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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483화 (483/488)
  • 483화

    “하논. 어떡해? 이러다 정말 다 죽으면 어떡해!”

    “나도 몰라……. 우린 왜 이렇게 된 거야? 폐하를 지키자고 해 놓고 왜 우리끼리 싸워?”

    “제발 그만해요! 제발요!!”

    슈프가 찢어질 듯한 목소리로 하울링을 내며 울부짖었지만 그 목소리는 닿지 않은 듯했다.

    “로니.”

    “……폐하?”

    엉엉 우는 늑대들과 하이에나들에게 다가온 이엘은 다정하게 웃으며 로날드의 등을 쓰다듬었다. 커다란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있던 로날드는 이엘을 보고서야 안정을 되찾은 건지 그녀의 품에 머리를 치대며 투정을 부렸다.

    “어른들이 싸워요! 폐하! 왜 우리끼리 싸워야 돼요?!”

    “저희는 싫어요. 전쟁이 너무 싫어요……. 그만하고 싶어요, 폐하. 무서워요…….”

    “살려 주세요. 제발 어른들을 막아 주세요.”

    늑대와 하이에나는 물론이고, 근처에 있던 다른 종족의 어린 테르들마저 이엘의 곁에 하나둘 모여들었다. 목 놓아 우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이엘은 제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마치 어린 시절의 제 모습 같았다. 전쟁이 싫은데…… 어른들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게 너무 억울하고 무서운데……. 왜 아이들이 피해를 봐야 할까.

    “로날드. 날 믿니?”

    “네! 믿어요! 폐하를 누구보다 믿어요!”

    “그럼 무슨 일이 일어나도 날 믿어 줄 거지?”

    “네! 무조건 폐하만 믿을 거예요.”

    “그럼 날 태워서 노아에게 데려다줘. 위험하겠지만 이 사이를 뚫고 갈 수 있겠니?”

    “물론이에요! 얼른 타세요, 폐하!”

    “저희도 엄호할게요.”

    위험을 무릅쓰고 저를 돕겠다고 나서는 아이들에게 이엘은 밝게 웃어 주지 못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이 전쟁을 끝내는 일뿐이었다. 더는 상처받는 아이들이 없게, 로날드와 하논이 서로를 향해 능력을 사용하지 않도록. 이 전쟁을 끝내는 것뿐이다.

    로날드의 등에 올라탄 이엘의 양옆을 슈프와 리퍼가 지켰고 그 앞뒤로 하논을 필두로 한 어린 하이에나들이 둘러쌌다. 또 그들의 밖을 호랑이 엘타와 타이곤 로, 그리고 수많은 호랑이와 사자들이 에워쌌다.

    창공은 새끼 독수리들이 지켰다. 어느새 뱀의 모습으로 돌아온 포레스트도 바닥을 기며 언제라도 독기를 뿜을 수 있게 모든 준비를 마쳤다.

    “가자, 로날드.”

    “네!”

    마침내 땅을 박차고 달리는 로날드와 거대한 테르 무리가 전장을 뚫는 데 성공했다. 격전을 벌이던 늑대와 하이에나마저 당황한 듯 뒤로 주춤거리며 밀려났고, 무력하게 죽음을 기다리던 타 종족들은 제 새끼들을 향해 다가오려 했다.

    “모두 막아! 아무도 로날드를 건드리지 못하게 해!”

    “슈프, 리퍼! 너흰 양옆으로 얼음 장벽을 세우고 로와 엘타는 후미에서 화염으로 길을 막아! 나머진 능력을 적절히 사용해서 우리의 장벽으로 어른들이 침범하지 못하게 방해해야 돼! 공격하지 말고 방어에 집중해! 우리에겐 시간이 별로 없어! 단시간에 끝내는 거야!”

    로날드는 지친 기색 하나 없이 그렇게 소리치며 달리는 속도에 박차를 가했다. 어차피 제 새끼들을 향해 죽일 듯이 공격을 퍼붓는 이종족은 없었다. 그런 와중에 아이들은 죽기 살기로 방어에 치중하며 이엘과 로날드를 지켜 내는 데 집중했다.

    “폐하! 노아 님이 보여요!”

    로날드의 외침에 이엘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있는 차원 너머의 공간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실패한 듯했다. 노아는 형체를 잃은 ‘목소리’와 싸우느라 여념이 없었다.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에서 노아는 허공을 향해 능력을 사용하고 있었고, 그의 몸은 피를 뒤집어쓴 것처럼 새카만 털이 핏빛으로 물든 채였다.

    “로날드. 잠깐 멈춰.”

    “네?”

    “내가 신호를 주면 바로 노아에게 달려가서 그를 옮기렴. 알겠니?”

    “그게 무슨 말씀……,”

    로날드가 말을 채 다 잇기도 전에 이엘은 활시위를 겨누었다. 그때까지도 로날드는 그녀가 노아와 싸우고 있는 ‘그’를 향해 활을 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홰액― 소리를 내며 빠르게 날아간 화살은 ‘그’가 아닌 노아의 허리춤에 박혔다.

