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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485화 (485/488)

485화

비늘을 떼어 내자마자 아이는 울었다. 그리고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아이의 심장은 ‘그’에게 뜯겨 사라졌다. 이후 ‘그’의 시선이 울부짖는 이엘에게 향했고 죽음을 직감하고 눈을 감았지만 제 앞을 누군가 가로막았다.

아주 따뜻하고 강렬한 빛이 이엘을 감쌌다. 그녀는 제 앞을 막은 이가 오드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섬광이 번쩍이고 어둠이 잠식되는 과정들이 끝도 없이 펼쳐졌다. 이엘은 연극의 관중이라도 된 것처럼 꼼짝도 하지 못한 채, 오드와 ‘그’의 전쟁을 목도했다.

그리고 돌연 오드의 몸에서 거센 폭풍이 불었다. 눈이 아플 만큼 번쩍이는 빛과 함께 오드가 발화했다.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연신 오드를 불렀을 때. 무언가 제 가슴팍을 푹 찔렀고, 이엘은 이 낯선 공간에 뚝 떨어져 버렸다.

“제가…… 아직 죽은 게 아닌 거군요. 저 대신 오드가…….”

“알잖니. 그들의 사명을.”

“……결국 오드를 지키지 못했어요.”

어떻게든 오드를 지키고 싶었는데 결국 지키지 못했다. 오드가 자신을 대신해 죽을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전에 자신이 죽으면 그도 포기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자르는 그런 존재야. 인간을 위해 아낌없이 주는 존재란다. 그들의 마지막은 꼭 인간을 위한 희생이 되어야 해. 그러면 그들은 임무를 완수하고 신의 품으로 돌아가는 거지.”

“…….”

“나타니엘. 이제 정말 시간이 없어. 선택해야 해. 사실 넌 아르세니온과 함께 신탁을 받은 신의 아이이니 선택이고 뭐고 그런 거 없이 당연히 그쪽 세상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

“너의 어미로서 여태 해 준 게 없어서. 그래서 네게 선택을 주려는 거야, 이엘.”

지쳤기 때문에, 이만하면 충분하기 때문에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은 그녀의 의사를 존중하겠다는 뜻이다. 오드의 희생과는 별개로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 오드 덕분에 ‘그’에게 흡수되는 일은 면했으니 이대로 선황후를 따라 신의 품으로 갈 수도 있겠지.

아이는…… 테오도로는 노아가 잘 키워 줄 것이다. 그는 훌륭한 아버지가 될 테니까. 그러니까…….

‘어머니!’

이것도 환각으로 볼 수 있는 건가. 테오도로를 갖기 전부터 눈에 아른거리던 아이의 모습이, 테오도로가 태어난 지금도 보인다고 하면. 이것도 환각인 건가. 아니면 예지인 건가. 드레인도 스완도 아닌 내가 이런 것들을 보고 있다면 이건 내 간절한 바람인가, 소망인가.

이엘은 저 멀리 시야 끝에 걸린 한 아이를 쳐다봤다. 일고여덟 살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손에 책을 들고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입 모양으론 연신 ‘어머니’를 외치며 간절한 눈으로 애타게 저를 쳐다보고 있다.

“이엘. 전쟁은 아픔을 남기지만, 그 아픔을 함께 메우기 위한 공동체라는 것도 생긴단다.”

“…….”

“너희는 공공의 적을 위해 싸웠고, 이제 그 싸움마저 다 끝났기에 서로를 향한 적대심은 퇴색됐어. 네가 돌아간 곳은 이전과 다를 거란 소리야.”

그러니까 나의 아가, 나타니엘.

“너의 아이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렴. 다시 한 번, 서로를 믿어 보렴. 이제는 모든 게 달라졌으니까 새로운 세상을 너희가 만들어 가렴. 신탁처럼 하지 않아도 돼. 그건 너의 사명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너의 길이야.”

“…….”

“네가 그 길을 걷다 보면 그게 자연히 신의 뜻이 될 테니까. 너 자신을 믿고, 신을 믿고, 신이 사랑한 것들을 믿고. 그렇게 나아가렴, 나의 아가.”

주저하던 것을 멈췄다. 이엘은 어머니의 말을 들으며 몸을 낮춰 저 멀리서 저만 바라보던 아이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 아이는 그제야 환하게 웃으며 이엘을 향해 뛰어오기 시작했다. 비록 가까워진 아이가 품에 안기기도 전에 환영처럼 부스러져 사라졌지만 이엘은 만족한 듯 웃음을 머금었다.

