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2화
“다음에 태어날 아이가 신의 선택을 받아 새로운 세상을 만들 것이다.”
“…….”
“그건 폐하께서 태어나시기 다섯 달 전에 내려온 마지막 신탁이었습니다.”
하지만 피시의 간절한 외침은 다른 쪽으로 닿은 모양이었다. 피시는 로빈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제 생각과 다른 쪽으로 변해 가는 것을 느꼈지만 막을 도리가 없었다.
“지금이 그 때가 아닐까요?”
“…….”
“신탁이 말하는 새로운 세상이란, 당신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세상은 아닐까요. 폐하, 제 생각이 억측입니까?”
“당신이 뭔데 나타니엘의 희생을 요구합니까? 당신 말대로라면 나도 그 신탁의 아이에 속하는 것 아닙니까? 차라리 내가 대신 죽겠습니다.”
침착한 로빈의 말을 깨뜨리고 들어온 이온은 고개를 흔들며 그건 아니라고 부정했다. 차라리 자신이 죽겠다며 길길이 날뛰는 이온을 가볍게 밀쳐 낸 로빈은 이엘을 마주 보고 선 채 서늘한 표정으로 담담히 말했다.
“신탁 하나만 보고 당신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제게 말씀하셨던 대로 결과를 보여 주십시오. 저희에게 새 세상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폐하.”
어떻게 저럴 수 있지? 피시는 저 빌어먹을 뱀을 노려보며 씩씩거렸지만 자꾸만 감기는 눈을 뜨기가 어려워 가쁜 숨을 몰아쉴 뿐이었다. 아무도 그를 말리지 않는 현실이 너무 억울했다.
하지만 가장 억울한 건 흐릿한 시야 사이로 보이는 이엘의 서글픈 얼굴이다. 체념과 의지 사이에서 갈등하던 그녀는 결단을 내린 듯싶었다.
그 순간 피시는 능력을 그녀에게 사용하려고 했다. 자신의 염력을 사용해서 나타니엘을 묶어 두면 아무도 그녀에게 책임을 못 지우지 않을까. 내가 옴짝달싹할 수 없게 만들면 되는 거잖아. 아무 데도 못 가게, 이곳에 머물 수 있게 하면…… 근데 내가 할 수 있을까?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피시는 바닥에 쓰러져 모로 누운 채 조금 전 자신의 분노로 엉망이 된 전장을 살폈다. 세밀한 조절 없이 막무가내로 염력을 사용해 뽑아낸 것들이 짙은 흔적을 남겼다. 땅은 지진이 난 것처럼 갈라졌고 용암이 흐른 것처럼 죄다 소생이 불가한 곳으로 변해 버렸다.
이 상태로 이엘에게 능력을 사용하면 그녀는 죽을 것이다. ‘목소리’로부터 그녀를 지키기는커녕, 내 능력에 이엘이 죽을 거라고.
“이후는 내게 맡겨라.”
피시는 제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노아의 목소리가 그 순간만큼은 신의 음성처럼 들렸다. 노아만이 그녀를 잡을 수 있을 거라고. 피시는 그렇게 생각했다.
“나타니엘. 더 가지 마라.”
노아는 늑대의 모습으로 돌아가 쩍쩍 갈라지고 무너진 지반을 뛰어 이엘의 앞에 도착했다. 커다란 몸을 더 크게 부풀리며 이빨을 드러내며 그르렁거렸다. 흡사 협박하는 모습과도 같은 행위에 바닥에 쓰러져 있던 동맹군들이 하나둘 몸을 일으켜 세웠다.
“네 품에 있는 건 내 아이다. 그 아이를 데려갈 생각 따윈 꿈도 꾸지 마라.”
싸늘한 노아의 목소리가 죽은 듯이 고요했던 적막을 깨웠다. 조금 전에 로빈이 이엘을 사지로 몰아갔을 때보다 더 무서운 분위기였다. 불과 조금 전만 해도 달콤한 사랑을 나눴을 두 사람 사이에 불꽃이 튈 듯한 신경전이 시작됐다.
