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죽음을 바칠 시간-16화 (16/123)

16. 걱정이란 이유로

이마 위로 흰 수건을 올려둔 일리안이 슬슬 주변을 둘러봤다. 타피아의 극성으로 인해 침대에 누워 있긴 하지만 사실 이미 다 나은 차였다.

일리안은 자신이 아프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일리안 하인리히의 신체는 건강 하나만큼은 발군이었다.

열두 살 여자아이의 신체를 너무 과도하게 굴린 걸까.

천장을 바라보던 그녀가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일리안 하인리히는 열두 살 때, 이미 먹고 살기 위해 돈을 벌고 있었다.

그때에 비하자면 충분히 호사스럽게 생활한 터였다. 비바람을 막아줄 집이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대단히 감사했다.

이마에 올려져 있던 흰 수건을 잡아당기며 그녀가 침대에서 일어섰다. 벌써 공작성에 나가지 못한 지 사흘이 흘렀다.

오늘은 어떻게 해서든 자리에서 일어나 얼굴이라도 비춰야겠다고 결심했다.

“헤이븐 님, 필요한 거라도 있으세요?”

“옷을 준비해 줘. 공작성에 다녀와야겠어.”

마침 방문을 열고 들어오던 타피아에 일리안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거울 앞에 섰다. 타피아가 침울한 얼굴로 일리안의 뒤를 따랐다.

“벌써요? 아직 사흘밖에 쉬지 못하셨는데……. 열도 나셨잖아요.”

“타피아, ‘사흘밖에’가 아니라 ‘사흘이나’야. 다른 사람이었으면 벌써 잘리고도 남았다고.”

전신 거울에 얼굴이 비치자 일리안은 턱을 매만지며 얼굴을 둘러봤다. 그러다 갑작스레 입꼬리를 올려 활짝 웃었다.

핼쑥한 감이 남아 있긴 하지만 미소로 대충 가려졌다. 일리안은 타피아가 건네주는 옷을 챙겨 입으며 나갈 준비를 시작했다.

옷을 다 입었을 때쯤 디노가 방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타피아, 밖에 손님이 오셨는데…….”

“이렇게 이른 시간에요? 세르앙 자작 부인께서 오셨나…….”

타피아가 자못 걱정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리며 방을 나섰다. 세르앙 자작 부인을 맞이할 생각에 타피아의 얼굴 위로 그림자가 들어섰다.

디노와 타피아가 방을 벗어나자 혼자가 된 일리안은 서스펜더를 당겨 반바지에 걸었다. 출근 준비는 이걸로 끝이었다.

드넓은 저택에서 머무르는 사람은 디노와 타피아, 그리고 일리안이 전부였다. 인력을 고용할 만큼 재정 상황이 넉넉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디노와 일리안이 밖에 나가 돈을 버는 사이 넓은 주택을 홀로 쓸고 닦으며 요리, 빨래까지 하는 것은 모두 타피아의 몫이었다. 그 탓에 오늘도 타피아는 새벽부터 일어나 움직이고 있었다.

타피아가 나간 방문을 바라보던 일리안은 이번 달의 재정 상황을 떠올렸다. 불면 계약도 성공했으니 이번 달은 제법 넉넉하게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람을 조금 더 고용해 볼까…….

고민하던 일리안은 끝내 고개를 저었다. 넓은 저택을 제대로 관리하려면 사람이 더 필요하긴 했지만 다달이 나가는 돈을 낼 수 있을 정도로 수입이 고정되지는 않았다.

그녀가 폭 한숨을 내쉬었다. 고생하는 타피아와 디노를 조금이라도 도와줄 수 있다면 좋으련만.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저, 헤이븐 님. 손님이 헤이븐 님을 찾아오셔서…….”

“내 손님이라고? 설마 고모 같지도 않은 세르앙 자작 부인?”

헤이븐 윈터가 어린 나이에 조실부모하여 가주가 되었다는 사실은 근방에서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녀를 도와주는 어른은 존재하지 않았다.

윈터 가문이 폭삭 망한 뒤부터는 저택을 방문하는 이도 없었다. 때문에 일리안은 자신을 찾아왔다는 소식에 세르앙 자작 부인부터 떠올렸다.

“아, 아니요……. 그게, 세르앙 자작 부인이 아니시고…….”

“낡아빠진 윈터 가문은 응접실로 안내해 줄 이도 없나.”

서릿발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문 너머로 들려왔다. 타피아는 곤란한 얼굴로 일리안과 문밖을 번갈아 바라봤다.

