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헤이븐 윈터의 후견인
“……졸려서… 죽을 것 같아…….”
눈 아래가 까맣게 죽은 일리안이 터덜거리는 걸음으로 공작성을 나섰다. 아직 어슴푸레한 아침은 해가 채 뜨지 못한 터였다.
그녀가 이리도 피곤한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이틀 연속으로 율리어스를 재우느라 밤을 완전히 지새운 탓이었다.
물론, 두 날 중 율리어스가 잔 것은 오늘 하루밖에 없었지만.
“오늘따라 왜 이렇게 아침이 춥냐……. 젠장.”
일리안은 오소소 닭살이 돋은 양팔을 문질렀다. 날이 더운 여름인데도 불구하고 아침은 아직 찬 기운이 느껴졌다.
그러다 문득, 일리안이 자그마한 코를 움찔거렸다.
“비 냄새?”
집시였던 부모님을 둔 일리안은 바깥 생활에 익숙했다. 종종 비박을 하기도 했던 일리안은 귀신같이 비 냄새를 잡아냈다.
인상을 와락 찌푸린 일리안이 나지막이 중얼거렸을 때였다. 묘하게 회색빛이었던 하늘에서 갑작스러운 소나기가 쏟아져 내렸다.
장대비라고 해도 전혀 부족함이 없을 빗줄기였다. 자그마한 손바닥으로 머리 위를 가린 일리안이 축축 늘어지던 다리에 힘을 주고 달려가기 시작했다.
며칠간 율리어스의 불면을 고쳐주기 위해 공작성에서 머물렀지만, 이제는 불면도 고친 터였다. 물론 하루쯤 더 머무른다고 해서 펜서를 비롯한 이들이 나무라지 않을 것을 알지만 그녀는 그럴 수 없었다.
그 넓은 저택에 둘만 남은 디노와 타피아가 얼마나 궁상맞게 지내고 있을지는 안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일리안은 자신이 없으면 고기 한 점 먹지 않을 둘을 위해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다.
“헤이븐 님? 이 시간에……. 세상에, 저 비를 다 맞고 오셨어요?!”
“어, 타피아. 오는 길에 비가 쏟아지더라고. 수건 좀 주겠어?”
일리안이 작은 손을 내밀었지만 타피아는 커다란 타월로 그녀의 몸 모두를 감쌌다. 아직 키가 작은 일리안의 몸 대부분이 커다란 타월 하나로 가려졌다.
타피아는 부드러운 손길로 일리안의 머리를 매만졌다. 그 손길에 머리를 맡겼던 일리안이 갑작스레 눈을 느리게 껌뻑이기 시작했다.
“아, 타피아……. 머리, 너무 흔들지 마. 어지럽다고…….”
“네? 헤이븐 님, 어지럽다니요?”
일리안의 머리에서 수건을 떼어낸 타피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타피아로서는 조심스럽기 짝이 없을 만큼 부드럽게 만졌는데도 어지럽다는 말이 들려오니 놀랄 법도 했다.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던 일리안의 몸이 휘청거린 것은 그때였다. 조그만 아이의 몸이 흔들리자 타피아가 다급하게 어깨를 감쌌다.
“헤이븐 님, 헤이븐 님!”
“타피아……. 소리치지 마……. 머리 울려.”
잠이 쏟아지는 것처럼 눈을 깜빡이던 일리안이 결국 정신을 잃었다. 깜짝 놀란 타피아가 디노를 부르짖은 것은 그와 동시였다.
* * *
“오늘은…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율리어스 님.”
보고서를 내려놓던 가이우스가 조심스레 말을 붙여왔다. 그 말에 책상 앞에 앉아 있던 율리어스도 잠시 움직이던 펜촉을 멈칫했다.
가이우스는 허투루 하는 말이 아니었다. 오늘 아침의 율리어스는 다른 날과 분명히 달랐다.
먼저, 그는 비가 오는 날을 좋아하지 않았다. 빗소리가 시끄럽다는 이유였다. 아침부터 우렁차게 쏟아지는 비는 율리어스의 기분을 망치기에 충분한 날씨였다.
때문에 빗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집무실에는 늘 마법을 걸어두곤 했다. 그런데 오늘은 그조차도 없이 쏟아지는 빗소리를 듣고 있는 중이었다.
그의 기분이 좋다는 증거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업무를 할 때면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는 율리어스가 미묘하게 풀어진 자세로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비록, 가이우스가 아니면 그 누구도 알아채지 못할 작은 틈이었지만.
