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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487화 (487/488)

487화

보통 테오도로가 황궁을 방문하면 아이가 영지로 돌아올 때까지 노아는 그곳에서 기다리는 편이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찾아온 적이 거의 없었기에 앤디도 괜히 걱정이 밀려들었다.

“앤디 경. 아버님 오신 거 맞지?!”

“네, 맞아요. 황자님을 데리러 오신 것 같네요.”

“후웅. 난 여기 더 있고 싶은데…….”

“급한 일 아니면 더 머물다 가시도록 제가 말씀드려 볼게요. 어차피 르네 님이나 이카르 님도 며칠 내로 오신다고 했으니까 황자님도 두 분을 보고 돌아가시는 편이 낫잖아요. 그러니까 식사 먼저 하세요. 걱정 마시고.”

누구보다 앤디의 말을 믿는 테오도로는 그제야 마음을 놓고 멈췄던 식사를 이어 갔다. 그러나 갑자기 다이닝 룸 안으로 아르세니온과 노아가 들이닥쳤다. 깜짝 놀란 테오가 들고 있던 포크를 놓쳤고 앤디는 잽싸게 손을 뻗어 떨어지는 포크를 받아 내는 데 성공했다.

“테오! 어서 영지로 돌아가자.”

“아버님. 저 며칠만 더 있으면 안 돼요?”

“테오. 여기 있는 모두가 함께 떠날 예정이니 너도 가야 돼.”

투정을 부리려는 테오의 손을 잡은 아르세니온이 웃으며 설명했다. 포크를 테이블에 내려놓은 앤디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이게 무슨 말이냐는 듯 노아를 쳐다봤다. 그런 제 주인의 눈동자가 붉게 충혈된 것을 알아챘다. 예전에 나타니엘이 쓰러지고 반년 정도를 술에 절어 살 때 저런 눈동자였던 것 같은데. 설마 공작님이 또…….

“그런 거 아니니까 그렇게 쳐다보지 마라, 앤디.”

“이젠 제 마음도 읽으십니까?”

“넌 얼굴에 다 드러나.”

“그럼 대체 무슨 일인데요. 저도 가는 겁니까?”

“어. 짐 챙겨.”

“왜……,”

“네 동생이 깨어났어.”

“네?”

내 동생? 멍청하게 눈을 끔뻑거리던 앤디는 뒤늦게 노아가 지칭하는 게 누군지 알아차린 건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나, 나, 나, 나타, 나타니……!”

“앤디 경. 왜 그래? 왜 말을 잘 못 해?”

옆에서 앤디의 옷을 잡고 죽죽 당기는 테오의 말에 모두가 웃음이 터졌다. 그때까지도 앤디는 입술만 달싹이며 멍청하게 서 있다가 뒤늦게 주먹을 쥐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더니 제 옷 끝을 쥔 테오도로를 번쩍 안아 들고는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황자님!! 나타니엘이 깨어났대요! 황자님 이제 어머니 볼 수 있다고요!”

“으악! 어지러워, 앤디!!”

“앤디. 좋은 말로 할 때 테오를 내려놔라.”

금방이라도 능력을 사용할 것 같은 노아의 으름장에 앤디는 히죽 웃으며 테오도로를 바닥에 내려 주었다.

“얼른 가요. 얼른…… 어서 가자고요.”

행랑은 간소하게 꾸렸다. 사실상 황궁의 요직에 선 자들은 전부 떠나야 하는 상황이라 비밀리에 움직이기로 했다. 독수리와 재규어에겐 늑대의 영지로 오라는 전갈을 남기곤 모두가 한밤을 타 은밀하게 제도를 떠났다.

늑대의 영지에 도착해서도 모두 어리둥절했다. 늑대의 권역에 들어선 순간, 나타니엘이 마중 나올 것이라 생각했는데 보초를 서는 늑대들 말고는 그들을 맞아 주는 이가 없었던 것이다. 다들 얼떨떨한 표정으로 노아를 힐끗거렸다.

사실 나타니엘은 아직도 잠든 상태가 아닐까. 혹시 노아가 미쳐 버린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며.

“생각보다 빨리 왔네.”

“레온 후.”

“어서 오십시오, 폐하. 기다렸습니다.”

레온이 성문 앞에서 그들을 맞았다. 그는 아르세니온을 향해 가볍게 인사하곤 옆으로 자리를 비켜섰다.

