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죽음을 바칠 시간-17화 (17/123)
  • 17. 남자 친구

    “그만두게 되었다고?”

    태양이 내리쬐는 오후는 막 점심시간이 지난 직후였다. 보통 때라면 모두 흩어져 맡은 일을 하기 바쁠 디버튼 분재원의 정원사들이 옹기종기 모여들었다.

    일리안이 게릭과 원장에게 오늘 이후로 분재원의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고 말해온 탓이었다. 이야기를 들은 게릭이 성급한 목소리로 일리안에게 물었다.

    “그러면 이제는 뭘 하려고?”

    “그게, 앞으로는 공부를 하게 되어서…….”

    일리안이 어딘지 쑥스러운 얼굴로 제 머리를 긁적였다. 그녀는 살면서 한 번도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가이우스로부터 분재원의 일은 그만두는 게 어떻냐는 제안을 받은 게 바로 어제였다. 리하르트 가문이 공식적인 후견인이 된 이상, 앞으로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일리안은 그 제안에 곧바로 수긍하지 못했다. 뒤이어 가이우스가 정확히 어디까지 교육을 받았냐는 질문을 던져왔기 때문이었다.

    가이우스로서는 당연히 윈터 남작 가에서 기본적인 교육을 시켰으리라는 생각에 질문을 한 것임이 틀림없었다. 물론 헤이븐 윈터가 아닌 일리안은 알지 못했다.

    올해로 마흔 살이 되었던 일리안은 실생활이나 삶의 지혜에 있어서는 헤이븐을 뛰어넘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역사나 수학과 같은 학문만큼은 부족하기 짝이 없었다.

    “하이고, 공부? 요 천방지축이 가만히 앉아 있을지나 모르겠구나.”

    “게릭 아저씨, 그래도 늘 공작성에 올 테니까 너무 보고 싶어 하지는 마세요.”

    “누가 누굴 보고 싶어 해?! 공부 힘들다고 쪼르르 달려오지나 말아라!”

    게릭은 그제야 그녀가 지나가듯 자신이 남작의 딸이라고 말한 것을 떠올렸다. 하는 짓이 너무도 수더분해 잠시 그녀의 신분을 잊어버린 채였다.

    거친 말투와는 달리 게릭의 눈빛에는 서운함이 담겨 있었다. 그 서운함을 토로하듯 게릭이 크고 두터운 손으로 일리안의 머리를 헝클였다.

    “헤이븐, 이번 달 월급은 디노 경에게 전해주마.”

    “여태까지 도와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원장님.”

    “도움은 네가 주었지……. 너야말로 정말 괜찮은 거니?”

    허리를 굽혀 시선을 맞춘 원장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열두 살 어린아이가 왜 이런 곳까지 와서 일을 하고 있었는지는 그도 대충 알고 있는 바였다.

    “도움이 필요하면 꼭 말하렴. 헤이븐, 너는 모든 일을 네가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어.”

    “설마요. 도와주지 않으셨다면 저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했을 텐데요.”

    “또 그렇게 하겠다고는 대답하지 않지? 약속하자, 힘든 일이 있으면 언제든 우리를 찾아오겠다고.”

    어린아이들을 대하듯 원장이 일리안에게 손가락을 내밀었다. 그녀는 짧게 웃으며 그의 손에 자신의 짧은 손가락을 걸었다.

    “그러면, 게릭 아저씨. ……하나 부탁드려도 될까요?”

    “흠, 흐흠. 내게? 뭘 말이냐?”

    일리안이 제법 결심 어린 눈으로 그에게 자신의 부탁을 전했다. 부탁을 들은 게릭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들어줄 것을 약속했다.

    * * *

    “헤이븐 님, 오늘부터 헤이븐 님에게 전반적인 학문을 가르쳐 주실 파르타 남작이십니다.”

    수업을 듣기로 한 곳은 리하르트 공작성이었다. 지원을 받긴 하지만, 아직 윈터 가문의 저택은 누군가를 맞이할 수 있을 정도로 여유롭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가이우스와 함께 들어온 파르타 남작은 우아한 몸짓으로 그녀에게 인사했다.

    “아직 헤이븐 님의 수준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먼저 확인 후 선생님을 늘려가기로 결정했습니다.”

    “파르타 남작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헤이븐 윈터 남작 영애.”

    파르타 남작은 앙상해 보일 정도로 빼빼 마른 남자였다. 자신의 몸보다 조금 넉넉한 옷을 입은 그가 수업을 시작하려는 듯 일리안의 앞에 자리 잡았다.

