이며 그녀를 힐끗 바라봤다.
일리안도 마찬가지로 속도를 늦추지 않고 달리고 있었다. 필립의 말을 듣던 일리안은 심드렁한 얼굴로 대꾸했다.
“난 검이 더 관심 가는데 어쩝니까. 못 배울 것도 아니고.”
“그거야, 그렇지만…….”
필립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더 이상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자 필립의 뒤에서 달리던 다른 이가 고개를 빼꼼 내밀어 일리안을 불렀다.
“헤이븐! 그러면 우리가 검술 좀 가르쳐 줄까?”
“……경들이요?”
“그래, 우리가 이래 봬도 리하르트 가문의 기사들 아니냐. 여기 있는 사람들 다 실력으로 뽑힌 거야.”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헤라프 제국의 실권으로 불리는 리하르트 가문은 기사로 들어가기가 황궁보다도 힘든 것으로 유명했다.
어느 순간부터 리하르트 가문의 보안이 높아지며 고용인들을 뽑는 데에 있어서 까다로워진 탓도 있었지만, 그전에도 리하르트 가문의 기사직은 인기 직업이었다.
돈과 명예를 한 번에 차지할 수 있는 자리인데 그것을 가르는 기준이 오로지 확실한 출신 정보와 실력뿐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실력으로 뽑힌 리하르트 가문의 기사단은 다른 가문들과 친선 결투를 벌이면 늘 우승을 차지하곤 했다.
그 때문인지 필립을 비롯한 리하르트 가문의 기사들은 기세등등한 얼굴로 헤이븐에게 약속했다.
“헤이븐, 네 검술은 우리가 가르쳐 주마! 걱정 말고 따라와.”
“가르쳐 주시는 건 감사합니다만……. 예, 뭐. 알겠어요. 그럼 오늘 수업 마치고 시간이 조금 남으니 어떠세요?”
“그래, 우리는 늘 첫 번째 연무장에서 수련하니 그쪽으로 찾아와.”
일리안과 가이우스가 이용하는 연무장은 세 번째였다. 가장 규모가 큰 첫 번째 연무장은 리하르트 기사단만이 이용하기 때문에 그녀는 한 번도 가지 못한 곳이기도 했다.
마침 아침 달리기마저 끝나자 일리안은 그들과 손을 흔들며 헤어졌다. 그녀도 오늘 운동은 다 했으니 수업을 들으러 가야 할 시간이었다.
* * *
가이우스는 아직 일리안에게 한 번도 제대로 검술에 대해 가르쳐 준 적이 없었다. 그는 모든 검술의 가장 기초는 체력이라며 훈련을 시켰는데, 그의 기준을 따르자면 아직 체력이 모두 다져지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했다.
일리안은 첫 번째 연무장으로 향하며 잠시 머뭇거렸다. 일단은 스승인 가이우스가 정한 것인데 자신이 멋대로 다른 이에게 검술을 배워도 될지 고민이 된 탓이었다.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녀 자신이 이미 오랫동안 검술을 해오기도 했을뿐더러 그 유명한 리하르트 기사단의 실력도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헤이븐!”
연무장에 들어서자 필립이 저 멀리서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아무래도 자유 연습 시간인 듯 기사들은 잠시 쉬거나 훈련, 혹은 대련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일리안은 연신 내부를 두리번거렸다. 늘 용병들에게 둘러싸여 살긴 했어도 기사들의 연습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연무장에 웬 여자아이가 들어오자 순식간에 헤이븐의 주위로 기사들이 몰려들었다. 필립은 그런 그들에게서 일리안을 감싸며 제 여동생을 대하듯 보호했다.
“네가 헤이븐이야?! 그 검술 배운다던?!”
“아니, 생각보다 너무 작잖아! 이래서야 검은 들 수 있겠어? 팔목 얇은 것 봐라. 데일! 네 손가락만 하겠다!”
“몇 살이야?”
헤이븐을 둘러싼 기사들은 필립에 의해 가까이 다가가진 못하면서도 연신 질문을 던져댔다. 일리안은 대체 어떤 질문에 대답해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어 어깨를 으쓱였다.
“애 놀라니까 좀 떨어져라, 이 무식한 놈들아!”
일리안의 젖살이 귀여웠는지 자꾸만 꼬집거나 만지려 들자 결국 필립은 그녀를 번쩍 안아 올렸다. 가이우스로 인해 제법 경험이 생긴 일리안은 필립의 어깨에 제 양손을 얹었다.
