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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488화 (완결) (488/488)
  • 488화

    이카르는 진심으로 대단하다는 표정으로 르네를 바라보고 있었다. 전쟁 이후 모두가 엉망이 된 땅을 복구하는 데 집중했다. 공공의 적이 사라졌고, 나타니엘이라는 존재에게 모두가 죄책감을 가졌다. 그 마음은 오롯이 테오도로를 향했다. 어미를 잃은 그 어린 황자에게 모두가 부채감을 느낀 것이다.

    말도 안 되는 평화가 찾아왔다. 억지로 누군가 이어 붙이려는 평화가 아니라, 스스로 평화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세상이 됐다.

    2제국이 처음 건국됐을 땐 중간에 낀 나타니엘이 인간과 이종족 사이를 조율했다면, 지금은 개개인이 그 역할을 함께 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평화를 주기 위해.

    그러므로 종족 간 경계가 사라졌다. 사실상 성문은 존재하나 마나 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영주의 허가 없이 이렇게 들어가도 되는 거야? 버젓이 성문이 닫혀 있고, 위병이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말했는데도 상공을 날아 이미 성 안으로 진입한 르네의 모습에 입이 떡 벌어질 수밖에.

    한편 다짜고짜 성 안으로 날아든 르네는 바닥에 내려앉자마자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늑대들은 허가 없이 출입한 르네를 크게 제재하지 않았다. 도리어 르네를 힐끔 쳐다보고는 각기 제 할 일을 하느라 바빴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 시끄러운 성 안을 둘러보던 르네는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런 르네를 먼저 발견하고 다가온 건 경비를 서고 있던 앤디였다.

    “르네 님. 오셨습니까?”

    “어, 앤디 경.”

    “생각보다 빨리 오셨네요.”

    “노아는?”

    “안에 계십니다.”

    “황자 전하께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

    “나쁜 소식은 아닙니다. 들어가 보십시오.”

    평소보다 들떠 보이는 앤디의 표정에 르네는 아주 잠깐 멈칫했다. 테오도로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니면 다행이긴 한데……. 그런데 그것보다 더 큰 설렘이 자꾸만 자신을 찾아온다.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왜일까…….

    “르네.”

    누군가 저를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르네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그는 좌우를 살피다가 목소리가 위층에서 들렸음을 인지하고 고개를 위로 들어 올렸다. 그곳엔 테오를 품에 안고 선 노아가 있었다.

    “노아.”

    “빨리 왔네.”

    “어. 급한 일일까 봐.”

    “공작님!”

    테오도로가 손뼉을 치며 활짝 웃더니 르네를 향해 두 팔을 뻗었다. 르네는 단숨에 계단을 올라 아이를 건네받았다. 테오도로는 까르르 웃으며 르네를 꼭 끌어안았고, 그 웃음소리에 르네도 잔뜩 긴장했던 게 풀렸다.

    노아는 혀를 쯧쯧 차며 다가와 르네의 어깨를 툭 치곤 말했다.

    “뭘 그렇게 긴장한 거야?”

    “갑자기 이쪽으로 오라고 하니까 그러지.”

    “네게 볼일이 있는 건 내가 아냐. 테오는 다시 내게 주고, 넌 저쪽에 들어가 봐.”

    “……저긴 왜?”

    “왜긴. 네 볼일이 저기 있으니까.”

    노아가 가리킨 곳은 안쪽에 위치한 커다란 침실이다. 르네는 그 침실이 누구의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르네와 떨어지기 싫다며 칭얼거리는 테오도로를 억지로 제 품에 데려온 노아가, 조금 전처럼 르네의 어깨를 툭 치며 앞으로 밀었다.

    “기다리게 하지 마. 그리고 울리지 마라. 안 그래도 근래 너무 많이 울어서 탈수 증세가 있어.”

    “……노아.”

    “밖에 이카르랑 유클리드도 있지? 그들이 와서 네 자리를 뺏기 전에 가서 만나.”

    천근만근처럼 무겁던 걸음이 그녀의 침실 앞에서 가벼워졌다. 똑똑. 가볍게 노크를 했지만 안쪽에선 어떤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르네는 손잡이를 잡고 문을 열었다.

    “어서 와, 르네.”

    기다렸다는 듯, 침실 문 앞에 의자를 놓고 앉아 있던 그녀가 르네를 맞았다.

