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죽음을 바칠 시간-2화 (2/123)
  • 2. 헤이븐 윈터의 아침

    “……일어 …텐데.”

    “의원은… 했어. 조금만 기다리면…….”

    일리안이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렸다.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정신이 없어 그것을 알아차리지도 못한 채였다.

    “헤이븐 님? 헤이븐 님!”

    “타피아, 무슨 소리야. 헤이븐 님이 눈을 뜨려면 조금 걸린다고…….”

    흥분한 여성을 가라앉히려던 침착한 목소리가 이내 뚝 끊겼다. 여자를 타피아라 불렀던 사내 또한 침대에 누워 있던 이가 눈을 뜬 것을 발견한 탓이었다.

    “의, 의원. 의원을 불러와야겠어요, 디노 경!”

    “어, 어……. 알겠어. 아직 멀리 가지 않았을 거야!”

    몸을 돌리며 다급하게 소리친 남자는 쾅,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일리안은 그 소리를 듣고서야 깨질 듯한 머리를 부여잡고 정신을 차렸다.

    방 안은 넓었다. 그러나 넓은 것과는 별개로 물건이 몇 개 존재하지 않았다. 낯선 공간에 일리안은 눈을 끔뻑거리며 입을 열었다.

    “물……. 물 좀, 줘.”

    잠깐, 내 목소리가 이랬던가?

    일리안은 제 입에서 처음 들어보는 앳된 목소리가 튀어나가자 눈을 끔뻑이며 고민했다.

    정신을 잃기 전, 물에 빠져 미친 듯이 강물을 먹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그 탓에 목소리가 나가 버린 걸지도 몰랐다.

    “헤이븐 님! 정신이 드세요?”

    여자는 그렇게 물으면서도 일리안의 물을 달라는 소리는 들었는지 재빠르게 물잔을 내밀었다. 흰색의 물잔은 고급스러웠지만 오래된 듯 밑동의 이가 빠져 있었다.

    일리안은 아무런 의심 없이 그 물잔을 받아 들었다. 몹시도 목이 말랐기 때문이었다.

    물잔이 제법 크네.

    잠깐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고민할 새도 없이 무겁고 큰 물잔에 어쩔 수 없이 두 손으로 그것을 받아 든 일리안은 단물이라도 되는 양 물을 급하게 마셨다.

    “하아, 살겠다.”

    단숨에 커다란 물잔에 든 물을 다 마셔 버린 일리안은 이내 그것을 건넸던 여자에게 돌려줬다. 의식한 것은 아니었지만 곁에 있던 여자가 당연한 듯 물잔을 받을 준비를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물잔을 건네던 일리안은 1가지 낯선 사실을 깨달았다.

    보통의 여자들보다 조금 큰 편인 제 손보다도 앞에 선 이 여자의 손이 훨씬 크다는 것. 물잔은 그녀의 손에 꼭 맞아떨어졌다.

    그리고 거기까지 깨달은 일리안은, 천천히 자신의 손을 가져와 눈앞에 펼쳐 들었다.

    “헤이븐 님? 괜찮으세요? 손이 어디 아프신가요?”

    여자의 손이 다른 사람들보다 큰 것이 아니었다. 물잔이 다른 것에 비해 유난히 크게 만들어진 것도 아니었다.

    자신의 손이 작아졌다.

    일리안은 그 하얗고도 말랑한 아이의 손을 넋이 나간 눈빛으로 바라봤다.

    * * *

    “헤이븐 님, 정말로 저희가 기억이 나지 않으세요?”

    “타피아. 헤이븐 님도 초조하실 거야. 계속 재촉해서는 안 돼.”

    “하지만 디노 경, 다른 사람도 아니고 헤이븐 님이 우리를 잊으시다니요…….”

    디노라고 불린 남자는 침착하게 여자를 달랬지만, 그 또한 표정이 좋지 못한 것은 매한가지였다. 디노와 타피아는 초조한 얼굴로 침대 안에 앉아 있는 아이를 바라봤다.

    고개를 돌리자 곧장 침대 위 놓여 있는 곰 인형이 보였다. 새까만 눈알이 반질거리는 갈색 곰 인형. 어린아이들이 밤에 무서워 껴안고 잔다는 그, 곰 인형.

    일리안은 곰 인형 옆에 앉아 고급스러운 빨대가 꽂힌 물잔을 양손으로 쥐고 있었다. 아이의 얼굴 위로 어울리지 않게 잔뜩 찌푸린 표정이 지어진 채였다.

    “그러니까, 내가 열두 살이라는 건가?”

    “예, 예, 헤이븐 님. 올해로 열두 살이 되셨어요. 작년엔 이제야 교양 수업을 졸업했다고 좋아하셨잖아요.”

    일리안은 피곤한 낯으로 제 얼굴을 쓸었다. 말랑거리는 자신의 피부는 태양 아래에서 40년간 굴렀던 여자의 낡은 피부와 비교할 수도 없었다.

    “물에 빠져 온 것도 아니고, 마차에서 떨어져 정신을 잃었다고요?”

    “네, 맞아요.”

