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죽음을 바칠 시간-10화 (10/123)

10. 잠자지 않는 공작성의 왕자님

“……누구, 계십니까?”

모른 척 돌아가려던 일리안은 가이우스의 음성마저 들려오자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결국 어색하게 웃으며 벽 옆으로 슬그머니 자리했다.

“헤이븐 님?”

“엿들으려던 건 아니었는데……. 하필 음수대가 거기 있어서요.”

자신이 들고 온 물병을 달랑거리며 웃었다. 눈짓으로는 그들의 뒤에 가려져 있는 음수대를 가리키고 있었다.

가이우스가 곤란한 눈으로 일리안을 바라보는 것에 반해 율리어스는 여전히 무뚝뚝한 얼굴이었다. 그러다 문득 가이우스가 제 손목에 차여진 시계를 바라봤다.

시계를 보지 않고 있던 율리어스가 먼저 나직이 말했다.

“가이우스. 들어가도록.”

“……예. 준비해 두고 있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가이우스는 일리안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다 그녀를 지나쳐 사라졌다. 제 주인인 율리어스가 타인에게는 몹시도 차가운 이라는 것을 아는 탓이었다.

그가 사라지자 둘 사이는 싸늘한 정적이 맴돌았다. 율리어스가 서늘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먼저 말이 흘러나온 것은 일리안에게서였다.

“……. 잠을… 못 잡니까?”

한참을 뜸 들인 질문이었다. 자신이 질문을 하고서도 일리안은 본인이 더 난처한 눈빛으로 율리어스를 바라봤다.

“유리, 내게는 돈보다도 중요한 것이 있어.”

“…….”

일리안은 율리어스에게 약했다. 사람을 대할 줄 알고 웬만한 상황에서 빠져나가는 법을 아는 그녀가 약한 것은 몇 없었지만, 그에게만은 예외적이었다.

그녀가 스물네 살이었을 때, 처음 만났던 율리어스는 고작 아홉 살에 불과한 어린아이였으니 더욱 그럴 만했다.

한 곳에 6개월 이상을 머무르지 않는 그녀가 1년이나 리하르트 가문에 종속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대단한 이야기였다. 몇 번이고 떠나려 했지만 그러지 못한 이유는, 열다섯 살의 소년이 매번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마침내 그녀가 떠나겠노라 통보를 했을 때. 율리어스의 계속된 명령과 부탁을 거절했을 때. 그는 이를 악물고 그녀를 바라봤다. 아래로 떨어진 그의 주먹에는 몹시도 힘이 들어가 있었다.

“……무엇입니까. 당신에게 가장 중요하단 그것이, 대체 뭡니까.”

“유리…….”

그 질문에 일리안은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난처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매번 그랬듯 손을 들어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려 하였을 때, 율리어스는 그녀의 손길을 거부했다.

거칠게 부딪친 그녀의 손을 뒤로하고 율리어스는 복도를 걸어갔다. 까만 어둠 사이로 홀로 사라지는 그를, 일리안은 잡을 수 없었다.

자신은 그의 곁에 평생 있어주지 못할 테니까.

“왜 묻는 거지?”

“……예?”

“왜 잠을 잘 수 없냐고 묻는 건지 물었다. 일리안이 물어보던가?”

일리안의 이름을 꺼내는 그의 눈에는 한 치의 기대도 없었다. 그녀가 자신에 대해 묻지 않았으리란 것을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니요. 전쟁터에 있는 사람과 연락할 방법은 제게 없습니다.”

일리안 하인리히가 전쟁터로 떠난 지 고작 한 달이었다. 율리어스가 잠을 자지 못하는 게 꼭 자신 때문인 것 같아 마음에 걸렸지만,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에게 일말의 기대라도 품게 해서는 안 되었다.

“그럼, 어째서 그것을 물었나.”

“걱… 정이 되었습니다. 잠이 들지 못한다는 이야기밖에 듣지 못해서…….”

일리안은 차마 그의 눈을 바라보지 못하고 대답했다. 매몰차게 떠났던 자신이 그의 수면을 걱정한다는 것 자체가 죄를 짓는 것 같기 때문이었다.

“꺼져.”

“……예?”

“꺼지라고 명했다.”

신이 내렸다고 일컬어지는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욕설을 단번에 이해할 수 없었다. 멍하니 그 얼굴을 바라보던 일리안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벽 너머로 사라지는 내내 율리어스는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 시선을 느끼면서도 일리안은 돌아보지 않고 벽 너머로 물러갔다.

그의 서늘한 눈빛을 받고서야 그녀는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이 이제는 일리안 하인리히가 아니라는 사실을.

