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월급날엔 고기를 먹어야지
디노는 현재 혼란스럽기 짝이 없었다.
“어어, 드발 아저씨. 이거 못 쓰는 거야? 그럼 내가 가져갑니다?”
“아이고, 그래. 들 수나 있겠어?”
“하, 참. 드발 형님. 날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니야?”
커다란 남자 어른의 허리께에 겨우 미치는 일리안이 요령 있게 그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농담을 하고 있었다.
돈을 벌러 가야겠다며 일리안이 향한 곳은 다름 아닌 분재원이었다. 곧장 수도 내에서 나름 이름 있는 분재원으로 향하기에 디노는 열두 살 꼬마 아이가 대체 이곳에서 무슨 일을 하겠냐는 생각이 가득했다.
그러나 분재원에 도착한 일리안은 다짜고짜 자신을 고용해 달라고 조르지 않았다.
오전 내내 정원사들의 뒤를 따라다니며 이것저것 일을 돕더니, 점심을 먹을 즈음에는 자신보다 족히 서른 살은 많아 보이는 이들을 농담으로 형님, 형님 하며 친해져 있었다.
“한창 바쁠 땐데 고양이 손이라도 있으니 좋구만!”
“게릭 아저씨, 이게 고양이 손이면 저어기 테오른 형님은 개발인가? 솔직히 엄청 도움 되잖아, 응?”
“허허, 요놈 보게. 자기 일 잘하는 건 알고 있어?”
“당연하지. 내가 못 하는 게 어디 있어요? 디노! 이리 와서 이것 좀 들어줘.”
게릭이라 불린 정원사가 모과나무 앞에 놓인 사다리에 앉아 바쁘게 가지치기를 하고 있었다. 그 아래로 떨어진 가지 중 성한 가지를 골라내는 것이 일리안의 몫이었다.
그렇게 모은 가지의 양이 제법 되자 일리안은 디노를 불러 그것을 나눠 들었다. 놀란 디노가 자신이 모두 들겠다며 손을 뻗었지만 일리안은 씩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거 저쪽에 모아둡니다! 꺾꽂이(번식) 하실 거죠?”
“어어, 그래! 고맙다, 헤이븐.”
“그러면 저녁엔 맛있는 거라도 사주시던지!”
“하하하! 오냐, 요 앞 카페에서 요즘 유행한다는, 그 뭐야. 음료수? 그거 사주마!”
“이 형님 보시게. 그걸로 퉁 치려고요?”
웃으며 대꾸한 일리안은 짧은 다리를 바쁘게 움직여 이미 나뭇가지들을 옮긴 뒤였다. 갖은 나무와 식물들로 복잡한 분재원 내부를 훤히 꿰뚫고 있었다.
그리곤 서글서글한 웃음을 지으며 나이 든 정원사들과 실없는 농담을 나누었다. 처음 보는 이들이었다면 일리안이 이곳 분재원에서 몇 년은 일한 줄 알았으리라.
분재원은 해가 저물 때까지 일이 끊이지 않았다. 어린아이에겐 고된 노동이었을 텐데도 일리안은 모든 일이 끝날 때까지 웃으며 일을 했다. 그녀가 일하는 내내 디노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일리안을 도왔다.
일을 마치자 이곳 분재원의 원장이 목에 걸어둔 밀짚모자를 뒤로 넘기며 정원사들을 모았다. 일리안도 자연스럽게 그곳에 섞여 들어갔다.
“하아, 오늘도 다들 고생했네. 요즘 귀족가에서 위탁 관리를 맡기는 게 한둘이어야지, 응? 요 며칠만 더 고생하자고.”
“이맘때만 지나면 그래도 한가할 텐데요, 뭐. 안 그러냐, 헤이븐?”
“에이, 제가 뭘 알겠습니까? 오늘도 형님들 뒤만 졸졸 따라다녔는데요.”
“하하! 요놈 말하는 것 보게. 정말 열두 살이 맞아? 저기, 서른 살 숫총각 알렉도 너처럼은 서글서글하진 못하는데!”
그 말에 잠시 뜨끔한 일리안이었지만 이내 내색하지 않고 웃을 뿐이었다.
반바지와 하얀색 상의를 입은 일리안의 옷은 이미 흙으로 더럽혀진 뒤였다. 그 정도로 그녀는 하루 종일 정원사들의 뒤를 따라다니며 일을 한 것이었다.
원장은 그런 일리안을 내려다보며 제 턱을 잠깐 매만지더니, 그녀에게 말했다.
