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리하르트 가문
“흐음, 그래서. 올해 정원 관리를 디버튼 분재원에 맡기겠다고?”
펜서는 영 마뜩잖은 눈으로 일리안과 디노를 바라봤다. 성격이 급한 프레딕이 단박에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그래! 잔말 말어, 정원 관리는 전적으로 내 소관이니까.”
“아니, 나무라는 건 아니다만……. 매년 빈센트 분재원에 맡겼었지 않나.”
펜서는 리하르트 공작성에서 수십 년째 일하고 있는 집사였다. 선대 리하르트 공작이 있을 때에는 고작 다섯 번째 집사에 불과했지만, 율리어스가 공작이 된 후로 집사장에 오른 이였다.
그가 일리안과 디노를 꺼리는 이유야 당연했다. 프레딕의 품에는 그와 펜서가 가장 좋아하는 와인인 로블랑이 안겨 있었고, 심지어 디버튼 분재원에서 보냈다는 이의 나이가 아무리 많게 잡아도 열다섯 살이 채 안 되어 보였다.
그런 펜서의 기분을 눈치 좋게 알아차린 일리안이 쪼르르 달려가 그의 허리를 폭 붙잡은 것은 그때였다.
“펜서 집사장님! 저는 헤이븐이에요!”
“으, 으응?”
일리안의 키는 고작 135센티에 불과했다. 180이 조금 넘는 펜서의 허리께에 겨우 도달하는 어린아이가 고개를 들어 올리며 방싯방싯 웃어 보이니 그도 차마 떨쳐낼 수 없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깜짝 놀란 것은 디노였다. 헤이븐 윈터는 눈을 뜬 뒤로 친화력은 몹시 좋아졌지만 애교는 일절 부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펜서는 눈에 띄게 당황한 얼굴로 제 허리에 덥석 달라붙은 아이를 내려다봤다.
헤이븐 윈터의 얼굴은 사실 눈에 띄게 예쁘거나 아름답진 못했다. 그러나 채 젖살이 떨어지지 않은 하얗고 말랑한 아이의 얼굴이 방긋 웃자 한 움큼 베어 물고 싶을 만큼 귀여웠다.
“그, 그래. 만나서 반갑구나. 하지만, 이렇게 아무 이유도 없이 빈센트 분재원과 인연을 끊는 건…….”
“정말 안 될까요?”
펜서는 귀여운 것에 약하다. 특히 어린아이에게.
젊어서부터 리하르트 가문에 종속되어 예순이 다 되어가도록 결혼하지 못한 펜서 집사장은 그 때문인지 어린아이들에게 유난히 약했다. 고용인들의 자식을 우연히 만나기라도 하면 뭐든 쥐여주지 못해 안달 내는 것이 그 증거였다.
그리고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일리안이 이용했을 뿐이었다.
마흔이라는 나이를 먹고 애교를 부려야 한다는 사실이 일말의 자존심에 걸리기는 했으나 그것도 한순간이었다. 일리안의 습관과도 같은 말이 바로 부러질 바엔 굽히겠다, 였다.
그 때문에 평소에는 그래도 나이가 있지, 하며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오버롤 형식의 멜빵바지를 챙겨 입지 않았던가. 거기다 목 뒤로 달랑거리게 묶어둔 어린이용 밀짚모자는 그녀를 귀여운 어린 농부로 보이게끔 도왔다.
마지막엔 타피아가 병아리 브로치를 가슴팍에 꽂아주며 평소에도 이렇게 입어주면 안 되냐고 물어올 정도였다.
“열두 살에 조실부모하여 더 이상 기댈 곳도 없이 혼자 살아왔지만…….”
펜서의 허리를 놓고 한 발짝 물러선 일리안이 눈을 내리깔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모두, 의도된 바였다.
“그런 저를 돌보아주기로 한 것이 저기 계시는 디노 경이시고, 어떻게든 돈을 벌기 위해 디버튼 분재원에서 겨우 일을 맡아 하고 있습니다……. 만약 여기서 일을 따내지 못한다면 저와 디노 경은 언제라도 거리로 쫓겨나 구걸을 해야 할지도,”
“같이하세!”