왜인지 늘 목마른 자의 눈을 하고서 바라보던 율리어스는 더 이상 자신을 일리안 하인리히로 바라보지 않았다. 그녀는 겨우 그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 * *

리하르트 가문에서 일을 한 지 2주가 흘러가자 슬슬 디버튼 분재원의 사람들도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프레딕과도 제법 친해져 오늘은 일을 마치고 가볍게 맥주를 하러 가자는 계획도 세운 참이었다.

“헤이븐! 어쩔 테냐. 따라가서 오렌지 주스라도 마실 게냐?”

“됐습니다, 게릭 아저씨. 오늘 저는 빠질게요. 할 일이 좀 남았어요.”

“어째 전정 일도 안 하는 네가 우리보다 더 바빠 보인다. 엉?”

호탕하게 웃은 게릭이 일리안의 등을 두드렸다. 어린아이의 몸으로 감당하기엔 제법 힘이 셌지만 그녀는 몸에 힘을 주고 버텼다.

해가 질 무렵이 되어 정원사들이 모두 빠져나가자 공작성의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바깥에서 들어오는 인원이 없을 때면 대개의 공작성은 조용한 곳이었다.

“헤이븐, 뭘 하고 있니?”

“아, 사라 주방장님.”

정원의 바닥에 앉아 잠시 하늘을 바라보던 일리안에게 말을 걸어온 것은 주방장인 사라였다. 어린아이가 세상을 다 짊어진 듯한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니 눈에 띈 모양이었다.

“내일 점심을 어떻게 준비할지 고민 중이었어요. 슬슬 요 앞 음식점에서 가져오는 것도 질려간다고들 하셔서요.”

“으응? 그래? 하긴, 리하르트 가문에서는 외부 사람들의 음식을 챙겨주지 않으니까……. 어쩐지 내가 다 미안하구나.”

“별말씀을요. 주방장님이 가끔 챙겨주시는 빵에 다들 얼마나 목숨을 거는데요.”

일리안이 웃으며 고개를 젓자 그녀도 작게 안도하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매번 점심시간마다 가문의 사람들끼리만 모여 식사를 하는 게 마음에 걸린 모양이었다.

그러나 사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공작성은 예전부터 최소한의 인원만을 고용했기 때문에 적은 인력으로는 외부 인력인 정원사들의 식사까지 챙겨줄 수 없었다.

“어디 가시는 길이세요? 그거, 같이 들어드릴까요?”

“어머, 그래 주겠니? 식당으로 가는 길이었단다. 식재료가 들어왔거든.”

“예, 제게 주세요. 조금 돕겠습니다.”

살갑게 다가온 일리안이 그녀의 오른손에 쥐어져 있던 바구니를 양손으로 받아 들었다. 이전의 용병인 일리안 하인리히였다면 사라의 양손에 쥐어진 것 전부를 가볍게 들었을 텐데, 작아진 헤이븐 윈터의 몸으로는 한 개도 벅찼다.

식당으로 가는 내내 사라는 말을 붙여왔지만 일리안은 상투적인 웃음을 지으며 한 귀로 흘렸다. 최근 들어 그녀를 괴롭히는 고민이 있기 때문이었다.

2주 전 들었던 율리어스의 불면증에 대한 이야기가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시기상으로나, 대화의 흐름으로나 그 불면의 이유가 자신임이 확실한 탓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10년 전 이때를 떠올려 봐도 율리어스로부터 그런 이야기를 듣지는 못했다. 자주 소식을 나눴던 것은 아니지만 잊을 만할 때면 그에게서 편지가 날아들곤 했었는데도.

“……래서, 수면에 좋은 음식을 준비했는데도 효과가 없지 뭐니? 이제는 음식이 아니라 밤마다 차라도 준비할까 싶어.”

“예? 차요?”

“응, 이리저리 알아보니 수면에 좋은 차가 많다더구나. 불면증으로 고생하는 이들이 밤마다 차를 마셔서 고쳤다는 소문도 있고.”

어느새 이야기가 율리어스의 불면까지 흘러간 모양이었다. 사라가 제 턱을 받치며 짐짓 고민스러운 얼굴로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데, 시종인 아이들이 모두 꺼려하지 뭐니. 밤의 공작 전하께서는 너무도 무섭다고.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야. 내가 보아도 공작 전하께서는 일반적인 열다섯 살 소년이라기엔 조금…….”

거기까지 말한 사라가 오히려 자신이 놀라며 입가를 가렸다. 자신도 모르게 공작 전하에 대한 나쁜 이야기를 할 뻔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사라가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일리안이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눈길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작게 안심하려던 찰나, 일리안이 씩 웃으며 말했다.

“그럼, 제가 조금 도와드려도 될까요?”

“으, 응? 뭘 말이니?”

어느새 도착한 주방의 의자 위로 일리안이 들고 있던 바구니를 내려두었다. 양손을 탁탁 털고서 사라를 바라봤다. 사라는 아직도 손에 든 바구니를 내려두지 못하고 있었다.

