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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484화 (484/488)
  • 484화

    “이대로 끝이란 거야?”

    “아니. 그 뒤는 나자르가 이어서 할 거야.”

    미엘의 눈짓을 받은 오드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저를 빤히 지켜보기만 하던 패티스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패티스 백. 내게 주세요.”

    “……정말 이게 맞는 건가요, 오드 님?”

    “주저하시는 건가요?”

    “아뇨. 주저하지 않습니다.”

    패티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품 안에서 뭔가를 꺼내 오드에게 건넸다. 그것을 알아본 이들은 경악하듯 눈을 크게 치떴다.

    주드의 기름. 르네의 눈알. 레온의 갈기. 그것들을 패티스에게 받아 손에 쥔 오드는 엉망이 된 폐허를 떠나 어딘가로 사라졌다. 오드가 무엇을 할 거라고 말하지 않았지만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그의 뜻을 짐작했다.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 오드! 안 돼! 너마저 가겠다고? 안 돼, 오드……. 차라리 내가 갈게. 제발 내가 가게 해 줘.”

    이온만이 오드를 붙잡고 늘어졌다. 그러나 오드는 제 옷 끝을 잡고 놓질 않는 이온의 손을 단호하게 떼어 냈다.

    “아르세니온. 우리는 각자에게 주어진 사명이 있어. 너희가 신탁의 아이로 태어난 것처럼 나는 너희를 지키기 위해 태어난 거야.”

    “하지만……,”

    “짧지만 즐거웠어, 아르세니온. 너희 둘이 자라는 모습을 보는 게 내 기쁨이었단다.”

    나자르는 신이 인간을 너무 사랑해서 보낸 자신의 대리자였다. 인간에게 자유와 선택을 허락했기 때문에 그들이 옳지 못한 방향을 가더라도 돌아올 수 있는 길을 준비한 것이다. 그게 나자르였다. 인간을 바르게 이끄는 것뿐 아니라 희생까지도 그들의 몫이었다.

    “차라리 내가 죽었어야 했어. 내가…… 내가 살지 말고 2차 전쟁 때 죽었더라면…….”

    “아르세니온. 너는 모르겠지만 모든 결과엔 과정이 필요해. 하나의 이야기가 완성되려면 일련의 과정이 필요한 것처럼, 우리가 현재 겪는 상황 역시 과거라는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거란다. 과정이 없이는 결과가 나올 수가 없어.”

    “…….”

    “네가 2차 전쟁에서 죽었더라면. 혹은 1차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나아가 인간과 이종족이 같은 종족이었더라면. 그런 가정은 무의미해. 그게 후회라는 단어를 만들 뿐이니까. 중요한 건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에 관한 거야. 주체적인 삶을 사는 너희를 위해 나와 같은 나자르를 보내셨지만, 우리의 사명도 이제 끝이야. 마지막 남은 나마저 신의 품으로 돌아가면 이제 정말 너희만 남겠지.”

    “…….”

    “내가 죽음으로써 완성되는 이야기도 존재한다는 뜻이란다.”

    오드의 말을 들으며 이온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넋이 나간 듯한 그의 뺨을 손등으로 쓰다듬으며 오드는 다정하게 타일렀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야. 신은 여전히 너희를 사랑하시고 지켜보고 계셔. 우리는 없지만 너희는 또 너희 힘으로 일어설 수 있을 거야. 후회하지 말고 그 후회를 기회로 바꿔 보렴. 너와 이엘은 똑똑하니까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거라고 믿어.”

    이미 벌어진 일을 후회해 봤자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모든 게 다 지금을 위한 과정의 일부였을 뿐이다. 그게 하필 신탁의 아이들에게 큰 희생을 요구하게 됐지만, 모든 건 처음으로 돌아가기 위한 과정이니까.

