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죽음을 바칠 시간-12화 (12/123)

12. 왕자를 재우는 첫 번째 방법

최근 들어 율리어스의 불면증이 심각해지고 있었다. 집무실에 앉아 잠시 펜을 내려둔 그가 이마를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지가 벌써 두 달을 넘어섰다.

일리안 하인리히가 떠날 때부터 불면을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보호도 필요 없는 자신이 나이를 앞세워 주야로 용병 경호 인력을 고용한 것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녀는 몰랐겠지만, 고용을 한 뒤부터 차근히 함께 있는 시간을 늘려갔다. 일리안 대신 들어오는 이에게 압박을 주어 도망가게 하는 것쯤은 어렵지 않았다.

처음에는 6시간, 8시간, 12시간……. 그러나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갈수록 율리어스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깊은 잠이 들지 못하는 게 당연하던 그가 어느 순간부터 밤을 잊어버리게 되었으니까.

물론 매일 깊게 자는 것은 아니었다. 율리어스가 잘 자는지 확인하기 위해 다가오는 일리안의 기척을 느낄 때면 뜬눈으로 밤을 새울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눈에 띄게 안정을 찾아갔다. 일리안 하인리히가 곁에 있을 때와 없을 때가 확연히 달랐다.

“제길…….”

불면의 이유가 그뿐만은 아니었다. 오늘 자신의 하루를 떠올려 보던 율리어스가 이를 악물었다.

가이우스는 매일 2시간마다 정기적으로 그녀에 대한 보고를 올렸다. 그녀가 있던 1년 동안은 사라졌던 보고였다.

그녀가 전쟁에 나간 뒤부터 가이우스의 보고를 들을 때마다 그녀가 죽었다는 이야길 들을까 봐 숨을 쉬기가 벅찼다. 전쟁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간다는 소식을 들으면 30분에 한 번씩 소식을 들었다.

자신이 어째서 일리안 하인리히에게 그다지도 집착하는지는 그도 알지 못했다. 단지 확실한 것은,

조금의 소식이라도 듣지 못하면 당장 자신이 죽어버릴 것 같았다.

“공작 전하, 오늘도 밤새 집무실에 계실 생각이십니까?”

“먼저 들어가도록.”

“전하……. 잠이 오지 않더라도 침실로 가셔야 합니다. 누워 있기라도 해주십시오.”

평소라면 그가 하는 일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을 펜서가 간절한 눈으로 율리어스를 바라봤다. 그러나 율리어스는 눈을 내리깔고 앞에 놓인 종이를 바라볼 뿐이었다.

“펜서. 나는 네게 그런 권한을 내린 적이 없을 텐데.”

태어났을 때부터 자신을 지켜본 이에게 하는 말이라기엔 너무도 무심했다. 그러나 펜서이기에 그쯤에서 끝낸 것이었다. 다른 이였다면 아예 공작성에서 나가게 했으리라.

펜서는 안타까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 결국 밖으로 나갔다. 일에 몰두하는 율리어스는 전혀 그 나이 또래답지 않았다.

조용해진 집무실 안에서 펜촉이 움직이는 소리만 들려올 때였다. 율리어스는 문득 이 시간마다 오는 이가 곧 도착하리란 것을 떠올렸다.

꺼지라는 말과 함께 유리잔을 깨뜨렸을 땐 울면서 뛰쳐나가기라도 할 줄 알았다. 그 나이대의 여자아이들은 대개 잘 울곤 했으니까.

울지 않고 자리를 치우고 나갔을 때에는, 속으로 잠시 놀라기도 했다.

그 이후로 그에게 가까이 오면 거부당할 것을 알았는지 아이는 문 바로 앞의 바닥에 트레이를 내려두고 사라졌다. 계속해서 무시를 당하면 얼마 가지 못해 포기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갔다. 펜서나 사라가 시킨 일일 테니 아침마다 덩그러니 놓인 식은 차가 있다는 걸 모르지도 않을 텐데, 아이는 끈질기게 찻잔을 내려뒀다.

“…….”

율리어스가 가만히 두터운 집무실 문 두 짝을 응시했다. 아마 오늘 저녁도 트레이를 달랑거리며 들고 올 것이었다.

율리어스의 손이 공중에서 한 차례 흔들렸다. 그러자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문 잠금장치가 걸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는 오늘로써 어깨를 추욱 늘어뜨리고 돌아가야 할 터였다.

라고, 생각했었다.

* * *

율리어스가 정신을 차린 것은 그로부터 서너 시간이 흘렀을 때였다.

“그럼, 율리어스 님. 내일 뵙겠습니다.”

오늘도 집무실에 앉아서 떠날 생각을 하지 않는 율리어스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가이우스가 고개를 숙였다.

벌써 밖이 까맣게 물들어 달이 떠오른 뒤였다. 유난히 커다란 보름달이 하늘을 떠다니고 있었다.

