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죽음을 바칠 시간-13화 (13/123)
  • 13. 왕자를 재우는 두 번째 방법

    “내가 어째서 제대로 된 길을 두고 그쪽으로 가야 하지?”

    아직까지 잡혀 있는 옷소매가 거슬리긴 했지만 아이의 손을 떨쳐내진 않았다. 대신 싸늘한 어조로 물었다. 그 모습은 기를 죽이려는 것 같기도 했다.

    “그야, 잠을 자야 하니까요. 격한 운동을 하면 잠이 잘 오는데. 모르셨죠?”

    당연히 몰랐다. 율리어스의 육체는 일반인만큼 움직였다고 땀을 흘리거나 힘겨워하지 않았으니까. 몇 시간을 쉬지 않고 달렸을 때 숨이 거칠어지는 정도였다.

    “나는 운동을 하겠다고 한 적이…….”

    “아아, 이쪽으로 나오기나 하세요. 어, 머리 부딪쳐요. 고개 숙이고. 그렇지.”

    창문은 커다랬지만 율리어스가 고개를 숙이지 않고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넓진 못했다. 고개를 숙여 창문틀을 잡고 넘어가자 좁은 창문턱 위로 율리어스와 일리안이 나란히 섰다.

    머리 위로는 커다란 달빛이, 발아래로는 싸늘한 바람이 불었다.

    율리어스로서는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15년을 공작성에서 지냈음에도 창문턱에 올라서서 바깥을 구경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물론, 그건 당연했다. 만약 율리어스가 5층 창문턱 위에 올라서 있는 모습을 펜서가 보기라도 했다면 당장 뒷목을 잡고 넘어갔을 게 분명했다.

    율리어스는 낯선 풍경에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앞을 바라봤다. 자유롭다고 느낀 적은 처음이었다.

    “자, 먼저 이 옆에 있는 독수리 모양 장식 보이죠. 저걸 잡고, 다음은 그 아래에 튀어나온 벽돌로 옮겨가는 겁니다. 이렇게!”

    왼쪽으로 손을 뻗은 일리안이 바로 옆에 나 있는 독수리 장식을 잡고 달랑거리며 서 있었다. 아래에 튀어나온 벽돌 1개를 밟고 있어 생각보다는 안정적이었다.

    “독수리 장식 잡아요. 어? 지금 무서워서 머뭇거리는 건가?”

    “…….”

    도발하듯 말했지만 율리어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바라봤다. 일리안은 정말 그가 무서워하는 것인가 싶어 손을 뻗었다. 그의 무게를 온전히 버티진 못하겠지만 손을 잡아줄 순 있었다.

    그때였다. 창문턱에 가만히 서 있던 율리어스가 손을 휘저었다.

    창문턱에서부터 불투명한 계단이 원형의 모양으로 아래로 이어졌다. 그 계단의 끝은 정확히 아래층 침실의 발코니였다.

    “야, 너 인……. 이런 좋은 방법이 있으면 어서 알려주셔야죠.”

    “그럼, 내가 머저리처럼 벽돌을 잡고 내려갈 줄 알았나.”

    “아, 예. 그러시겠죠.”

    벽돌을 잡고 있던 일리안이 손을 탁 놓자 계단 아래로 가뿐하게 내려섰다. 민망할 정도로 단단한 계단이었다.

    율리어스는 공작성 내부의 계단을 내려갈 때처럼 기품 있는 발걸음으로 발을 뻗었다. 불투명한 계단은 멀리서 보면 잘 보이지 않아 공중을 걸어가는 것 같기도 했다.

    길은 일리안이 앞장섰다. 고작 계단 두어 개를 앞장선 것뿐이지만 아무튼 그랬다. 침실 발코니에 도착한 일리안이 설치된 난간을 밟고 아래로 뛰어내렸다.

    뒤이어 도착한 율리어스도 난간에서 탁 뛰어내렸다. 일리안과 분명히 비슷한 자세임에도 어쩐지 그의 것은 고급스러워 보였다.

    “이제 침대로 가면 되는 건가?”

    수면을 위해 침실에 도착했으니 당연한 질문이었다. 그도 대답을 들으려고 한 것은 아니었는지 곧장 발코니를 열고 침대로 향하려 했다.

    또다시 그를 붙잡은 것은 일리안이었다. 이번에도 손을 잡지 않고 옷소매를 붙잡았다.

    만약 손을 붙잡았다면 떨쳐내기라도 할 수 있을 터인데, 옷소매만 붙잡으니 쳐내기도 뭐했다. 율리어스는 설마 그것까지 예상하고 소매를 잡는 것인가 싶어 그녀를 내려다봤다.

    “침대로 가면 잘 수 있어요?”

    “…….”

    “못 자면서. 침대는 됐고, 발코니에 아까 만들었던 층계 하나만 여기 만들어줘요.”

    어딘가 불만스러운 눈으로 일리안을 바라보긴 했지만 율리어스는 말없이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일리안이 가리켰던 난간에 불투명한 선반 하나가 만들어졌다.

