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죽음을 바칠 시간-9화 (9/123)

9. 언젠가는 헤어질 사람이지.

시립해 있던 디노가 연신 호기심 어린 눈빛을 보내왔다. 일리안은 애써 그 눈빛을 무시하며 가이우스의 얼굴을 바라봤다.

“예, 또 뵙습니다. 가이우스 씨.”

“디버튼 분재원에서 일하시는 줄은… 몰랐습니다.”

“일하게 된 지 얼마 안 되어서요.”

그들 사이로 얼마간 침묵이 맴돌았다. 말솜씨 좋은 일리안에겐 자주 있는 일이 아니었다.

용병이었던 일리안은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이를 대할 줄 알았다. 그러나 더 잘하는 것은 그녀보다 어린 이들을 대하는 것이었다.

가이우스는 일리안 하인리히보다 다섯 살이나 어린 남자였다. 그런데도 그녀는 가이우스를 만나고서 오랜만에 ‘벽’을 느껴야만 했다.

그는 일리안 하인리히를 지독히도 싫어했다. 일리안은 떠오르는 옛 기억에 다소 무뚝뚝한 어조로 물었다.

“할 이야기가 없다면 이만 가도 괜찮습니까?”

“아, 어딜 가시는 길이십니까?”

“펜서 집사장님이 빵을 가져가라고 하셔서요.”

일리안이 무뚝뚝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이우스는 싱긋 웃으며 무릎을 굽혔다. 처음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키가 작은 그녀를 위해 배려한 것이었다.

“주방으로 가는 길을 아십니까?”

“……아니요. 모릅니다.”

공작성의 고용인들 모두를 아는 그녀가 주방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이곳에 처음 온 어린아이가 길을 훤히 알고 있다는 사실은 누가 봐도 이상했기에 모른다고 대답해야만 했다.

“그럼,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같이 가실까요.”

“괜찮습니다. 저와 디노 경이 충분히……!”

일리안은 번쩍 들어 올려진 제 몸에 놀라 가이우스의 어깨를 짚어야만 했다. 뒤에 서 있던 디노가 단박에 다가와 말했다.

“제, 제가 안겠습니다!”

“기왕 안은 것, 제가 계속 안겠습니다. 그래도 괜찮을까요, 헤이븐 님?”

가이우스는 품에 안긴 헤이븐을 내려다보며 웃었다. 그의 웃음에는 아무런 사심도 들어가 있지 않았다. 오로지 선의만이 가득했다.

헤이븐 윈터는 싫어하지 않나 보군.

그렇게 생각한 일리안은 내색하지 않고 가이우스의 웃음을 바라봤다. 이전의 가이우스는 첫 만남에서부터 일리안 하인리히를 싫어한다는 기색을 잔뜩 내비쳤기 때문이었다.

“일리안 하인리히입니다. 율리어스의 보좌관, 그러니까 가이우스 씨 맞으십니까?”

“……율리어스 님이라고 칭해주십시오.”

그녀는 단번에 제 실수를 사과하고 호칭을 달리했다. 자신의 상관을 함부로 불러댔으니 기분이 나쁠 법도 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나 함께 지내면 지낼수록 알 수 있었다. 가이우스는 애초부터 일리안 하인리히에게 커다란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어린 나이부터 일을 하시는 군요.”

“열두 살이면 제 밥값은 할 수 있는 나입니다.”

“그런가요…….”

일리안은 다소 무뚝뚝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전엔 이렇게 사이좋게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가이우스라는 남자가 아랫사람들 사이에서 얼마나 평판이 좋은지는 그녀도 알고 있었다. 성격도 좋고 듬직한 체구 덕분에 결혼 이야기가 벌써부터 나온다고 했었나.

그런 사람이 자신을 이유도 없이 싫어했다니. 일리안은 그때가 생각나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굳이 나쁘게 지낼 필요가 없을 것 같아 몇 번이고 그녀가 다가섰지만 가이우스는 딱딱한 얼굴로 거부를 했었다.

그게 몇 번 반복되고 나니 일리안도 굳이 자신을 싫어한다는 이와 잘 지낼 필요는 없다고 판단해 서로를 무시했다. 그녀가 전쟁터로 떠나기 직전, 마지막 밤 이전까지는 그러했다.

“도착했습니다. 여기가 주방인데……. 음, 사라 주방장님께서 자리를 비우셨나 봅니다.”

“예, 저희는 이곳에서 기다릴 테니 가이우스 씨는 가셔도 됩니다.”

“그래도 손님을 이렇게 둘 수는…….”

“곧 12시네요.”

일리안이 나지막이 시계를 보며 말하자 가이우스가 다급하게 제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12시면 가이우스가 율리어스에게 정기적으로 보고를 올리는 시간이었다.

“이런, 벌써 시간이.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헤이븐 윈터 님.”

고개를 끄덕이는 것까지 확인한 가이우스가 성큼성큼 걸어 주방을 빠져나갔다. 일리안은 그의 커다란 등을 지그시 바라봤다.

“헤이븐 님, 저분은 언제 만나셨습니까?”

