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죽음을 바칠 시간-14화 (14/123)

14. 왕자님을 재우는 마지막 방법

“좋은 아침입니다, 율리어스 님.”

집사인 펜서가 웃는 낯으로 문을 밀며 들어왔다. 익숙한 몸짓으로 가장 먼저 커튼을 걷으려 창문가에 다가갔던 그는 잠시 멈칫했다.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던 커튼이 오늘은 이미 걷어진 채 햇빛이 쏟아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고개를 돌려 제 도련님을 바라보자 율리어스는 오늘도 무뚝뚝한 얼굴로 신문을 펼쳐 들고 있었다. 침대에 앉아서 아무 말도 없이 신문을 보는 율리어스는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좋은 아침이군.”

“……예?”

펜서가 멍하니 입을 벌린 채 되물었다. 15년간 율리어스를 돌보며 그가 되물은 적은 손가락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드문 일이었다.

“알아듣지 못했나?”

다른 이도 아니고 펜서가 되묻자 율리어스는 인상을 와락 찌푸리며 물었다. 율리어스의 손안에서 아주 조금 구겨진 신문이 아래로 내려가며 그가 펜서를 힐끗 바라봤다.

펜서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서 작게 벌리고 있던 입가를 움찔거렸다. 그가 율리어스를 돌보던 15년간 처음으로 받아본 아침 인사였다.

펜서가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자 율리어스는 짧게 혀를 차며 신문을 들어 올렸다. 그러면서도 율리어스가 나지막이 펜서에게 말했다.

“티슈는 테이블 위에.”

“도, 도, 도련님……!”

이미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 펜서가 코를 크게 훌쩍였다.

율리어스를 공작 전하라고 부르지 않고 도련님이라 부르는 것은 아주 어릴 때를 제외하고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가 너무도 어린 나이부터 공작이라는 직위를 물려받은 탓이었다.

율리어스가 제 눈물마저 챙겨준 것을 안 펜서는 아침 시중을 들기에 이미 그른 상태였다. 그를 한 번 바라본 율리어스는 그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조용히 방을 나서자 침실에 홀로 남은 펜서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중얼거렸다.

“헤이븐…….”

제 도련님이 하루아침에 이리도 바뀐 것에는 그 아이 말고 다른 이유가 있을 리가 없었다.

아침에 율리어스의 침실에서 나오는 헤이븐을 봤다는 이야기를 이미 시종들로부터 들은 뒤였다. 펜서는 그 아이를 떠올린 순간 결심했다.

헤이븐 윈터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제 도련님의 곁에 붙여두어야겠다고.

* * *

펜서, 가이우스, 그리고 사라가 모인 것은 오후 점심시간이 되어서였다. 업무가 끝나기 전까진 모이는 일이 없던 그들이 비상 대책 회의를 세운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공작 전하께서 미치셨다.

오늘 하루 공작성에서 돌고 있는 소문이었다. 펜서를 비롯한 여러 명의 집사와 시종들의 입을 단속시켰지만 일파만파 퍼져 나가는 소문을 잡을 순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율리어스가 하루 사이에 약이라도 먹은 것처럼 다정해졌다. 아니, 사실 다른 이었더라면 무뚝뚝하다는 이야길 들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게 다른 누구도 아닌 율리어스라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산더미처럼 쌓인 보고서를 들고 온 가이우스에게 ‘고생했군.’이라고 하자 방 안에 있던 이들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굳었다.

그 모습을 보고 놀라 실수로 찻잔을 떨어뜨린 시녀에게 ‘치워.’라는 말을 하자 분위기는 걷잡을 수 없이 딱딱해져 갔다. 이후 방을 나온 가이우스의 의견에 따르면 그것은 ‘위험할 테니 어서 치우도록.’이라는 뜻이었다.

심각한 표정의 가이우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쩌면 좋습니까, 펜서 집사장님.”

늘 미소를 짓는 사라도 드물게 걱정 어린 얼굴로 말을 거들었다.

“어쩌면 좋을까요, 펜서.”

둘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펜서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행복해서 죽을지도 모르겠다네.”

세 명이 동시에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다들 심각한 얼굴인 것과는 다르게 한숨에는 행복이 묻어 있었다.

현재 공작성에서 가장 오래 일을 해온 이들인 셋은 자신들의 도련님께서 바뀐 것이 행복하면서도, 너무 갑작스러우니 두려워하는 것이었다.

율리어스가 그들에게 다정하게 대해주는 것은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그가 홀로 어깨에 지고 있는 것을 내려두고 그들에게 기대길 바랄 뿐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는 아직 열다섯 살 소년이니까.

모두 눈을 내리깐 채 지키고 있던 침묵을 깬 것은 펜서였다. 그중 가장 연장자인 펜서가 고개를 들며 결심 어린 눈으로 말했다.

“헤이븐을 정식으로 고용해야겠네.”

이 엄청난 일의 원인이 헤이븐임을 셋 모두 알고 있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가이우스가 제법 불편한 얼굴로 이의를 제기했다.