    오드는 이엘이 사라진 곳에 다가섰다. 이젠 텅 빈 폐허가 된 곳에 따사롭게 내리쬐는 햇빛이 가득 찼다. 그는 땅을 향해 무언가 중얼거렸고 입술 새로 나온 새하얀 빛이 결계를 치듯 주변을 둥글게 둘러쌌다. 누군가와 대화하듯 끊임없이 말하며 들고 왔던 유리병들을 차례차례 바닥에 깨고 붓기 시작했다.

    모두가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두려움과 염려로 점철된 그들의 눈동자엔 아주 작은 희망의 빛도 얼비쳤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모두의 시선 속에 오드는 품 안에서 단검을 꺼내 위로 쳐들었다. 그러곤 망설임 없이 제 가슴을 향해 찔러 넣었다.

    *

    “나타니엘.”

    무겁게 내려앉은 눈꺼풀을 들기 힘들었다. 이대로 영원히 잠들고 싶은 마음만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제 귓가에 찾아든 음성이 저를 불러 깨웠다.

    “나타니엘. 일어나야지.”

    귀에 익은 목소리 같기도 했고, 처음 듣는 음성 같기도 했다. 자신이 눈을 뜰 때까지 이름을 부를 것 같아서, 결국 이엘은 힘겹게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

    “많이 컸구나, 나타니엘.”

    “여기가 대체 어디…… 제가 죽어서 어머니를 뵐 수 있게 된 건가요?”

    아주 오래전. 스완의 능력 속에서 만났던 어머니와 달랐다. 이건 이엘의 기억을 토대로 만들어진 환각이 아니다. 정말 그녀의 어머니가 눈앞에 있었다.

    이런 날이 오면 눈물이 흐를 것 같았는데 막상 마주한 어머니를 보니 가슴이 마냥 설레기만 했다. 신을 저버리고 악을 선택했으니 죽으면 신의 품으론 가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영원히 악의 공간에서 살아야 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어머니를 만나게 되다니.

    “……어머니. 정말 어머니세요?”

    “시간이 없단다, 나타니엘.”

    “네? 무슨 시간이요?”

    “선택을 해야 돼.”

    이제 다 끝난 게 아니었나? 내게 선택할 게 더 남았던가? 이미 지쳐 버린 이엘은 선황후의 말에 진이 빠져 고개를 저었다.

    “그만하고 싶어요.”

    “…….”

    “저는 제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해요. 이 정도면 충분하잖아요.”

    환멸이라는 단어를 쓰고 싶지 않았지만 여태 이엘에게 주어졌던 모든 상황들이 그녀를 환멸 나게 만들었다. 마지막까지도 뻔뻔하게 그녀에게 희생을 요구하던 사람들을 생각하면 그냥 이대로 다 놔 버리고 싶단 마음만 들었다.

    하지만……. 하지만 또 그리워. 이해해. 그 나약해 빠진 마음이 곧 내 마음을 닮아서.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게 돼. 누구의 잘못도 아니잖아, 사실은. 또는 우리 모두의 잘못이잖아, 사실은.

    그러니까 이해한다. 궁지에 몰려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그들을 이해한다. 이제 와서 원망하기엔 그런 감정을 갖는 것조차 너무 지쳤다.

    “아가. 네게 모든 걸 맡기고 떠나 버린 나를 용서하지 말렴.”

    “어머니의 잘못이 아닌걸요.”

    “그래. 너의 잘못도 아니지.”

    “…….”

    “네가 실수했더라도 괜찮아.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애초에 이온을 버렸더라면 이런 결과는 없었을 텐데. 처음부터 내 목숨과 이온의 목숨을 맞바꿨더라면 이런 가슴 아픈 희생들은 없었을 텐데. 내 아이, 테오도로를 걸지 않아도 됐을 텐데…….

    노아를 사랑하지 말걸. 너희를 사랑하지 말걸. 그냥…… 땅 위로 가지 말걸. 전쟁이 터졌을 때 르네의 검에 죽었어야 했는데. 아버지의 손에 맞아 죽었어야 했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그냥 그 자리에서 선황의 손에 죽었어야 했는데.