그가 자리를 비우자 뒤늦게 디노가 물어왔다. 볼을 긁적이던 일리안이 눈을 피하며 대답했다.

“뭐, 우연히 마주쳤어. 이전에 내가 모아둔 용돈을 찾으러 갔을 때.”

“그렇습니까.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일리안이 이만 골드를 찾아가자 디노와 타피아는 깜짝 놀라며 어디서 난 돈이냐고 물었다. 그걸 이제껏 모아둔 용돈이라며 거짓말을 쳤었는데, 디노는 그 말을 굳게 믿고 있었다.

“무슨 일이라니? 아무 일도 없었는데.”

“아니요……. 헤이븐 님이 어쩐지 가이우스 씨에게 반감이 있는 것 같아서요.”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사과 하나를 베어 물었던 일리안이 멈칫했다. 겉으로 보기엔 몹시 단순해 보이는 디노는 종종 날카로운 촉을 드러내곤 했다.

“설마. 이제 두 번째 보는 사람인데.”

“역시 그렇죠? 제가 조금 예민했나 봅니다.”

말을 돌리려는 듯 디노가 이 사과를 먹어도 되는 거냐고 물어왔다.

선선히 고개를 끄덕인 일리안은 그 언젠가, 가이우스를 한층 더 불편하게 생각하게 되었던 그 날 밤을 떠올렸다.

“일리안 님.”

“……가이우스 씨. 이 밤에 여긴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그녀가 전쟁터로 떠나기 전날 밤, 짐을 챙기던 일리안에게 가이우스가 찾아왔었다. 예의를 중시하는 이답게 그는 2번 문을 두드리고 자신의 방문을 알렸다.

울 것 같은 눈을 한 가이우스는 갑작스레 그녀의 앞에서 쿵, 무릎을 꿇었다.

“꼭… 가셔야겠습니까.”

“예? 가이우스 씨,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아니, 그것보다 무릎을 왜 꿇으십니까. 어서 일어나세요.”

“한 번만, 단 한 번만 부탁드리겠습니다. 가지 말아주십시오.”

어두컴컴하고 차가운 복도에서 무릎을 꿇은 그는 주먹을 꽉 쥔 채 고개를 숙이고 부탁했다. 그녀가 있던 1년 내내 자신을 싫어하던 남자라곤 상상할 수 없었다.

“대체 이러시는 이유가 뭡니까.”

“……. ……죄송합니다. 늦은 밤에 실례했습니다.”

“가이우스 씨?”

그러는 이유를 도통 짐작할 수가 없던 일리안이 질문을 던졌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벌컥 일어나 커다란 어깨를 늘어뜨린 채 뒤돌아 복도로 걸어갈 뿐이었다.

그녀는 차마 가이우스를 붙잡지 못하고 바라봐야만 했다.

“어머, 네가 헤이븐이니?”

바퀴가 달린 트레이를 밀고 들어온 여자가 낯선 손님들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리에서 일어난 일리안과 디노가 그녀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오늘부터 일하게 된 디버튼 분재원의 헤이븐입니다.”

“그래, 디버튼 분재원이 들어온다는 이야기는 들었단다. 웬일로 펜서 집사장님이 빵을 부탁하셨나 했더니, 헤이븐 때문이었구나?”

일리안은 말없이 씩 웃었다. 사라 주방장이 잠시 안쪽으로 들어가더니 커다란 바구니에 빵을 한가득 담아왔다.

“특별한 건 아니고, 그냥 호밀 빵이란다. 네가 어린아이인 줄 알았으면 조금 다른 빵을 준비했을 텐데…….”

“사라 주방장님은 호밀 빵을 제일 잘 만드시잖아요. 잘 먹겠습니다.”

바구니를 받아 든 일리안이 짧게 인사하곤 디노와 함께 바쁘게 주방을 나섰다. 고생하고 있을 디버튼 분재원의 정원사들에게 빵을 나눠줄 요량이었다.

그들이 주방을 나가자 사라가 귀여운 아이가 들어왔네, 하고 작게 웃음을 흘렸다. 그러다 문득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중얼거렸다.

“내가 호밀 빵을 제일 잘 만드는 걸 어떻게 알았담……?”

* * *

“게릭 아저씨! 일은 잘되어가세요? 슬슬 날이 덥네요.”

“하아, 그러게나 말이다. 시원한 냉수라도 마시면 소원이 없겠는데.”

그러자 일리안이 커다란 생수병을 게릭의 뺨으로 가져다 댔다. 병의 표면으로 물방울이 똑똑 떨어질 정도로 차가운 물병에 게릭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실까 봐 제가 챙겨왔습니다.”

“아이고, 헤이븐. 내가 이러니 널 아끼지!”

“빵도 얻어왔어요. 드시면서 하세요.”

그녀가 커다란 바구니를 쿵 내려놓자 게릭이 깜짝 놀라며 호밀 빵을 바라보았다. 척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운 빵이 바구니에 가득 차 있자 그의 주변으로 정원사들이 몰려들었다.

“여기, 다들 빵 좀 먹고 해!”

“응? 갑자기 웬 빵이야?”