    가이우스가 자리를 비켜주려는지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러다 그는 가장 뒤로 물러나 일리안의 시야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향했다.

    “……가이우스 씨께서도, 수업에 참석하시는 건가요?”

    당연히 그가 방을 나갈 것이라고 생각했던 일리안이 당황스러운 눈으로 가이우스를 바라봤다. 가이우스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오늘은 첫날이라 제가 수업을 지켜보기로 했습니다.”

    “이런, 망…….”

    할, 이라는 단어를 겨우 삼켜낸 일리안이 침울한 얼굴로 앞을 바라봤다. 파르타 남작은 이제 시작해도 되겠냐는 눈짓을 부드럽게 보냈다.

    수업은 순조롭게 흘러갔다. 걸릴 게 없어 너무도 순조로웠다.

    “……저, 헤이븐 님. 혹시 기본 교육을 받아보신 적은 있으신지…….”

    “…….”

    일리안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목덜미를 내보이며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파르타 남작이 던진 질문에 단 하나도 대답하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민망한 것은 뒤에서 가이우스가 이 모든 광경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가이우스가 본 것은 대부분 율리어스에게 흘러 들어간다.

    아무리 지금의 자신이 열두 살 어린아이라고는 해도 정신만은 마흔 살 백전노장의 용병 일리안 하인리히였다. 가이우스는 자신보다 다섯 살이 어렸고, 율리어스는 자그마치 열다섯 살이 어렸다.

    일리안은 낯부끄러움에 두어 번 마른세수를 반복했다. 나는 지금 열두 살 어린아이다, 라고 자신에게 세뇌를 거는 수밖에 없었다.

    “흠흠, 아쉬운 이야기지만 헤이븐 님에게 선생님은 현재 저로 충분할 것 같습니다. 먼저 기본적인 교육을 받으신 뒤에…….”

    대략적인 수준이 파악되자 가이우스가 단걸음에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는 꼭 그녀의 보호자라도 되는 마냥 진중한 얼굴로 파르타 남작의 이야기를 새겨들었다.

    “그러니까, 수준이 열 살 어린아이보다 조금 낮다는 이야기로군요.”

    곤란한 얼굴로 어찌어찌 돌려 말하던 파르타 남작의 말을 가이우스가 단번에 일축했다. 열 살이라는 단어가 일리안의 가슴팍에 푹 꽂혀들었다.

    물론 귀족 아이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였다. 그녀도 살아온 햇수가 있는 만큼 어디 가서 무식하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지식에 무지하지는 않았다.

    단지, 이들과 다른 교육을 받았을 뿐이었다.

    강과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는 법, 산속에서 밤을 지새우는 법, 먹을 수 있는 식물과 그렇지 못한 식물……. 그것이 그녀가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교육이었다.

    “그럼, 가이우스 님.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첫날은 예정된 시간보다 빠르게 수업을 마쳤다. 둘만 남은 방 안에서 가이우스가 어딘지 걱정스러운 얼굴로 제 턱을 감쌌다.

    “헤이븐 님.”

    “옛, 예. 가이우스 씨.”

    “수업 시간이… 예상했던 것보다 늘어날 것 같습니다.”

    일리안은 싫다는 말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수준이 나이에 비하자면 부족하기 짝이 없으니 보충 수업이 필요한 것은 당연한 이야기였다.

    수업이 길어져 싫은 것보다 집으로 돌아가 타피아에게 이 소식을 전하는 것이 문제였다. 타피아라면 세상에서 가장 충격을 받은 얼굴로 모두 자신의 탓이라며 슬퍼할 것이 눈에 선했다.

    일리안의 입에서 작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다른 때보다 훨씬 무거울 것 같았다.

    * * *

    “율리어스 님, 보고하겠습니다.”

    집무실로 들어온 가이우스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아직 업무를 보고 있던 율리어스는 종이를 내려두고서 그를 바라봤다.

    가이우스가 율리어스의 앞에서 보고하기 위해 무릎을 꿇는 경우는 단 1가지밖에 없었다. 일리안 하인리히. 그녀의 소식이 들어왔다는 뜻이었다.

    “싯투르 공국에게 승세가 기울었다는 소식입니다. 특히, 일리안 님께서 참여하셨던 남쪽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뒀습니다.”

    “다쳤나?”

    율리어스가 무심한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가이우스는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예, 팔 한쪽에 찰과상과 왼쪽 다리를 절뚝이십니다.”

    “센티를 보내라.”

    “알겠습니다. 저번과 마찬가지로 우연한 인연을 가장하겠습니다.”

