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죽음을 바칠 시간-19화 (19/123)

19. 조그만 등

“누가 그걸 확인하러 여기까지 왔다고 했나?”

율리어스가 심히 기분이 나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일리안은 그러면 그렇지, 하는 눈으로 뒤이어 물었다.

“그러면 여기까지 왜 왔는데요?”

“…….”

“어? 대답 없다? 나 그러면 내가 남자 친구 있는지 확인하려고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합니다?”

일리안이 놀리듯 물었다. 물론 그가 그것 때문에 찾아왔다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지만, 늘 차갑고 딱딱하기만 한 그를 놀릴 수 있는 귀중한 기회였다.

그녀는 율리어스가 대번에 반박할 모습을 기대하며 그의 말을 기다렸다.

“…….”

“……뭐야. 왜 어색하게 말이 없어요?”

그는 대답을 제쳐둔 채 걸음을 빨리했다. 율리어스보다 한참은 키가 작은 일리안이 다급하게 발을 움직여 그를 따라갔다.

뒤에서 졸졸 따라오듯 붙은 그녀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진짜 그거 확인하러 왔다고? 율리어스가?”

“반말이군.”

“……아, 예. 율리어스 님이요?”

일리안이 대화의 주제를 바꿀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자 율리어스는 침묵을 지키는 것을 관뒀다. 대신, 귀찮다는 어조로 그녀에게 툭 말했다.

“열 살보다 수준도 낮은 주제에 놀러 간 건지 확인하러 왔을 뿐이다.”

“허, 가이우스 씨도 없이요?”

“……저번부터 그랬지만, 내가 가이우스가 없으면 어디도 못 가는 줄 아나 보군.”

율리어스가 가이우스와 마차가 없으면 아무 곳도 못 가는 사람인 줄 알았던 일리안은 볼을 긁적였다.

“그건 그렇네. 어? 잠깐. 여기 공작성 방향이 아닌데요. 아, 직접 걸어서는 길을 잘 모르시는 건가.”

“내가 누구처럼 열 살보다 수준이 낮은 머저리인 줄 아는 건가.”

양 갈래 길에서 공작성으로 향하는 길이 아닌 다른 길을 선택한 율리어스는 꿋꿋하게 속도를 늦추지 않고 걸어갔다. 때문에 일리안은 조금 숨을 헐떡일 정도로 발을 움직여야만 했다.

“그러면 어디 가는 건데요? 당신 집 저쪽이라니까? 날도 어두워졌는데 이만 들어가야죠.”

“아직도 모르는 건가?”

율리어스는 귀찮다는 얼굴로 제 옆에 선 일리안을 힐끗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 눈빛을 받고서야 주변을 둘러보던 일리안이 눈을 끔뻑거렸다.

“……우리 집?”

“길을 모르는 건 내가 아니라 너였군.”

“율리어스 님이 왜 우리 집에 가요?”

일리안이 멍한 얼굴로 물었다. 그 질문에 코웃음을 친 율리어스가 됐다는 듯 다시 걸음을 옮겼다.

“지금… 나, 데려다주는 건가?”

“그래.”

“율리어스가, 나를?”

어쩐지 그 사실이 낯부끄러워진 일리안은 볼을 긁적였다. 율리어스는 그녀에게 있어서 늘 지켜주어야 하는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는 어린아이로, 다음엔 경호해 줘야 할 고용인으로……. 그렇게 그가 자라는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던 일리안에게는 그가 마냥 어린아이 같았다.

이제는 자신이 누군가를 지켜줘야 하는 사람이 아니라, 누군가로부터 보호를 받는다는 사실이 어색해 그녀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그러자 율리어스 또한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어서 오지 않고 뭐 하냐는 듯한 눈빛이었다.

“……내가 작구나.”

“그걸 이제 안 건가? 대체 언제 클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군.”

“하? 두고 보시죠. 내가 우유 잔뜩 마셔서 지금 율리어스보다 커질 겁니다.”

자신이 예전과는 달라졌다는 사실에 조금이나마 우울했던 일리안은 이내 그것을 털어냈다. 대신, 더 당찬 걸음으로 율리어스보다 앞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 작은 등을 율리어스가 묘한 눈으로 바라봤다.

* * *

공작성에서의 수업 시간은 힘들었지만, 제법 평화로웠다. 일리안으로서는 자주 겪어보지 못한 일상의 반복이었다.

“헤이븐 님, 시험지는 다 작성하셨는지요?”

