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죽음을 바칠 시간-3화 (3/123)
  • 3. 금고의 주인

    일리안은 헤이븐 윈터에게 생각보다 문제가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헤이븐 윈터가 문제가 아니라 아이를 둘러싼 많은 것들이 문제였다.

    첫 번째로, 윈터 가는 망했다. 그것도 처절하게.

    “아니, 무슨 빚이 이렇게…….”

    “그게, 이 저택을 감당하려면 어쩔 수 없었어요. 다달이 저택 관리비로 나가는 돈만 해도…….”

    “그래도 그렇지. 나 남작 가문 아니었어? 모아둔 돈이 없진 않을 것 같은데?”

    자신보다 훨씬 큰 의자에 앉은 일리안이 건성으로 서류들을 들추며 물었다. 그곳은 전 윈터 가의 가주, 즉 그녀의 아버지가 앉아 집무를 보던 곳이었다.

    “윈터 남작님께서 돌아가신 뒤로 작게 하시던 분재 사업마저 폭삭 망했어요. 그래서 고용인들도 저와 디노 경밖에 남지 않았구요.”

    타피아의 말대로 넓지만 초라한 저택 내부에는 일리안과 타피아, 그리고 디노만이 살고 있었다. 대충 들어보니 그들 나름대로 윈터 가에 평생을 바치기로 결심했다는 모양이었다.

    갖가지 빚더미 내용들을 살펴보던 일리안은 한쪽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딱히 고민한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저택을 팔아야겠네.”

    “네?! 저, 저, 저, 저택은 무려 80년간 대를 이어온 윈터 가의 마지막 자존심인데……!”

    “그럼 어쩌겠어. 이 사업들 때문에 진 빚이야 내가 양도받을 재산을 포기해서 없앤다 치더라도, 집 때문에 다달이 나가는 비용은 감당 못 할 것 같은데?”

    종이를 들추며 턱을 괸 일리안은 무신경한 말투로 읊조렸다. 그녀의 이야기는 너무나도 현실적이었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타피아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떨어뜨릴 것처럼 단번에 눈시울을 붉혔다.

    “어떻게 그런 말씀을……. 윈터 남작께서 이 저택만은 꼭 지켜내야 한다고, 헤이븐 님께 늘 말씀하셨잖아요!”

    “어, 어어, 타피아. 울지 마,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응? 나 여자 달래는 건 쥐약이라고.”

    타피아가 끝내 눈가를 소매로 훔치자 이제껏 의자에 앉아 있던 일리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짧은 다리로 도도도 달려온 일리안은 팔을 한껏 뻗어 타피아의 눈물을 닦아줬다.

    “알겠어, 저택을 판다는 소리는 안 할게. 절대로.”

    “정말이죠……? 저도 백방으로 알아볼게요. 저택을 지킬 방법을요!”

    타피아는 자신보다 키가 작은 일리안을 위해 허리를 굽혔다. 눈이 마주친 타피아는 어떻게 해서든 돈을 구해오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생각보다 일이 힘들어지겠는데. 낮게 한숨 쉰 일리안은 제 볼을 긁적이다 결국 타피아에게 말했다.

    “그래. 나도 알아볼게. 대신, 그러려면 내가 다녀와야 할 곳이 있는데…….”

    * * *

    디노 경과 함께 가라는 타피아의 말을 한사코 거절하고 겨우 빠져나온 일리안은 머리 위로 기지개를 켰다. 심란한 자신의 마음과는 달리 따사로운 태양빛에 눈을 가늘게 떴다.

    돈이라, 돈…….

    그녀는 평생을 떠돌이 용병으로 살아왔지만 죽기 직전에 이르러서는 돈이 부족하지 않았다. 생활에 필요한 금액을 소속된 용병단에서 지급해 주기도 했을뿐더러, 그녀 자신의 몸값도 값비싼 터라 고급 의뢰만이 들어오는 탓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게 다 무슨 소용이던가. 열두 살의 망할 꼬맹이 헤이븐 윈터에게는 단 한 푼의 돈도 없었다. 저기 사탕을 들고 지나가는 꼬마보다도 가난하리라.