    “들어와도 돼.”

    그녀의 말간 목소리가 꿈만 같았다. 일순 여기가 꿈속은 아닐까 싶었다. 늘 악몽만 꾸다가 오늘은 기분 좋은 꿈을 꾸게 된 건 아닐까 하고.

    “밖이 시끄럽던데, 르네 공 말고도 다른 사람이……,”

    창이 있는 쪽을 힐끔거리며 말하던 이엘이 입을 다물었다. 르네가 저를 안아 올린 것이다.

    “르네?”

    “나타니엘.”

    “응. 나 돌아왔어.”

    “…….”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이엘이 웃으며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하나밖에 남지 않은 그의 눈이 오늘따라 애달프게 느껴졌다. 르네는 이엘을 안아 올린 채 침실 깊은 곳으로 향해, 그녀를 침대 위에 내려 주었다.

    “꿈이 아니겠지.”

    “응. 꿈 아니야. 나 멀쩡하게 살아 있어.”

    “…….”

    “내가 없는 동안, 테오를 잘 봐줘서 고마워. 테오가 공의 이야기를 많이 하던걸.”

    “나타니엘.”

    “응.”

    “……돌아와 줘서 고맙다. 정말로 고마워.”

    죽음의 기로에서 신의 품이 아닌 이곳을 선택했다. 그런 이엘의 선택을 알아채기라도 한 것처럼, 르네는 그렇게 한참을 고맙다는 말로 위로했다. 이엘은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억눌러 참았다. 모두에게 지독했을 2년 반의 침묵이 마침내 깨어졌다.

    *

    “어제 이상한 꿈을 꿨어요.”

    오늘도 정원에서 앤디와 신나게 한바탕 뒹굴었던 테오도로의 옷엔 낙엽이 들러붙어 있었다. 이엘은 제 품에 달려온 테오의 옷을 털어 주며 아이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무슨 꿈인데?”

    “하늘에서 뭐가 반짝거리더니 제 품에 쏟아졌어요.”

    “그래?”

    “그리고요, 꿈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어떤 사람이 저한테 손을 내밀었어요! 제 이름을 알고 있었어요! 그리고 저한테 하얀 빛을 나눠 줬어요!”

    우리 테오의 상상력은 꿈에서 나오는가 보군. 노아가 웃으며 그렇게 답했지만, 테오도로는 꽤나 진지한 얼굴로 연신 손을 휘저으며 설명했다. 이엘도 웃으며 적당히 동조하다가 문득 시선을 정원 쪽으로 돌렸다.

    그곳이 일순 반짝거렸다.

    “어?! 저런 빛이었어요! 꿈에서 본 빛이랑 똑같은데!”

    신난 표정으로 방방 뛰는 테오도로를 품에 안은 노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엘도 같이 일어나 그 뒤를 따랐고, 늘어져라 엎어진 채 털을 고르던 앤디도 빛에 홀려 벌떡 일어섰다. 세 사람의 발길이 한곳을 향했다.

    “저게 무슨 빛이지?”

    “모르겠어.”

    늑대들 모두 웅성거리며 한데 모이고 있었다. 가까이 갈수록 너무 환한 빛이 쏟아지는 터라 노아는 큰 손으로 테오도로의 눈을 가렸다. 자기도 보고 싶다며 연신 칭얼거리는 테오에게 안 된다며 이르고는 점점 더 가까이 빛을 향해 걸었다.

    가장 앞에 있던 건 노아였는데, 어느 순간 뒤에 있던 이엘이 그를 제쳤다. 돌아온 지 반년이 다 되어 가지만 여전히 혼자 걷는 게 힘들어 속도가 느리던 그녀였는데, 지금은 거의 뛰다시피 걷고 있었다.

    “앤디. 테오를 받아라.”

    “네, 각하.”

    테오를 앤디에게 안겨 주곤 이엘을 붙잡은 노아가 그녀가 제대로 걸을 수 있게 옆에서 단단히 보조했다. 그때까지도 이엘은 홀린 듯 희미한 빛을 응시하고 있었다.

    “나타니엘. 왜 그래?”

    “저 빛 익숙하지 않아?”

    “익숙하다고?”

    “이 느낌……. 모르겠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이엘의 목소리는 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노아는 이엘이 하는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무슨 느낌을 말하는 건지 모르겠다.