“간밤에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가이우스는 왠지 모르게 기대감 어린 얼굴로 율리어스를 바라봤다. 그 또한 펜서로부터 오늘도 헤이븐이 율리어스의 방에서 나왔다는 이야길 들은 탓이었다.
제 주인의 조금이라도 편한 모습을 본 지가 벌써 2달이나 흘러 있었다. 일리안 하인리히가 있을 때 이후로 오랜만에 보는 그 모습에 가이우스는 작은 희망을 가졌다.
“…….”
겉으로 보기에는 평소와 다를 것 없이 딱딱한 얼굴의 율리어스가 대답을 망설였다. 손에 쥐어진 펜은 아직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평소라면 조금의 고민도 없이 대답하지 않았을 질문이었다. 그러나 헤이븐 윈터, 그녀가 전해준 일리안의 말이 율리어스를 망설이게 만들었다.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요.’
마침내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잠을 잤다.”
단순히 한 마디만을 내뱉은 율리어스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이어서 펜을 움직였다.
그러나 당연히 그가 대답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종이들을 모으고 있던 가이우스는 그만 모은 종이들을 떨어트렸다. 가이우스가 바닥으로 떨어진 종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멍하니 율리어스를 바라봤다.
가이우스를 놀라게 한 것은 율리어스가 제 말을 들어준 것도, 그가 제 질문에 대답을 해줬다는 사실도 아니었다.
단지, 그가 잠을 잤다는 사실. 그것뿐이었다.
율리어스의 육체는 일반인과는 달랐다. 리하르트 가문의 초대 가주가 드래곤이라는 소문은 전설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번 대에 이르러서 갑작스럽게 드래곤의 힘이 발현한 이였다. 세대가 바뀌며 옅어진 것 같았던 드래곤의 피는 아직 건재함을 과시하듯 율리어스에게 특별한 힘을 쥐여줬다.
드래곤의 피가 흐르는 율리어스는 일반인과 달리 뛰거나 잠을 자지 않아도 힘들어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도 반은 인간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잠을 자지 않을 수는 있어도 그 경우에 몰려오는 끔찍한 두통은 그도 어쩔 수 없었다.
일반인에 불과한 가이우스는 인간이 2달간 잠을 자지 못할 때의 고통이 가히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진심으로……. 진심으로 다행입니다, 율리어스 님.”
율리어스는 그 말을 듣고서야 멈췄던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이우스도 제 감정을 다스리고 바닥에 떨어진 종이를 하나씩 주워 들었다.
한 장씩 정리하던 가이우스는 문득 떨어진 종이 한 장을 발견하고 들어 올렸다. 그곳에 적힌 것은 다름 아닌 ‘후견인 등록증’이었다.
그 종이와 율리어스를 한번 번갈아 보던 가이우스는 조심스레 운을 떼었다.
“잠을 잘 수 있었던 것이 혹, 헤이븐 윈터 님 덕분이십니까?”
“그래.”
모아 든 종이를 내려둔 가이우스는 종이 한 장만을 들고 율리어스에게 다가갔다. 인기척이 가까워지자 율리어스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율리어스 님. 저, 일전의 헤이븐 윈터 님과의 계약 건 말입니다…….”
가이우스는 율리어스가 보기 쉽도록 종이를 돌려 내밀었다.
“현재 윈터 가문이 빚으로 인해 어려운 상황이라고 들었습니다. 율리어스 님께서 후견인이 되어주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본래라면 펜서나 가이우스가 그녀의 후견인이 되어줄 요량이었다. 본디 그들이 아는 율리어스는 후견인 따위를 해줄 이가 아닌 탓이었다.
가이우스가 갑작스럽게 생각을 바꾼 이유는 어쩐지 ‘헤이븐 윈터’라면 그 율리어스도 생각을 달리할 것 같기 때문이었다.
그 아이에게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꼭, 노력하지 않아도 늘 사람이 따르던 일리안 하인리히처럼…….
“차용증.”
“예, 예?”
“오늘 내로 해결하도록.”
단지 그렇게 말한 율리어스는 빠르게 후견인 등록증에 서명을 마쳤다. 서명을 마치고 종이를 바라보던 율리어스는 문득 1가지 사실을 깨닫고 미간을 구겼다.
그 종이는 정식으로 후견인이 되기 위해 국가에 제출해야 하는 ‘후견인 등록증’이었다. 그곳에는 후견인인 율리어스 뿐만 아니라 후원을 받는 당사자인 헤이븐 윈터의 서명도 필요했다.