펜서가 울먹거리는 얼굴로 일리안을 와락 껴안았다. 품에 안겨 모습이 가려진 일리안이 조그만 목소리로 ‘정말요……?’ 하고 속삭였다.
“물론이지. 그 어린 나이에 얼마나 힘들었니, 헤이븐. 내 작지만 네게 힘이 되어주고 싶구나.”
“감사합니다! 그럼, 내일 같은 시간에 계약서를 들고 찾아뵙겠습니다.”
활짝 웃은 일리안이 단풍잎 같은 손으로 디노의 손을 붙잡고 뒤로 돌았다. 손을 잡은 일리안이 마지막까지 꾸벅 인사하자 펜서는 행커치프를 꺼내 눈 아래를 두들겼다. 프레딕도 은근슬쩍 뒤로 돌아 붉어진 눈시울을 숨겼다.
디노만이 끝까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그들과 일리안을 번갈아 바라볼 뿐이었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일리안이 제 앞머리를 휙 쓸어 넘겼다. 피곤하다는 기색이 손짓에 가득했다. 돈 벌기 쉽지 않네. 일리안이 중얼거렸다.
연신 리하르트 공작성을 돌아보던 디노가 마침내 경비병들마저 보이지 않자 겨우 일리안에게 물었다.
“대체 어떻게 알고 계셨습니까?”
“응? 무엇을?”
“그… 공략, 법이랄까요.”
일리안의 행동은 그들을 한두 번 본다고 나올 만한 게 아니었다. 프레딕이 로제 와인 중에서도 로블랑을 좋아한다는 것과 펜서 집사가 어린아이에게 약하다는 점을 헤이븐 윈터가 알 리가 없었다.
“뭐, 우연이지.”
“……우연이요?”
“그럼. 로제 와인은 저렴해서 샀던 거고, 보통 그 나이대의 아저씨들은 나처럼 귀여운 어린아이를 좋아하시잖아. 손자, 손녀가 생각나서.”
자신이 생각해도 별 설득력 없는 말이었지만 일리안은 대충 넘기라는 듯 손을 휘저었다.
디노는 분재원에 찾아간 뒤로 느껴지는 그녀의 처세술에 감탄을 넘어 감동을 받고 있었다. 그 사실을 모르는 일리안은 그저 어서 집에 가서 발 닦고 자야겠노라 생각하는 중이었다.
* * *
원장의 뜻대로 공작가에 다녀온 뒤 그대로 퇴근했던 디노와 일리안은 다음 날 일의 성공을 알렸다. 예상했던 대로 디버튼 분재원은 한바탕 떠들썩해졌다.
“아니, 헤이븐! 대체 어떻게 한 게냐?!”
“진짜 말도 안 된다고! 귀족 나리들이 얼마나 까다로운데. 한번 분재원을 정하면 바꾸려 들지를 않는다니까.”
“헤이븐, 이거 정말이냐? 응? 어떻게 해낸 게야?”
아침부터 자신을 둘러싸고 연신 침을 튀기는 아저씨들 사이에서 그녀가 제 볼을 긁었다. 그러다 문득 히죽 웃으며 그들에게 말했다.
“전 그저 우리 디버튼 분재원이 얼마나 성실하고 끈기 있는지 말했을 뿐입니다.”
일리안의 작은 목소리에 흥분했던 이들이 잠시 가라앉았다. 그러나 얼마 안 가 더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게릭이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렸다.
“이런 복덩어리가 어떻게 우리 분재원에 들어왔는지! 응?! 다들 그렇게 생각하지?”
“아하하, 게릭. 난 이미 헤이븐이 없으면 전정 일을 할 수가 없을 정도라니까!”
게릭의 품에 안긴 일리안의 짧은 머리칼을 정원사들이 마구 헝클였다. 그 손길은 비록 거칠어도 그녀에 대한 애정이 담겨 있었다.
고작 1달. 일리안이 디버튼 분재원에서 진심 어린 애정을 받기까지 걸린 시간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원장. 우리 헤이븐을 정식 고용하는 게 어떻겠어?”
“뭐?”
흥분했던 기색은 어디 갔는지 다소 가라앉은 목소리로 게릭이 말했다. 그 이야길 들은 원장이 눈을 끔뻑거리며 되물었다.