    하아, 짧게 한숨 쉰 일리안은 퍽퍽한 걸음으로 움직였다. 열두 살 아이치고는 가장의 무게를 견디는 것처럼 걸음걸음이 묵직했다.

    잰걸음으로 움직이던 일리안이 멈춰 선 곳은 천으로 대강 햇빛만 가려둔 문의 앞이었다. 어느샌가 도시의 골목 구석까지 들어와 있었다.

    “여, 타파 할멈. 살아 있어?”

    먼지가 자욱하게 이는 천을 들춰내고 안으로 들어선 일리안은 익숙하게 집주인을 찾았다. 살아 있냐고 묻는 질문에는 일말의 그리움도 담겨 있었다.

    “고얀 것! 일리안, 어딜 갔다 이제 오는 게야!”

    “아, 미안해. 요새 옆 도시에서 의뢰가 쏟아졌잖아. 거기 좀 다녀왔지.”

    등을 돌리고 있던 타파는 무거운 몸을 천천히 돌려세웠다. 몸을 돌려세운 타파의 눈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녀는 맹인이었다.

    “그런데 일리안, 목소리가 꼭 회춘이라도 한 것처럼 젊어졌구나?”

    “뭐, 감기 기운이라도 도나 보지. 으슬으슬한 게 딱 그렇네.”

    “예끼, 이 날씨에 무슨 감기야! ……차라도 마실 테냐?”

    버럭 소리 질렀던 타파는 그러면서도 이미 주전자에 물을 받고 있었다. 미적지근한 찻물이 이가 잔뜩 나간 찻잔에 담겨 나온 것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그래서, 무슨 일이냐. 네가 나를 허투루 찾을 리도 없고.”

    “무슨 섭섭한 소릴. 타파 할멈 살아 있는 거 확인하려고 내가 수도에 얼마나 뻔질나게 왔었는데!”

    미지근한 차를 단박에 들이켠 일리안이 찻잔을 탕 소리가 나도록 내려뒀다. 타파는 심술궂은 표정으로 일리안의 찻잔에 다시금 물을 따랐다.

    눈이 보이지 않는 맹인이었지만 일리안이 한 번에 얼마만큼의 차를 마시는지 훤하게 알고 있기에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다른 게 아니고, 저번에 맡겨뒀던 열쇠 있지? 그거 찾으러 왔어. 그 왜, 옛날에 내가 반질반질한 열쇠 하나 맡겼었잖아.”

    “돈 필요하냐? 빌려줘?”

    “할멈이 돈이 어디 있다고! 됐어, 그 돈으로 낡아빠진 찻잔이나 바꿔. 저번에 내가 사다준 건 또 왜 안 써?”

    10년 전 이맘때에 타파에게 이런저런 물건들을 사다줬다는 것을 떠올린 일리안이 눈을 찡그리며 물었다. 그러나 타파는 대답하기 싫은 듯 골골대며 제 뒤에 놓인 찬장을 뒤적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어디 보자……. 그래, 여기. 이거 맞지?”

    “이건 또 왜 녹이 이렇게 슬었어?”

    “가져다 버리려다 안 버린 걸 감사히 여겨라, 요놈아!”

    타파가 녹슨 열쇠를 내밀자 일리안은 한 손으로 그것을 받아 들었다. 그러다 서로의 손이 조금 스쳐 지나가자 타파가 감은 눈을 찌푸렸다.

    “손이 작아진 것 같은데?”

    “응? 하하, 이 할멈이 벌써 노망이 났나. 손이 어떻게 작아져?”

    “손 다시 내밀어봐라.”

    “타파! 내가 바쁜 일이 있어서, 으응? 이만 가볼게.”

    일리안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슬슬 뒤로 발을 내뺐다. 그녀가 그렇게 나가면 적어도 1, 2년은 돌아오지 않으리란 것을 아는 타파가 노성을 질렀다.

