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죽음을 바칠 시간-11화 (11/123)

11. 곰 같은 기사와 토끼 같은 시녀

일은 빠르게 진행됐다. 불면을 해결하기 위해 일리안은 며칠간 머무를 수 있게끔 짐을 챙겨 홀로 공작성으로 들어와야만 했다.

낮에는 늘 그래왔듯 분재원의 이들을 도와 정원 일을 했다. 경비가 삼엄한 공작성에 디노까지 머무를 수 없어 그와 떨어져야 했지만, 디노도 매일 낮마다 볼 수 있으니 크게 걱정하진 않았다.

여름이라 해가 긴 탓에 아직 해가 떨어지지 않았는데도 정원 일은 끝이 났다. 사라가 일리안을 부른 것은 몇 시간이 지나고서였다.

“헤이븐, 정말 할 수 있겠니? 많이 무서울 텐데……. 밤의 공작 전하께서는 낮과 다르시거든.”

“많이 까칠하신가요?”

“낮에는 친절한 분이시다 보니 다들 적응을 못 하더구나.”

……그게요?

일리안은 자기도 모르게 반문하려는 입을 움찔거려야만 했다. 얼마 전, 율리어스가 일리안을 향해 꺼지라고 했던 말이 뇌리에 박힌 탓이었다.

그 속도 모른 채 곁에 서 있던 펜서 집사장이 맞장구를 쳐왔다. 고개를 끄덕거리는 폼이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공작 전하께서 낮에는 정말 친절하시지. 웬만한 일은 눈 감고 넘어가 주시지 않나.”

그냥 관심이 없는 것 아닐까요?, 라고 묻고 싶었지만 또 한 번 꾹 참았다. 어린아이가 되기 전의 일리안도 율리어스가 웬만한 일에 관해선 냉정할 정도로 관심이 없다는 사실 정돈 알고 있었다.

차마 사라와 펜서의 말에 동의해줄 수 없었던 일리안은 그들의 앞에 놓인 트레이를 손에 들었다. 트레이 위로 뚜껑이 덮인 찻잔이 놓여 있었다.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헤이븐. 응원하고 있으마.”

사라와 펜서의 웃는 얼굴을 뒤로하고 일리안이 짧은 다리를 열심히 움직였다. 아이의 몸이니 트레이가 흔들릴 법도 한데, 묘하게 균형을 잡고 있었다.

계단과 긴 복도를 지나 일리안은 겨우 집무실의 앞에 섰다. 일정한 음각이 새겨진 고동색의 커다란 나무문 두 짝이 놓여 있었다.

해가 까맣게 진 밤인데도 율리어스는 침실로 가지 않고 집무실에 머물렀다. 펜서는 그가 밤새 침실로 향하지 않고 일을 한다며 걱정했다.

달랑거리는 손잡이로 문을 두드리기에 앞서, 일리안은 잠시 멈칫했다. 커다란 트레이를 들고 문까지 노크할 정도로 그녀의 힘이 세지 않은 탓이었다.

결국 일리안은 트레이를 잠시 바닥에 내려놓고 문을 두드려야만 했다. 남이 보면 공작 전하께서 드실 음식을 바닥에 내려두었다고 경악할 광경이었다.

똑똑.

“공작 전하, 차를 가지고 왔습니다. 잠시 들어가도 될까요?”

“…….”

아무리 문이 두터워도 분명히 들었을 텐데, 안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없었다.

만약 공작성의 다른 이들이라면 터덜터덜 물이 든 찻잔을 들고 돌아가야 했겠지만 일리안은 달랐다. 그가 일부러 무시하고 있다는 깨달음이 든 순간, 그녀의 말랑한 눈썹이 꿈틀거렸다.

바닥에 내려둔 트레이를 들어 올린 일리안은 몸으로 한쪽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가이우스보다 커다란 문을 당길 자신은 없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발을 들이자마자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가.”

집무실 책상을 앞에 두고 앉아 있는 율리어스는 의자에 파묻혔던 일리안과는 다르게 몹시도 그곳과 잘 어울렸다. 그는 고개조차 들지 않고 있었다.

“사라 주방장님께서 차를 가져다…….”

“나가라고, 두 번째 말했다.”

서릿발처럼 차가운 음색이 들려왔다. 만약 트레이를 들고 서 있던 게 일리안이 아니라 다른 시종이었다면 겁을 먹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일리안은 조금 곤란한 얼굴이 되었을 뿐 물러서진 않았다. 오히려 조용히 다가가 넓은 책상 위로 트레이를 올려두었다.

걸음 소리를 낮추고 천천히 걸어간 일리안이 달칵, 트레이를 올려두자 그제야 율리어스가 고개를 들었다. 책상 앞에 선 일리안을 그가 고요히 가라앉은 눈으로 바라봤다.

“벌써 몇 주째 잠들지 못했다고 들었습니다. 수면에 효과가 있는 차인데요.”

눈을 끔뻑거리던 일리안이 평이한 목소리로 설명을 이었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 율리어스는 눈동자만 굴려 트레이 위에 놓인 찻잔을 바라봤다.

