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486화 (486/488)

486화

‘테오도로?’

‘압빠…….’

아이를 향해 두 팔을 벌렸는데 아이가 엉엉 울며 제게서 뒷걸음질 쳤다.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아이를 데려왔던 레온이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쓴소리를 냈다.

‘그렇게 술 냄새가 나는데 황자가 네게 퍽도 가겠어.’

‘아…….’

‘반년이야.’

‘…….’

‘네가 아이를 방치한 시간이 반년이라고.’

레온의 충고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반년. 우논에겐 그리 긴 시간도, 짧은 시간도 아닌. 그러나 레온의 품에 안긴 제 아이는 반년 만에 두 발로 걸었고 말도 더듬더듬 할 줄 안다.

둔은 인간과 다르기 때문에 성장이 빠르다고 했는데 정말 눈 깜짝할 새에 아이가 자라 버렸다. 그리고 자신은 슬픔에 젖어 그 시간을 놓쳤다.

이 정도면 아버지로서 자격을 상실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노아는, 레온의 품에 안겨 엉엉 울면서도 저를 힐끔힐끔 쳐다보는 테오도로를 향해 쓴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노아의 시선이 누워 잠든 이엘에게 닿았다.

슬퍼하는 마음으로 이엘을 지킨 반년은 헛되지 않았다. 하지만 더 이상은 안 된다. 그녀가 우리에게 남긴 미래를, 희망을 그냥 두고 보면 안 돼.

그 뒤론 마음을 고쳐먹고 서툴게 아버지 역할을 시작했다. 이엘을 닮은 테오도로는 자격 없는 아버지인 자신에게도 금세 마음을 열고 달려왔다. 그 아이는 제 어미가 깨어나지 못하는데도 투정 부리지 않고 그저 침대 위에 무릎 꿇고 앉아 잠든 나타니엘을 빤히 쳐다보며 그리움을 집어삼키곤 했다.

“테오가 널 많이 사랑해.”

노아의 말에 이엘의 뺨에 눈물이 아롱지는 것도 당연했다. 짧은 한 마디에 모든 의미가 함축되어 있으니 이해하지 못할 리가. 노아는 웃으며 손등으로 그녀의 뺨을 닦아 주고선 푹 쉬라는 말만 남기고 침실을 나갔다.

그리고 이어 들어온 건 그녀의 충실한 근위대장 하트였다.

“폐하.”

“하트 경. 잘 지냈나?”

“저는…….”

의외였다. 그 자리에 붙박인 채 말문이 막힌 하트의 모습은 이엘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가까이 오라는 그녀의 손짓에도 하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왜?”

“폐하께선 아직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경이 가까이 온다고 해서 내가 다치는 것도 아닌데, 뭘. 그리고 언제까지 내게 폐하라고 할 거야? 이제 황제는 아르세니온이잖아.”

“제겐 폐하만이 주군이십니다.”

암컷에게만 충직한 하이에나답다. 이엘이 설핏 웃고는 그럼 거기서 자신을 잘 지켜보고 있으라며 눈을 감고 안식을 취했다. 그러는 새에도 하트의 시선은 이엘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나타니엘이 다시 눈을 감으니 그 주변 풍경이 지난 2년 반의 시간으로 돌아갔다. 그 순간 하트는 움찔하며 저도 모르게 침대 쪽으로 한 발을 내디뎠다.

……어? 폐하께서…… 깨어나신 게 아니었나? 내가 잠깐 졸았나? 그래서 꿈을 꿨던 건가? 하트는 손으로 제 눈을 비비며 몇 번이나 깜빡였지만 나타니엘은 색색 숨소리를 내며 잠든 채였다.

“……폐하.”

목소리 끝이 잘게 흔들렸다. 그의 불안한 목소리에도 이엘은 눈을 뜨지 않았고, 마침내 하트가 자신이 피로에 절어 꿈을 꿨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그렇게 못 믿을까 봐 가까이 오라고 한 거잖아, 하트.”

“……폐하.”

“이리 와서 잡아. 나 일어난 거 맞으니까 울지 말고.”

제게 뻗어진 그녀의 말간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하트는 그제야 제 눈에서 눈물이 후드득 떨어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언제부터 울고 있던 건지 모르겠다. 왜 가슴이 이렇게 미어지는 건지 모르겠다. 조이나가 죽었을 때도 이렇게 마음이 아프지 않았는데. 도리어 지금은 그녀가 깨어난 거니 좋은 일인데도, 왜…….

“너희 세쌍둥이는 다 닮았어.”

이엘은 제 앞에 다가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침대에 머리를 박은 채 흐느끼는 하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간 꾹꾹 눌러 참았을 그의 슬픔이 침대를 타고 고스란히 전해졌다. 하트는 강하지만, 또 약하다. 타인에게 절대로 먼저 마음을 열지 않지만, 한번 열면 그 뒤론 제 전부를 주는 이였다.

그는 누구보다 제 가족을 사랑했다. 조이나가 그랬고, 피시가 그랬으며 패티스가 그랬다. 하트에게 세 사람은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사랑할 가족이었다.

그리고 나타니엘, 자신도 이미 그의 가족이었다.

“미안해. 또 상실을 겪게 해서 미안해, 하트.”

“아니…… 아닙니다…….”

“내 이기적인 결정이 그대를 조금이라도 아프게 했다면 내 잘못이야.”

“…….”

“그만 울어. 그대가 우니까 나도…… 나도 마음이 좀 그래.”

하트가 억지로 울음을 삼키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그는 시트에 파묻었던 고개를 들어 올린 채 이엘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자리에서 일어나 뒷짐을 지고 늘 그랬듯 벽에 붙어 그녀의 곁을 지켰다.

