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죽음을 바칠 시간-7화 (7/123)
  • 7. 스물두 살의 남자와 열두 살의 아이

    “헤이븐, 우리야 해주면 고맙지만……. 할 수 있겠어?”

    일리안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렉에게서 이야기를 전해 들었던 원장은 불안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래, 헤이븐 너라면……. 여기 있는 시커먼 놈들보다야 낫겠지.”

    “너무 걱정하지 마쇼, 원장님. 헤이븐 저거 아주 크게 될 녀석이라니까!”

    곁에 있던 게릭이 호탕하게 웃으며 원장의 어깨를 두드렸다. 원장 또한 주변에서 왁자지껄하게 웃자 그제야 불안한 기색을 지웠다.

    그의 말대로 헤이븐 윈터라면 믿을 수 있었다. 아이가 일한 지 1달여가 지난 지금, 분재원은 그녀가 없으면 안 될 정도로 존재감이 커져 있었다.

    정원사 일을 하며 모은 돈으로 분재원을 차린 원장은 장부 정리를 할 줄 몰랐다. 그런 원장의 곁에 쪼르르 달려와 틀린 부분을 이리저리 짚어낸 것이 일리안이었다.

    원장이 장부 정리는 어디서 배웠냐고 묻자 일리안은 늘 그렇듯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옛날에 비슷한 일을 좀 했습니다.”

    이제 겨우 열두 살에게 옛날이면 대체 언제인가, 싶었지만 원장은 고개를 저었다. 저 나이 때는 고작 몇 달 전 일도 옛날이라고 칭하기도 하니까.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헤이븐! 우리 모두 기대하고 있으마!”

    일리안은 기대감이 가득 담긴 말에도 별다른 말 없이 손을 휘저으며 길을 떠났다. 알렉이 부탁한 일에 성공하리라는 자신은 있었지만 그래도 너무 큰 기대를 심어주면 안 될 테니까.

    도로를 걷는 일리안의 뒤에 바짝 붙어선 것은 디노였다. 오늘 하루 시종일관 발을 동동거리던 그가 땀을 훔치며 말했다.

    “헤이븐 님, 이건 말도 안 됩니다. 절대 안 된다니까요!”

    알렉이 부탁한 일은 단순했다. 그저 리하르트 공작가로 가서 분재원의 일을 따오는 것이었다.

    원장이 그 일을 알렉에게 맡긴 이유야 뻔했다. 햇볕 아래에서 땀을 흘리며 일하는 시커먼 정원사들 중에서 희멀건 알렉이 그나마 단정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소심하고 낯가리기로 제일가는 알렉이 그런 류의 일을 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단지 다들 어영부영 그에게 밀어 넘기다 보니 맡았을 뿐이었다.

    거기다 다른 곳도 아니고 그 유명한 ‘리하르트’ 가문이었다.

    황궁에서 보관 중이라는 헤라프 건국기에도 리하르트 가문에 대한 설명이 들어가 있었다. 블랙 드래곤의 선택을 받은 황제가 헤라프 제국을 건설했으며, 그 드래곤에게 리하르트 공작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것.

    편찬된 지 몇백 년이나 지난 건국 설화의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순 없다. 그러나 리하르트 가문은 아직도 건재하며, 헤라프 제국에서 리하르트 가문에게만은 법을 달리할 정도로 그 힘이 엄청났다.

    “다른 귀족 가에 일을 받으러 가다니요! 절대 안 됩니다, 헤이븐 님. 타피아가 알면…….”

    “디노.”

    디노가 어제저녁 알렉에게 부탁을 받은 뒤부터 전전긍긍하는 이유가 저것이었다. 그래도 엄연히 남작 가문의 딸인 그녀가 공작가에 가서 정원 일을 받아온다니, 가문에 오래 남을 수치가 될 게 분명했다.

    그러나 앞서가던 일리안은 디노를 부르며 몸을 돌렸다. 디노 또한 걸음을 멈추고 일리안을 향해 고개를 숙여 바라봤다.

