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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죽음을 바칠 시간-18화 (18/123)

18. 남자 사람 친구

홀로 게릭의 집 앞에 도착한 일리안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일이 아직 끝나지 않은 게릭으로부터 집에 연락을 해둘 테니 먼저 가 있으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게릭의 집은 분재원에서 크게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녀가 담장 너머로 게릭의 집 주변을 기웃거리고 있을 때였다.

“야!”

키는 크지만 아직 앳된 얼굴이 남아 있는 남자아이였다. 이목구비가 묘하게 게릭과 닮은 아이의 모습에 일리안은 그가 게릭이 말한 ‘에릭’임을 눈치챘다.

“왜 남의 집 주변을 기웃거려? 너 누군데?”

“일리, 아니, 헤이븐. 게릭 아저씨가 여기로 가라고 하던데.”

“헤이… 븐? 아부지가 말한 그 헤이븐?”

에릭이 눈을 크게 뜨며 헤이븐을 다시 바라봤다. 그러다 손가락을 들어 올려 그녀를 가리켰다.

“헤이븐이 여자애였어?!”

“……그게 왜?”

“웬 철부지가 1명 올 거라고……. 여자애면 여자애라고 말을 해줘야 할 것 아니야, 이 아저씨가!”

투덜거리듯 말을 마친 에릭은 성큼성큼 그녀에게 다가왔다. 일리안의 손목을 거칠게 잡아 쥔 에릭이 그녀를 끌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집은 아담한 2층 집이었다. 에릭이 들어가자 어머니로 보이는 중년의 여성이 둘에게 다가왔다.

“엄마, 아부지가 말한 헤이븐이래요.”

“어머. 이렇게 예쁜 여자애였니? 난 이름이랑 이야기만 듣고 당연히 남자아이인 줄 알았구나.”

“말투가 갑자기 왜 그래? 아줌마, 웃기니까 그만해.”

그녀가 웃는 얼굴로 에릭의 등을 철썩 내리쳤다. 웃고 있는 얼굴과는 달리 엄청난 소리에 헤이븐이 되려 놀랄 정도였다.

그러나 에릭은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별일 아니라는 듯 제 등을 살살 매만졌다.

“에릭, 헤이븐에게 집 소개라도 해주거라. 시장에 다녀와야 할 것 같으니까.”

일리안이 먼저 집을 나서는 그녀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묘하게 중성적인 데다 젖살이 빠지지 않은 일리안 이 귀여운 듯 머리를 쓰다듬은 부인은 밖으로 나갔다.

집 안이 조용해지자 에릭이 일리안을 슬쩍 바라보며 제 머리를 헝클였다. 그녀가 대단히 성가시다는 듯한 태도였다.

“뭐……. 하고 싶은 거라도 있냐?”

“그건 없고, 네가 공부하던 것 좀 보자.”

“공부?!”

제 또래라면 찾지 않을 공부 이야기에 에릭이 얼굴을 구겼다. 이상한 녀석을 다 봤다는 듯 일리안을 바라본 에릭은 먼저 2층으로 올라갔다.

일리안이 그 뒤를 따라 2층에 오르자 짧은 복도와 함께 다락방이 나왔다. 선반마다 갖가지 모양의 모형 배가 즐비한 그곳은 에릭의 방처럼 보였다.

“책장은 저쪽에. 그런데 너도 참 이상한 녀석이네. 무슨 공부를 하는지 궁금해서 여기까지 와?”

“요즘 열다섯 살은 뭘 공부하는지 궁금해서. 넌 네 할 일 해도 좋아.”

무심하게 말한 일리안은 책장에서 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에릭의 침대에 털썩 앉은 그녀가 천천히 책을 읽기 시작했다.

에릭은 그런 일리안을 성가셔 하면서도 방 밖으로 나가지는 않았다. 대신, 침대에 앉은 그녀를 연신 곁눈질할 뿐이었다.

조용한 시간이 내내 지속됐다. 에릭은 그동안 나무 조각들을 매만지며 뭔가를 만들고 있었다.

“배를 좋아해?”

책을 읽던 일리안이 지나가듯 그에게 물었다. 조각에 집중하던 에릭은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고개를 들었다.

침대에 앉아 있던 일리안은 잠깐 책을 내려둔 채 그가 만지고 있던 배를 바라보고 있었다. 에릭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뭐, 그렇지.”

“멋있긴 하네. 요즘 그런 형식의 범선은 잘 안 쓰지만.”

“뭐야, 너 배에 대해 좀 알아?”

에릭이 만지고 있는 것은 오로지 풍력으로만 나아가는 가장 기본적인 형식의 범선이었다. 점점 기술이 발달해 마법으로 나아가는 배가 많은 요즘에는 잘 사용하지 않는 형식의 배였다.

“그야 당연하지. 다른 나라로 가려면 배를 타… 아니, 배에 자주 타봤으니까.”

“뭐?! 무슨 배? 너, 뱃멀미는 안 해?”

한평생을 정착하지 않고 돌아다니며 살았던 일리안에게는 당연한 이야기였다. 심지어는 잠깐이나마 배 위에서 일을 한 적도 있었으니 뱃멀미가 있을 리가 없었다.