    센티는 리하르트 가문에서 후원 중인 여신관이었다. 사실상 평민이 우연히 신관을 만날 일은 거의 없었지만 센티를 보내는 것이 벌써 세 번째였다.

    “그림자들은 뭘 하고 있었나.”

    “……죄송합니다. 일리안 님께서 너무 빠르게 움직이신 탓에 따라잡을 수 없었답니다.”

    “따라잡을 수 없어?”

    율리어스가 드물게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몹시도 차가운 웃음이었다.

    “주인을 따라잡을 수 없는 그림자는 필요 없다. 모두 교체시키도록.”

    “예, 알겠습니다.”

    만약, 그녀가 전쟁터로 가지 않았다면 율리어스도 이렇게 사람을 붙이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율리어스의 곁을 떠나며 목적지를 전쟁터로 정하는 순간, 그녀의 뒤에는 많은 사람이 따랐다.

    일리안 하인리히는 주변에 있는 이들에게 민감했다. 곁에 있는 사람은 많았지만 누군가가 자신의 곁에 오래 붙어 있는 것은 좋아하지 않았다.

    때문에 율리어스는 그녀의 곁에 사람을 붙일 수 없었는데, 전쟁터라는 급박한 상황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어줬다.

    “그럼, 센티와 그림자들을 다시 보내두도록 하겠습니다.”

    보고를 마친 가이우스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율리어스도 멈췄던 업무를 다시 하기 시작했다. 이 시간은 오로지 일리안 하인리히만을 위한 시간이었다.

    자리를 비우려던 가이우스가 갑작스레 걸음을 멈춘 것은 그때였다. 그는 이 보고를 올릴까 고민하다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율리어스 님, 헤이븐 윈터 님의 첫 수업이 끝났습니다.”

    “……어떻던가?”

    바쁘게 펜을 움직이던 율리어스가 여상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다지 궁금하지 않은 것처럼 무심한 목소리였다.

    “그게, 열 살 어린아이보다 조금 부족한 수준이시라고…….”

    큽.

    가이우스는 숙이고 있던 고개를 자신도 모르게 쳐들었다. 그러나 그곳에는 딱딱한 얼굴로 펜을 움직이고 있는 율리어스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그가 웃는 소리를 들었다고 착각하다니. 가이우스는 자신이 드디어 환청을 듣는 건가 싶어 업무를 줄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수업은… 파르타 남작이 한다고 했나.”

    “예, 아직 선생이 더 필요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왜 고개를 숙여 종이를 보는 율리어스의 입매가 말려 올라간 것만 같을까. 가이우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번에는 환각을 의심했다.

    “수업은 언제 한다고 했지?”

    “아무래도 조금 급하다 보니 매일 하기로 정해졌습니다. 당장 내일부터 교재와 함께 수업을 시작한다고 하십니다.”

    “내일이라…….”

    헤이븐 윈터의 수업이 진행되는 곳은 율리어스가 아주 어렸을 때 수업을 받던 곳이기도 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율리어스는 종이에 서명을 마치고 펜을 내려뒀다.

    “오늘은 일찍 마쳤겠군.”

    “예, 파르타 남작께서도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어디 있지?”

    그가 지금 묻는 것이 헤이븐 윈터의 소재라는 사실에 가이우스는 잠시 멈칫했다. 누군가의 위치를 묻는 것은 일리안 하인리히를 제외하고 상당히 드문 일이었다.

    “그게… 끝나자마자 오늘은 갈 곳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갈 곳?”

    율리어스가 고개를 들어 가이우스의 눈을 바라봤다. 눈빛이 마주친 가이우스는 눈을 끔뻑거리다 느리게 대답했다.

    “디버튼 분재원의 정원사 중 1명인 게릭 씨의 집에 간다고 하셨습니다.”

    그것만 들어서는 도대체 그 목적이 무엇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미간을 좁힌 율리어스가 질문을 하기도 전에 가이우스가 덧붙여 말했다.

    “게릭 씨에게 아들이 있다고 하더군요. 열다섯 살이라고 들었습니다.”

    “열… 다섯?”

    마침 율리어스의 나이도 열다섯이었다. 인상을 와락 찌푸린 율리어스가 가이우스의 말을 조합해 다시 한번 물었다.

    “그러니까 지금, 그 녀석이 열다섯 살짜리를 보러 갔다는 말인가?”

    “맞습니다.”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 가이우스는 문득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산만 한 덩치와는 달리 상당히 순박한 미소였다.

    “그 나이면, 아마 남자 친구라도 사귄 것 아니겠습니까.”

    소문이 와전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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