서명란은 아직 텅 빈 채였다.
“……헤이븐 윈터는 어디 있지?”
“그게…….”
오늘 공작성에는 안 나오셨는데요. 가이우스가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 * *
“헤이븐이 오늘도 안 나왔다고?”
“그 녀석, 꾀병 아니야? 고놈 고게 아픈 모습은 영 상상이 안 가는데.”
미심쩍다는 말투와는 달리 게릭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담겨 있었다. 일리안이 공작성에 드나들지 않은 지 벌써 사흘이었다.
디노는 아픈 그녀를 대신해 모든 일을 도맡아 했지만 유난히 일솜씨가 좋은 일리안을 모두 대신할 수는 없었다. 거기다 슬슬 장난꾸러기 손녀 같은 그녀를 보고 싶어 하는 이들도 늘어나던 차였다.
제 턱을 긁적인 게릭이 슬며시 병문안을 가자고 말하려던 때였다. 디버튼 분재원의 정원사 중 1명인 드발이 게릭에게 속삭였다.
“아니, 그런데 저분은 요새 왜 이리도 자주 보이냐.”
“으응? 누구, 누구 말…….”
고개를 돌리던 게릭은 헙, 하는 소리와 함께 잠시 놓았던 가위질을 다시 시작했다.
게릭이 고개를 돌린 곳에는 그들의 고용주, 율리어스가 있었다. 시종일관 싸늘한 얼굴인 그가 웬일인지 정원을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아니, 웬일은 아닐지도 몰랐다. 일리안이 공작성에 나오지 않은 사흘간 그는 제법 자주 모습을 보였다.
물론, 불면을 치료해 주겠다는 계약도 끝난 터라 디노가 그들에게는 일리안이 아프다는 소식을 전하지 않은 탓이었다.
율리어스는 어딘지 심기 불편한 모습으로 정원을 서성였다.
그 모습을 보던 게릭을 비롯한 디버튼 분재원들의 정원사들은 더 불편한 모습으로 서로를 쿡쿡 찔러댔다.
“네가 가봐.”
“내가?! 이 사람아, 내가 왜 가? 갈 거면 우리 대장이 가야지!”
“나, 나……?”
율리어스가 며칠째 묘한 모습으로 정원을 서성이자 디버튼 분재원의 이들은 그가 할 말이 있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얼떨결에 사람들로부터 밀쳐진 원장이 율리어스의 앞으로 발을 헛디디며 굴러 나왔다. 자꾸만 뒤를 돌아보던 원장은 게릭이 눈썹을 밀어 올리자 겨우 앞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딱딱하기 짝이 없는 얼굴의 율리어스가 그를 직시하고 있었다. 원장은 침을 꿀꺽 삼키고서 말했다.
“무, 무슨……. 하, 하,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지…….”
“헤이븐 윈터.”
원장은 생각지도 못한 이름에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어 예? 하고 되물었다. 그러자 율리어스의 미간이 구겨지며 더욱 싸늘해졌다.
원장의 히익,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을 때였다. 결국 뒤에서 보다 못한 게릭이 한달음에 다가와 원장의 옆에 붙어 섰다.
“저, 공작 전하. 무슨 일이십니까? 하실… 말씀이라도…….”
그러나 평소라면 호탕하게 말을 붙였을 게릭도 그의 분위기에 결국 끝말을 미처 완성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헤이븐 윈터는 왜 나오지 않았지?”
“헤, 헤이븐이요?”
헤이븐 윈터라는 이름에 원장과 게릭의 시선이 잠깐 부딪쳤다. 게릭은 햇볕에 까맣게 탄 목을 긁적거리며 말했다.
“그게, 열이 펄펄 끓고 있답니다.”
“열?”
“예, 의원이 말하길 아마 과로라고…….”
게릭은 자신이 말하면서도 멋쩍었는지 음, 하는 소리를 덧붙였다. 열두 살짜리 어린아이가 과로에 걸렸다는 사실은 그로서도 입안이 쓸 수밖에 없었다.
“과로, 라.”
율리어스는 차갑게 식은 얼굴로 디버튼 분재원의 이들을 모두 훑어봤다. 시선을 받은 이들이 하나씩 움찔거리기 바빴다.
얼마 안 가 그는 몸을 돌려 정원을 빠져나갔다. 이유 모를 그의 행동에 분재원의 이들이 모두 의문 어린 눈빛을 교환했다.
단지, 율리어스의 손에는 흰 종이 하나가 콱 구겨져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