일리안은 당장이라도 배를 자랑하기 위해 눈을 반짝이며 바라보는 에릭을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삼각돛이네. 확실히 사각돛보다는 삼각돛이 낫지.”

“무슨, 아니야. 이렇게 삼각돛이랑 사각돛을 다 쓰는 게 제일 멋도 나고 바람도 잘 받아.”

헤라프 제국의 수도인 드발릭은 항구와 제법 거리가 되었다. 때문에 드발릭에 사는 에릭은 주변에서 배에 관해 대화를 나눌 이가 몇 없었을 터였다.

일리안은 신이 나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형선들을 모두 들고 와 떠드는 에릭의 말을 모두 들어주기 시작했다. 그녀가 간간이 자신이 아는 이야길 말해주며 대화를 이어갔다.

에릭의 어머니가 돌아온 것은 한참이 지나서였다. 다락방 문을 열고 고개를 내민 그녀는 모형선 하나를 사이에 둔 채 떠들고 있는 일리안과 에릭을 귀엽게 바라봤다.

“헤이븐도 배를 좋아하니?”

“돌아다니는 걸 좋아해서요. 배 이야기도 재밌네요.”

“우리 에릭은 배에 미쳐 가지고선……. 어휴, 저 모형선들을 만든다고 얼마나 난리를 쳤는지.”

에릭은 어머니의 장난스러운 타박에 얼굴이 붉어졌다. 까맣게 탄 에릭의 얼굴이 붉게 물들자 일리안이 짧게 웃었다.

“아줌마! 내려가 있어. 이거 모형선까지는 맞추기로 했으니까.”

“그래, 그래. 곧 저녁 먹을 때니까 내려와라.”

부인이 사라지자 에릭은 침대 바로 앞에서 맞추고 있던 모형선을 다시 조립하기 시작했다. 일리안도 어느새 침대에서 내려와 바닥에 앉은 채 책을 읽고 있었다.

책을 읽던 그녀가 가끔씩 에릭이 헤매면 어디에 부품을 넣어야 하는지 도와주는 식이었다. 모형선이 완성되자 에릭이 씩 웃으며 그것을 내밀었다.

“다 만들었다. 엄청 멋있지?”

“어. 예전에 탔던 카를로스호를 닮았네.”

“카를로스호?! 너 그것도 타봤어?”

고개를 끄덕인 일리안이 이만 아래로 내려가자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읽고 있던 책은 이미 책장에 꽂아둔 뒤였다.

그녀를 따라 자리를 정리하고 계단을 내려가던 에릭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카를로스호라면 10년 전에 이미 항해를 중단한 배였다.

“야, 근데 카를로스호는…….”

“에릭! 어서 이리 나오거라!”

일리안의 어깨를 붙잡았던 에릭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일을 마치고 돌아온 게릭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에릭은 일리안을 제치고 서둘러 계단을 내려갔다.

“왜 이렇게 불러대? 보기 싫어도 봐야 하는데.”

“이놈이! ……되었고, 손님이 오셨으니 인사해라.”

“손님? 또 손님이 왔다고? 헤이븐은 저기 있는데?”

미간을 좁힌 게릭은 문 앞에서 한걸음 옆으로 물러나며 에릭의 머리를 꾹 눌러 인사시켰다. 강제로 인사를 하게 된 에릭이 눈을 찡그린 채 고개를 올려 또 다른 손님을 바라봤다.

“뭐야, 나랑 나이도 비슷해 보이는데?”

“공작 전하시다, 이 녀석아! 똑바로 인사 못 해?”

어느새 계단을 다 내려온 일리안이 눈을 끔뻑거리며 새로운 손님을 바라봤다. 이곳과 가장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 문 앞에 있었다.

율리어스는 제 침실보다도 좁은 집 안을 훑어보며 게릭과 다투는 에릭을 힐끗 바라봤다. 누가 보아도 열다섯 살 애송이에 불과했다.

“저, 공작 전하. 변변찮지만 식사라도 함께하시는 건…….”

잠시 머뭇거리던 게릭이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물론 율리어스가 수긍하리라 생각하고 한 제안은 아니었다.

공작성에서 귀중한 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는 그가 왜 평민의 집에서 저녁 식사를 하겠는가. 게릭은 차라리 그가 어서 거절하기를 바라는 눈으로 바라봤다.

“그러지.”

의외로 율리어스에게서 선뜻 알겠다는 대답이 나왔다. 게릭은 주춤거리면서도 그를 천천히 안쪽 주방으로 안내했다.

평소라면 세 명이서 작게 식사를 할 테이블에 두 명이 추가되자 급조된 의자 두 개를 가져와야만 했다. 게릭과 부인이 등받이가 없는 나무 의자에 앉았다.

“차, 차린 건 없지만 맛있게 드세요.”

“유, 율리어스 님도 입맛엔 맞지 않겠지만 맛있게 드시길…….”

테이블 위는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게릭네 가족은 처음으로 높은 귀족을 상대해 보는 것에 상당히 애를 먹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분위기를 풀어간 것은 일리안이었다.