재빨리 달려간 일리안이 사라의 손에 쥐어진 바구니를 가져오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밤마다 차를 가져다 드리는 거요.”

* * *

“저, 헤이븐 님. 제가 지금 잘못 들은 건가요?”

“그래? 그러면 다시 말해줄까?”

이야기는 수월하게 진행됐다. 일리안의 제안을 듣고 눈을 동그랗게 뜨던 사라가 이내 박수를 짝 치며 열렬한 반응을 보였다.

곧장 펜서 집사장의 방으로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더니, 둘은 동시에 일리안을 바라보며 그녀라면 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약속이라도 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성에 들어온 헤이븐 윈터가 일리안 하인리히만큼이나 친화력이 있어서이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시종들이 그 일을 꺼린 탓도 있었다. 펜서와 사라의 말을 들어보니 매일 밤마다 시종들끼리 율리어스에게 차를 가져다주는 일을 서로에게 미루는 모양이었다.

“공작 전하의 시중을 든다니요! 대체, 대체 그게 무슨……! 시중은 저처럼 미천한 이들이 하는 거예요, 헤이븐 님 같은 남작 영애가 아니라!”

“진정해, 타피아. 그리고 미천한 이들이라니. 황자 전하나 황녀 전하의 시중은 백작가나 되어야 할 수 있는 일이라고.”

“그건 황손이시니까……!”

타피아의 입장에선 충분히 화낼 법한 이야기였다. 돈을 벌겠다며 분재원에 일하러 가는 것도 몹시 죄송한 일인데, 공작 전하의 시중을 들겠다니.

타피아는 일이 이렇게 된 것에 대한 미안함과 무심한 일리안에 대한 분노가 뒤섞여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녀가 뚝뚝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자 일리안이 크게 놀라며 다가왔다.

“울지 마, 타피아. 어? 내가 미안해. 내가 다 잘못했어. 나 달래는 걸 제일 못한다고…….”

“죄송해요, 헤이븐 님. 제가… 제가 저택을 팔아선 안 된다고 해서…….”

“무슨 소리야. 아버지의 유언을 지키는 건 딸 된 도리로 당연한 이야기지.”

물론 돈만 잡아먹는 이 저택을 팔면 좋겠지만, 만약 그랬다가는 세르앙 자작 부인이 기다렸다는 듯 돈을 노리려 할 것이었다.

그녀를 상대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겠지만 아직 헤이븐 윈터가 열두 살이라는 게 문제였다. 어떻게 될지 모르는 미래를 기대하느니 남의 눈에 효심 지극한 어린아이로라도 보이는 게 나았다.

“타피아, 다른 곳도 아니고 ‘그’ 리하르트 공작가야. 거기가 어딘지는 알고 있지?”

일리안은 드물게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사실, 백작은 되어야 시중을 든다는 황성보다도 어쩌면 더 권력이 높은 곳이 바로 리하르트 가문이었다.

권력, 명예, 힘. 3가지를 두루 갖춘 리하르트 가문이 조용하기에 헤라프 제국의 황족들이 활개를 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리하르트 가문은 철저히 신비주의를 지켰다. 몇 년 전 크게 갈아치우긴 했지만 일을 하는 이들 대부분이 대대로 자리를 물려받는 데다 새로 고용인들을 뽑아도 엄청난 다중 면접을 진행하는 덕분이었다.

괜히 리하르트 공작성이 철옹성이라 불리는 게 아니었다. 오죽하면 황성보다 공작성에 고용되는 게 더 어렵다는 말이 나올까.

“그건 그렇지만…….”

“만약 일만 잘되면 분재원에서 일하는 것도 그만둘 수 있어. 펜서 집사장님께서 개인적으로 나를 고용하셨거든.”

쑥스러운 얼굴로 일리안이 볼을 긁적였다. 펜서는 일리안 하인리히 님 이후로 이렇게 친화력이 좋은 사람은 처음 봤다며, 그녀가 율리어스의 불면을 해결해 준다면 돈을 지급한다는 계약서를 내밀었다.

그 계약서를 쓸 때 펜서와 사라, 그리고 일리안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가이우스 또한 이 이야기에 급격한 관심을 가지며 자리에 함께했다.

계약서가 완성될 때까지 조용히 듣던 가이우스는 계약서를 가지고 나가는 일리안을 따라 나왔다. 그리고선 언제나 그랬듯 한쪽 무릎을 굽히고 그녀와 눈을 마주친 채 말했다.

“헤이븐 윈터 님.”

“예, 가이우스 씨.”

“……제발……. 제발, 부탁드리겠습니다.”

가이우스는 한쪽 주먹을 꽉 쥔 채 그녀에게 말했다. 그의 더없이 간절한 눈빛은, 일리안 하인리히에게 떠나지 말아달라는 부탁을 한 뒤로 처음 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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