“눈 붙이십시오. 제가 곁을 지키겠습니다.”

“그럼 조금만 더 자고 일어날게. 여긴 안전하니까 경도 쉬엄쉬엄해.”

“예.”

푸스스 웃음을 터뜨린 이엘이 도로 깊은 잠에 빠졌다. 그녀의 머리 위로 열린 창 너머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쫴 얼굴을 밝혔다. 하트는 커튼을 쳐서 드리워진 햇빛을 조금이나마 가려 주었다. 시원한 바람이 들이닥치는 그녀의 침실은 그 어느 때보다 따뜻하기만 했다.

*

“대부님!”

서류를 보고 있던 일라이저의 앞에 작은 머리통 하나가 쏙 들어왔다. 자신이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사실을 정확히 이해한 아이는 늘 저를 찾을 때마다 얼굴을 먼저 들이밀어 존재를 알렸다.

테오도로의 귀여운 행동에 일라이저는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고 웃으며 그를 껴안았다.

“어서 오세요, 황자님. 오늘은 뭘 하셨습니까?”

“정원! 정원에서, 앤디 경이랑 놀았어요!”

둔이라서 그런지 성장이 엄청 빠른 편이었다. 이 모습을 보지 못한 나타니엘을 대신해, 일라이저는 자신이 아이의 모습을 두 눈에 담아 기억했다. 테오도로는 날 때부터 그랬지만 자라면서 더욱더 나타니엘을 닮아 갔다.

“앤디 경이 또 괴롭히진 않았습니까?”

“거참. 후작님은 절 뭘로 보는 겁니까? 되레 제가 당했어요. 누굴 닮은 건지 힘이 아주 넘치다 못해 폭발하실 정도예요.”

뒤따라 들어온 앤디가 꽃잎으로 엉망이 된 머리를 손으로 툭툭 털며 투덜댔다. 그의 말이 거짓은 아닌 모양이었다. 누가 봐도 앤디 쪽이 된통 당한 모습이었던 것이다. 일라이저는 작게 웃으며 테오도로를 품에 안고 열린 발코니 너머로 향했다.

“황궁은 어떠십니까? 좋으신가요, 황자님?”

“네. 좋아요, 대부님. 숙부님도 제게 다정하시고요!”

아르세니온은 쓰러진 이엘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뒤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그도 조카 앞에선 무장 해제 될 수밖에 없었다. 테오도로가 황궁에 올 때면 정무도 뒤로 미루고 조카와 놀아 주느라 정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 탓에 곁을 보좌하던 패티스가 테오도로의 잦은 입궁을 막을 정도였다.

그런 주제에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패티스는 원하는 때마다 늑대의 영지로 향해 테오도로를 보고 가는 통에 아르세니온만 불만이 쌓이던 나날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테오도로의 정기적인 입궁 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모른다.

“똑똑. 테오도로 황자님, 거기 계신가요?”

문을 두드리는 척, 소리를 내며 안으로 들어온 아르세니온이 고개를 내밀며 테오도로를 찾았다. 일라이저의 품에 안겨 있던 테오도로는 히죽 웃으며 그에게서 벗어나 제 숙부에게 달려갔다. 일라이저 역시 웃으며 아르세니온을 향해 예를 갖췄다.

“오셨습니까, 폐하.”

“후작도 짐 때문에 일이 많이 밀렸겠군.”

“아닙니다. 그러려고 받은 작위인걸요. 무엇이든 맡겨 주십시오.”

“그럼 부탁하겠네. 테오는 짐이 데리고 갈 테니 누가 찾거든 짐과 함께 있다고 이르게.”

“예, 폐하.”

“대부님. 안녕!”

“잘 다녀오십시오, 황자님.”

일라이저에게 손을 흔들며 아르세니온의 목에 제 팔을 감고 안긴 테오도로는 오늘 있었던 일을 제 숙부에게 설명하느라 바빴다. 패티스 백작과 함께 학문 공부를 마치고 앤디 경과 함께 대련 수업을 명목으로 정원을 맘껏 뛰어놀았단다. 테오의 뺨에 제 뺨을 비비던 아르세니온은 저물어 가는 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숙부님. 왜 그러세요?”

“아무것도 아니란다. 오늘은 석찬 후에 온실에서 다과회를 가질까?”

“좋아요! 온실에서 같이……어?!”

헤헤 웃던 테오도로의 귀가 돌연 늑대의 귀로 변하더니 쫑긋거리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니, 테오?”

“아버님 냄새가 나요!”

“아버님? 노아 공?”

“예!”

나타니엘의 배 속에서도 그랬지만 테오도로는 유달리 감각이 예민한 편이었다. 오늘도 아이의 감각은 적중했다. 두 사람이 다이닝 룸에 도착하자마자 위병이 달려온 것이다.

“노아 공작께서 제도 경계 부근을 막 지났습니다.”

“공작 혼자?”

“예. 급한 전보가 있다고 곧장 알현실로 향한다고 하셨습니다.”

“알겠다. 밖에 앤디 경 있으면 들어오게.”

“예, 폐하. 부르셨습니까?”

“황자의 식사를 경이 좀 돕게. 경의 주인이 전언도 없이 수도를 넘었다고 하거든. 무슨 일인지 짐이 확인하고 오겠다.”

“알겠습니다.”

앤디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곤 테오의 옆자리에 앉았다. 아직 서툰 식사를 도우면서도 시선은 창밖을 향했다. 노아 님께서 말도 없이 무슨 일이시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