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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죽음을 바칠 시간-5화 (5/123)
  • 5. 돈 벌러 가야지, 가장이잖아.

    금고 안은 먼지만 쌓이지 않았을 뿐 오래된 흔적이 보였다. 일리안이 그곳에 팔을 집어넣자 그녀의 몸 모두가 들어갈 것처럼 빨려들어 갔다.

    무릎으로 금고의 바닥을 짚고 안으로 들어간 일리안은 얼마 안 가 머리를 빼냈다.

    “아니, 이게 여기 있었어?”

    “뭔데요?”

    곁에 있던 은행원이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일리안이 번쩍 들어 올린 것은 어린아이들이나 쓸 법한 작은 활이었다.

    용병이었던 일리안 하인리히는 다른 무엇보다도 활로 유명했다. 그녀의 활 솜씨는 근방의 대형 용병단 몇 개를 뒤져도 찾기 힘들 정도로, 저명한 명사수였다.

    일리안이 즐거운 눈으로 활을 만지작거리는 사이 율리어스가 금고의 앞에 섰다. 조금 고개를 숙인 율리어스는 한 손으로 금고의 윗부분을 붙잡고 느릿하게 내부를 살폈다.

    자신의 금고에 별다른 관심이 없던 일리안은 그사이 은행원과 금고 안의 골드를 옮기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율리어스 님. 찾으시는 게 있으십니까?”

    가이우스는 그사이 율리어스의 뒤에 다가가 자신도 슬쩍 금고의 내부를 바라봤다. 둘러보던 율리어스가 갑작스럽게 손을 뻗어 뭔가를 들어 올린 것은 그때였다.

    “가이우스.”

    “예, 율리어스 님.”

    그것은 펜던트였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를 부른 율리어스는 그저 제 손에 쥐어져 있는 펜던트의 중심에 박힌 수정을 눌렀다. 그러자 어렸던 일리안 하인리히와 그녀의 부모님 모습이 허공에 떠올랐다.

    활을 만지작거리던 일리안도 고개를 돌려 마법 영상을 바라봤다. 3명의 인물들은 모두 손을 붙잡고 어색한 얼굴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처음 찍는 마법 영상이 못내 민망한지 자꾸만 몸을 틀었고, 일리안은 왠지 모르게 불퉁한 얼굴인 채였다. 대략 1, 2초 정도의 짧은 움직임이 펜던트에 담겨 있었다.

    일리안은 그 펜던트를 보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험한 제 일의 특성상 망가지기 쉬울 것 같아 금고 안에 넣어둔 것이었다.

    율리어스의 앞에 다가간 일리안이 펜던트를 챙기기 위해 손을 뻗어 그의 손에서 펜던트를 가져가려던 순간이었다.

    “……이보세요?”

    미간을 찌푸린 율리어스가 일리안의 팔이 닿지 않도록 팔을 높이 들어 올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일리안 또한 눈썹을 꿈틀거렸다.

    “이야기했던 것과 다르지 않습니까?”

    “팔아라.”

    “그걸 어떻게 돈으로……!”

    “빚만 떠안은 채 감당도 하지 못할 저택이 있다고 했었나. 완전히 파산한 다음에야 팔 생각인가.”

    그렇게 되길 바라?

    율리어스의 건조한 눈이 일리안을 내려다보며 묻고 있었다. 그가 충분히 그렇게 할 만한 이라는 사실도 이제는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일리안의 하나뿐인 가족사진이었다. 결국 대답을 하지 못한 그녀가 입을 꾹 닫았다.

    율리어스는 그녀를 기다려 주지 않았다. 일리안에 대해 자신이 모르는 것을 다른 이가 알고 있다는 사실이 퍽 불쾌한 모양이었다. 그로서는 처음 보는 어린 시절의 모습에 욕심이 차올랐다.

    “일리안이 돌아오면 달라고 했습니다.”

    “내가 돌려주지.”

    “……괜찮아요. 저한테 부탁한 일인데,”

    “돌아올 때까지 안전하게 보관할 자신이 있나 보군.”

    율리어스가 일리안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자신이 맡는 순간 펜던트가 사라지거나 부서지리란 것을 깨달았다.

    그가 어떻게 해서든 그렇게 만들 것이라는 것도.

    이게 빼앗는 게 아니면 대체 뭘까. 그러나 일리안은 그도 아직 열다섯 살이라는 사실을 상기하고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날 제법 잘 따랐으니 사진이라도 가지고 싶은가 보지. 일리안은 그렇게 생각하며 결국 물러섰다. 사실, 금고를 만들고 한 번도 오지 않을 정도로 펜던트를 잊고 있기는 했다.

    “가지세요, 아주 다 가져 버리시죠.”

    일리안은 심술궂은 얼굴로 한 손을 내저었다. 그녀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가이우스가 황급히 달려와 두 손을 내밀었다.

    “율리어스 님, 저택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제가 보관하고 있겠습니다.”

