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죽음을 바칠 시간-4화 (4/123)

4. 친구에 나이랄 게 있나요

고개를 돌린 일리안은 율리어스의 새까만 눈동자와 맞부딪치자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그의 눈에는 묘한 힘이 있었다. 율리어스를 안 지 16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이 어린 공작님은 그녀에게 늘 묘한 긴장감을 안겨주곤 했다.

고작 135센티에 불과한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던 율리어스의 시선이 옆으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은행원의 앞에 녹이 슨 열쇠가 놓여 있었다.

함께 그 시선을 따라갔던 일리안이 잽싸게 그 열쇠를 낚아챘다. 열쇠가 생명줄이라도 된 마냥 두 손으로 꼭 쥔 채였다.

“그거. 일리안 하인리히의 금고 열쇠인가?”

“아니, 아닌… 건 아니지만.”

“가이우스.”

율리어스가 나지막이 가이우스를 부르자 기다렸다는 듯 거구의 남성이 앞으로 나왔다. 그는 아직 꼬마 아이인 일리안에게 힘을 쓰고 싶지 않았는지 무릎을 꿇고 일리안과 눈을 마주했다.

“백만 골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예? 뭐라고요?”

“5백만 골드.”

가이우스의 시선은 아이의 두 손에 쥐어진 열쇠만을 향해 있었다. 일리안은 그 시선을 바라보고서야 그들이 고작 녹슨 열쇠에 5백만 골드를 넘기겠다는 말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천만 골드.”

천만이라는 숫자가 나오자 은행 내부에 있던 이들의 헉, 하는 신음 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왔다. 천만 골드면 당장 이 수도권 일대의 노른자 건물 서너 채는 거뜬히 살 수 있는 금액이었다.

일리안은 고민했다. 사실 자신도 돈이 필요해서 제 금고를 얻으려 했으니 당연한 이야기였다. 아니, 사실 그냥 천만 골드라는 금액에 혹했다.

“죄송하지만, 안 되겠습니다.”

“2천만 골드.”

일리안이 거부하자마자 곧바로 가이우스의 뒤에 있던 율리어스의 나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 숫자에 주변 이들에게서 컥, 커헉 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3천만.”

“거, 말 좀 듣고 합시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니까?”

아이는 영 성가시다는 듯이 제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러자 율리어스가 눈을 가늘게 뜨며 일리안을 바라봤다.

“가이우스, 자리를 마련하라.”

“예, 공작 전하.”

가이우스는 짧게 고개를 숙여 율리어스에게 예를 표하고는 굽힌 무릎을 피지 않고 일리안에게 말했다.

“함께 가셔야겠습니다, 헤이븐 윈터 님.”

일리안은 그들이 제 이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의문을 가졌다. 그러다 은행원의 앞에 아직 자신이 내밀었던 신원 증명서가 있다는 걸 깨닫곤 고개를 끄덕였다.

* * *

율리어스와 가이우스는 마차를 타고 온 듯했지만 멀리 갈 생각이 아니었는지 걸어가고 있었다. 키가 큰 둘에 비해 다리가 짧은 일리안은 재게 걸음을 움직였지만 역부족이었다.

전혀 걸음을 봐주지 않는 율리어스 탓에 일리안은 거의 달려야만 했다. 그러자 먼저 갔던 가이우스가 돌아와 다시 무릎을 굽히고 그녀를 마주했다.

“실례하겠습니다, 헤이븐 윈터 님.”

가이우스는 산처럼 커다란 몸으로 일리안을 번쩍 들어 올렸다. 장장 190센티가 넘는 사내의 품에 안기자 커다래 보였던 건물들이 작게 보이기 시작했다.

상당히 안정된 폼으로 일리안을 안았던 가이우스가 그녀를 내려둔 곳은 카페였다. 척 보기에도 사치품들이 가득한 것이 일반인이 즐기기엔 무리가 있어 보였다.

가이우스의 품에서 내려온 일리안은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율리어스는 이미 자리에 앉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가 필요하지?”

“예?”

“윈터 남작이 사망한 뒤 분재 사업에 실패했지. 그 빚을 갚아주길 원하나? 아니면, 그 낡아가는 저택을 감당할 돈이 필요한가.”

자리를 옮기는 동안 벌써 헤이븐 윈터에 대한 조사가 끝났는지 율리어스는 표정 없는 얼굴로 그녀의 재산 상황을 읊고 있었다.