“들어가서 만나십시오.”

“……정말 나타니엘이……,”

“예, 정말 나타니엘이 있습니다.”

아르세니온은 늑대의 등에서 내려 성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 뒤를 테오도로를 안은 노아가 함께했다. 세 사람은 이엘의 침실 앞에서 아주 잠깐 멈칫하다가, 안에서 들린 웃음소리에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이온……?”

하트와 웃으며 대화하던 나타니엘이 가장 먼저 아르세니온을 발견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윽고 그녀의 시선은 이온의 뒤에 선 노아의 품으로 향했다. 그곳엔 제 아비의 목을 감싸 안고 저만큼이나 눈을 크게 뜬 남자아이가 있었다.

“……테오?”

아직 일어서면 안 되는데 지금의 이엘은 그런 것 따위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침대 아래에 발을 딛고 여러 번 넘어질 뻔하더니 기어이 혼자 힘으로 걸어가 침실 문 앞에 섰다. 그녀의 녹색 눈동자가 마주 선 사람이 알아볼 정도로 세차게 흔들렸다.

“테오.”

“……어, 어머니?”

테오도로는 늘 누워서 잠들어 있던 어머니가 아닌, 제 앞에 손을 내밀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 낯설었다. 여전히 노아의 품에 안겨 있었지만 아이의 시선은 나타니엘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 모습에 이온이 웃으며 자리를 비켰고 노아가 대신 그녀에게 다가갔다.

“테오. 네 어머니다.”

“어머니……?”

“그래. 어머니가 널 기다리는데 가서 안아 드려야지.”

노아의 차분한 음성에 당황하던 테오도로도 차츰 안정을 찾아갔다. 아이는 노아와 이엘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제게 다가온 나타니엘의 품을 향해 두 팔을 뻗었다. 단번에 아이를 안은 이엘은 생각보다 무거운 테오도로의 무게에 아주 잠깐 비틀거렸으나 금세 균형을 잡아 단단히 끌어안았다.

“테오. 내 아이…….”

“정말 어머니예요?”

“그래, 테오도로. 네 어미란다. 네 이름도 내가 지었는걸.”

고작 2년 반인데. 그 2년 반 사이에 아이가 너무 많이 자랐다. 이렇게 자라는 동안 지켜보지 못한 것이 속상했고 아이에겐 미안했다. 자신처럼 부모의 공백을 느끼지 않게 키우려고 했는데…….

“미안해, 테오도로. 네가 이만큼이나 자랐는데 어미가 네 곁에 없었구나.”

“아니에요. 어머니는 늘 제 곁에 있었잖아요. 매일…… 매일 테오가 어머니 보고 싶어서 여기 왔잖아요. 테오 꿈에도…… 어머니가 찾아왔잖아요.”

아이답지 않게 의젓하기까지 했다. 어미의 상실이 널 그렇게 빠르게 자라게 한 걸까. 이엘은 테오도로를 소중하게 끌어안으며 눈물을 삼키다가, 뒤늦게 아르세니온과 눈이 마주쳤다. 자신을 향해 웃어 주는 다정한 쌍둥이 동생을 보니 이제야 비로소 집에 돌아온 기분이었다.

“돌아온 것을 환영해, 이엘.”

“……네게 모두 떠넘기고 갔던 것, 미안해. 미안해, 이온.”

“우리 사이에 그런 대화는 무의미하잖아. 돌아온 것만으로도 충분해.”

“역시 황위는 네게 더 잘 어울려.”

“네가 깨어났을 때, 네 희생으로 바뀐 세상을 보여 주고 싶었어.”

결국 신탁의 아이는 우리 둘 모두를 의미했던 거야. 너의 희생으로 새로운 세상이 될 기틀이 세워졌고, 나의 노력으로 새로운 세상은 도약을 시작했어. 나타니엘. 결국 너와 내가 신탁의 아이였던 거야. 아르세니온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이엘을 끌어안았다.

“나타니엘?”

연이어 들어오는 이들의 목소리에 이엘은 웃으며 그들을 맞았다. 누가 형제 아니랄까 봐, 하트처럼 눈물을 펑펑 쏟는 피시의 모습은 제 마음을 무너지게 만들었다. 이엘은 테오도로를 노아에게 도로 안겨 주곤 훌쩍이는 피시의 등을 쓰다듬었다.

“미안해, 피시. 네 상처를 또 헤집어 놔서.”