“그나저나, 정말 검술을 배우겠다고? 이렇게 작고 말랐는데?”
“그게 못 배울 이유가 됩니까.”
“그건… 그렇지?”
귀여운 얼굴과는 달리 일리안이 단호하게 대답하자 질문을 했던 기사는 머쓱한 얼굴이 되었다.
일리안도 썩 기분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들이 자꾸만 작고 말랐으니 검술을 배워선 안 될 것처럼 굴자 발끈해 버린 것이었다.
“그래도 말이야, 우리도 기사 준비생이 있기는 하잖아. 그 애들이랑 같은 나이라는 게 안 믿겨질 정도로 작은데……?”
기사들 중 1명이 일리안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으며 필립에게 말했다. 그가 보호자처럼 구니 다른 이들도 필립을 일리안의 보호자라고 생각해 버린 탓이었다.
이들이 말하는 준비생은 리하르트 가문에서 기사가 되기 위해 수련하는 소년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일리안보다 나이가 조금 더 많거나 몇 살 어린아이들로 구성된 그들은 공작성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수업을 들으러 오기 때문에 자주 볼 수는 없는 이들이었다.
“그러게. 지금 준비생 중에서 제일 큰 애가 리트릭이었지? 몇 년만 있으면 정식 기사단으로 입단한다며.”
“어, 그렇다더라. 꼬맹이들, 더럽게 빨리 자란다니까.”
순식간에 이야기 주제가 기사 준비생으로 넘어가자 그들은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를 이어갔다. 일리안은 그런 그들을 멀뚱히 바라보고 있었다.
연무장의 문이 벌컥 열린 것은 그때였다. 아직 어려 보이는 소년 하나가 연무장의 문을 열고 들어와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응? 리트릭 아니야?”
“귀신같이 제 이야기 하는 건 어떻게 알고 왔냐, 쟤는.”
연신 주변을 둘러보던 소년은 필립의 품에 안겨 있는 일리안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리곤 곧장 직진해 그녀의 앞에 멈춰 섰다.
필립에게 안긴 탓에 리트릭보다 눈높이가 높은 일리안이 그를 내려다봤다. 먼저 입을 연 것은 필립이었다.
“……리트릭 아니냐? 너, 여긴 무슨 일로…….”
“네가 가이우스 경에게 개인 훈련을 받는다던 그 애냐?”
눈썹을 찡그린 리트릭은 필립은 안중에도 없는지 그녀를 올려다봤다. 제 말이 무참히 무시당하자 필립은 입을 다물고 이야기를 나누는 둘을 바라봤다.
“맞다면?”
일리안은 겉으로 보기에 자신과 나이가 비슷해 보이자 존댓말을 집어치웠다. 거기다 질문을 하는 리트릭의 태도가 상당히 시건방졌으니 당연한 이야기였다.
“네가… 네가 뭔데! 바쁜 가이우스 경에게 훈련을 받아?!”
“헤이븐 윈턴데.”
“누가 이름을 물었어?!”
심드렁하기 짝이 없는 일리안의 태도에 더욱 열이 받은 리트릭은 한걸음 성큼 다가왔다. 필립은 그런 리트릭의 태도에서 위험함을 감지했는지 껴안은 일리안을 추어올렸다.
일리안은 필립의 어깨에 편안하게 기댄 채 리트릭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니까, 네가 인정할 수 없다고?”
“그래! 우리도 가르침 한 번 받아본 적 없는 분이신데…….”
가이우스는 준비생들 사이에서 제법 유명한 이였다. 리하르트 가문에 들어오기 전부터 그는 귀족가에서 대단히 명성이 높은 기사였는데, 이유는 모르겠지만 기사라는 일을 관두고 보좌관으로 율리어스의 아래에 들어왔다.
그 이후로 누군가를 가르치거나 검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대신, 소문으로만 남은 가이우스의 이야기를 들은 소년들이 무언가 환상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영 억울한 모양인데. 이미 듣기로 한 걸 어떻게 할까.”
“나랑 대련해서 이긴다면 널 가이우스 경의 제자로 인정하겠어.”
필립은 리트릭의 말에 식겁해서 일리안을 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꽉 안기자 불편해진 그녀가 필립의 어깨를 툭툭 쳐 내려줄 것을 요구했다.
“대련……. 그래. 네가 그렇게 해서 억울하지 않겠다면 그러지, 뭐.”
“잠깐, 헤이븐. 너 리트릭이랑 대련을 하겠다고? 저 앤 기사 과정을 준비한 지 오래된 앤데 무슨 소리야.”