“고용이 아니라……. 후견인이 되어주는 건 어떻겠습니까.”

“가이우스, 그거 정말 좋은 생각인걸요. 고용보단 후견인 쪽이…….”

오래 볼 수 있잖아요. 사라의 말은 덧붙여지지 못했다. 셋이 모여 있던 주방의 문이 쾅 열리며 누군가 들어온 탓이었다.

이 모든 일의 근원인 헤이븐 윈터였다.

“사라 주방장님, 펜서 집사장님, 그리고… 가이우스 씨. 웬일로 이 시간에 모두 모여 계세요?”

일리안이 활짝 웃으며 다가오자 셋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상대적으로 키가 작은 그녀를 보려면 고개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실례하겠습니다.”

“어, 어어?”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가이우스였다. 성큼성큼 다가간 가이우스가 일리안을 번쩍 들어 올렸다.

가이우스가 일리안을 들어 올리자 펜서와 사라가 다가왔다. 2명은 각각 손을 뻗어 일리안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헤이븐, 정말 대단한 일을 해냈구나.”

“예, 예……? 제가 뭘 했는데요?”

“율리어스 공작 전하를 바꾸었잖니!”

“아직 불면증도 못 고쳐 드렸는데요?”

일리안이 영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리안을 제외한 3명은 그런 그녀의 반응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바라봤다.

“지금 해낸 것만 해도 아주 대단한 일인 걸, 헤이븐.”

“그래, 그 침착한 가이우스가 저렇게 흥분한 걸 봐라. 네가 얼마나 대단한 일을 했는지 알겠지?”

펜서의 말에 일리안이 고개를 위로 올리자 가이우스가 말없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정말 펜서의 말대로, 평소의 가이우스와는 달리 조금 흥분한 것 같기도 했다.

“전하께서 처음으로 가이우스에게 고생했다는 말을 해줬다는구나.”

“……고작 그거요?”

율리어스, 이 녀석은 대체 제 주변 사람들에게 어떻게 대한 건지. 일리안은 속으로 율리어스를 향해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나 그런 일리안의 기색을 눈치채지 못한 펜서와 사라가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래! 거기다 내게는 아침부터 좋은 아침이라고 인사도 하셨단다!”

“어머, 정말요? 제겐 샐러드가 맛있군, 이라고 하신걸요?”

묘하게 자신에게 해준 칭찬이 더 대단하다고 자랑을 하는 눈치였다. 일리안은 그런 그들의 말을 들으며 오늘 밤도 율리어스를 다시 교육시켜야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래서 말인데, 헤이븐. 그 계약…….”

“아, 펜서 집사장님! 생각해 보니까 프레딕 정원사님이 맡기신 일이 있었네요. 나중에 다시 뵙겠습니다!”

일리안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자꾸만 그들이 자신을 치켜세우자 멋쩍은 얼굴로 가이우스의 품에서 뛰어내렸다.

재빨리 주방을 벗어나는 일리안의 뒤로 3명이 동시에 ‘헤이븐!’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일리안은 애써 그 부름을 모른 척하며 도망쳤다.

* * *

“그래서, 오늘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르고 다니신 겁니까, 율리어스 님?”

율리어스의 침실 발코니에 선 일리안이 건들거리는 태도로 물었다. 바닥을 탁탁 쳐대는 짧은 다리는 건방지기보다는 귀여운 인상을 준다는 사실이 애석할 뿐이었다.

“무슨 짓이라.”

창가에 마련된 티 테이블에 앉아 있던 율리어스가 따뜻한 찻물이 담겨 있는 찻잔을 들어 올렸다. 일리안이 며칠 내내 가져다주어도 거들떠보지도 않던 그 ‘차’였다.

차의 향을 맡던 율리어스는 힐끗 눈동자만 돌려 일리안을 바라봤다. 발코니의 난간에 기댄 일리안이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율리어스는 왠지 모르게 그 상황이 우스웠다. 며칠 내내 무슨 일을 당해도 눈물 한 번 흘리지 않고, 뻔뻔하기 짝이 없던 아이의 찌푸려진 얼굴은 그로선 드물게 재밌는 일이었다.

“오늘 하루 동안 집사님들, 시녀장님, 시녀, 시종 할 것 없이 날 무슨 눈으로 봤는지 아세요? 다 이렇게 반짝반짝한 눈으로, 헤이븐 님, 뭐 필요한 건 없으세요? 하고 물었다고요. 그것도 하루 내내!”

율리어스는 자신도 모르게 픽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찻잔으로 가렸다. 자신이 한 날갯짓 하나가 일리안에게는 태풍이 되어 돌아간 것이었다.

사람들과 두루 친해지긴 해도 일정 선 이상 친해지거나 관심을 받는 것을 즐기지 않는 일리안에겐 그다지 반가운 일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일리안이 그의 불면을 고치리라는 확신이 모두에게 생긴 듯했다.