    제 앞에 내밀어진 커다란 두 손을 바라보던 율리어스는 짧게 말했다.

    “아니.”

    단지 그렇게 말한 율리어스가 손을 휘젓자 공간이 찢어졌다. 말 그대로, 허공이 찢어지듯 입을 벌리며 새까만 공간이 드러났다. 그의 머리칼처럼 한 치의 빛조차 들지 않는 검은 공간이었다.

    그의 손에 신중하게 쥐어져 있던 펜던트가 아공간 속으로 사라졌다. 일리안은 자신도 처음 보는 율리어스의 마법에 잠시 멍한 눈으로 바라봤다.

    그를 알고 지낸 지 16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그는 단 한 번도 일리안의 앞에서 마법을 쓴 적이 없었다.

    가만히 그 모습을 보던 일리안은 이내 몸을 돌려 금고를 조금 더 뒤졌다. 그녀의 예상대로 금고의 구석에는 피다 만 담배꽁초도 남아 있었다.

    “담배가 그리울 줄은 몰랐는데…….”

    일리안은 조용히 중얼거리며 담배꽁초를 주워 들었다. 실제로 일어나자마자 물을 마시고서 자신의 손이 작아졌다는 사실만 몰랐다면 담배라도 한 대 필 생각이었다.

    그러고 나서는 자신이 처한 이 혼란스러운 상황에 간절히 담배가 그리워졌다. 자신의 몸은 아직 중독되지 않은 어린아이임에도 머릿속이 바란 터였다.

    일리안은 떨어진 담뱃갑에서 한 개비를 꺼내곤 자연스럽게 약지와 중지 사이에 꼈다. 활을 자주 잡아당겨 닳아버린 검지 대신 약지와 중지 사이에 담배를 끼우는 것은 일리안의 오래된 습관이었다.

    “어머! 너 누가 이런 걸 가르쳤니? 응?”

    다가온 은행원이 다급하게 그녀의 손에서 담배를 빼앗아 들었다. 열두 살 어린아이가 담배를 손에 쥐고 있으니 놀랄 법도 했다.

    일리안은 아쉬운 눈빛으로 그것을 바라보다 이내 포기했다. 만약 자신이 담배 냄새를 풍기며 돌아갔다간 타피아와 디노에게 외출 금지를 당할지도 몰랐다.

    일리안의 뒤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율리어스는 여전히 무미건조했다. 그는 일리안을 혼내는 은행원을 바라보다 이내 등을 돌렸다.

    “돌아가지, 가이우스.”

    나지막한 목소리를 들은 일리안 또한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복잡한 눈으로 사라지는 둘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 * *

    일리안은 제법 익숙해진 얼굴로 집무실 의자에 앉아 다리를 달랑거렸다. 사실, 그녀의 몸이 너무나도 작아 바닥에 다리가 닿지 않을 뿐이었다.

    금고 안에 있던 골드는 간신히 2만 골드를 넘는 정도였다. 그 정도면 아끼고 아껴 두어 달간의 저택 관리비와 타피아, 디노의 월급을 지급할 수 있을 터였다.

    용병이었던 일리안이 고소득인 건 사실이지만 현재의 일리안은 고작 서른 살에 불과했다. 거기다 금고에만 돈을 넣어뒀던 게 아니라 여기저기 분산해서 나누어두었으니, 돈이 많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이야기였다.

    애초에 그깟 낡은 금고 열쇠에 3천만 골드를 제안하는 율리어스가 이상한 것이었다.

    “그래도 돈이 필요해.”

    “네? 헤이븐 님, 뭐라고 하셨어요?”

    책상을 잡고 의자를 바싹 당겨 앉은 일리안이 양 팔꿈치를 책상 위로 올려뒀다. 그리곤 손을 모아 깍지 끼고는 제 턱을 받쳤다.

    희고 말랑한 젖살 탓에 전혀 위엄 있지는 못했지만, 찌푸려진 눈썹만큼은 제법 진지해 보였다.

    “타피아. 2만 골드면 얼마나 버틸 수 있겠어?”

    “바짝 아끼면 3달…, 아니, 2달 반 정도일 거예요. 디노와 제 월급을 조금 미뤄둔다 치더라도 수도 내 저택 관리비가 워낙 비싸다 보니…….”

    “역시 그렇지? 돈이 필요하지?”

    그러나 타피아는 그 물음에 곧장 대답하지 못했다. 헤이븐은 아직 열두 살이었고, 그런 아이에게 돈 문제를 논하는 건 못 할 짓이었으니까.

    타피아는 어쩌면 그녀의 말대로 저택을 파는 게 옳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르앙 자작 부인의 도움이 없다면, 어쩔 수 없이…….

    “그러니까 돈을 벌어야겠어.”

    “네, 네?”

    점점 숙여지던 타피아의 고개를 들어 올린 것은 일리안의 나지막한 목소리였다. 타피아는 자신이 들은 말이 믿기지 않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일리안을 바라봤다.