일리안은 그 하얀 얼굴을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러자 다시금 율리어스의 눈이 가늘어지며 그녀를 바라봤다.

“왜 웃지?”

“예? ……아닙니다. 제가 아는 사람과 닮아서요.”

지금 그가 열다섯 살이라면, 자신은 서른 살일 터였다. 그래, 바로 이맘때였다.

서른 살의 자신은 리하르트 공작 가문에 고용되어 일을 했었다. 그 유명한 리하르트 가문에서 경호 차원의 일을 용병으로 대체한다는 게 이상한 일이긴 했지만, 높은 금액 탓에 들어왔었다.

“달마다 천만 골드를 주겠습니다.”

“예?”

“2천만.”

“아니, 유리. 잠시만,”

“3천만 골드.”

일리안은 종종 율리어스를 유리라고 부르곤 했다. 그를 처음 봤던 때가 아홉 살이었던 데다 처음엔 율리어스가 공작이라는 귀한 신분인지도 몰랐던 터라 감히 애칭으로 부르곤 했었다.

그러나 경호 일에 답답함을 느낀 일리안은 그해 네 번째 달에 이르러 공작가를 나왔다. 곧장 전쟁터로 향하겠다는 자신에게 유리는 고용을 연장하고자 3천만 골드를 부른 것이었다.

물론, 그것도 거절했었지만.

일리안은 젊었던 자신의 패기를 떠올리고는 픽 웃었다. 그때는 돈보다도 중요한 것이 있다고 믿었다.

“아까 전에도 말했지만, 돈은 괜찮습니다.”

“팔 생각이 없다는 말인가.”

“예. 이건 제 것이라서요.”

3천만 골드를 얻어 돌아간다면 자신을 둘러싼 문제들이 풀리긴 하겠지만, 이대로 유리에게 열쇠를 건넬 순 없었다. 금고 내에는 돈 말고도 제 물건들이 가득했다.

“돈이라도 받고 열쇠를 주는 게 좋을 텐데.”

“협박하시는 겁니까?”

“그래. 난 그 열쇠를 포기할 생각이 없으니까.”

율리어스는 자신이 어린아이를 협박하고 있다는 것을 순순히 인정했다. 열두 살 어린아이를 보는 그의 눈에는 조금의 동정도 없었다.

유리는 평소 이런 성격이었군. 일리안은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안 하인리히의 앞에서 늘 존댓말을 쓰던 어린아이는 오간 데 없었다. 그의 평소 성격이 제 앞에서와 다르단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녀의 생각보다도 그는 더 오만했다.

“이 열쇠가 왜 필요하십니까?”

“내가 알려줘야 할 이유가 있나?”

“필요한 이유를 말씀해 주셔야 저도 고민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말한 일리안은 씩 웃었다. 그 유명한 리하르트 공작의 앞에서 조금도 기죽는 기색이 없었다.

“―일리안 하인리히의 것이니까.”

“예?”

“그뿐이다.”

일리안 하인리히의 것은 당연히 제 것이라고. 그의 오만한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 안 되겠는데요. 저도 여기 금고 안에 든 게 필요해서.”

일리안이 그렇게 말하자마자 율리어스는 눈을 번뜩였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파충류의 그것처럼 번들거렸다.

“그 안에 든 것을 알고 있나?”

“뭐……. 나름대로.”

“어떻게.”

거기까지 말했을 때였다. 율리어스가 제 왼쪽에 차고 있던 검을 빼어 든 것은 순식간이었다. 율리어스는 일리안의 턱 아래에 날카로운 검날을 가져다 대며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렸다.

“넌 일리안의 무엇이냐.”

네가 감히.

그는 눈빛으로 그렇게 물어오고 있었다. 자신이 모르는 걸 다른 이가 알 리가 없다는 것처럼.

그렇게 묻는 율리어스의 눈에는 한 치의 동요도 없었다. 그의 하얀 얼굴은 한결같이 차갑고 무미건조했다.

“어……. 글쎄, 굳이 말하자면… 친구……?”

일리안은 곤란한 눈으로 슬쩍 웃으며 제 볼을 긁었다. 갑작스레 목이 베일 위기에 처하자 놀란 것은 사실이었지만, 용병이었던 그녀가 무서울 정돈 아니었다.