고개를 끄덕인 일리안이 공손하게 종이를 내밀자 파르타 남작이 그것을 받아 들었다. 그는 신중한 눈으로 그녀의 시험지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붉은 잉크가 묻은 펜을 움직이던 파르타가 문득 물었다.

“공부는 할 만하십니까?”

“……노력 중입니다.”

1페이지밖에 되지 않는 시험지는 벌써 채점이 끝났는지 붉은 잉크로 가득 그려져 있었다.

“그러면 어째서 점수가 이럴까요.”

파르타 남작은 시험지를 내려다보며 한숨을 폭 내쉬었다. 시험지 위에는 X자 표시가 가득 그려져 있었다.

일리안은 제 시험지를 바라보며 고개를 숙였다. 슬쩍 눈을 들어 그의 눈치를 보기도 했다.

그녀라고 해서 수업을 농땡이 치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아무리 노력해도 파르타 남작이 바라는 수준까지 가는 것은 역부족일 뿐이었다.

하루 만에 국가 요직과 귀족 사회의 계급, 각 계급에 속한 가문까지 모두 외워오라는 것은 너무한 일이 아닌가? 파르타 남작이 내준 종이를 보며 공부하던 일리안은 과연 이것이 진짜 열두 살이 배우는 게 맞는지 고민해야만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녀는 공부에 흥미가 전혀 없었다.

“……죄송합니다. 다음부턴 열심히 할게요.”

그러나 그것을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었다. 일리안이 슬슬 눈치를 보며 말하자 파르타 남작은 그러면 되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번에는 꼭 모두 외워오셔야 합니다.”

“모두요?”

“예, 전부.”

괜히 어물쩍거리며 묻는 일리안에게 파르타 남작은 쐐기를 박듯 전부를 강조했다. 일리안은 한숨을 쉬며 모두 외워올 것을 약속했다.

“이런 공부는 영 재미가 없으시지요?”

그녀의 한숨을 들어버린 파르타 남작이 웃으며 물었다. 일리안은 당장이라도 고개를 끄덕이고 싶었지만 자신을 가르쳐 주고 있는 파르타 남작을 생각해 아닌 척 고개를 저었다.

“헤이븐 님. 혹시 따로 배우고 싶으신 게 있으십니까?”

“따로 배우고 싶은 것?”

예상외의 질문에 일리안이 눈을 끔뻑거렸다. 지금 하고 있는 공부로도 머리가 부서질 것처럼 따라가기 벅찬데, 따로 배우고 싶은 것이라니.

그녀는 눈치를 보다 슬쩍 고개를 저으려 했다. 그것을 막은 것은 파르타 남작의 이어진 말이었다.

“귀족 가문의 영식들은 모두 아주 어릴 때부터 검술이나 마법을 배우지요. 만약 헤이븐 님께서도 하고 싶으시다면 얼마든지 배우실 수 있습니다.”

“검술이나… 마법이요?”

용병이었던 일리안 하인리히는 검술에 능했다. 그리 특출나진 못해도 제 밥벌이만큼은 제대로 하던 용병이었으니 당연한 이야기였다.

무엇이든 그만 배우고자 했던 일리안은 마음을 고쳐먹었다. 이전 생에선 그저 귀동냥으로 남의 것을 훔치듯 배웠던 것들을 전문적으로 배울 수 있는 기회였다.

“검술과 마법, 둘 중 무엇에 더 관심이 있으십니까?”

마법사가 되기만 한다면 큰돈을 버는 것은 아주 쉬울 것이었다. 돈이 부족하면 쉽사리 배울 수 없는 학문이었으니 이번 기회가 유일할지도 몰랐다.

그러다 문득 일리안은 파르타 남작이 1서클 마법사라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처음 수업을 할 때 자신이 1서클 마법사라는 소개를 한 덕분이었다.

“파르타 남작님, 마법은 어떤 학문입니까?”

“음……. 처음 시작하신다면 먼저 고대어를 모두 익히신 뒤 마나의 순환과 6대 원소에 대해 학문적으로 배우시고…….”

“검술로 하겠습니다.”

지금 배우고 있는 역사, 수학, 그리고 교양만 하더라도 머리가 깨질 것처럼 어려웠다. 열두 살부터 이런 걸 가르쳐도 되는 건가 싶을 정도로 어려운 말만 가득했다.

머리를 쓰는 것보다 차라리 몸을 움직이는 게 편했다. 일리안은 검술을 선택하면 그나마 괜찮을까 싶어 내린 결정이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얼마 가지 않아 산산조각이 났다.