“갈게요.”

“그래.”

“다시…… 다시 시작할게요. 계속 해볼게요. 실패하고 무너져도 포기하지 않을게요. 정말 제 숨이 다해서 신을 만나는 날이 올 때까지, 계속 도전하고 또 도전할게요. 그게 인간다운 삶인 거죠?”

“그래. 나타니엘, 나의 사랑스러운 아가.”

“어머니. 다음에도 절 만나러 와 주세요. 제가 정말 신의 곁으로 가는 그날. 그날에도 어머니가 절 마중 나오셔야 해요.”

“그래. 네가 원하는 건 다 해 줄게.”

이엘은 선황후의 손을 잡고 움켜쥐었다가 펴기를 반복한 후 예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선황후도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며 웃어 주었다. 그 순간만큼은 황후와 황녀가 아니라 평범하고 단란한 어머니와 딸의 모습이었노라고, 이엘은 그렇게 기억했다.

*

아주 긴 꿈을 꾸었다.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안 갈 만큼 너무 생생해서, 따사로운 햇살이 얼굴에 달라붙어 잠을 깨웠을 때. 이엘은 눈물로 얼룩진 채 눈을 떴다.

“이게…… 이게 다 무슨…….”

목이 잠긴 건지 한 마디 한 마디 내뱉는 게 고통이었다. 갈라진 목소리에 미간을 찌푸리며, 이엘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푹신한 침대와 옆에 달린 설렁줄. 이곳은 영락없는 황녀궁이었다. 이엘은 마치 깊은 꿈을 꾼 것 같은 착각에 어안이 벙벙했다. ……다 꿈이었나? 다시 황녀의 자리로 돌아온 건가? 몇 번이고 눈을 깜빡거리던 그녀는 무거운 팔을 뻗어 설렁줄을 힘겹게 잡아당겼다. 종소리가 울리자마자 굳게 닫혀 있던 문이 벌컥 열렸다.

“나타니엘!”

……꿈이 아니었구나. 쏟아져 들어온 노아의 음성에 이엘의 볼 위로 굵은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노아 역시 침대 바로 옆에 서서 이엘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번엔 정말로 내가 죽은 건가?”

“무슨 그런 말을……! 그런 말을 해, 나타니엘…….”

울컥한 건 이엘만이 아닌 듯했다. 이엘이 웃으며 그를 향해 손을 뻗자 가까이 다가온 노아가 그녀의 등과 무릎 뒤에 손을 넣어 제 품으로 안아 올렸다.

“너무 오래 누워 있어서 바로 걷기 힘들 거야. 불편해도 당분간은 내가 안아서 이동하는 게 낫겠어, 나의 엘.”

“내가 얼마나 잠들었는데?”

“……2년 하고 반년 정도.”

생각보다 더 오래 누워 있었구나. 그렇게 중얼거리는 이엘의 이마 위로 노아의 따듯한 입술이 내려앉았다. 그는 깨어질 환상처럼, 연신 이엘의 얼굴 위에 제 체온을 나눠 주기 바빴다.

“……나타니엘?”

열린 문 새로 어떤 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노아의 품에 파묻혀 웃음을 터뜨리던 이엘의 고개가 침실 문을 향했다. 그곳엔 감히 들어오지 못한 채 눈만 껌뻑거리는 레온이 서 있었다.

“레니.”

“……정말 나타니엘이야?”

“응.”

“…….”

“울지 말고 가까이 와.”

레온은 돌처럼 굳은 채 그 자리에 서서 눈물을 뚝뚝 흘리고만 있었다. 이엘이 그를 향해 손짓하는데도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그녀를 품에 안은 노아가 직접 레온의 앞으로 이엘을 데려다주어야 했다.

“레니.”

“자, 잠깐만! 잠깐만 내게 시간을 줘…….”

레온은 벅찬 감정을 추스르는 데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그러나 노아의 품에서 내려온 이엘이 어렵게 땅에 발을 딛자마자 주저앉는 걸 보고, 레온은 저도 모르게 팔을 뻗어 그녀를 붙잡아 세웠다.

“그렇게 바로 내려오면 어떡해.”

“지금 붙잡지 않으면 레니가 도망갈 것 같아서.”

“……내가 어딜 가. 네가 여기 있는데.”