단지 율리어스의 검술이 자신의 눈으로 잡기도 힘들 만큼 놀라울 정도였구나, 했을 뿐.

“친구?”

“예. 뭐, 열여덟 살쯤 차이가 나긴 하지만……. 친구에 나이랄 게 있나요.”

다른 사람이 듣기에 말이 되지 않으리란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일리안은 본인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성격상 열여덟 살 차이 나는 친구쯤 얼마든지 사귈 수 있다는 것을.

친구라는 이야기에 율리어스가 순식간에 검을 집어넣었다. 검을 갈무리한 그는 여상한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실례했군.”

“아니요, 괜찮습니다.”

“열쇠는 그녀가 맡긴 것인가?”

“예. 떠나기 전에 맡기고 갔어요.”

일리안은 자신이 어차피 10년 후의 일리안이니 거짓말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서글서글한 웃음을 지으며 그를 바라봤다.

율리어스는 그녀가 전쟁을 치르기 위해 떠났다는 이야기마저 알고 있자 의심 없이 믿는 것 같았다.

“그래서요. 제가 제안 하나 해도 괜찮겠습니까.”

“말하라.”

“내부가 궁금한 거 아닙니까. 그렇죠?”

안에 든 것은 별로 없지만.

제 금고 안에 피다 만 담배꽁초 따위의 쓰레기도 있다는 걸 상기해 낸 일리안이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물었다. 율리어스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제가 보다시피, 열두 살이라서요. 열다섯 살 이상은 되어야 금고를 확인할 수 있다던데.”

“내가 확인해 주겠다.”

“정말이십니까?”

일리안은 눈을 둥그렇게 뜨며 테이블 위에 올려진 율리어스의 손을 와락 잡았다. 그러자 뒤에 있던 가이우스가 눈을 찌푸렸다.

율리어스 또한 잡힌 제 손을 내려다보다 더러운 것을 떼어내듯 그녀의 손을 툭 쳐냈다. 민망해진 손을 들어 올린 일리안이 뺨을 긁적였다.

“그런데, 안에 든 물건을 드릴 순 없어서요.”

“보는 걸로 충분하다.”

“그럼 계약 성립했습니다. 자, 어서 가죠!”

의자에서 뛰어내린 일리안이 씩씩하게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얼마 안 가 가이우스의 품에 다시 안겨야 했지만.

* * *

금고 보관함으로 내려가는 마법 이동 박스는 나무로 만들어져 상당히 낡아 있었다. 가이우스가 올라섰을 땐 폭삭 내려앉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이동 박스의 나뭇결을 따라 손가락을 훑는 율리어스를 대신하듯 가이우스가 중얼거렸다.

“일리안 님께선 왜 이리 낡은 곳으로 선택하셨을까요.”

대답을 바라고 물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의외의 목소리가 가이우스의 한참 아래에서 흘러나왔다.

“그게, 이거 만들 땐 돈이 없었거든…….”

“……뭐?”

“아, 아니. 돈이 없었나 보다, 하고.”

일리안은 어색하게 웃으며 뒷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이동 박스가 덜컹거리며 멈춰 서자 일리안은 도망가듯 밖으로 빠져나갔다.

이동 박스에 서 있던 가이우스와 율리어스는 그 조그만 등을 바라보며 이동 박스에서 내려섰다. 가이우스가 내려설 때는 올라설 때와 마찬가지로 덜컹거렸다.

“가이우스.”

“예, 주군.”

“체중 조절을 해야겠군.”

그러자 가이우스는 시무룩한 얼굴로 제 몸을 내려다봤다. 울퉁불퉁한 몸매는 조금의 지방도 허락하지 않고 균형 있는 근육이 잡혀 있었다.

“이쪽이세요, 일리안 하인리히 님의 금고.”

“아, 여기요. 맞아, 자리가 안 좋다고 한참 투덜댔었지.”

일리안은 은행원과 벌써 친해진 듯 별 이야기를 다 나누고 있었다.

루비색의 금고는 다른 금고들과 동떨어진 채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 앞에 선 일리안이 침을 삼키며 녹슨 열쇠를 가져다 댔다.

끽, 끼긱.

열쇠가 잘 돌아가지 않자 가이우스가 다가서서 일리안의 손을 붙잡고 같이 열쇠를 돌렸다. 철컥이는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기름칠이 잘 되어 있던 모양인지 금고가 미끄러지듯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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