    “이번 달 저택 관리비가 얼마가 나왔지?”

    “8, 8천 골드… 입니다.”

    “우리가 저번 달에 벌어들인 돈은?”

    “2천 2백 골드입니다…….”

    대답을 할수록 디노의 고개가 숙여졌다. 종내는 그의 턱이 목에 닿을 정도였다.

    일리안은 디노의 기를 죽이고자 하는 게 아니었다. 서둘러 다가선 그녀가 디노의 옷자락을 붙잡고 고개를 들어 바라봤다. 겨우 둘의 눈이 부딪쳤다.

    “이대로 가다간 파산이야. 자존심은 돈을 벌고 나서 지켜도 충분하다고.”

    “하지만……! 그럼,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헤이븐 님은 가지 마십시오.”

    “해낼 수 있겠어?”

    어느새 디노의 옷자락을 놓은 일리안이 무감각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듣기로는 분재원에서도 크게 기대를 하지 않고 있다고 했습니다.”

    디노의 말은 옳았다. 저택이 아니라 성이라 하는 게 옳을 리하르트 가문의 정원 일을 맡게 된다면 좋겠지만 그 확률은 희박했다.

    수도 내에 있는 분재원만 해도 수십 개가 넘었다. 일리안과 디노가 일하고 있는 디버튼 분재원이 이름 있는 것은 사실이나 한 가문의 정원 일을 도맡는 건 다른 이야기였다.

    귀족 가문의 정원을 맡으면 알음알음 이름이 퍼져 다른 귀족 가문도 그 분재원을 찾는다. 귀족들의 분재 몇 개만을 위탁 관리 해주는 것보다 훨씬 돈이 되기에 대부분의 분재원들은 이 일을 바랐다.

    디버튼 분재원 또한 다를 것 없었다. 단지, 평생 정원사였던 원장에게 요령이 없어 귀족 가에 이름을 알리지 못했을 뿐.

    대개 경력이 없다는 이유였다.

    일을 시켜줘야 경력을 쌓을 것 아닌가. 디버튼 분재원은 억울했지만 참았다. 큰돈은 아니더라도 다 같이 먹고 살 만큼은 벌었으니까.

    “디노, 우리가 디버튼 분재원에서 얼마나 일할 수 있다고 생각해?”

    “……모르겠습니다.”

    “나무가 싹트고 자라는 6월까지는 정원 일이 몰려오지. 그런데 잎이 떨어지는 10월이 되면? 아니, 당장 지금 하고 있는 위탁 작업이 끝나고 일이 없다면?”

    “…….”

    “누가 제일 먼저 정리될 것 같아?”

    그렇게 말하는 일리안의 얼굴은 놀라울 정도로 무감각했다. 늘 웃으며 일을 하고, 타피아와 디노에게도 편하게 대하던 그녀 같지 않았다.

    이제껏 열두 살 답지 않은 행동을 해도 특유의 해맑은 웃음에 디노는 넘어가곤 했다. 단순히 조금 어른스러운 행동을 하실 뿐이구나, 하고.

    그런데 방금 보여준 얼굴은 그렇지 못했다. 디노는 멍하니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삶을 직시하고 현실을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은 올해로 스물둘이 된 디노보다도 어른처럼 보였다.

    그러나…….

    “우리가 꼭 필요하다는 생각을 심어둘 필요가 있다는 뜻이야. 알겠지, 디노? 그럼 가자!”

    다시금 웃어 보인 일리안이 오른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앞으로 향했다. 디노는 잠시 그녀의 작은 등을 바라봤다.

    고작 열두 살, 어린아이의 등이 믿음직스러운 것은 왜일까.

    윈터 남작 부부가 함께 사고로 죽고, 미래가 남지 않은 윈터 가문을 떠나는 고용인들을 바라보며 디노와 타피아 또한 고민했다. 고작해야 스물 초반인 자신들이 이곳에 묶여도 될지.