    “뒤지기 전엔 오지도 마!”

    “섭섭하게 말하기는. 또 올 거야. 아주 수시로 들락거릴 거야!”

    툴툴거린 일리안은 이내 천을 거두고 밖으로 나왔다. 고개를 돌려 자신이 나온 낡고 허름한 건물을 바라보던 일리안의 얼굴 위에는 웃음기가 없었다.

    타파, 그녀에게 당신이 지금으로부터 3년 뒤에 죽는다는 이야긴 할 수 없었다.

    * * *

    열쇠에 달린 끈에 손가락을 넣은 일리안이 그것을 휘휘 돌렸다. 열쇠는 아슬아슬하게 빠질 듯 빠지지 않고 있었다.

    무릎이 보이는 반바지에 멜빵을 입은 일리안은 머리가 그리 길지 않아 소년처럼 보이기도 했다. 짧은 다리를 열심히 움직여 그녀가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은행이었다.

    은행은 생각보다 한산했다. 평일 오전에 은행을 오는 이는 일을 하지 않는 자들 빼고는 별로 없는 덕분이었다.

    창구 앞에 선 일리안이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요.”

    “…….”

    그러나 아무런 대답이 없자 일리안은 눈을 찌푸렸다. 결국 아이는 손을 들어 테이블 위를 똑똑 두드려야만 했다. 안쪽에서 일리안의 머리통이 겨우 보이는 높이였다.

    “꼬마야, 엄마 잃어버렸니?”

    “아뇨, 은행에 볼일이 있어 왔습니다만.”

    “그래, 그래. 그럼 엄마 데리고 오렴.”

    창구에 있던 여자는 일리안의 키를 힐끗 확인하고는 이내 다시 하던 업무로 돌아갔다.

    “윈터 남작 가에서 나왔습니다, 은행원님. 제 명의…, 아니, 본 은행에서 보관 중인 금고를 확인해야 해서요. 등록된 열쇠만 있으면 신원을 확인하지 않고 열람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는데요.”

    그 말을 듣고서야 은행원은 고개를 빼꼼 내밀어 아이를 확인했다. 그러자 테이블 너머에서 한 꼬마 아이가 씩 웃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일리안은 혹여나 자신이 아니라 다른 이에게 금고를 확인해 달라고 해야 할 일이 생길까 봐 부러 보안이 높지 않은 은행에 맡겨둔 것을 다행이라 생각했다.

    “윈터 남작 가라고 했니?”

    “예, 맞아요. 헤이븐 윈터라고 합니다.”

    아이는 제법 나이에 비해 또랑또랑해 보였다. 그래도 은행원은 귀찮다는 기색이 가득했다. 은행원은 무심한 어조로 일리안에게 말했다.

    “우리 은행이 금고 등록자와 신원을 대조하지 않는 건 맞지만, 그래도 신분증은 확인하거든. 헤라프 제국은 열다섯 살 이하에게는 신분증이 나오지 않는 걸 알지? 아쉽게 되었구나.”

    “그러실까 봐 제가 윈터 남작 가의 이름으로 귀족 증명서를 떼어왔죠. 여기, 헤이븐 윈터라는 이름 보이시죠?”

    창구 테이블 위로 종이를 슥 밀어 넣은 일리안은 말랑한 손가락을 꼼질대며 제 이름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정말로 ‘헤이븐 윈터’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것도 헤라프 제국의 직인이 찍혀 있는.

    아이는 그 종이를 내밀며 히죽 웃어 보였다. 이어서 능청스럽게 열쇠를 내밀었다.

    “여기. 어서 확인 좀 부탁드립니다. 제가 여간 바쁜 게 아니라.”

    몸집은 고작 열 살이나 되었을까 싶은 아이가 하는 짓은 어째 백 년 묵은 구렁이 같았다. 떨떠름한 얼굴로 종이를 확인하던 은행원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움직였다.

    이제야 제 금고를 확인할 수 있나 싶어 어서 마법 이동 박스를 탈 준비를 하던 일리안은 그녀가 정반대편으로 움직이자 멈칫했다.