    일리안은 기다렸다는 듯 그 선반 위로 올라가 앉았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옆자리를 탁탁 턴 뒤 그곳을 두드렸다.

    “자, 여기 앉아보세요.”

    “내가 왜.”

    “어서.”

    그가 생각해도 이상할 정도로 남의 말을 순순히 따라주고 있었다. 커다랗게 떠오른 달이 마법을 부리는 걸지도 몰랐다.

    일리안의 옆자리에 앉자 한 뼘 정도의 공간을 두고 둘 모두가 앉을 수 있었다.

    자리에 앉은 율리어스는 만약 그녀가 시답잖은 충고나 잔소리를 하려 들면 당장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다. 고요했던 것도 잠시, 일리안이 말문을 열었다.

    “달 더럽게 밝네.”

    ……뭐?

    율리어스는 자신도 모르게 되물어볼 뻔했다. 젖살이 오동통하게 붙은 아이의 입에서 나올 법한 말은 전혀 아니었다.

    “날이 더웠어요. 더워 죽겠는데 같이 일하는 용, 아니. 사람들은 짜증만 부리고. 하루 종일 햇볕 아래에서 서 있어야 하니 짜증이 날 만도 했죠. 거기다 물 한 모금도 못 마셔서 쩍쩍 마른 입안으로 모래가 들어오는 거예요.”

    “…….”

    “몇 번을 퉤퉤 뱉어도 입속에 굴러다니는 모래 서너 개가 혓바닥을 괴롭혔죠. 그렇게 몇 시간을 태양 아래에서 버텼는데, 허탕이었어요. 거의 반나절은 그렇게 서 있었는데 말이에요. 같이 있던 사람들이 죄다 험한 욕을 내뱉고 돌아갔죠.”

    일리안의 눈은 하늘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녀는 율리어스에게 이야기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러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하늘을 올려다봤는데, 이런 망할. 달이 더럽게 밝은 겁니다.”

    “……어째서 ‘망할’이지.”

    “당연히 ‘망할’이죠. 본인은 하루 종일 모래밭에서 구르다 왔는데 하늘의 달은 저렇게 고고하다니. 마음 같아선 작살로 푹 쑤셔다가 아래로 떨어지게 하고 싶었다니까요.”

    순한 인상을 와락 찡그린 일리안은 진심으로 달이 마음에 들지 않은 듯했다. 작살을 쥔 것처럼 주먹을 쥐었던 일리안이 투명한 작살을 쑤시듯 달을 향해 쳐들었다.

    그러다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는 율리어스와 눈을 마주했다. 그리고 활짝 웃었다.

    “그러니까 마음에 안 들면 달에게 욕이라도 하라고요. 망할, 내 기분은 이따윈데 저 달은 왜 저렇게 밝아? 하고.”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헤이븐 윈터의 얼굴 위로 일리안 하인리히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너무도 닮아 순간 일리안이 그에게 돌아온 것만 같았다.

    “그건 그렇고, 우리 반말합시다.”

    “내가 어째서.”

    “그놈의 어째서, 내가 왜는 그만하고. 내가 잠자는 것 도와주기로 했잖아요. 그거 대가로 반말하게 해주면 안 되나?”

    “불면을 해결하면 골드를 지급받기로 계약서를 작성했을 텐데.”

    뜨끔했다. 조금도 아니고 아주 많은 골드였다.

    “……계약서를 읽고도 찻잔을 거들떠도 안 보셨다?”

    “마셔야 할 이유가 없으니까.”

    잠깐 삐죽 입을 내밀었던 일리안은 빠르게 반말을 포기했다. 일리안 하인리히였던 시절에는 그에게 존댓말을 잘 하지 않아 어색해서 해본 부탁일 뿐이었다.

    “불면의 근원이 뭔데요.”

    “네가 알 것 없다.”

    “협조하려는 태도가 아주 바람직한데요.”

    그것이 비꼼임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율리어스는 그것에 대해선 더 이상 조금도 말하고 싶지 않았는지 입을 꾹 다물었다.

    “가이우스는 언제 만났어요?”

    “……5년 전에.”

    “어쩌다가?”

    “직접 고용했다.”

    오…, 하는 짧은 감탄사가 일리안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율리어스와 가이우스 사이에 일어난 일에 대해선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그가 일을 탁월하게 잘했어요?”

    “아니. 5년 전의 그는 스무 살 애송이였어.”

    당신은 열다섯 살인데요. 라고 삐죽 대답하고 싶었지만 이내 속으로 삼켰다. 그러자 율리어스가 웬일로 먼저 입을 열었다.

    “골목에서 나이 든 노인에게 두들겨 맞고 있더군. 후에 들어보니 아버지라 했던가. 길을 지나가기에 거슬려서 놈을 치워 버렸지.”

    “……가이우스 씨 아버지를요?”

    “그래. 청소를 마치고 길을 지나가려는데 그 녀석이 갑작스레 자신을 데려가 달라고 사정해서 고용했을 뿐이다.”