    자신의 목숨값으로 돈을 벌려는 이들에게 엿을 먹이기 위해 멋지게 강물에 뛰어들었지만, 그녀도 사람이었다.

    소용돌이치는 강물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보려 필사적으로 몸을 움직이다 점점 힘이 풀려갔다. 그와 동시에 코와 입으로 들이닥친 물을 먹어 고통스럽게 죽었다.

    그 모든 기억을 바로 어제 일처럼 기억하고 있는 일리안은 자신을 둘러싼 모든 일이 믿기지 않아 잠시 말을 멈췄다.

    “거기다 올해가… 몇 년도라고?”

    “헤라프력 218년이요. 네 번째 달이구요.”

    일리안은 적어도 이곳이 자신이 나고 자란 헤라프 제국이라는 사실에 안도했다.

    그런데 헤라프력 218년이라니. 그녀가 기억하기로 은퇴를 결심하기로 했던 날은 헤라프력 228년, 열두 번째 달이었다.

    자신이 열두 살 여자아이의 몸으로 들어온 것도 모자라 10년이라는 세월을 거슬러 돌아오다니. 일리안은 그 사실이 믿기지 않아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타피아? 타피아라고 했지?”

    “네, 네! 헤이븐 님, 저는 타피아예요. 제 옆의 기사는 디노 경이구요.”

    “미안하지만 나가줄 수 있겠어? 조금 피곤해서 그런데.”

    타피아는 정중하지만 단호한 축객령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열두 살이었던 헤이븐 윈터는 타피아의 기억에도, 그리고 다른 모두의 기억에도 소심하고 여린 여자아이였다. 함부로 남에게 나가 달라는 말조차도 하지 못할 정도로.

    “죄송해요, 헤이븐 님. 회복하신 지 얼마 되지도 않으셨는데…….”

    “괜찮아. 신경 쓰지 않고 나가봐도 좋아. 더군다나 둘 다 내가 잠든 동안 날 돌봤다고 했잖아. 쉬는 게 좋을 거야.”

    “헤이븐 님…….”

    타피아는 자신들을 걱정해 주는 어리지만 다정한 목소리에 눈을 글썽였다. 정신을 차린 그녀는 몹시도 어른스러워져 있었다.

    디노와 타피아는 언뜻 보기에도 채 서른이 되지 못한 얼굴이었다. 올해로 마흔 살이 되었던 일리안은 젊은 아이들의 얼굴 위에 적힌 피곤을 읽고는 속으로 짧게 혀를 찼다.

    일리안에게 고개를 숙인 디노가 타피아를 데리고 나가려던 순간이었다.

    “헤이븐, 헤이븐! 너 어디 있니!”

    밖에서부터 들려오던 목소리는 점점 커져가더니 이내 쾅, 하고 거칠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살집이 두툼한 여성이 침대에 앉아 있는 일리안을 발견하고는 성큼성큼 다가왔다.

    타피아는 여성을 발견하자마자 어쩔 줄 모르고 발을 동동거렸다. 디노 또한 예상치 못한 상황인 듯 타피아의 곁에 서서 움직임을 멈췄다.

    육중한 몸을 티 내듯 큰 소리를 내며 걸어온 여자는 흰 종이를 일리안의 앞에 거칠게 내려뒀다. 일리안의 작은 손에 억지로 펜을 쥐여주기도 했다.

    “정신 차렸니? 자, 여기. 어서 네 이름을 적으렴.”

    “죄송합니다만, 누구십니까?”

    여자는 그 말에 와락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네 고모 얼굴도 못 알아보니? 오빠는 애 교육을 어떻게 시킨 건지…….”

    “세, 세르앙 자작 부인님. 잠시만요. 헤이븐 님께서는 아직 어려운 단어를 잘 모르실 텐데…….”

    육중한 몸의 부인이 나무 침대를 흔들자 타피아가 다급하게 그 사이를 막아선 순간이었다.

    짝!

    몸이 휘청거릴 정도로 타피아의 고개가 왼쪽으로 돌아갔다. 자신이 맞은 사실조차 인지가 되지 않은 타피아가 제 뺨을 부여잡았다.

    “고작 시녀 주제에……. 건방진 년! 네가 어디라고 감히 나서?!”

    곁에 있던 디노도 놀라 쓰러질 뻔한 타피아의 어깨를 붙잡아줬다. 그는 인상을 쓰며 자작 부인을 바라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피아의 편을 들어줄 수는 없었다. 세르앙 자작 부인은 그래 보여도 귀족이었고, 기사인 디노는 명을 받지 않는 이상 귀족인 그녀에게 대항할 수 없는 몸이었다.

    타피아의 뺨을 올려붙인 세르앙 자작 부인은 고개를 휙 돌려 침대에 앉아 있는 일리안을 내려다봤다. 일리안이 손을 움직이지 않으면 강제로라도 움직이게 할 요량이었다.

    “……하여, 을은 윈터 가문의 모든 재산에 대한 소유권을 포기할 것을 동의한다. 또한 을의 보호자인 로잔 세르앙에게 위 소유권을 양도한다.”