    은행원은 금고를 보관하는 지하 보관실이 아니라 자신보다 높은 이에게 간 것이었다.

    은행원이 돌아온 것은 그러고도 20분여가 지난 뒤였다.

    “많이 기다렸지? 열두 살 아이가 금고를 확인하러 온 건 처음이거든.”

    “하하, 뭘요. 저야말로 바쁘신데 번거롭게 해서 죄송합니다.”

    아이는 말쑥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받았다.

    “그런데 이걸 어쩌니. 열다섯 살 미만의 아이에게는 금고를 보여줄 수가 없다는구나.”

    “예?! 어째서요?!”

    단박에 창구에 몸을 붙인 아이가 눈을 크게 뜨며 은행원에게 물었다. 여자도 짐짓 미안하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헤라프 제국법상 열다섯 살 미만의 아이는 은행 업무 시 법정 대리인, 그러니까 보호자가 필요하거든.”

    일리안은 그 말에 미간을 잔뜩 좁혔다. 법정 대리인이라는 말에 세르앙 자작 부인이 떠올랐으나 그 즉시 생각을 지웠다. 그 고약한 여자가 제 말을 따라줄 리가 없었다.

    어차피 신원을 확인할 필요가 없다면, 타피아나 디노에게 부탁해도……. 아니, 그들에겐 일리안의 금고를 뭐라 설명할 텐가?

    일리안이 그런 고민을 하던 찰나였다.

    “……님! 어, 어찌 따로 연락을 주시지 않고……. 무, 무슨 일이십니까?”

    “일리안 하인리히의 금고를 확인하러 오셨습니다.”

    “아아, 일전에 말씀하신 그것 말이지요? 준비해 두었습니다. 금고 등급 순서는 차례대로…….”

    난데없이 들려온 제 이름에 일리안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곳에는 새까만 머리의 남자가 거구의 수행원을 이끌고 서 있었다. 척 보기에도 은행에서 가장 높은 이가 튀어나와 손을 비비고 있는 채였다.

    율리어스 알 리하르트. 일리안은 그 검은 머리의 소년을 알고 있었다.

    소년은 열다섯 살이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미 170센티의 키를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새하얀 얼굴에는 일말의 표정조차 없어 아무도 그를 열다섯 살의 소년이라 짐작하기가 어려워 보였다.

    “사파이어로 하겠다. 지금 이동할 수 있는가?”

    “아이고, 그럼요. 당연하지요! 어서 보관실로 내려가셔서 같이 확인하시죠!”

    그들이 하는 양을 게슴츠레한 눈으로 지켜보던 아이는 다시 제 눈앞의 은행원을 불렀다. 높은 창구의 테이블에 딱 달라붙은 채였다.

    “저기요. 열쇠가 있는 저는 안 되고 왜 열쇠도 없는 저치는 된답니까?”

    “어머, 저치라니. 얘, 너 말조심하렴. 저분은 그 유명한 리하르트 공작님이시잖니!”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죠. 이쪽은 열쇠도 있는데!”

    “아이, 참. 저분도 금고 안을 확인하시는 건 아니야. 매년 주기적으로 금고를 높은 등급으로 바꾸실 뿐이지.”

    “예? 어째서요? 유리, 아니 리하르트 공작님이 왜 내 금고를……?”

    일리안은 처음 듣는 이야기에 눈을 둥그렇게 떴다. 자신의 금고가 해마다 높은 등급으로 바뀌고 있었다니?

    그도 그럴 것이, 일리안은 40년이란 삶을 살면서 금고에 차곡차곡 돈을 모으긴 했으나 열람하진 않았다. 따로 모아둘 곳이 없어 넣어둔 것이지, 크게 돈 필요할 일이 없던 탓이었다.

    그때였다. 일리안의 작은 어깨를 누군가 붙들었다.

    “열쇠라,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는군.”

    일리안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거구의 수행원을 뒤에 단 새하얀 얼굴의 율리어스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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