“그런 말 하지 마. 됐어, 그런 건……. 그냥 나는…… 나는 그냥…….”

“형님. 하고 싶은 말은 간결하게 하는 게 제일 좋다니까.”

패티스가 피시의 어깨를 툭 치며 가볍게 웃었다. 그는 울컥한 사람들 속에 가장 아무렇지 않은 낯이었다. 어제 만났던 사이처럼, 패티스는 예를 갖춰 절하곤 이엘에게 안부 인사를 건넸다.

“돌아오실 줄 알았습니다.”

“그대는 쌍둥이 형님들과 달리 울지 않아서 다행이야.”

“하트도 울었습니까?”

피시는 예상했는데 하트까지 울었다고? 패티스는 혀를 쯧쯧 차며 이엘의 너머에 서 있는 하트를 흘겼다. 이래서 근위대장은 어떻게 했던 거야? 하여간 수컷 하이에나들은 하등 도움이 안 된다니까.

“나타니엘! 너! 너 진짜!!”

그러나 누구보다 크게 울음을 터뜨린 건 앤디였다. 뒤에서 조용히 지켜보기만 하던 앤디는 제 차례가 다가오고 나서야 폭포수처럼 눈물을 쏟아 냈다. 그 긴 시간 동안 한 번도 울지 않더니 참고 있던 눈물을 한꺼번에 죄 쏟아 내는 모양이었다. 끝에 가서는 발음이 먹혀서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못 알아들을 정도였다.

“앤디.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못 알아듣겠어.”

“너무하다고요!”

휴지로 코를 흥! 풀고는 한참 씩씩거린다. 이엘은 앤디의 목청에 놀랐다가도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우와, 앤디 경 울보다.”

테오도로가 진짜로 경탄에 젖어 내뱉은 탄성에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

르네의 악몽은 끝나지 않았다. 언젠가부터 릴리가 아닌 죽은 나타니엘이 꿈에 나오기 시작했고, 마지막 전쟁 이후 그녀가 영원한 잠에 빠지며 악몽은 갈수록 지독해졌다.

레온은 잠에 빠지면 극심한 통증을 앓기 때문에 차라리 잠자는 것을 포기한다고 했는데, 그게 제 상황과 뭐가 다를까. 그렇게 르네가 제대로 잠을 청하지 못한 지 2년 반 정도 됐을 무렵이다.

“각하, 황자 전하께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걸까요?”

“글쎄. 다짜고짜 이곳으로 오라고 전달을 받았으니 나도 알 도리가 없지.”

르네의 답에 엔리케도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물러섰다. 오랜만에 테오도로가 황궁에 왔다는 소식에 영지 내 급한 정무를 마무리한 르네와 엔리케는 황자를 보기 위해 황궁으로 가려고 했다.

그런데 제도 쪽에서 늑대의 영지로 오라는 전언을 보낸 것이다. 혹여나 테오도로와 관련된 일일까, 르네는 못내 불안하던 차였다.

“오랜만입니다?”

그런데 늑대의 영지 앞엔 자신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먼저 도착해 있던 이카르가 제 동족들과 실컷 떠들다가 르네를 발견하곤 다가와 알은체를 했다. 르네는 재규어의 뒤로 줄줄이 선 스라소니와 뱀을 쳐다보며 이게 무슨 조합인가 싶어 미간을 찌푸렸다.

“왜 다들 여기 있는 것이오?”

“그야 당장 이곳으로 오라는 서신을 받았기 때문이겠죠.”

심드렁하게 대답한 이카르는 이제나저제나 굳게 닫힌 늑대의 성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는 듯했다. 그러곤 아직도 혼란에 빠진 듯한 르네에게 살짝 귀띔했다.

“안에 무슨 일이 있긴 한가 봅니다. 스완과 밀로까지 찾았다는데, 그 둘이 하필 용이 사는 곳에 가는 바람에 연락이 안 된다네요.”

“…….”

“이렇게 다 같이 부른 적이 없는데. 대체 무슨 일인지, 원.”

위병이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지만 이유 없이 불안함과 설렘으로 점철된 르네의 마음이 한시를 기다릴 수 없었다. 그는 성문에서 조금 물러난 곳에서 돌연 독수리의 모습으로 변했다.

“어어?!”

“아무리 종족 간 장벽이 없어졌다지만 저래도 되는 겁니까, 대장?”

“난들 알겠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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