“그럼, 헤이븐. 오늘은 내가 요 앞 카페에서 맛있는 음료수를 대접하마.”
그 말에 뒤에 서 있던 디노가 얼굴을 굳히고 한 발 앞으로 나갔다. 오늘 하루 종일 고생한 일리안의 노동값을 카페의 디저트로 무마하려는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리안은 뒤로 손을 뻗어 디노의 허벅지를 밀었다. 디노는 그 손짓이 아무런 말도 하지 말라는 것임을 알기에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아이고, 원장님. 오늘 요 녀석이 한 일이 얼마나 되는데 고작 음료수로 넘어가려고?”
“으응? 그런가? 으음……. 그래, 그럼 내일부터 일을 좀 도와줄 수 있겠어? 요즘 여간 바빠야지. 네가 제대로 네 몫만 해준다면 일당도 잘 쳐주마.”
“그럼, 그렇게 할까요? 아저씨들이랑 오늘 하루 정도 들었는데요, 그렇죠?”
나이가 제법 있는 게릭이 그 말에 숨이 넘어가라 웃더니 일리안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래 뵈어도 귀족 태생인 그녀를 서슴없이 들어 올리는 모습에 디노가 화들짝 놀랐지만, 분위기가 워낙 좋아 섣불리 말릴 수가 없었다.
“우리 아들도 요놈처럼만 굴었어봐, 내가 안 예뻐하나. 공부도 못하는 놈이 성격이라도 좋아야지!”
“게릭 아저씨를 닮았으면 그럴 수도 있죠. 그래도 끈질기긴 할 것 같은데요? 오늘 세 번째 딱총나무였나, 나는 그거 가지가 하나도 안 남는 줄 알았다니까!”
“흐흐, 그렇지? 우리 아들이 날 닮아서 제법 끈질긴 면이 있기는 하지.”
일리안은 처세술에 능했다. 친근하게 굴면서도 선을 넘지 않았고, 농담을 하면서도 상대가 좋아할 법한 이야기를 할 줄 알았다.
기억을 잃기 전까지만 해도 소심하기 짝이 없어 고용인에게 아무런 명령도 내리지 못하던 헤이븐을 떠올린 디노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 * *
“가지치기…, 정원 일들은 어떻게 아십니까?”
마침내 얼마간의 일거리를 따낸 일리안과 함께 돌아가던 디노가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 앞서가던 일리안은 갑작스레 몸을 잔뜩 움직인 탓에 뭉치려는 근육들을 풀기 위해 연신 허리를 돌리고 있었다.
“응? 뭐, 책에서 몇 번 읽기도 했는데. 오전 내내 분재원 돌아다니면서 대충 눈치로 익힌 거지.”
“그걸… 전부 말이십니까?”
꺾꽂이, 휘묻이 등의 용어를 아는 건 물론 그들이 필요한 도구들을 쏙쏙 골라 가져다주던 일리안이었다. 디노는 그 말이 믿기지 않아 다시 한번 물었다.
“그 정도야 눈칫밥 조금 먹다 보면 알 수 있지. 그래서 처음엔 가만히 대화하는 걸 듣기만 했잖아.”
그것은 사실이었다. 분재원에 도착한 일리안은 당장 움직이려 들지 않고 가만히 그들이 하는 양을 바라봤다. 정원사들은 그녀를 힐끗대긴 해도 손님인가 싶어 가만히 둘 뿐이었다.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한 시간쯤이 지난 뒤였다. 게릭이 가지치기를 이어서 하기 위해 전정 가위를 들려는데, 주변을 둘러봐도 찾을 수가 없어 다른 전정 가위를 가져오려던 때였다.
“여기요, 여기. 이거 찾으시는 거 맞죠?”
“으응? 고, 고맙소. 그런데 저, 누구…….”
정원사 게릭은 그녀의 뒤에 있는 디노를 한 번 보고는, 눈치껏 제 앞에 있는 아이가 귀족이라는 사실을 알아내었다. 게릭의 나이가 훨씬 많기는 하지만 귀족이라는 지위 탓에 어색한 존댓말을 사용했다.
그러자 일리안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허, 참! 말 편하게 하세요! 지위가 먼저랍니까? 나이가 먼저죠.”
“그… 래도 될까?”
“그럼요. 아, 저도 게릭 형님이라고 부를까요? 나이 차도 얼마 안 나 보이는데.”
“뭐? 하하! 요놈 봐라.”