    그러나 그들은 떠날 수 없었다. 가난했던 디노의 가족들을 도와준 게 윈터 남작이었고, 타피아의 아픈 어머니의 약값을 마련해 준 게 윈터 남작 부인이었다.

    조그만 침대 위에 곱게 누운 채 눈을 감은 어린아이를 바라보며 디노와 타피아는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저 아이를 어떻게 보살펴야 할지 너무나도 막막했기 때문이었다.

    “디노! 거기서 뭐 해? 너무 시무룩하지 말라고, 어? 사내놈이 조금 혼났다고 기죽기는!”

    앞서가던 일리안이 가만히 서서 움직이지 않는 디노를 발견하곤 다시 뒤로 달려와 그의 손을 붙잡았다. 일리안의 하얗고 말랑한 손이 디노의 손을 붙잡고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렇게 이끌려 가도 좋을 것 같다고, 스물두 살의 디노는 생각했다.

    * * *

    “저, 헤이븐 님. 리하르트 가문으로 가는 것 아니었습니까?”

    디노가 초조한 얼굴로 연신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향한 곳은 리하르트 가문이 아니라 근방의 양조원이었다.

    직접 담근 포도주로 유명한 양조원이라니. 다 좋다, 다 좋은데, 그녀가 고작 열두 살이라는 게 문제였다.

    “총각, 찾는 거라도 있수?”

    “예, 예? 아니, 없…….”

    “로제 와인을 좀 보려고 하는데. 너무 비싼 건 안 되고, 혼조법으로 만든 거 말이야.”

    양조원의 주인이 당연히 어른으로 보이는 디노에게 다가와 물었다. 그러나 대답이 나온 것은 그의 허리에 겨우 미치는 키의 일리안이었다.

    주인은 눈을 내려 일리안을 발견하곤 껄껄 웃어 보였다. 그러나 일리안은 별다른 말 없이 전시된 와인을 들어 눈으로 훑기 바빴다.

    “그럼, 요건 어떠냐. 밖에서 한참 유명한 건데 말이다.”

    주인은 제 뒤에 있던 장식장에서 와인병 하나를 꺼내 들어 일리안에게 건넸다. 주인의 눈에는 옅게나마 그녀를 무시하고 있는 기색이 들어 있었다.

    아무렇지 않게 그 와인병을 받아 든 일리안은 슥 훑어보곤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이건 너무 어리잖아. 그래도 5년은 되어야지.”

    그녀가 떠넘기듯 다시 건네자 주인은 멍하게 와인을 받아 들었다. 사람에게 하듯, 와인더러 어리다고 하는 것이 한두 번 술을 골라본 솜씨가 아니었다.

    “아, 로블랑이 여기 있었네. 좋아, 이걸로 합시다. 주인장?”

    계산을 마친 일리안이 양조원을 나왔다. 그녀의 품에 안긴 커다란 와인이 위태롭게 흔들리자 디노가 조심스레 그것을 제 손으로 옮겨왔다.

    “헤이븐 님, 대체 술은 어디서 배우셨습니까?”

    “응? 배우기는, 어릴 때 저택 아래에 있는 저장고에서 조금 봐둔 거야.”

    거기까지 말한 일리안은 손가락을 들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여기서 리하르트 가문이 아주 가깝네. 어서 가자, 디노.”

    어쩐지 그녀가 말을 돌리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든 디노였지만, 그것을 내색할 순 없었다. 벌써 달리기 시작한 일리안이 이미 리하르트 공작성의 문 앞에 다다랐기 때문이었다.

    공작성의 문 앞에는 당연히 병사들이 문을 지키고 있었다. 디노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손짓한 일리안이 먼저 그들에게 다가갔다.

    “디노! 가자, 들어가 보래.”

    “예? 어, 어떻게요……?”