    “나타니엘. 왜 그러는……,”

    “오드.”

    “…….”

    “……이건 오드의 성력이잖아.”

    이엘이 그의 손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힘으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비틀거리면서도 끊임없이 빛을 향해 걷고 또 걸었다. 노아는 그녀의 뒤에서 빛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이 느낌……. 정말 성력과 비슷하다. 그것도 오드의 성력…….

    그 순간 빛이 폭발하듯 한 번 더 강하게 번쩍였다. 노아는 팔로 제 눈을 가려 빛을 피했다. 곁눈으로 본 다른 늑대들도 움찔하며 고개를 숙여 빛을 피하는 듯했다. 그리고 강하게 내리쬐던 빛의 강도가 조금 약해졌을 때였다.

    “오드?”

    물기 어린 그녀의 목소리에 노아가 시선을 올렸다. 꺼진 빛이 있던 자리엔 은빛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이엘을 향해 두 팔을 벌렸고, 그녀는 망설임 없이 아픈 다리로 그에게 뛰어들었다.

    “오드!”

    “나의 엘. 잘 지냈니?”

    “어떻게…… 네가 어떻게…… 돌아온 거야? 정말로?”

    “나는 신의 대리인이야. 신의 뜻을 전하고 너희를 바르게 이끌기 위한 나자르잖아.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단다, 나의 엘.”

    “오드…….”

    이엘은 손을 뻗어 오드의 얼굴을 만졌다. 꿈에서처럼 만지면 사라지는 환영이 아니라, 정말로 살아 움직이는 오드다.

    “엘. 네게 할 말이 있어서 온 거야.”

    “그게 뭔데?”

    “이젠 너희도 알겠지. 너희가 신을 떠나도 신은 너희를 떠나지 않으신다는 것을. 그 사실을 기억한다면, 이제 내가 없어도 너흰 신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 거란다.”

    “…….”

    “수고했어. 너희 모두의 수고와 아픔을 그분이 다 보셨어. 그러니까 이제는 모두에게 신의 가호가 함께하기를.”

    “……오드?”

    “잘 있으렴, 나타니엘. 너와 아르세니온이 자라는 걸 지켜보는 게 내겐 가장 큰 행복이었어. 나의 아이들이 너희여서 나도 무척 기뻤단다.”

    “가지 마.”

    “신의 품에선 우리 모두 만날 수 있어. 그곳에서 기다릴게.”

    “…….”

    “신의 가호가 너에게 있기를.”

    오드의 입술이 이엘의 이마에 짧게 부딪혔다가 떨어졌다. 그러곤 빛이 또 한 번 강하게 번쩍였다가 스러져 사라졌다. 오드도 빛이 되어 사라졌다.

    “꿈에 나온 사람이랑 똑같아요, 어머니.”

    어느 틈에 앤디에게서 벗어난 테오도로가 이엘의 손을 꼭 잡으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이엘은 조금 전까지 오드가 있던 곳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웃으며 테오도로를 품에 안아 올렸다. 그러곤 아이의 뺨에 입술을 묻었다가 떼며 말했다.

    “신께서 우리 테오도로를 사랑하시나 보구나. 네 꿈에 찾아오신 걸 보면.”

    “신께서 저를 사랑하세요? 정말로요?”

    “그럼. 테오도 사랑하고, 테오의 아버지도 사랑하시지. 신께선 이곳을 너무 사랑하셔서 신의 대리자를 보내셨던 거란다. 테오를 지키기 위해.”

    “아까 전에 본 사람이 신께서 보낸 사람이에요?”

    “응. 그리고 어미의 친구였단다.”

    돌아온 뒤로도 마음을 억누르고 있던 무거운 짐들이 죄 날아간 기분이었다. 속이 뻥 뚫린 것처럼 시원해졌다. 이엘은 곁으로 다가온 노아의 가슴에 머리를 대며 웃었다.

    우리는 버림받았던 게 아니라, 긴 여행을 마치고 원래의 자리에 돌아온 것이라고. 그러니 다시 새롭게 시작하면 될 것이라고. 이제야 비로소 신의 음성이 들리는 것 같았다.

    여기는 우리의 의지로 만들어 갈 새로운 세상이다. 긴 여행은 마침내 마침표를 찍었다.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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