    거기까지 들으니 더 듣지 않아도 상황이 훤했다. 가이우스의 가문인 ‘렌’ 가문은 예전부터 그 아비의 손속이 좋지 않다는 소문이 돌았고, 그런 아버지를 치워준 율리어스가 그에게는 신처럼 보였을 테지.

    불쌍한 가이우스. 이렇게 지독한 상사에게 코를 꿰다니.

    “가이우스 씨는 운이 좋았네요. 이렇게 좋은 상사도 만나고.”

    그 말을 뱉자마자 율리어스가 고개를 휙 돌려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봤다. 일리안은 제 뻔한 거짓말이 들통나자 볼을 긁적였다.

    “……어쨌든 공작 전하한테는 다행이잖아요. 그만한 충신이 어디 있다고.”

    “많다.”

    “집무실에서부터 걸렸는데요, 좀 너무한 것 아닌가?”

    그가 어디 말해보라는 듯 그녀를 바라봤다. 일리안은 참아뒀던 말을 그에게 내뱉었다.

    “펜서 집사장님은 15년, 사라 주방장님은 10년, 가이우스 씨는 5년. 이렇게 긴 세월을 곁에 있었는데 너무 매정한 것 아니에요? 공작 전하는 주변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요. 잘난 척 그만하고.”

    마지막의 ‘잘난 척 그만하고’에 이르러서는 급격히 자신감을 잃어서 거의 속삭이듯 말했다. 율리어스는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일리안을 바라봤다.

    “어떻게 알았지?”

    “예?”

    “그들이 얼마나 일했는지.”

    세 명 모두 공작성에서 일한 지 오래된 이들이라 자신이 일한 햇수에 대해선 입이 무거웠다. 오래전, 공작성에서 일어난 ‘어떤 일’과 연관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실수를 직감한 일리안이 눈을 굴렸다.

    “……일리안한테 들었어요.”

    “일리안 하인리히에게?”

    아니, 이 자식이. 그래도 자기보다 열다섯 살 연상의 이름을 이렇게 막 불러?

    물론 예전에도 꼬박꼬박 하는 존댓말과는 달리 ‘일리안, 일리안.’ 하고 이름을 불러대긴 했다. 그러나 풀 네임을 열다섯 살 꼬맹이에게 듣자 얼굴이 구겨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녀가 그러던가?”

    “뭘요?”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눈을 끔뻑거리던 일리안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율리어스는 그 뒤로 허공을 바라보며 오래도록 대답하지 않았다.

    그 공기가 어쩐지 다른 때와 달라 보여 일리안도 구태여 대화를 이어가려 하진 않았다. 그러다 한마디가 침묵을 깨트렸다.

    “알았다.”

    그 대답이 다른 때와 달리 너무도 온순해 일리안은 잠시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허구한 날 ‘내가 어째서 그래야 하지?’ 따위의 반문을 하던 율리어스가 한 대답이라기엔 너무도 착했다.

    “……뭘 알아요? 그들이 일한 지 오래되었다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겠다고.”

    일리안도 그 대답이 믿기지가 않아 한 질문이었는데, 율리어스도 그녀의 기색을 눈치챘는지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그러면서도 순순히 제 입으로 귀를 기울여 주겠다는 말을 다시 해주었다.

    “아니, 진짜요?”

    “말을 3번은 들어야 알아듣는 머저리였나?”

    까칠하다 못해 말로 사람을 찔러 죽일 것 같은 말투가 율리어스임이 확실했다. 일리안은 작게 입을 벌리고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그거 진짜 좋은 선택입니다. 예? 약속했어요?”

    “…….”

    불퉁한 얼굴로 약속까지는 해주지 않는 것도 율리어스다웠다. 그래도 일리안은 이 비약적인 발전에 감격스러운 얼굴을 했다.

    그 뒤로도 둘은 발코니에 앉아 달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눴다. 율리어스가 처음에 생각했던 것처럼 시답잖은 이야기였다.

    대개는 일리안이 질문을 하고, 율리어스가 짧게 대답하는 형식이었다. 말솜씨가 좋은 그녀가 대화들을 꿰매서 전체적인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느새 하늘을 꽉 채웠던 달은 사라진 지 오래고 저 멀리서 해가 보이고 있었다.

    어스름한 하늘을 박차고 올라오는 해는 그 어느 때보다 눈부셨다.

    해를 보던 일리안이 엉덩이를 툭툭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발코니로 훌쩍 뛰어내리곤 아직 앉아 있는 율리어스에게 안 내려오고 뭐 하냐는 눈빛을 보냈다.

    “불면을 해결해 준다고 했지, 오늘 자라곤 안 했어요. 젠장, 나도 밤새웠네. 일하러 가기 전에 1시간 정도는 자요. 식사를 포기하면 잘 수 있어.”

    쩍 입을 벌려 하품한 일리안이 대충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쿵, 침실의 문이 닫히자 홀로 남은 율리어스가 눈을 깜빡였다.

    어쩐지, 오늘 1시간은 깊게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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