    작은 침대에 앉아 종이를 든 일리안은 귀찮다는 눈으로 글을 읽어 내려갔다. 세르앙 자작 부인은 그녀가 글을 읽으리라곤 생각지도 못한 듯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봤다.

    “고모라고 했던 것 같은데. 그렇지, 타피아?”

    “네? 네, 네. 세르앙 자작 부인께서는 헤이븐 님의 고모세요…….”

    “요즘 고모는 조카 건강보다 돈이 더 관심사인가 봅니다. 10년 전엔 그랬었나…….”

    일리안이 나지막이 10년 전을 언급했지만 그 목소리는 너무도 작아 들리지 않았다. 이어서 일리안은 차갑게 식은 눈으로 그 종이를 바라보다 지익, 하고 종이를 찢었다.

    “너, 너… 지금 뭐 하는 거니!”

    “보면 모르시겠습니까, 세르앙 자작 부인. 종이를 찢고 있는데요.”

    심드렁한 얼굴로 종이를 4번에 걸쳐 찢은 일리안이 그것을 부인의 얼굴로 집어 던졌다. 손짓에는 아무런 일말의 가책도 없어 보였다.

    종이 더미를 맞은 부인이 투실한 제 턱을 부들부들 떨었다.

    “네가 이러고도,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알아! 난 네 보호자다, 헤이븐 윈터!”

    “예, 예. 그런 건 아무래도 좋습니다. 이만 나가주세요.”

    “헤이븐 윈터!”

    “디노 경이라고 했지? 윈터 가의 기사라고. 저 여성분 좀 내쫓아주세요.”

    제 이름을 들은 디노는 화들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그러다 자신에게 명을 내린 이가 다른 누구도 아닌 윈터 가의 마지막 주인, 헤이븐 윈터라는 사실에 몸을 움직였다.

    디노가 발버둥 치는 세르앙 자작 부인을 강제로 이끌고 나가자 방 안에는 침묵이 맴돌았다.

    “헤, 헤이븐 님……. 괜찮으시겠어요?”

    “안 될 이유라도 있어?”

    “그러니까 저분은 이제 헤이븐 님의 보호자가 되실 텐데…….”

    헤이븐의 나이는 고작 열두 살이었다. 그녀의 부모가 얼마 전 모두 사고로 죽었으니 아직 어린 헤이븐은 법적으로 보호자가 필요한 나이였다.

    타피아 또한 헤이븐의 양 부모님이 죽은 뒤로 헤이븐의 안위는 안중에도 없이 윈터 가문의 재산을 탐내던 세르앙 자작 부인이 싫었다. 그러나 유일한 혈육으로 헤이븐의 보호자가 될 그녀를 함부로 대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보호자라고 해서 내가 재산을 양도할 이유는 없을 텐데.”

    “그건, 맞지만요…….”

    “6년간 법정 대리인이 필요할 일을 만들지 않으면 되겠네.”

    일리안은 심드렁한 얼굴로 머리 뒤로 손을 대며 침대에 누웠다. 그러나 그녀의 옆으로 놓여 있는 갈색 곰 인형이 무척이나 이질적일 뿐이었다.

    열두 살 주제에 법정 대리인과 재산을 논하는 일리안을 타피아는 몹시도 흔들리는 눈동자로 바라봤다.

    * * *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던 일리안은 자신의 손을 뻗어보았다. 역시나 하얗고 작은 손이 그곳에 놓여 있었다.

    10년 전으로 돌아온다면 무엇을 하는 게 좋을까. 그것도 열두 살의 육체를 가지고서.

    이제는 자신이 마흔 살이었다는 사실조차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40년간 있었던 대부분의 기억들이 자신이 일리안 하인리히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일리안은 제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해 눈을 감고 옛 기억들을 떠올려야만 했다. 죽기 전까지 함께 했던 푸른 새벽 용병단, 전쟁에 참여했던 기억, 누구보다 소중했던 자신의 아들…….

    아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일리안이 말랑한 미간을 찌푸렸다. 어떻게 그 아이를 잊을 수 있을까.

    짧은 다리로 침대에서 내려온 그녀는 침대 옆에 놓인 달력의 앞에 섰다. 달력에는 커다랗게 헤라프력 218년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10년 전, 이맘때의 자신은 분명 싯투르 공국과 하핀 왕국의 전쟁에 참여할 무렵이었다. 그리고 정확히 5년 후, 헤라프력 223년 두 번째 달에는 시릴 정도로 찬바람과 함께 폭설이 내렸다.

    그리고 그날, 자신의 하나뿐인 아들이 죽었다.

    라울 하인리히. 자신이 지어줬던 어여쁘고도 소중한 이름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아니, 잊어야만 했다. 자신이 미치지 않으려면 다섯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생을 다 한 그 아이를 잊고 살아야만 했다.

    일리안 하인리히가 현재 이 세상에 자신 말고도 또 있다는 현실이 소름 끼치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만약 자신의 아들을 되살릴 수 있다면?

    일리안은 생각했다. 자신이 이 미래를 바꿔야겠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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