“아니었어요? 워어낙 젊어 보이셔서, 원.”
대화를 하면서도 일리안은 게릭의 손발에 맞추어 전정 가위나 물 따위를 연신 건넸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분재원에서 가장 다가가기 쉬우면서도 제법 연차가 쌓여 보이던 이가 게릭이었다.
그래서 원장이 그녀에게 대충 음료수나 쥐여 보내려 할 때 게릭이 나서서 이야기를 할 수 있던 것이었다.
이걸 모두 눈치로 알아차렸다고……? 디노는 제 앞에서 앞뒤로 손을 뻗어 박수를 짝짝 치며 걸어가는 일리안을 멍하니 바라봤다.
“헤이븐 님, 디노 경! 다녀오셨어요?”
기다리고 있었는지 타피아가 달려와 웃으며 그들을 맞이했다. 디노는 뻣뻣한 걸음으로 저택 내부로 들어갔다.
돌아온 일리안은 셔츠를 고정시키기 위해 착용하고 있던 서스펜더를 바지에서 풀었다. 상체를 조이던 서스펜더가 풀리자 일리안은 타피아에게 그것을 건넸다.
이어서 어린아이용 셔츠의 가장 윗단추를 푼 일리안이 말했다.
“목욕부터 해야겠다. 디노도 할 거지? 타피아, 나오면 식사 부탁할게.”
“네, 그럼요. 준비해 둘게요.”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던 디노는, 어쩐지 그 모습이 자신의 어린 시절 아버지가 돌아왔을 때와 비슷하다고 생각해 버렸다…….
* * *
그래도 아직 열두 살의 어린아이였기에 디노는 그녀가 며칠만 지나면 몸이 지쳐 그만두리라고 생각했다. 분재원의 정원사들도 그녀에게 딱히 큰 기대를 걸고 있진 않았다.
그러나 일리안은 꼬박 2주를 꾸준히 분재원에 나갔다. 디노 또한 그녀를 지키는 것 외에는 크게 할 일이 없었기에 부지런히 분재원에 나가야만 했다.
변화는 가장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됐다.
“헤이븐, 헤이븐! 내 전정 가위 못 봤어?”
“어, 그거 아까 빌 아저씨가 빌려가셨는데요!”
“빌, 이 자식이! 자기 담당 가위는 또 어디다 내버려 두고!”
“하나 가져다 드릴까요? 아까 빌 아저씨 전정 가위를 찾아뒀거든요.”
“그래주면 고맙지!”
그 말에 일리안은 정리하던 가지들을 내버려 두고 쪼르르 달려가 사다리 위로 전정 가위를 건넸다.
외에도 정원사들은 종종 일리안을 찾았다. 대부분이 나무를 관리하고 있기 때문에 높다란 사다리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 영 불편하기 때문이었다.
일리안이 대략 1달간 분재원에 나갔을 때쯤,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가 점점 곳곳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마침내는 하루 동안 그녀를 한 번도 부르지 않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헤이븐, 오늘 점심은 뭘 거 같아?”
“음……. 원장님이 아침에 밀가루가 드시고 싶다던데. 면이 아닐까요?”
“그 사람은 허구한 날 면이야!”
“그럼, 제가 슬쩍 빵은 어떠시냐고 물어볼게요. 요 앞 카페에서 샌드위치가 새로 나왔대요.”
목을 꺾어 사다리 위에 앉은 게릭을 바라보며 일리안이 씩 웃자 그 또한 엄지를 척 들어 올렸다.
그녀를 따라다니는 동안 디노도 놀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첫 출근 날 아무것도 모르고 그녀를 따라왔을 때는 윈터 남작 가의 제복을 입고 있었지만, 지금은 편안한 차림이었다.
작은 몸으로 몇백 평은 되는 분재원을 분주하게 오가는 일리안을 따라 이것저것 일을 도왔다. 큰 힘을 써야만 하는 일들이 대개 그의 몫이었다.
그렇게 고단한 1달을 보내자, 먼저 원장이 일리안을 불렀다. 꽃 따위로 이리저리 어지럽혀진 나무 책상 위로 원장이 흰 봉투를 건넸다.
“이건 이번 달 월급. 헤이븐, 고생했다.”
“제가 무슨 고생을 했다고요. 다 정원사 아저씨들이 하신 거죠.”