무거운 침묵이 잠시 감돌았다. 그러다 율리어스가 먼저 왼손을 뻗어 찻잔을 들어 올렸다. 일리안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려던 찰나였다.

쨍그랑.

검지손가락이 걸쳐져 있던 찻잔에서 손가락이 빠진 것은 그 순간이었다. 순식간에 바닥에 부딪힌 찻잔이 큰 소음을 내며 산산조각이 났다.

일리안은 고개를 숙여 제 발밑에 부서진 찻잔을 바라봤다.

“꺼져.”

아무래도 나가라는 단어는 공작성에 종사하는 이를 위한 단어였는지, 어느새 나가라는 말이 꺼져로 바뀌어 있었다.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율리어스가 다시 책상 위에 놓인 종이로 눈길을 옮겼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일리안은 화가 나지 않았다.

오랫동안 그를 지켜본 것은 아니었지만, 아홉 살에 그를 만났던 이후로 율리어스는 자신의 성격이 이렇다는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다소 묵묵하고, 어쩌면 조금 냉정한.

일리안이 율리어스를 향해 내렸던 평가는 그 정도였다. 그마저도 그녀의 앞에서는 자주 보여주지 않았다.

그가 일리안 하인리히에게 얼마나 유달리 대했었는지, 그녀는 그제야 깨닫고 있었다.

일리안은 아무런 말 없이 무릎을 굽혀 트레이 위로 유리 조각을 주워 담았다. 잘게 부서지지 않고 세 동강이 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조금 멍하게 움직인 탓이었을까, 엄지가 유리 조각에 길게 베여 피가 흘렀다. 그녀는 움찔했지만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자리를 치웠다.

율리어스는 그녀가 나갈 때까지 다시는 눈길을 주지 않았다.

* * *

깨진 조각을 들고 터덜터덜 돌아온 일리안을 사라와 펜서가 다정하게 토닥였다. 어쩐지 그녀가 시무룩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일리안을 보고 곧 포기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그녀는 다음 날 밤에도 식당으로 찾아왔다. 시무룩해진 기색은 전혀 없이 평소와 같이 씩 웃고 있는 채였다.

너무 다가서면 역효과가 난다.

일리안은 그 사실을 충분히 인지했다. 그래서 그날부터는 노크와 함께 문을 열고 들어가 바로 문 앞에 트레이를 내려뒀다.

매일 반복하다 보면 율리어스도 한 번쯤은 마셔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율리어스를 너무 쉽게 보았다.

매일 문을 열고 들어가 바닥에 트레이를 내려두고 나온 게 1주일쯤 되었을까. 일리안은 몸으로 아무리 밀어도 꿈쩍도 하지 않는 문을 올려다보았다.

트레이를 내려두고 당겨봤지만 여전히 문은 움직이지 않았다. 안에서 단단히 걸어 잠근 것이었다.

“이 자식이…….”

어린아이의 입으로 나지막이 속된 말이 흘러나왔다.

율리어스가 일리안 하인리히를 특별하게 대했던 만큼, 그녀도 그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건 이제 옛날 일이었다.

처음에는 잔을 깨부숴도 화가 나지 않았는데, 그가 이렇게까지 나오자 왠지 모를 승부욕이 불타기 시작했다. 매일 자신이 주방으로 돌아갈 때마다 잔뜩 기대하는 가이우스와 사라, 아침마다 덩그러니 놓인 식은 찻잔을 치우는 펜서를 봐서라도 이제는 포기할 수 없었다.

트레이를 들고 성난 걸음으로 주방으로 돌아가자 사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일리안을 바라봤다. 주방에 놓인 테이블 위로 거칠게 트레이를 내려둔 일리안이 주먹을 쥐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니, 헤이븐?”

“아니요.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문제죠.”

마침 일을 확인하러 주방에 들어서던 가이우스도 다가왔다. 조금 흐트러진 뚜껑을 뚫고 흘러나온 연기로 보아 오늘도 실패했음을 안 그가 이야기했다.

“헤이븐 님, 힘드시면 그만두셔도 괜찮…….”

“가이우스 씨.”

“예, 부르셨습니까.”

꽉 쥐었던 양손을 풀지 않고 고개를 들어 올린 일리안이 가이우스를 바라봤다. 목이 꺾여라 고개를 들어야 했지만 일리안은 개의치 않았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일리안이 웃었다.

어쩐지 그 웃음이 해맑지 못하고 활활 타오르는 것 같았지만. 그녀가 입을 열어 말했다.

“저, 이래 봬도 한 가정의 가장입니다. 집에서 곰 같은 기사와 토끼 같은 시녀가 기다리고 있다고요.”

* * *

그녀가 만약 거기서 포기했다면 20년을 용병으로 살아온 백전노장, 일리안 하인리히일 리가 없었다. 일리안은 의뢰를 포기하지 않는 끈질김으로 유명했다.

침대에 누워 차근히 앞으로 율리어스의 수면 계획을 생각하던 일리안이 양손으로 이불을 끌어당겼다. 좁지 않은 방은 어린아이에겐 제법 커다래 보였다.