그가 아무리 괴롭혀도 꿈쩍도 하지 않을 것 같던 일리안이 제 머리를 쥐어뜯으며 부담스러워하자 율리어스는 웃음을 숨기기 위해 찻잔을 들고 있어야만 했다.

“웃는 거 다 보입니다, 율리어스 님.”

“…….”

율리어스가 뻔뻔하게 웃음기를 지우며 찻잔을 내려뒀다. 예의 차가운 얼굴이 된 그는 일리안에게 물었다.

“그래서, 오늘은 뭘 할 생각이지?”

일리안도 그 말에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순순히 발코니에서 걸어 나왔다. 물론, 오늘도 그녀는 율리어스의 방에 무단 침입한 것이었다.

“오늘부터는 정말 잠이 들어야죠.”

“방법이라도 있나 보군.”

“자, 슬슬 침대로 들어가 누웁시다.”

자리에 앉아 있던 율리어스는 제 등을 미는 작은 손바닥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직도 그녀의 말을 순순히 듣는 것에 대한 불만이 남아 있는 것 같았지만 어제와 달리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조용히 율리어스가 침대에 눕자 일리안이 따라와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의 이불이 너무도 큰 탓에 두 손으로 끌어당겨야만 했다.

“……그리고?”

“이제 뭐 없는데요.”

뭐?, 율리어스가 다소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어깨를 으쓱 들어 올린 일리안이 그의 침대로부터 멀어지자 그가 눈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내가 이런다고 잘 수 있었다면…….”

그러나 그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그녀가 향한 곳이 다른 곳도 아니고 침대의 바로 옆, 커다란 창인 탓이었다.

침대와 떨어진 곳에 있는 발코니와는 달리 침대의 머리 부근에 있는 큰 창은 사람 하나가 앉을 수 있는 턱이 있었다. 일리안은 그 위로 올라가 무릎 하나를 굽힌 채 자리했다.

율리어스는 입을 다물고 몹시도 딱딱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곳은 일리안 하인리히가 율리어스의 곁을 지켜주던 지난 1년간, 매일 밤마다 자리하던 곳이었다. 율리어스가 그곳에 있으라고 한 것도 아니건만 그녀는 밤마다 그곳에 앉아 그를 지켰다.

일리안 하인리히가 앉을 때는 성인 하나가 앉은 탓에 제법 좁아 보였던 그 자리가 어려진 일리안이 앉자 두 다리를 모두 올릴 수 있을 정도로 넓었다.

“자는 거 보고 있을 테니까, 눈 감으세요.”

“뭐?”

“무서워서 그러는 걸 수도 있잖습니까. 내가 보고 있을 테니까 그만 자라고.”

일리안은 더 이상 말하면 율리어스가 잠을 못 자리라 생각했는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어린아이의 둥근 턱선을 지켜보던 율리어스는 결국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몹시도, 짜증이 났다.

어제부터 그러했다. 일리안 하인리히와 몹시도 비슷하게 웃고, 그녀가 늘 앉아 있던 자리에 자연스럽게 앉는다.

어쩌면 괴로워하는 자신을 비웃기 위해 누군가가 닮은 이를 보낸 건 아닐까. 율리어스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내 속으로 고개를 저어야만 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그 일리안 하인리히가 자신을 걱정해 주다니. 현실에선 죽어도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다른 생각하는 거 눈에 다 보이는데요, 율리어스 님. 자는 척이라도 할 거면 그 구겨진 미간부터 풀어보던가.”

눈을 감고 있는 율리어스의 귓가로 어린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끝에 묘하게 웃음기가 담겨 있는 것도 같았다.

탁. 창문 아래로 두 발이 내려서는 소리가 들려왔다. 타박, 타박하는 작은 발걸음 소리 또한 이어서 들렸다.

이마에 따뜻한 촉감이 느껴진 것은 그 직후였다. 말랑하지만 이제 막 굳은살이 생긴 것 같은 어린아이의 손가락이 율리어스의 미간을 매만졌다.

찌푸려진 미간이 둥글게 만져지자 살며시 풀려갔다. 그럼에도 손은 떨어지지 않고 율리어스의 이마를 느리게 매만졌다.

그 감각이 멀어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나 참.”

방 안으로 누군가의 느린 숨소리만 들려오자 일리안은 픽 웃었다. 이마를 만지자마자 잠들어 버린 율리어스를 보고 누가 불면증을 겪고 있는 사람이라 생각할 수 있을까.

이번 의뢰는 수당에 비해 너무 쉽잖아.

그러나 오래도록 율리어스를 봐온 일리안은 알고 있었다. 열다섯 살 소년의 얼굴에 붙어 있는 피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그는 누구에게도 피곤하다는 기색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런 율리어스가 시종들에게도 걱정을 살 정도라면 대단히 위험한 상태라는 뜻이었다.

천천히 이마에서 손을 떼어낸 일리안은 율리어스의 머리맡에 앉아 가만히 그를 바라봤다.

이번 고용은… 생각보다도 더 길어질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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