처음엔 조금 낯을 가리는 것 같던 원장도 이내 1달 동안 일리안의 서글서글한 웃음을 보자 결국 참지 못하고 푹 웃었다. 그리곤 고개를 돌려 그녀의 곁에 선 디노를 바라봤다.
“이건 디노 씨 몫.”
“예, 예? 전 제대로 고용된 게…….”
“아이고, 내가 그 정도로 도리가 없을까 봐? 멀쩡한 사람 가져다 쓰는데 값은 치러야지.”
“고, 고맙습니다…….”
열두 살 아이보다 숫기 없어 보이는 디노가 두 손으로 그것을 받자 원장은 가보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다른 정원사들은 이미 모두 퇴근한 뒤였다.
분재원을 나오자마자 일리안이 흰 봉투의 입구를 벌려 한쪽 눈을 찡그렸다. 액수를 대강 짐작하는 그녀를 따라 디노도 자신의 흰 봉투를 열었다.
“디노, 얼마 받았어?”
“천 골드를… 받았습니다.”
“오, 그래? 많이 받았네.”
“실례가 아니라면 헤이븐 님은 얼마 받으셨습니까?”
천 골드면 대략 1인 가구의 한 달 생활비 정도였다. 제대로 고용한 것도 아닌 데다 아무리 그들을 잘 돕는다고 하더라도 정원사는 아니니 이 정도만 해도 큰돈이었다.
디노의 물음에 한 손으로 제 어깨를 주무르던 일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친 일리안은 샐쭉 웃으며 말했다.
“천 2백 골드.”
“예? 정말이십니까?”
“왜, 내가 더 받아서 질투 나?”
농담이라는 듯 흐흐, 웃은 일리안은 고개를 다시 앞으로 돌렸다. 그녀는 디노에게 질투라도 나냐고 물었지만 사실 디노는 그렇지 않았다.
조금 놀란 것은 사실이지만 얼마 안 가 역시…, 라는 생각이 든 탓이었다. 디노는 힘쓰는 일을 했지만 일리안은 분재원의 전반적인 일들을 도맡아 했다.
천생 정원사인 원장이 머리 아파하는 장부 정리도 도와줬고, 처음 맡았던 사소한 잡일들도 허투루 하지 않았다. 오늘도 원장이 그만두라는 말을 하지 않았으니 당연히 다음 달도 나오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좋아, 월급도 받았겠다. 오늘은 타피아한테 고기라도 사다주자! 어때?”
“예, 좋습니다!”
일리안이 먼저 오른손을 들어 올리자 디노는 잠시 고민하다 그 손에 자신의 손을 맞부딪쳤다. 여실히 차이 나는 손 크기를 보고서야 또 한 번 그녀가 열두 살이라는 사실을 상기했다.
고기를 사기 위해 평소와는 달리 상가를 거쳐갈 때였다. 일리안이 먼저 누군가를 알아보곤 손을 흔들었다.
“알렉 형님! 저녁 반찬 사러 왔어요?”
“응? 으응……. 계란을 사러…….”
알렉이라 불린 청년은 분재원에서도 제법 젊은 축에 속하는 이였다. 대부분이 중년인 이들에 비해 아직 삼십 대 초반인 그는 소심한 성격으로 유명했다.
오늘도 친근하게 구는 일리안이 다가오자 주춤 물러섰다. 하지만 일리안이었으니 그 정도였지, 만약 다른 사람이 다가왔다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리를 떴으리라.
“알렉 형님, 계란은 이쪽이 더 싱싱해. 여기 아줌마는 꼭 싱싱한 걸 안쪽에 두더라?”
“그, 그래……?”
알렉은 전혀 몰랐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안쪽에 있던 계란을 집어 들었다. 가게 주인이 나와 계산을 치를 때도 일리안이 슬쩍 그녀에게 말했다.
“아니, 여기 주인 바뀌었어요? 내가 알기로 핀트 아주머니셨는데.”
“어머? 내가 핀트인데. 넌 누구니?”
“예? 너무 젊어지셔서 몰라뵀습니다! 무슨 비약이라도 쓰셨어요?”
아이의 능청스러운 칭찬에 주인은 재밌다는 듯 웃더니 알렉에게 계란 두어 개를 더 넣어 내밀었다. 일리안은 그녀에게 제 이름을 가르쳐 주곤 알렉과 디노를 데리고 가게를 나섰다.
양 갈래 길에 서서 일리안과 디노가 저택으로 돌아가려던 순간이었다. 알렉이 손가락을 꼼질거리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헤이븐……. 너만 괘, 괜찮다면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