침실로 가셔야 한다고, 한 마디라도 올리려 했던 가이우스는 이내 입을 꾹 다물고 뒤로 돌았다. 율리어스가 어제 이후로 수면에 대한 이야길 꺼내지 말라는 명령을 내린 탓이었다.

“가이우스.”

“예, 율리어스 님.”

“……아니다. 이만 돌아가도록.”

평소와 다른 그의 태도에 잠시 눈을 끔뻑거리던 가이우스는 이내 자리를 떠났다. 쿵, 집무실의 문이 잠시 열렸다 다시 닫혔다.

율리어스는 자신도 모르게 ‘오늘은 차가 없는 건가?’라고 물으려던 생각을 떠올리고 미간을 좁혔다. 물론 차의 여부 따위가 궁금한 게 아니었다.

분재원의 웬 꼬마 아이가 몇 주 전부터 공작성을 빨빨거리며 돌아다니고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그 또한 한번 얽힌 적이 있는 아이였다.

일리안의 열쇠를 맡고 있던 아이. 그녀가 대체 왜 그 아이에게 열쇠를 맡겼는지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정원 일을 하게 되었다며 들어온 그 아이는, 묘하게 일리안과 비슷한 구석이 많았다.

한 달이 채 되기 전에 고용인들 모두와 친해진 게 그랬다. 그러면서도 가끔 사람을 귀찮아하는 기색을 보이거나, 일정 선 이상 친해지지 않는 것도 비슷했다.

5층인 집무실에 있는 커다란 창문은 헤이븐 윈터가 자주 일하는 정원이 잘 보였다. 종종 자리에서 일어설 때면 아이가 웃는 낯으로 여기저길 쏘다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곤 했다.

가이우스가 닫고 나간 집무실의 커다란 문이 고요하자 율리어스는 미묘한 낯으로 문을 바라봤다.

드디어 포기했군.

고용인들이 대부분 자는 시간이 올 때까지 문이 고요한 걸 보아하니 결국 포기한 것 같았다. 드디어 귀찮은 걸 떨쳐내 통쾌한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불쾌했다.

근성 없는 놈.

아이에 대한 평가를 한 줄로 마친 율리어스가 이내 펜을 다시 들었다. 매일 거의 잠을 자지 않고 일을 해대니 남는 일도 없었지만 했던 일을 다시 확인해서라도 일을 만들었다.

그렇게라도 해야 1시간이나마 잘 수 있었다. 일리안 하인리히가 사라진 뒤에 생긴 습관이었다.

모두가 잠이 들어 조용해졌을 때였다. 쿵쿵. 창문에서 낯선 소음이 들려왔다.

오랜만에 찾아온 암살자인가.

그다지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공작성에 홀로 남은 이후로 잠잠해지긴 했지만 리하르트 공작가에는 무수히 많은 적들이 있었다. 이대로 손만 조금 흔들어도 암살자는 죽겠지만.

……그런데, 암살자가 보통 창문을 노크하고 들어오나?

그 생각이 들자마자 고개를 번쩍 돌렸다. 달빛이 들어오는 커다란 창 너머로 조그만 손 하나가 보였다.

홀린 듯 자리에서 일어난 율리어스가 창가로 다가갔다. 양쪽으로 열리는 문 하나를 열고 아래를 내려다보자,

“차 마실 시간인데요, 율리어스 님.”

아이가 히죽 웃으며 창가에 매달려 있었다.

율리어스는 어이가 없어져 손을 뻗을 생각도 하지 않고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아이의 발이 위험하게 허공을 휘젓고 있었다.

층이 낮은 것도 아니고, 5층에 있는 집무실이었다. 대체 어떻게 하면 아이의 몸으로 5층까지 올 수 있는 것인지 심각한 의문에 빠졌다.

“물론 차를 안 들고 오기는 했는데, 일단 저 좀 잡아주시죠. 여기서 떨어지면 저라도 죽습니다.”

“그걸 알고 있는 녀석이 5층 창문에 매달리나?”

“문 걸어 잠그신 게 누구신데요. 아, 그것보다 팔 좀 잡아줘요. 곧 힘 풀려서 떨어집니다.”

아이의 말대로 웃는 얼굴과 달리 턱을 붙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율리어스는 순순히 그 팔을 붙잡고 위로 잡아당겼다.

가벼운 아이의 몸답게 휙 끌어올려 졌다. 바깥으로 튀어나온 창문턱에 안착한 아이가 벽을 기어오르느라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냈다.

“5층을 기어 올라온 건가?”

“설마요. 아무리 저라도 그런 미친 짓은 안 하죠. 4층 침실에서 타고 올라온 건데요.”

“……거긴 내 침실일 텐데.”

“그럼 뭐해요, 주인도 안 오는데.”