    “크으윽!”

    거기에 멈추지 않고 이엘은 화살 두 개를 더 쐈다. 각각 노아의 앞다리 두 개에 박히자 중심을 잃은 노아는 괴성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로날드, 지금이야!”

    “폐하?!”

    “어서 노아를 지켜!”

    로날드의 등에서 내린 이엘이 노아가 쓰러진 곳으로 달려가며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노아가 바닥에 쓰러지며 놓친 아이를 품에 안고 빠르게 그를 지나쳤다. 로날드는 정신없는 와중에도 이엘이 시키는 대로 쓰러진 노아의 곁에 다가가 제 주인을 이빨로 물어 끌어당겼다.

    “오아이! 이어아에어!(노아 님! 일어나세요!)”

    뒤쪽에서 상황 파악을 마친 슈프와 리퍼가 돕기 위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로날드는 그들이 다가와 노아의 몸을 움직이는 역할을 나누고 나서야 시선이 이엘에게 향했다.

    “로날드?! 왜 그래? 정신 차려!”

    “……폐하께서 사라지셨어.”

    “뭐?”

    “……저기로 들어가셨다고.”

    로날드가 가리키는 곳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균열이 생겨 있었던 ‘그’의 공간이었다. 슬픔으로 얼룩진 로날드의 목소리에 슈프와 리퍼의 시선도 그쪽을 향했다. 아무것도 없다. 이엘도 없었고 핏덩어리로 만들어졌던 ‘그’도 없었다.

    “안 돼…… 안 돼, 나타……나타니엘…….”

    세 늑대의 목소리를 들은 노아가 간신히 눈을 뜬 채 굵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결국 막지 못했다. 그녀의 희생을 막지 못했다고…….

    바닥을 붉게 적셨던 찌득찌득한 핏물이 조금씩 증발해 사라지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부터 어둠은 사라졌고, 성력의 빛이 없이도 세상은 밝아졌다. 똑같이 고요한 적막이 찾아왔지만, 어둠이 잠식됐을 때의 절망은 사라졌다. 모두의 눈엔 살았다는 기쁨이 묻어 있었다.

    “안 돼!! 폐하! 안 돼, 제발!! 아니지? 이거 다 장난이지? 아니잖아. 그럴 리 없잖아. 폐하가 왜! 나타니엘이 왜? 왜……. 대체 그녀가 뭘 잘못했는데? 뭘 그렇게 잘못해서 죽음으로 몰아가? 왜!!”

    이미 목소리가 잔뜩 쉰 레온이 울음을 토해 내며 바닥에 제 머리를 찧고 고함을 쳤다. 어떻게 이래……. 어떻게 이렇게 허무하게 보낼 수가 있어……. 왜…… 대체 왜……!

    “으아아악!”

    이카르도 마찬가지였다. 숨도 쉬지 못할 만큼 괴로움에 발버둥 치던 그는 비명을 지르며 조금 전까지 이엘이 있었던 곳을 샅샅이 뒤졌다. 어디 있어. 나타니엘, 너 어디 있어. 왜 그랬어. 왜 혼자 가……. 아무리 찾고 헤매도 그녀가 사라진 ‘그’의 틈 따윈 보이지 않았다.

    “다 끝났어. 계약이 이행돼서 ‘놈’이 사라진 거야.”

    대충 손등으로 얼굴에 묻은 핏물을 닦아 낸 미엘이 처음으로 낮은 목소리로 상황을 정리했다.

    “기척이 사라졌어. ‘놈’이 이곳을 완전히 떠났다고.”

    “…….”

    “어때. 너희가 그토록 바라던 세상이 왔는데 기분이 어떠냐고.”

    비꼬는 어조도 아니었고 정말로 단순한 감상을 묻는 질문이었는데도 미엘에게 대답하는 이는 하나도 없었다. 그 순간 기뻐하던 모두의 마음속에 죄책감이 생겼다. ……우리가 정말 이렇게까지 했어야 했나? 이게 정말 옳은 방법이었나?

    “으아아악! 사, 살려, 살려 줘! 아악!”

    올리세스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그곳엔 검을 들고 그를 향해 무자비하게 휘두르며 공격하는 유클리드가 있었다.

    “왜, 왜 이러는 거야! 이제 끝났잖아! 모두가 바랐는데 왜 나한테만……!”

    “입 닥쳐. 넌 내 손으로 죽이겠다고 다짐한 지 오래니까.”

    지금도 마음만 먹으면 올리세스의 목숨 따위 단번에 끊어 낼 수도 있는데도 유클리드는 그러지 않았다. 계속해서 검으로 외상을 입히며 한계로 몰아넣고 또 몰아넣는 중이었다.

    이대로 죽기 직전까지 상처 입혔다가 저 입에 포필렌을 처박아 넣을 것이다. 이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저놈의 입에 포필렌을 처넣고 똑같이 보복하는 것. 똑같은 꼴을 만들어 버리는 것.