“헤이븐이 얻어왔대!”

아무것도 없는 호밀 빵인데도 그들은 차가운 물과 함께 맛있게 빵을 베어 물었다.

일리안도 호밀 빵 하나를 집어 들어 디노에게 반을 나눠주고선 양손으로 잡은 채 크게 물었다. 씹을수록 느껴지는 고소함이 일품이었다.

사라 주방장님 솜씨는 여전하시군. 호밀 빵을 오물거리던 일리안의 머리를 누군가 거칠게 쓰다듬었다. 고개를 들자 게릭이 웃는 낯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맙다, 헤이븐.”

“전 옮기기만 한 것뿐인데요, 뭐.”

“나 참. 열두 살짜리가 이렇게 어른스러워서야. 애늙은이가 따로 없다니까, 응?”

게릭은 장난스럽게 웃으면서도 짐짓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얼마 전 부모님을 잃었다는 열두 살 어린아이가 애처럼 굴지 않으니 오히려 더 걱정스러운 모양이었다.

“무슨 일이 있거든……. 내가 큰 도움은 안 되겠지만, 그래도. 너보다 어른에게 도움을 청해도 좋단다. 헤이븐, 알겠냐?”

“예, 무슨 일이 없어도 게릭 아저씨네 집은 찾아갈게요. 저도 에릭이 궁금하거든요.”

에릭은 게릭의 열다섯 살 된 아들이었다. 그녀가 자신의 아들을 언급하자 게릭도 껄껄 웃으며 그래, 저녁이라도 먹으러 오라며 응수했다.

디버튼 분재원의 사람들은 대부분 선한 이들이었다. 그러니 귀족 가와 연을 잇지 못하고 위탁 관리나 맡았던 거겠지만.

그러나 진심으로 게릭의 집을 찾아갈 생각이 있는 건 아니었다. 단지, 그렇게 말해두었을 뿐.

그녀의 인간관계는 대개 넓고 얕았다. 평생을 떠돌이로 살았으니 깊은 인간관계를 만들어보았자 좋을 게 없었다.

언젠가는 헤어져야 할 사람이지.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평생을 살아왔지만 그래서인지 유난히 사람을 곁에 두는 일이 없었다. 적군도, 그리고 아군도 만들지 않는 게 가장 편했다.

10년을 함께한 푸른 새벽 용병단이 듣는다면 제법 섭섭하겠지만, 그들도 조금은 눈치채고 있을 것이었다. 그녀가 알게 모르게 타인에게 일정한 선을 긋는다는 사실을.

웃으며 대화를 마친 일리안이 고개를 돌리자 텅 빈 생수병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생각보다 다들 목이 마른 탓이었다.

일리안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아직 호밀 빵을 먹고 있던 디노가 허둥지둥 음식을 씹어 삼키려 했다.

“저, 저도 같이 가겠……!”

“되었어, 디노. 물이나 뜨러 가려는 거야. 편하게 먹고 있어.”

디노의 어깨를 꾹 누른 일리안은 씩 웃으며 빈 물병을 손에 들었다. 음수대는 주방으로 갈 필요도 없이 정원에도 한 곳 설치되어 있었다.

물병을 달랑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기억하기로 이 벽만 돌면 음수대가 있었다.

“……님께서는 무사하십니다, 율리어스 님.”

자연스레 걸음을 옮기려던 일리안이 멈칫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이름이 들려오자 자신도 모르게 벽 뒤로 숨어들었다.

“싯투르 공국에 물자를 더 투입하라.”

“얼마 안 가 전쟁은 끝나게 될 겁니다. 그러니 더 이상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가이우스의 말에도 율리어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싯투르 공국이라니. 이 시기에 싯투르 공국이 치르고 있는 전쟁이라면 하핀 왕국밖에 없었다. 그녀에게는 10년 전, 일리안 하인리히가 바로 지금 참여하고 있을 그 전쟁이었다.

일리안은 율리어스가 전쟁에 관여되어 있었다는 사실에 잠시간 놀랐다. 그녀에게는 한 번도 그런 내색을 비치지 않았던 탓이었다.

“그것보다 율리어스 님, 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못 주무신 겁니까.”

“…….”

“조금이라도……. 조금이라도 주무셔야 합니다. 약이라도 준비할 테니…….”

그가 잠들지 못한다는 이야기에 일리안은 잠시 눈을 끔뻑였다. 그녀가 리하르트 공작성에 있었던 고작 1년간의 기억이지만 율리어스는 제법 일정한 수면 패턴을 가지고 있었다.

오후 9시에 잠들어 오전 7시에 일어난다. 오히려 일반인보다 잠이 많은 편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아는 이유는, 그녀가 밤마다 율리어스의 방 안에서 야간 경호를 맡았기 때문이었다. 1주일에 한 번씩 다른 용병과 주간, 야간을 바꾸어가며 근접 경호를 했었다.

그런데 잠이 들지 못하고 있다니.

조금 더 이야기를 듣기 위해 귀를 기울이던 순간이었다.

“거기, 쥐새끼처럼 듣고 있는 놈. 나와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