일리안이 심드렁한 얼굴로 대꾸했다. 아무리 고작 1층을 올라온 것이라 해도, 높이가 있으니 두려울 법도 한데 아이는 전혀 무서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아무튼, 공작성 벽에 장식이 많아서 무사히 올라왔네요. 그런데 이거 좀 위험한 것 아닌가? 내가 아니라 밤손님들한테도 유용할 것 같은데.”

오히려 제 턱을 쥐고 공작성의 보안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는 아이의 얼굴은 진지해 보였다. 내내 무미건조한 얼굴이던 일리어스가 입을 벌려 짧게 헛웃음을 내뱉었다.

창문턱에 앉은 아이와 그 앞에 선 자신이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다는 것 자체가 놀라웠다.

“뭐 하는 놈이냐.”

“예?”

“정체가 뭐냐고 물었다.”

그 질문에 아이가 잠시 제 볼을 긁었다. 퍽 곤란하다는 눈치였다.

이런 사소한 버릇들이 일리안과 묘하게 겹치는 구석이 많았다. 율리어스는 그래서 이 아이가 거슬렸다.

“가장인데요. 곰 같은 기사와 토끼 같은 시녀를 둔.”

“……뭐?”

“차 마셔주는 게 그렇게 어려워요?”

아니, 뭐, 내 의뢰는 차를 마시게 하는 게 아니라 불면을 해결하는 거니까 상관없긴 하지만…….

아이가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율리어스도 들었지만 그것에 대해 묻진 않았다. 가이우스가 올린 보고서 사이로 지나가듯 자신의 불면에 대한 계약서가 올려져 있던 걸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어째서 차를 마셔줘야 하지?”

“그야, 그쪽 불면을 해결하려면…….”

거기까지 말하던 아이가 문득 눈을 가늘게 뜨고 율리어스를 바라봤다. 노려보는 것 같기도 했다.

“당신, 불면을 고칠 생각이 없구나?”

“…….”

어느새 호칭이 당신으로 내려왔다는 건 눈치채지 못했다. 열두 살 아이가 그의 속내를 푹 찔러온 탓이었다.

말대로 굳이 불면을 고치려 들지 않았다. 어쩌면, 정말로 어쩌면. 떠나 버린 일리안이 율리어스의 소식을 궁금해할지도 모르니까.

일리안 하인리히라면, 자신 때문에 불면을 겪고 있는 열다섯 살 소년을 무시하지 못하겠지.

“그게 네놈과 무슨 상관이라는 거냐.”

“있죠. 당연히 상관있다고요. 펜서 집사장님과 사라 주방장님, 그리고 가이우스 씨가 얼마나 걱정하는지 알고 있어요?”

“내가 그들의 사정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나.”

무심하기 짝이 없는 대답에 일리안은 자신도 모르게 턱에 힘을 줬다. 정말이지, 그 ‘유리’의 성격이 이 정도일 줄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나 아무리 어른스러워 보여도, 그가 아직 열다섯 살 소년임을 떠올린 일리안이 폭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에는 아이답지 않게 크나큰 시름이 담겨 있었다.

“그래, 그러면 그건 미뤄두고. 이보세요, 율리어스 님. 정말 잠을 자고 싶지 않다는 겁니까?”

“…….”

“정말 솔직하게. 머리는 멍한 데다 하루 종일 두통을 껴안고 살잖아요. 아닙니까?”

멈칫하던 율리어스가 결국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대로 하루 종일 끔찍한 두통이 그를 따라다녔다. 굳이 고치려고 생각을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억지로 잠을 자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그도, 잘 수 있다면 자고 싶었다.

“좋아, 솔직한 건 좋네. 그럼 나한테 협조 좀 해요. 내가 불면을 해결해 줄 테니까.”

“어떻게.”

그가 무뚝뚝한 어조로 불면을 해결할 방법을 물어왔다. 일리안은 그 정도로도 율리어스로선 충분히 친절한 대답임을 눈치챘다.

“먼저 잠을 자려면 침실로 가야죠.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로 가야 하듯.”

그게 같은 건가?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율리어스는 어쩐지 설득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몇 달째 지속된 끔찍한 두통이 그를 멍하게 만든 것일지도 몰랐다.

“그럼, 내려가야겠군.”

곧장 몸을 돌려 침실로 향하려던 율리어스의 팔소매를 일리안이 다급하게 붙잡았다.

붙들린 율리어스가 단번에 얼굴을 와락 찌푸리며 소매를 바라봤지만 예전처럼 손을 쳐내지는 않았다. 단지 고개를 돌려 아직도 창문턱에 앉아 있는 아이를 바라봤다.

“어디 가십니까? 내려가는 길은 이쪽인데요.”

일리안이 활짝 웃으며 손가락을 아래로 향했다. 휑한 창문 아래로 바람이 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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