“그래봤…….”
그래봤자 어린아이인데요, 뭐. 라고 대답하려던 일리안은 입을 다물었다. 자신도 몸은 어린아이란 것을 자각했기 때문이었다.
걱정하는 필립과는 달리 다른 기사들은 이미 재미 난 볼거리라고 생각했는지 자리를 만들어주고 있었다. 그들 중 1명이 필립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됐어, 필립. 헤이븐한테도 좋은 경험일걸? 위험하다 싶으면 우리가 말리면 되는 거고.”
“검을 한 번도 안 잡아본 애한테 무슨……!”
그러나 이미 자리는 만들어진 뒤였다. 기사들이 헤이븐과 리트릭을 둘러싸고 둥그렇게 원을 만들자 분위기는 한층 더 시끄럽게 흘러갔다.
리트릭은 준비해온 검을 빼 들었다. 일리안도 요즘 들어 가지고 다니는 목검을 꺼내 들어 슬쩍 내려다봤다.
진검인 리트릭에 반해 일리안은 목검을 들고 있었다. 리트릭은 이미 수련 과정을 거의 마쳤기 때문이었고, 일리안은 가이우스로부터 아직 진검 사용을 허락받지 못한 탓이었다.
리트릭이 그녀의 목검을 보고서 코웃음을 쳤다. 자신의 상대가 아직 진검도 허락받지 못한 여자아이라는 사실이 우스운 모양이었다.
목검의 검집을 왼손에, 진짜 목검은 오른손에 쥔 일리안이 리트릭에게 눈빛을 보냈다. 두 손으로 검 하나를 쥐어 반듯하게 세운 리트릭은 정석적인 자세로 준비를 마쳤다.
먼저 달려온 이는 리트릭이었다.
“야, 필립.”
“왜?! 아니, 헤이븐 쟤는 어떻게 하려고……!”
여동생이 있는 필립만이 헤이븐을 걱정하는 눈치였다. 그의 곁에 서 있던 기사들 중 1명이 필립을 툭툭 치며 의문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근데, 헤이븐 쟤가 지금 취하고 있는 자세는 쌍검… 아니냐?”
기본적으로 일리안이 쥐고 있는 목검의 형태는 가장 기초적인 모습인 바스타드 소드였다. 어린아이용이라 일반적인 것보다 짧다는 게 특이하다면 특이했다.
일리안은 그 바스타도 소드를 역수로 돌려 잡은 채 보통의 롱소드를 다루는 방식과는 전혀 다른 자세로 준비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검집을 쥔 손도 마찬가지였다.
달려온 리트릭은 신중한 얼굴로 검을 휘둘렀다. 일리안이 목검을 들어 리트릭의 검을 막아냈다.
정확히 말해서 막아낸 것은 아니었다. 리트릭에 비해 힘이 약한 그녀가 그가 휘두르는 검을 제대로 방어할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몇십 년간 진창을 굴렀던 용병이었다. 자신보다 힘이 센 이를 상대하는 법 따위는 얼마든지 알고 있었다.
리트릭의 검을 막아선 일리안은 요령 있게 팔에 힘을 풀어 그의 힘을 흘려보냈다. 온 힘을 다해 휘둘렀던 리트릭은 순간 중심을 잃고 발을 다시 디뎌야만 했다.
따악.
그리고 그 순간, 반대편 손에 검집을 쥐고 있던 일리안이 검집을 들어 리트릭의 머리를 크게 내려쳤다. 연무장에는 싸늘한 정적과 함께 리트릭이 이마를 맞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지금 …뭐야?”
“리트릭이 진 거야?”
잠시간 침묵이 내려앉았던 연무장에는 누군가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곧이어 다른 이들도 멍한 얼굴로 자신이 본 것을 확인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모두 믿기지 않는 눈치였다.
그중 가장 놀란 것은 리트릭이었다. 검을 아래로 내린 채 제 이마를 붙잡은 리트릭은 헤이븐을 혼이 나간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검을 이제야 막 배우는 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때문에 대련으로 그녀에게 제 주제를 알게 할 셈이었다.
그런데 자신이 지다니. 검을 한 번도 배우지 못한 아이에게…….
리트릭을 비롯해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일리안은 멋쩍은 얼굴로 제 볼을 긁적거렸다. 그 손짓에는 나름의 곤란함이 담겨 있었다.
상대가 아이였으니 별거 안 하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실패한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