* * *

“정식으로 소개하겠습니다. 오늘부터 헤이븐 님의 검술을 가르치게 된 가이우스 렌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일리안이 두 손을 모으고 꾸벅 허리를 굽혔다. 파르타 남작의 권유로 검술 수업을 받겠다고 대답한 것이 바로 1주일 전의 이야기였다.

그녀는 꼬챙이처럼 마른 파르타 남작이 직접 검술을 가르칠 리는 없으니, 아마도 새로운 검술 선생이나 리하르트 기사단의 1명을 데려와 수업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파르타 남작의 이야기를 들은 가이우스는 단호하게 말했다.

‘헤이븐 님의 검술 수업은 제가 맡겠습니다.’

그게 모든 일의 발단이었다. 일리안이 공작성에서 수업을 듣기 시작한 뒤로 그녀의 학습 상태를 주기적으로 확인하더니, 학부모의 책임감이라도 느낀 모양이었다.

일리안은 그런 가이우스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성실한 가이우스라면 가르침도 꽤나 정석적으로 가르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헤이븐 님, 기사에게는 각자 검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게 있습니다. 헤이븐 님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순간 고민하던 헤이븐은 어렵지 않게 답을 내밀었다.

“경험입니다.”

“좋은 대답입니다. 그렇다면 제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무엇일 것 같습니까?”

“……힘?”

“비슷하군요. 체력입니다.”

일리안은 그 말을 듣자마자 자신이 스승을 잘못 골랐음을 깨달았다. 말을 마친 가이우스가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서 눈높이를 맞추었다.

“제 수업은 게으름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헤이븐 님.”

평소에는 가이우스의 눈을 보며 어쩌면 사람이 저리도 정직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가졌었다. 늘 소처럼 일하고 성실한 그는 아랫사람들의 귀감이라며 추앙받는 탓이었다.

그러나, 그 성실함이 제게는 독이 되어 돌아왔다.

“달리기부터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가볍게 6바퀴, 힘드시면 중간에는 걸으며 휴식을 취하십시오. 끝나고 나면 검을 만지셔도 좋습니다.”

말을 마친 가이우스가 짧게 미소를 지었다. 일리안은 어색하게 마주 웃을 뿐이었다.

그런 가이우스를 뒤로한 채 일리안이 가벼운 준비 운동을 마치고 달리기를 시작했다. 뒤에서 그녀를 응원해 오는 가이우스의 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아직도 연병장 뛰면서 훈련할 짬밥이냐?

가이우스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얼굴을 와락 구긴 일리안이 부러 입을 크게 벌려 숨을 내쉬었다. 열두 살의 체력으로는 사실 넓은 연병장 1바퀴도 버거웠다.

전생의 일리안 하인리히는 검술을 힘보다도 요령으로 사용하던 이였다. 일반인에 비해 체력이 좋은 편이기는 했어도 이렇게 집중적으로 체력을 키우진 않았었다.

세 바퀴가 되었을 즈음에는 속도가 현저히 느려졌다. 체력 관리에는 자신이 있는 일리안이었지만 그녀도 이번 몸은 처음 사용해 보는 것이었다. 옆에서 가이우스가 따라 걸어도 그것보다 겨우 조금 앞서는 게 최대였다.

옆에서 함께 뛰던 가이우스가 오히려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제안했다.

“헤이븐 님, 힘드시면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셔도 좋습니다. 첫날부터 훈련 일정을 따라가기엔 벅차실 겁니다.”

일리안은 그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사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입을 열기도 힘들었다.

그러나 포기하지는 않았다. 다리에 납을 단 것처럼 무거워 한 걸음, 한 걸음 떼기가 벅찰 정도였지만 죽어도 그 다리가 멈추는 일은 없었다.

마지막으로 6바퀴째를 도는 순간, 일리안이 완주 선에서 대자로 뻗어 누웠다. 황급히 달려온 가이우스가 이렇게 바로 누우면 심장에 무리가 간다며 그녀를 부축한 채 몇 걸음을 더 걸었다.

거의 자신에게 기대다시피 한 채 후들거리는 다리로 걸음을 떼던 아이는 제 발로 윈터 저택까지 돌아갔다. 휘청거리는 것이 안쓰러워 가이우스는 몇 번이고 달려가 안아주려 들었다.

그러나 그 조그만 뒷모습에는 오롯한 고집이 담겨 있었다. 쓰러져도 자신 혼자 쓰러지겠다는, 그런 집요함.

그 모습을 바라보던 가이우스는 왜인지 누군가가 생각나는 집요함에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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