    리하르트 공작성의 담장만큼이나 높은 것이 병사들의 충성도였다. 디노가 분재원에서 듣기를, 일을 따내는 것보다도 공작성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문 앞에 선 병사들과 대략 10초가량의 이야기를 나눈 일리안은 디노의 손을 잡고 안으로 향했다. 들어가는 디노를 바라보는 병사들의 눈빛은 따가웠지만 그를 막아서진 않았다.

    “와, 공작성은 이렇게나 아름다운 곳이었군요.”

    높은 담장 탓에 디노도 공작성의 내부로 들어오는 것은 처음이었다. 애초에 남작 가문의 말단 기사와 공작가 사이에 왕래가 있을 턱이 없었다.

    내부는 아름다운 꽃들보다도 과실수들이 줄을 지어 서 있었다. 과실수인데도 그것들의 꽃과 위치를 많이 염두하고 심었는지 성까지 이어지는 정원의 풍경은 감탄이 나왔다.

    잠시 자신도 모르게 정원사로서의 생각을 해버린 디노는 벌렸던 입을 닫았다. 그는 자신의 기사라는 직업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자, 자. 디노, 어서 가자. 우리 여기 일하러 온 거다.”

    “예, 헤이븐 님!”

    일리안은 공작성으로 향하지 않고 발걸음을 돌려 정원으로 향했다. 디노는 익숙해 보이는 발걸음에 그녀에게 혹시 이곳에 와본 적이 있느냐고 묻고 싶었다.

    그러나 그 질문은 나오지 못했다. 얼마 안 가 사다리에 앉아서 전정 가위를 든 채 일을 하고 있는 중년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일리안은 그 사다리의 뒤에 서서 고개를 들었다.

    “프레딕 아저씨!”

    커다란 목소리에 깜짝 놀랐는지 어깨를 떤 사내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아래에 서서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드는 어린아이와 눈이 마주친 사내가 눈을 끔뻑거렸다.

    “날 아냐?”

    “이제부터 알아갈 사이죠! 휴식 시간인데, 잠깐 내려와서 이야기 좀 하십시다.”

    “일 없다.”

    프레딕이라 불린 사내는 고개를 팩 돌리며 다시 제 앞의 벽을 바라봤다. 그의 얼굴에는 나이 든 사람 특유의 고집스러움이 담겨 있었다.

    “어이쿠. 여기 로블랑이 떨어져 있네?”

    로블랑, 이라는 단어에 프레딕의 어깨가 크게 움찔했다.

    “와인이 여기서 굴러다니면 큰일 나지. 펜서 집사장님께 가져다 드려야…….”

    “기다려!”

    버럭 소리 지른 프레딕이 다급하게 사다리에서 내려왔다. 어찌나 급하게 내려왔는지 사다리가 휘청거릴 정도였다.

    내려온 프레딕이 일리안의 품에 안겨 있는 로블랑을 빼앗듯 들어 이리저리 훑어봤다.

    “네 이놈, 이거 어디서 구했냐!”

    “역시 1병으로는 부족하겠죠? 그 양조원이 어디냐면…….”

    알려줄 듯 입을 벌리던 일리안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곤 히죽 웃으며 말했다.

    “디버튼 분재원.”

    “뭐? 디버튼 분재원이 언제부터 술을 만들었다고,”

    “디버튼 분재원에서 나왔습니다, 저희.”

    그 말을 들은 프레딕이 잠시 멈칫했다. 정원사들이 가장 바쁘다는 5월, 리하르트 가문의 유일한 전속 정원사인 자신에게 로블랑 와인을 들고 찾아온 디버튼 분재원.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당연했다. 올 한해 리하르트 가문의 정원을 디버튼 분재원이 책임지고 싶다는 의미였다.

    “이깟 양조원, 내가 찾아내면 돼!”

    “음, 역시 펜서 집사장님에게 로블랑이 있는 양조원을 알려드려야…….”

    당장이라도 떠나려는 듯 몸을 돌리는 일리안의 작은 어깨를 프레딕이 거세게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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