“잡일도 잘하지, 장부 정리도 도와줘, 성실해. 거기다 귀족가와의 거래에 물꼬를 트기까지 했잖아. 난 헤이븐을 이만 우리 분재원의 가족으로 넣어도 된다고 생각해.”
평소 목소리만 큰 게릭답지 않게 침착한 이야기였다. 원장은 잠시 곤란한 얼굴로 게릭을 바라봤다.
그러나 원장의 곤란한 얼굴은 얼마 가지 못했다.
“그래, 나도 그 생각에 동감해. 헤이븐은 충분히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고.”
“맞아. 아니, 사실 헤이븐이 다른 분재원으로 갔다간 우리만 손해라고!”
“게릭이 웬일로 올바른 말을 했구만!”
게릭의 품에 안긴 일리안은 그저 눈을 끔뻑거리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주위에 있던 정원사들이 연신 그녀를 도와주는 이야기를 꺼냈다.
“그래도 말이야, 헤이븐은 아직 전정 일도 할 줄 모르는데…….”
“하이고, 늙은이. 전정 일이야 우리가 천천히 가르치면 되지! 여기 솜씨 좋은 정원사가 몇 명이냐!”
원장의 소심한 한 마디를 게릭이 단박에 반박했다. 이리저리 고갯짓하며 제 의견을 주장하는 모습이 그제야 게릭다웠다.
그러자 원장이 슬쩍 눈치를 보며, ‘그럴까……?’ 하고 중얼거렸다. 귀신같이 그 목소리를 들은 정원사들은 이미 가족이 된 양 일리안을 높이 들어 올리며 크게 웃었다.
“헤이븐! 너도 이제 우리 가족이다, 응?!”
아저씨들의 커다란 웃음소리에 비례해, 던져지는 일리안의 몸 높이도 가파르게 올라갔다. 그때마다 발을 동동 구르며 갈 길 잃은 손을 허우적거리는 것은 고작 디노뿐이었다.
* * *
“그래, 디버튼 분재원이라고 하였는가?”
“예, 예……. 저희 분재원을 믿고 이런 일을 맡겨주셔서 정말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할지,”
“믿고 맡긴 것은 아닐세. 일하는 것을 보아야 믿을 것 아닌가?”
일리안이 디버튼 분재원의 가족이 된 날, 오후에 만난 펜서는 다시금 고집스러운 집사장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의 앞에 선 원장은 처음 만나는 높은 신분에 땀을 뻘뻘 흘리며 손을 꼼지락거렸다.
원장이 당황으로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자 펜서의 눈이 뾰족해져만 갔다.
그것을 알아차린 일리안이 은근슬쩍 쪼르르 달려가 펜서의 허리를 푹 껴안은 것은 그때였다.
“펜서 할아버지! 보고 싶었어요.”
“응, 으응? ……그래, 나도 보고 싶었단다.”
펜서는 사실 어린아이들에게 인기가 없었다. 아니, 없는 정도가 아니라 그의 얼굴만 보면 우는 아이들이 부지기수였다.
그도 그럴 것이, 평생 고집스러운 집사로 살아온 펜서의 얼굴은 그 흔적이 깊게 남아 미간에 주름이 잔뜩 잡혀 있었다. 자주 웃지 않아 무뚝뚝한 얼굴도 아이들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아, 죄송해요. 제가 너무 급했죠. 할아버지라고 함부로 불러서는 안 되는데. 저희 집엔 이제 웃어른이 계시지 않아서, 그리워서 그만…….”
“아이고! 아가야, 아니, 헤이븐. 할아버지라고 부르려무나! 응?”
고개를 숙인 일리안이 펜서에게 보이지 않도록 씩 웃었다. 그리곤 앞에 서 있는 원장에게 어서 계약서에 이름을 적으라는 눈짓을 보냈다.
원장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슬쩍 팔을 움직여 계약서를 마저 작성했다.
“할아버지, 그러면 저는 이만 일 하러 가겠습니다! 오늘도 힘내세요.”
“그래, 그래. 가기 전에 빵이라도 준비해 줄 테니 받아가거라.”
네, 하고 해맑게 대답한 일리안과 원장은 문을 닫고 밖으로 나왔다. 밖에선 기다리고 있던 디노가 자연스럽게 일리안에게 따라붙었다.