    “어, 어떻게요……?”

    “분재 사업.”

    은퇴를 하고 나서 짧게나마 무엇을 할지 고민했었다. 술집, 식당, 카페……. 여러 가지가 떠올랐지만 자신과 잘 맞는다고 생각한 것은 없던 터였다.

    아니, 있었다. 일리안은 나름대로 꽃을 좋아했다. 단지 거친 용병들 사이에서 살아오며 어쩔 수 없이 제 취향을 거세당했을 뿐.

    만약 그때 자신이 꽃집을 차린다고 말했다면, 그녀의 주변 이들은 하나같이 ‘네가?’라는 반응을 보일 게 당연해서 말을 하지 않았다.

    “윈터 남작, 아니, 아버지도 분재 사업을 하셨잖아. 그 유지를 이어보려고.”

    “하지만, 사업을 하려면 돈이 필요할 텐데…….”

    “타피아. 날 못 믿어?”

    제 입술을 만지작거리는 타피아와 눈이 마주친 일리안은 히죽 웃었다. 악동 같은 웃음이었지만 타피아는 어쩐지 그 모습에 오히려 안심을 느꼈다.

    그러나 잠시 고민하던 타피아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헤이븐 님, 헤이븐 님은 아직 열두 살이세요. 돈을 벌려고 하지 않으셔도 돼요. 저, 저와 디노 경이 어떻게든 해결해 볼 테니까…….”

    일리안은 그 말에 다소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용병이었던 아버지와 집시인 어머니는 그녀가 열 살일 때 죽었다. 부모님이 죽자마자 일리안은 자신의 밥벌이를 해야 했고, 그때부터 안 해본 일이 없었다.

    부모님을 닮아 집 없는 떠돌이 생활이 몸에 맞는 건 다행이었지만 자주 굶고 매번 추위에 떨어야만 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남겨주지 않은 부모님을 원망하진 않았다. 자신을 누구보다도 사랑했음을 알았으니까.

    “타피아. 열두 살은 안 굶어 죽어?”

    “네?”

    “조실부모한 열두 살을 누가 먹여 살려줘. 내 입에 풀칠도 내가 해야 하는 거야.”

    그 말을 하는 일리안은 웃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단호한 얼굴로 타피아에게 말하고 있었다.

    타피아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헤이븐 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와.”

    짧게 방문을 알린 디노는 문을 열고 들어서자 한 차례 혼난 얼굴인 타피아를 바라봤다. 일리안의 얼굴이 잠시나마 엄중해 보였던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일리안이 씩 웃으며 디노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야?”

    “그게, 세르앙 자작가에서 편지를…….”

    책상 위로 세르앙 가의 밀랍 인장이 찍힌 하얀색 편지가 올려졌다. 긴장한 얼굴인 디노와는 달리 일리안은 심드렁하게 편지 윗부분을 주욱 찢었다.

    [네 사교계 데뷔를 망치고 싶지 않다면 당장 내 앞으로 무릎을 꿇으러 와야 할 게다. 지금이라도 네 잘못을 인정하겠다면…….]

    거기까지 읽은 일리안은 지익, 직 하고 두어 번 편지지를 찢었다. 귀찮아 보이는 기색이 역력했다.

    “뭐, 뭐라고 적혀 있던가요, 헤이븐 님?”

    “사교계가 어쩌고 하는데.”

    “아……. 헤이븐 님께서도 3년 뒤에는 사교계에 데뷔를 하시겠군요.”

    “그거, 꼭 해야 하는 건가?”

    난 안 해도 될 거 같은데. 일리안은 속으로 뒷말을 덧붙였다.

    “그래도, 데뷔는 하셔야 할 거예요. 활동을 하지 않으시면 윈터 남작 가는 이대로 몰락하게 될 테니까요. 하지만 보통 첫 데뷔는 파티를 직접 열거나 주변에서 열리는 데뷔 파티에 나가야 하는데, 헤이븐 님께선 그럴 만한 지인이…….”

    80년이나 되었다는 이 저택은 윈터 남작의 분재 사업으로 인한 빚을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그럼에도 저택을 욕심내는 세르앙 자작 부인은 급하게 굴지 않았다.

    열다섯 살이 되면 어찌 되었든 헤이븐 윈터에게는 조력자가 필요할 테고, 어쩔 수 없이 그녀가 먼저 고개를 숙이고 들어와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3년 후잖아.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자. 지금부터 고민했다간 스트레스만 받는다고. 안 그래?”

    “……네, 그렇죠.”

    “그런 의미에서, 나는 오늘부터 좀 부지런히 움직여야겠어.”

    “어디 가십니까? 제가 함께 가겠습니다.”

    아직 앳된 얼굴의 디노가 딱딱한 표정으로 한 발 나섰다. 그사이 의자에서 뛰어내린 일리안은 기지개를 켜다 디노와 눈이 마주치곤 히죽 웃어 보였다.

    “돈 벌러 가야지. 이제 가장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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