눈을 깜빡이던 일리안이 타피아를 지나쳐 문밖으로 나갔다. 그곳에는 무미건조한 얼굴의 율리어스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유리, 아니, 율리어스 님?”

“이름은 기억하고 있나 보군.”

서둘러 일리안을 따라 나온 타피아가 둘을 응접실로 안내하기 위해 손을 들었다. 그 몸짓을 본 일리안이 고개를 저었다.

“응접실은 창고로 쓰고 있을 걸, 타피아. 거긴 청소하지 않기로 했었잖아.”

“아……. 그랬죠, 참.”

“정원으로 나갈게. 장소가 변변찮은데, 괜찮으시죠?”

대답을 기다리지 않은 일리안이 먼저 복도를 걸어갔다. 귀중한 손님이 오셨으니 뭐라도 내드려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 발을 동동 구르는 타피아와는 달리 침착한 태도였다.

타피아마저 하던 일 하라는 핑계로 보낸 일리안은 율리어스와 함께 정원에 도착했다. 정원은 리하르트 가문의 공작성처럼 화려하지도, 넓지도 못했다.

듬성듬성 잡초마저 나 있는 정원에는 덩그러니 흰 테이블과 의자 2개만이 존재했다. 아침 이슬을 맞아 축축한 의자 바닥을 손으로 대강 닦은 일리안이 앉으라는 듯 손짓했다.

율리어스는 가만히 그녀를 따라 자리에 앉았다.

“가이우스 씨도 없이 혼자 무슨 일이시죠, 율리어스 님?”

“가이우스가 없으면 혼자 돌아다니지도 못하는 어린아이인 줄 아나? 누구처럼.”

늘 디노와 함께 공작성으로 출근하는 그녀를 두고 한 말임이 틀림없었다.

“누가 혼자 못 다닙니까, 누가. 그리고 디노 경이 날 도와주는 게 아니라 제가 디노 경을 도와주는 거라고요.”

일리안이 짐짓 억울하다는 얼굴로 테이블을 약하게 두들겼다. 율리어스는 그녀의 억울한 눈빛으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이 이른 아침부터 무슨 일로 찾아오셨는데요. 디노 경 대신 저랑 출근이라도 하려고 그러십니까?”

“헛소리.”

일리안의 말을 일축한 율리어스가 테이블 위로 종이를 내밀었다. 제 앞으로 다가온 종이에 그녀가 고개를 숙여 바라봤다.

일리안의 눈에 ‘후견인 등록증’이라는 6글자가 가장 먼저 들어왔다. 눈동자를 조금 내리자 가장 아래에는 ‘율리어스 알 리하르트’라는 이름이 써진 채였다.

미간을 좁힌 일리안이 조심스럽게 그 종이를 들어 올렸다.

“이게 뭡니까.”

“열이 올라 그 좁쌀만 한 눈도 멀어버렸나?”

“이렇게 큰 좁쌀이 어디……! 아니, 이 종이가 후견인 등록증이 맞다고요? 유리, 아니 율리어스 님이 내 후견인이 되어주겠다고?”

일리안은 자신도 모르게 ‘드디어 미쳤어요?’라는 말이 나오려는 것을 겨우 삼켜냈다. 대신 찌푸린 얼굴로 종이를 한 번 더 바라볼 뿐이었다.

“싫다, 이 건가.”

“싫다는 게 아니라……. 믿기지가 않는 거죠. 천하의 율리어스 님이 대체 왜? 아, 혹시 이것도 가이우스 씨의 의견?”

하기 싫은 것까지 억지로 하라는 말은 아니었는데……. 일리안이 멋쩍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내가 하기 싫은 일을 누구의 부탁 때문에 할 사람처럼 보이나?”

“아니요, 전혀요.”

조금의 고민도 없이 대답이 나오자 율리어스의 눈썹 하나가 꿈틀거렸다. 일리안은 신경 쓰지 않고 종이를 빤히 바라봤다.

고민하는 시간이 길어지자 율리어스가 일리안을 향해 물었다.

“설마, 주제에 조건을 따지려는 심산인가?”

“아니, 그게 아니라…….”

일리안이 뚫어버릴 것처럼 읽고 있던 종이를 테이블 위로 내려뒀다. 그녀가 제 볼을 긁적였다.

“왜 제게 이런 것까지 해주시나 싶어서요.”

“당연한 걸 묻는군.”

“……?”