일리안 하인리히를 대할 때와는 완전히 다른 율리어스를 보고 있자니 문득 그를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스물네 살이었던 일리안은 그때도 머무르는 곳 없이 떠돌고 있었다. 그저 우연히 의뢰를 찾아 이곳 헤라프 제국의 수도에 왔을 뿐이었다.

수도가 한참 뒤숭숭하던 시절이었다. 그녀는 이곳에서 꽤 오래 머무를 계획으로 여관이 아닌 다달이 월세를 내는 작은 집을 구했다.

깐깐한 집주인과 겨우 계약을 마치고 들어왔을 때에는 이미 해가 져 있었다. 상자 두 개가 그녀가 가진 짐의 전부인 덕에 짐 정리를 할 필요도 없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빈집에는 이전에 살던 사람이 남기고 간 가구가 남아 있었다. 옷장으로 상자를 쑤셔 넣은 일리안은 다음 날부터 의뢰를 수행하기 위해 일찍 잠이 들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 건 새벽이었다.

똑똑.

만약 그녀가 용병이 아닌 일반인이었다면 듣지 못했을 작은 소리였다. 한쪽 눈을 찡그린 일리안이 늘 챙겨 다니는 단도를 뒤로 숨기고 끼익, 문을 열었다.

일리안의 주변에는 이런 시각에 집을 찾아올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단도를 챙긴 이유는 충분했다.

“…….”

“……어이, 꼬마야. 너 집 잘못 찾았다.”

문틈 사이로 보인 것은 까만 머리칼이었다. 그곳에는 그녀의 허리보다 작은 키의 꼬마가 서 있었다.

머리와 마찬가지로 검은 눈을 한 아이는 말없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길을 잃은 아이라 생각하고 무심하게 다시 문을 닫으려고 했었다.

“숨겨줘.”

“뭐?”

“숨겨 달라고.”

달빛 아래로 하얗게 빛나는 아이의 얼굴이 천사처럼 아름다워서, 일리안은 순간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아이의 작은 입술이 움직이는 걸 보고서야 그가 말한 것임을 깨달았다.

괜한 일에 엮이는 건 별론데.

숨겨주라는 말을 듣고서 가장 처음 든 생각이었다. 겉으로 보기엔 친화력 좋아 보여도 속내는 무심하기 짝이 없는 그녀였으니 당연한 이야기였다.

잠시 망설이고 있을 때, 멀리서부터 제법 많은 이들의 인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 새벽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다닐 리는 없으니 그들의 목적이야 뻔했다.

고개를 숙이자 까만 머리의 아이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을 쫓는 이들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리는 데도 꿈쩍도 하지 않는 아이라.

끼익.

일리안은 문을 조금 더 열어주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들어오라는 몸짓이었다.

조금도 급하지 않은 움직임으로 들어온 아이가 자연스럽게 놓여 있던 옷장으로 들어가려 했다. 일리안은 그런 아이의 어깨를 붙잡았다.

얼마 안 가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와 함께 쾅쾅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보시오! 잠깐 나와보시오!”

문을 조금 연 일리안은 중지와 약지 사이로 담배 한 대를 끼우고 있었다. 담배를 입에서 떼어낸 그녀가 귀찮다는 듯 물었다.

“어이, 새벽에 남의 집 두드리는 게 예의가 아니란 것도 모르나?”

“검은 머리의 아이를 보았소?”

일리안의 말을 무시한 채 제 말을 하기 바쁜 사내가 그녀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그가 얼굴을 들이밀자 일리안은 찡그린 눈을 풀지 않고 고개를 빼며 말했다.

“검은 머리 애? 봤지.”

“어디, 어디서……!”

“한 10분 전쯤에 저기 길 아래로 내려가던데. 이 집, 창이 커서 바깥이 잘 보이거든.”

그 이야길 들은 사내가 의심스럽다는 듯 눈을 찌푸렸다. 방이 하나뿐인 일리안의 집은 그 내부가 모조리 보였다.

그가 어깨 너머로 제 집을 훔쳐본다는 걸 안 일리안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녀의 집에서 가구라곤 옷장 하나와 낮은 침대가 전부였다.

영 귀찮다는 듯 그녀가 짧은 자신의 머리를 흩트렸다. 짜증이 물씬 담긴 걸음으로 걸어가 좁은 옷장의 문을 벌컥 열었다.

“이제 만족하나, 형씨들?”

옷장을 열자 구겨 넣었던 상자가 떨어지며 안에 든 물건들이 바닥으로 쏟아졌다. 옷이나 생필품이 전부였다. 일리안이 더럽혀진 방바닥을 보며 망할, 하고 중얼거렸다.

눈을 부라렸던 사내가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짧게 사과했다. 들어올 때와 달리 조심스럽게 문을 닫은 그들이 사라졌다.

고요해진 방 안에 서 있던 일리안이 담배를 한 번 깊게 빨아들이고서 말했다.

“인마, 이제 나와.”

끼익. 방금 전까지 사내들이 서 있던 곳 바로 앞에 있는 신발장이 열리며 꼬마 아이가 기어 나왔다.

그것이 그와의 첫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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