    그걸 가만히 지켜보던 패티스 역시 검을 들어 올리세스를 공격했다. 유클리드와 똑같은 방법으로 죽지 않을 만큼의 외상을 만들면서. 패티스답지 않은 가학적인 짓이었으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자신의 울분을 풀 수 있는 곳이 이곳밖에 없었다. 저딴 놈 때문에 나의 주군이 희생당했다니.

    “으아악! 제, 제발……!”

    “이렇게 된 거, 그냥 올리세스의 잔당을 다 잡아 죽이지, 뭐.”

    건조한 표정의 앤디마저 그렇게 중얼거리며 검을 들었다. 주드의 죽음 이후 또다시 가족을 잃은 그의 눈동자는, 다시는 빛을 되찾지 못할 것처럼 짙은 어둠이 가득했다.

    “유클리드, 멈춰.”

    그러나 그들을 말린 건 몸에 박힌 화살을 뽑아내고 피를 토해 내던 노아였다. 사람의 모습으로 변한 노아는 엉망이 된 입가를 대충 닦으며 유클리드에게 한 번 더 명령했다.

    “멈춰라, 유클리드 백.”

    “…….”

    “또 전쟁을 치를 셈이야?”

    “…….”

    “나타니엘의 희생을 헛되게 하지 마. ……부탁이다.”

    나타니엘의 희생이란 단어에 앤디는 들고 있던 검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의 얼굴은 피와 눈물로 엉망진창이었다. 앤디는 바닥에 쓰러져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주드도 지키지 못했는데…… 이엘도 지키지 못했어……. 또. 이번에도 또 내 동생을 지키지 못했다고…….

    연이어 유클리드는 긴 한숨을 쉬며 손으로 얼굴을 가렸고, 패티스는 쓰러진 올리세스의 목 위로 검을 들어 올렸다가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땅바닥을 찍었다.

    “젠장! 젠장!!”

    훌쩍이는 소리가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누구는 괴로움을 이기지 못해 헛구역질을 했고, 또 누군가는 슬픔을 억누르지 못해 쓰러졌다. 암흑이 가득했던 세상은 사라지고 이전보다 더 밝은 빛이 찾아왔는데도, 모두의 마음속엔 여전히 어둠이 남아 절망을 만들었다.

    “응애애― 으애앵―!”

    그때 어디선가 낯선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짐승의 울음소리도 아니고 인간의 것도 아닌 기묘한 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그곳을 향했다.

    “테오도로 님이에요.”

    소용돌이치며 생긴 허공의 틈새에서 스완이 소리쳤다. 그와 함께 그 공간에 있었던 드레인이 소리를 지르며 울고 있는 아기를 품에 안고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모두가 얼어붙었다. 아기는 조금 전에 나타니엘이 분명……,

    “그건 내가 만든 가짜야. 육체는 내가 성력으로 만들었고 안에 담긴 가짜 영혼은 신의 열매로 불어넣은 거야. 황제와 저 늑대의 피를 섞어서 만들었던, 안팎이 다 가짜인 인형이라고.”

    “테오도로를…… 내게 줘.”

    “여기.”

    정확한 상황을 알고 있는 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누구보다 이엘의 계획을 잘 알고 있던 노아는 상처 입은 몸으로도 우뚝 서서, 제게 다가오는 드레인을 향해 팔을 벌렸다. 그녀는 노아의 품에 울고 있는 아기를 안겨 주었다.

    “테오.”

    지친 목소리로 아기의 이름을 부르자, 자지러질 것처럼 울던 테오도로가 거짓말처럼 눈물을 그쳤다. 앞도 제대로 못 보는 핏덩이라 목소리도 구별하지 못할 텐데도, 테오도로는 마치 저가 안긴 사람이 제 아비임을 알아보는 것처럼 울음을 그쳤다.

    노아는 그제야 아이를 바라봤다. 감긴 눈꺼풀 사이로 이엘과 똑 닮은 녹색 눈동자가 아른거렸다. 오물거리는 입술도 그녀를 닮았다. 칭얼거리는 듯 포근한 제 품을 찾아 안기는 테오도로의 존재에 노아는 눈물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래서 얼굴을 보면 헤어질 수 없을 거라고 그랬구나. 이렇게 널 닮고, 날 닮아서……. 누가 봐도 자신과 나타니엘의 아이였다. 테오도로는 둔이기 때문에 보통의 인간 아기보다 조금 컸고, 우논의 아이보다는 한참 작았다. 혹여나 잘못 만졌다가 아이에게 해를 입힐까, 노아는 품에 끌어안지도 못하고 그대로 손에 든 채 바라보기만 했다.

    “황제가 정말로 죽었다고? 그러면 신탁은? 신이 주신 신탁은 어떻게 되는 건데!”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던 가비가 소리를 치며 미엘을 흔들어 댔다. 용들의 시선이 일제히 아르세니온에게 닿았으나 그들은 고개를 저었다. 아르세니온만이 신탁의 주인이 아니다. 신탁의 아이는 나타니엘과 아르세니온, 두 쌍둥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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