“밤마다 잠이 들기 위해서다.”

말을 마친 율리어스가 알았으면 어서 이름을 적으라는 듯 턱짓했다. 일리안이 마침 지나가는 디노에게 펜을 부탁했다.

멀리서부터 헐레벌떡 펜을 가져오고 있는 디노에게 일리안이 던지라는 말을 전했다. 펜 하나가 포물선을 그리며 일리안의 작은 손바닥에 안착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율리어스가 일리안에게 물었다.

“저자는 기사가 아니었나.”

“예, 일단은 그렇죠.”

“제 주군에게 물건을 던지는군.”

일리안은 재빠르게 종이 가장 아래에 헤이븐 윈터를 적어냈다. 잉크가 마르도록 종이 위로 입바람을 불며 그녀가 말했다.

“어차피 셋밖에 없는데요, 뭐.”

“……셋?”

“예, 이 저택에 타피아, 디노, 그리고 저. 이렇게 셋밖에 없어서요.”

그 말에 율리어스가 고개를 들어 저택을 바라봤다. 확실히, 저택의 크기가 검소한 편이긴 하나 고작 셋으로 관리할 만한 크기는 아니었다.

“자, 이제 등록증도 다 썼겠다. 슬슬 출근해 볼까요.”

“드디어 출근할 생각이었나 보군.”

“그럼요, 조금이라도 더 벌어야지.”

율리어스는 먼저 돌아가겠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리안도 짧게나마 배웅을 하기 위해 의자를 밀었다.

뜬금없이 찾아왔던 율리어스는 순식간에 멀어져갔다. 사용한 테이블과 의자를 정리하고 있던 일리안에게 타피아가 다가왔다.

“이야기는 다 나누셨어요?”

“어, 내 후견인이 되어주시겠다던데.”

“어머, 후견인이요? 정말 잘됐네요!”

그러다 문득 타피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왜 여기까지 찾아오신 걸까요? 헤이븐 님은 어차피 공작성으로 가실 텐데…….”

“……그러게?”

후견인 등록증에 서명을 받겠다고 여기까지 찾아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유리가?

타피아와 일리안이 의문 섞인 눈으로 율리어스가 떠난 자리를 바라봤다.

* * *

“일은 잘 해결되셨…….”

마차 앞에서 율리어스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가이우스였다. 황급히 다가온 가이우스가 율리어스에게 질문을 하다 말고 뚝 멈췄다.

돌아온 율리어스가 어쩐지 싸늘한 눈으로 가이우스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혹시 일이 잘 안 되셨…….”

“가이우스.”

“예, 예?”

율리어스가 가이우스를 지나 마차에 발을 올렸다. 가이우스는 몹시 궁금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다음부터는, 혼자 움직이겠다.”

단호하게 명령한 율리어스가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덩그러니 혼자 남은 가이우스는 얼어붙은 채 그의 뒷모습을 바라봐야만 했다.

가이우스마저 마차에 올라타자 곧 말이 우는 소리와 함께 마차가 출발했다. 얼마 안 가 정신을 차린 가이우스가 먼저 그에게 물었다.

“헤이븐 님께서는… 많이 안 좋으시던가요. 신관이라도 1명 보내 드리는 게 어떻습니까.”

“다 나았더군.”

가이우스가 그 소식을 반겼다. 율리어스가 다시 잠을 자지 못하는 탓도 있지만, 공작성의 이들 모두가 그녀를 그리워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오늘부터 다시 출근한다던가.”

“오늘부터 말입니까? 이런, 얼마 쉬지도 못하셨는데…….”

말과는 달리 가이우스의 얼굴에는 반가움이 담겨 있었다. 율리어스는 무심한 얼굴로 창밖을 바라볼 뿐이었다.

“약을 보내도록.”

“……예!”

그녀에게 따로 약을 보낼 생각을 하고 있던 가이우스는 놀란 얼굴로 대답했다. 율리어스가 저렇게도 다정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일리안 하인리히를 제외하고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가이우스는 그 사실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율리어스에게 있어서 일리안 하인리히는 그 무엇에도 비할 바가 되지 않았으니까.

율리어스의 머리카락 위로 바람이 불었다. 세찬 바람 소리에 가이우스는 순간 율리어스의 목소리를 놓칠 뻔했다. 그가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덧붙인 탓이었다.

“가이우스, 네 이름으로.”

단지, 율리어스가 무슨 이유로 윈터 가문에 직접 발걸음했는지 분명해졌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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