함께 복도를 걷던 원장이 시무룩한 얼굴로 아이에게 말했다.
“헤이븐, 너만 괜찮다면 펜서 집사장을 만나는 걸 네게 맡겨도 되겠니?”
“예, 괜찮아요. 불편하시면 다음부턴 제가 말씀 전해 드릴게요.”
그러자 원장의 얼굴이 대번에 밝아지더니 가벼운 발걸음으로 정원을 향했다. 정원엔 디버튼 분재원에서 파견 나온 정원사들이 우르르 몰려 있었다.
그런 그들의 앞에 선 것은 리하르트 가문의 유일한 전속 정원사, 프레딕이었다.
“리하르트 가문에 온 이상 정원 일은 내 명령을 따라야 할 거요. 특히나 우리 가문은 정원에 민감하니 멋대로 전정질을 했다간 콱! 가지처럼 잘려 나갈 줄 아시오!”
디버튼 분재원의 정원사들은 다들 귀족가에 온 게 처음인지 다소 기가 죽어 있었다. 프레딕은 그런 그들의 기를 잡기 위해 부러 언성을 높였다.
슬쩍 뒤로 물러선 일리안이 팔짱을 끼고 그 모습을 지켜봤다. 그녀의 뒤에 시립한 디노가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이번엔 안 도와주십니까?”
“뭐?”
“아니요, 그냥……. 그래도 1달간 함께 해온 분들이 기가 죽어 계시니 마음이 좋지 못해서요.”
그렇게 말하며 디노가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일리안은 그런 디노를 힐끗 바라보곤 다시 앞으로 고개를 고정하며 말했다.
“원래 이 정도 기선 제압은 당연한 거야. 디노도 기사이니 파견을 몇 번 나가봤을 텐데? 그때마다 텃세 좀 받지 않았어?”
“음……. 예, 가끔 다른 귀족 가문에 파견을 나가면 꼭 그러기는 했습니다.”
“조금의 긴장은 일할 때 도움이 되지. 프레딕도 그걸 알고 있어서 저렇게 구는 거고. 그리고 디버튼 분재원이 실수했다간 소개시켜 준 나도 면목 없어진다.”
당장 오늘 오전까지 가족이 되었다며 함께 웃던 일리안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들을 대하는 그녀의 모습은 철저히 사무적이었다.
디노는 말없이 그녀의 자그마한 뒤통수를 바라봤다.
“자, 그러면 이제 일하자고. 먼저 오늘은 가장 안쪽에 있는 첫 번째 정원이네. 일이 팍팍 밀렸으니 어서들 따라와!”
프레딕은 그들을 이끌고 안쪽으로 이동했다. 겉으로 보기엔 기가 죽어 있는 모습이 안타까웠지만 기실 그렇게 안타까운 상황은 아니었다.
디버튼 분재원뿐만 아니라 그들 개인에게도 리하르트 가문에서 일을 했다는 건 대단한 경력으로 남을 일이었다. 이후에 전속 정원사가 되고 싶다면 충분히 도움이 될 법한.
거기다 당장은 기가 죽었다 해도, 며칠만 지나면 슬슬 친해져 분재원에서 일하던 모습이 나올 것이 분명했다. 일리안이 기억하기로 프레딕은 술만 한번 같이 마셨다 하면 평생 친구로 여겼으니까.
“일리안! 오늘이야말로 내가 로블랑의 진수를 가르쳐 주마!”
“그러다 뻗지나 마시죠, 프레딕 씨. 펜서 집사장님도 부를까요?”
“그놈은 뭣 하러!”
벌써 프레딕과 술을 마신 것도 10년 전이었군. 일리안은 지나가듯 떠오른 옛 기억에 짧게 웃었다.
리하르트 가문에서 일리안이 지냈던 시간은 대략 1년 정도에 불과했지만, 그녀의 성격상 모든 고용인의 이름, 나이, 가족 관계까지 알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유일하게 친하게 지내기 어려운 이가 있었는데…….
“다시 뵙습니다, 헤이븐 윈터 님.”
고개를 끝까지 올려야 겨우 얼굴이 보이는 거구의 남자. 그녀가 처음으로 친하게 지내긴 글렀군, 이라는 생각을 들게 했던 이.
가이우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