“차린 게 없다니, 이렇게 맛있는 게 많은데요? 와, 이건 제가 좋아하는 계란 요리인데.”

크게 계란을 먹은 일리안이 우물거리며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그제야 부인도 안도의 미소를 지으며 자신이 만든 요리를 맛봤다.

일리안이 화두를 꺼내자 게릭의 가족들도 제법 편하게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헤이븐이랑 에릭은 내내 2층에서 안 내려오던데, 대체 무슨 이야길 그렇게 나눈 거니?”

“헤이븐, 이 자식이 배에 대해 제법 알더라고. 내 친구들 중에서도 이렇게 많이 아는 애는 없었는데…….”

“알기는 무슨. 난 에릭 너한테 비하자면 아는 것도 아니던데, 뭘.”

에릭은 그사이 일리안이 편해졌는지 팔꿈치로 곁에 앉은 그녀의 팔을 툭툭 쳤다. 일리안은 픽 웃으며 에릭의 장난을 받아줬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율리어스가 포크를 내려뒀다. 그러자 네 명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됐다.

“배?”

“아, 예. 삼각돛과 사각돛이 섞인 카를로스호의 모형선을 만들어서요.”

“지금은 아무도 타지 않는 범선 말인 건가.”

그의 대답에 잠시 멈칫했던 일리안은 싸늘해진 분위기를 풀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래도 멋있잖습니까. 항구에서 돛들이 쫙 펼쳐지는 배들을 보고 있자면 가슴이 뜨거워지는데요.”

“그래봤자 지금은 모두 돛을 쓰지 않지. 대항해 시대 이후 나온 마법선들 때문에 상선으로는 유용하지 않으니까. 필요 인원과 최대 적재량까지 생각하자면 범선은 사라지는 게 옳았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말씀이 많으실까. 일리안은 그 말을 삼켜내며 부러 활짝 웃었다. 이럴 때는 대화 주제를 바꾸는 게 나았다.

“와, 그나저나 이 채소는 텃밭에서 직접 가꾸는 거죠? 집 앞에 작게 텃밭이 있던데…….”

“어머, 그걸 봤니? 아무래도 직접 키우는 거라 그런지 파는 것에 비하자면 볼품이 없구나.”

그 뒤로 율리어스가 입을 여는 경우는 없었다. 일리안은 평소라면 조용한 그가 대체 왜 그 타이밍에 입을 열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식사 시간을 무사히 넘기는 게 더 중요했다.

식사가 끝나고 집에 돌아갈 때가 되었을 때는 이미 해가 지고 난 뒤였다. 게릭과 에릭이 집 앞까지 나와 율리어스와 일리안을 배웅했다.

“야, 헤이븐!”

“에릭?”

“……다음에 또 와라.”

툭 던지듯 말한 에릭은 서둘러 집 안으로 들어갔다. 게릭은 그런 제 아들을 바라보곤 낄낄거리며 에릭을 따라 집으로 들어갔다.

일리안은 이내 걸음을 돌렸다. 아직도 제 옆에 선 율리어스에게 어서 가지 않고 뭐 하냐는 듯 바라보다 물었다.

“마차는 어디 있어요? 데려다줄까?”

“……걸어왔다. 그리고 어째서 네가 데려다준다는 거지?”

눈을 찌푸린 율리어스는 먼저 걸음을 떼었다. 율리어스가 걸어왔다는 이야기에 잠시 멍하니 있던 일리안도 빠르게 발을 움직여 그의 뒤에 바짝 붙었다.

“여긴 무슨 일로 왔어요? 아니, 요즘 제 주변에서 자주 보이시는 것 같은데…….”

“내가?”

“예, 율리어스 님이요.”

율리어스는 대답하지 않고 꿋꿋이 앞을 보고 걸어갔다.

“너야말로, 저 녀석을 보러 여기까지 온 건가?”

“제가요? 아뇨, 설마. 다른 일 때문에 왔죠.”

“다른 일?”

율리어스가 힐끗 일리안을 바라보며 묻자 그녀는 곤란한 얼굴로 제 볼을 긁적였다. 그것이 가르쳐 줄 수 없다는 것임을 안 율리어스는 다시 앞을 바라봤다.

“열 살보다 조금 부족한 수준이라더군.”

“……이렇게 몇 시간도 안 돼서 소식이 들어갈 줄은 몰랐는데.”

“공부에 집중해야 할 텐데. 리하르트 가문이 후견인이라는 사실이 창피하지 않으려면.”

율리어스의 옆에서 천천히 걸음을 맞춰 걷던 일리안은 양손을 깍지 낀 채 제 뒷머리에 가져갔다.

“집중해야죠. 누가 보면 내가 땡땡이라도 친 줄 알겠네.”

“남자 친구를 사귀러 갔지 않나.”

“……예? 누가요. 내가? 헤이븐 윈터가요?”

곰곰이 생각하던 일리안은 문득 고개를 들고 율리어스에게 물었다. 상당히 미심쩍은 어조였다.

“설마, 그거 확인하려고 여기까지 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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