레온은 입술을 꽉 깨물며 제 손을 잡고 마주 선 이엘의 얼굴을 천천히 살폈다. 3년 가까이 되는 시간 동안 레온은 매일같이 희망과 절망을 넘나들며 그녀의 곁을 지켰다. 처음 반년은 슬픔에 젖어 울기만 하던 노아를 채찍질하는 데 제 시간을 쏟았고 그 이후 2년간은 감정을 억누른 노아를 대신해 저가 눈물을 쏟았다.

레온은 이엘의 뒤에 선 제 친구의 얼굴을 바라봤다. 노아의 새카만 눈동자는 그녀에게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 모습에 실소하듯 웃음이 터진 레온은 이엘의 손을 놓고 뒤로 물러나는 걸 택했다.

“나와의 회포는 나중에 풀고, 지금은 노아와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좋겠네.”

레온의 말에 이엘이 고개만 돌려 노아를 쳐다봤다. 그는 저가 눈치 준 게 아니라며 어깨를 으쓱였지만 레온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걸로 보아 의도치 않게 눈치를 준 건 맞는 듯했다. 레온이 푹 쉬라며 문을 닫고 나가려는데 이엘은 그제야 떠오른 무언가에 노아의 팔을 붙잡고 다급히 물었다.

“테오는?!”

어떻게 내 아이를 잊을 수가……. 이곳에 돌아온 이유 중 하나가 그 아이 때문인데. 이엘이 미간을 찌푸린 채 노아를 간절히 바라보다가 문고리를 쥔 레온을 또 불안하게 쳐다봤다. 두 남자는 달리 말이 없었고 그게 이엘의 심장을 쿵 떨어뜨려서.

“어, 어떻게 된 거야? 아이가…… 테오는……!”

“진정해, 엘. 테오는 무사하다.”

노아가 품에 안아 침대에 올려놓은 뒤에 차분히 설명했다.

“잘 자랐어. 다만 지금 당장 만날 순 없어서 그렇다.”

“왜?”

“테오는 지금 황궁에 있어.”

“황궁? 그러면 여긴……,”

“여긴 늑대의 영지다. 내 영지.”

완연한 황녀궁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러고 보니 곳곳에 묻은 정취가 늑대의 것을 닮았다.

“예전에 내 침실 옆에 네 침실을 만드는 중이라고 했던 것 기억나?”

“아…….”

“공사가 다 마무리되기도 전에 네가 떠나서 몇 년을 비워 뒀는데. 돌아와 줘서 고맙다, 나타니엘.”

말을 마친 노아는 손으로 침실 한구석을 가리켰다. 그곳엔 작은 문이 하나 있었고, 그 너머엔 자신의 침실이 있다며 설명을 이었다. 신기한 듯 곳곳을 바라보던 이엘은 레온이 문을 닫고 나가는 것을 확인하곤 노아의 팔을 잡아당겨 테오의 소식을 물었다.

“왜 황궁에 있는 거야? 그럼 지금 황궁은 누가……,”

“엘, 진정해라. 모두 다 안전하니까 우선은 몸을 추스르는 것에 집중해.”

“하지만…….”

“테오는 황제와 함께 있다.”

“아…….”

“네 반쪽인 아르세니온.”

“…….”

“그가 황제가 되었어, 네 뜻대로.”

이제야 마음이 놓인 건지, 이엘은 축축한 눈으로 멍하니 노아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침대 위에 몸을 눕혔다. 노아는 다정하게 그녀의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이불을 덮어 주었다.

“테오를 데리러 갔다 올게. 하트 경을 들여보낼 테니 안심하고 조금 더 자도록 해라.”

“노아. 미안해. 나 때문에 마음고생 심했지?”

“별로. 그 정도는 네가 겪은 일에 비하면 별것도 아니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지난 2, 3년은 노아에겐 죽을 만큼 힘든 시간이었다. 반년은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채 이엘이 잠든 침대 옆에서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수면제를 먹어도 소용이 없었고, 심지어 스완과 드레인의 능력으로도 잠을 자는 게 불가능했다. 그래서 매일 술을 입에 단 채 그녀의 침실을 지켰다.

그러던 노아가 정신을 차린 건, 제 앞으로 뽈뽈뽈 걸어온 작은 아이였다. ……이렇게 작은 아이가 존재했었나? 물끄러미 아이를 바라보는데, 아이가 떠듬떠듬 어떤 단어를 내뱉었다.

‘아, 빠?’

새카만 머리카락. 에메랄드를 닮은 녹색 눈동자. 누가 봐도 저와 나타니엘의 아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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