    왜 내가 살아서 이렇게 된 걸까. 왜 난…… 자꾸만 이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

    “너희를 처음 가졌을 때. 나는 무척 행복했단다.”

    그러나 아주 짧은 시간 자책했던 것들이 사라졌다. 선황후가 하는 말이 그녀의 모든 후회를 불식시켰다.

    “아이를 갖기가 힘들었거든. 선황과 내 사이는 좋지 않았고, 그 탓인지 아이가 날 찾아오지 않았어. 어쩌면 내가 그의 아이를 갖기 싫어했기에 더 그랬는지도 몰라. 당시에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 따로 있었으니까. 마음이 준비되지 않았던 거야.”

    선황후는 제 옆자리를 탁탁 쳐서 이엘에게 권했다. 주섬주섬 일어난 이엘은 그녀의 곁에 앉아 칭얼거리듯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 안겼다.

    “난 선황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고, 몇 번이나 그러지 말라고 간언했지만 소용이 없었단다. 황후로서 자격 박탈이지. 내가 말리지 못했기 때문에 전쟁이 일어난 거라고 자책하고 또 자책했어.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너희가 날 찾아온 거야.”

    “…….”

    “알렉산드로의 아이이면서 동시에 나의 아이이기도 한 너희. 그저 배 속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너희는 내 세상이 되었고 내 전부가 되었어.”

    그건 이엘도 공감했다. 얼굴도 보지 못한 아이인데, 배 속에 품었다는 이유만으로 전부가 되어 버렸다. 테오도로, 그 예쁜 아이가.

    “나타니엘. 내가 너희를 두고 먼저 떠난 것에 사과를 해야 할 것 같구나.”

    “아니에요, 어머니. 저희는……,”

    “한순간도 너희를 사랑하지 않은 시간이 없단다. 매 시간이 행복했고, 즐거웠고, 기뻤어.”

    “…….”

    “그러니까 나타니엘. 너는 사랑을 못 받고 자란 아이가 아니라, 지금까지도 무한한 존재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아이란다. 나뿐 아니라 신께서도 너를 사랑하시니까.”

    여태 이엘은 자신이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랐기에 아이에게도 사랑을 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특히나 부모에게서 받은 사랑이 없기 때문에 테오도로에게 부모의 사랑을 줄 수 없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아이에겐 부모가 필요해.”

    “……알아요.”

    “신께서 인간을 너무도 사랑해서 나자르를 보내셨지만, 사실 부모 역시 신의 사랑을 간접적으로 보여 주는 존재지.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이 신의 것과 비슷하니까.”

    “…….”

    “테오도로가 널 기다린단다. 돌아가렴.”

    “하지만 저는 이미 죽었어요. 가짜 아이와 함께.”

    이제야 마지막 기억들이 파도처럼 물밀 듯 밀고 들어온다.

    이엘은 전쟁이 한창이던 곳에서 아이를 낳았고, 드레인의 공간으로 아이와 함께 들어갔다. 드레인은 자신의 공간에서 못 만드는 게 없었지만 그건 그녀의 공간을 벗어나면 사라지는 가짜였다.

    하지만 드레인이 만든 가짜 아이에, 거짓 생명을 넣는 신의 열매를 더하니 정말 살아 움직이는 인형이 되었다.

    이엘은 그 인형 같은 가짜 아이에게 용의 비늘을 붙여 재웠다. 한번 붙이면 나자르도 뗄 수 없는 비늘이지만, 신과 ‘그’는 뗄 수 있었다. 그 상태로 ‘그’의 공간에 들어왔고 한차례 실랑이 끝에 가짜 아이를 ‘그’에게 빼앗겼다. ‘그’는 아이의 몸에 붙은 비늘을 가볍게 떼어 내며 조롱했다.

    ― 이런 걸로 내 눈속임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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