이엘은 어떤 말도 없었다. 그저 제 품에 있는 아이를 조금 더 끌어안으며 겉옷 안으로 숨겼을 뿐이다. 그러는 새에도 늑대의 매서운 눈동자는 아이에게 고정된 채였다. 여차하면 달려들어 그녀를 물어 죽이고 아이를 빼앗을 것처럼 흉흉한 기세로.
“가려면 혼자 가라.”
노아의 차가운 음성에 이엘이 헛웃음을 들이켰다. 그러곤 허리춤에서 검을 꺼내며 노아를 향해 겨누었다.
그때였다. 쓰러졌던 하이에나들이 일제히 일어나 이엘의 뒤에 섰다. 패티스와 하트를 필두로 모든 근위대와 하이에나들이 그녀의 뒤에서 전투태세를 갖췄다. 마찬가지로 노아의 뒤에도 늑대들이 집결했다. 서로를 잡아먹을 것처럼 이빨을 빠드득 갈며 짐승의 울음소리로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순식간에 전투는 하이에나와 늑대의 것이 되어 버렸다. 몇 년을 한 몸처럼 지냈던 두 종족이 한순간에 갈라져 버렸다.
“나타니엘. 우리끼리 싸워야 할 이유가 없다.”
“…….”
“아이만 내게 주면 돼.”
아이를 달라고 요구하며 죽음으로 몰아가는 건 노아였는데, 도리어 눈물을 흘리며 아픔을 호소하는 것도 노아였다. 이엘은 저를 향해 으르렁거리는 늑대들을 무정한 표정으로 쳐다보며 검을 제대로 고쳐 쥐었다. 그러곤 숨 돌릴 틈도 없이 노아를 향해 달려들었다.
모두가 기다렸다는 듯이 맞붙었다. 이엘은 커다란 검은 늑대 한 마리만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전에 아이를 낳았던 사람이라곤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검을 사용하는 자세에 흐트러짐이 없었다.
가볍게 발을 굴러 튀어 오른 이엘은 날쌔게 움직이는 노아의 등 위에 올라탔다. 노아 역시 그녀를 봐주지 않았다. 몸을 바닥에 굴리고 흔들어 대며 이엘을 바닥에 떨어뜨리는 데 성공했다.
착지마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마무리한 이엘은 쉬지 않고 노아를 향해 검을 사용했다. 노아가 얼음으로 창을 만들어 이엘을 향해 날렸으나 뒤에서 그녀를 보조하던 하트의 염력으로 모든 게 무효가 됐다. 그러나 앤디가 하트를 향해 얼음을 퍼붓는 바람에 하트는 이엘을 보조하던 것에서 손을 뗄 수밖에 없었다.
“이쪽은 저희가 맡겠습니다, 각하! 아기님을…… 꼭 지켜 주십시오.”
앤디의 말에 이엘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웃음을 쳐다보던 앤디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손등으로 제 눈가를 마구 훔쳤다. 모르겠다. 감정에 휘둘리지 말자. 지금은……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잖아.
앤디처럼 이성을 차린 노아가 마지막 경고를 남겼다.
“더는 봐주지 않을 것이다. 포기해라, 나타니엘.”
“그런 것치고는 많이 봐주던데.”
“…….”
“봐주지 마, 노아. 난 그렇게 약해 빠진 자에게 아이를 맡길 수 없어.”
이엘은 그 말을 마치기 무섭게 등 뒤에서 활을 앞으로 빼며 시위에 화살을 걸어 쐈다. 쌕― 소리를 내며 날아간 화살은 노아의 오른쪽 허리에 정통으로 박혔다. 얼굴을 향해 쐈던 건데 노아가 재빨리 피한 덕에 치명상을 면했다. 이빨로 허리에 박힌 화살을 뽑은 노아는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와 검을 쥐었다.
맞붙는 두 사람의 모습을 멀거니 쳐다만 보던 피시는 자신이 지금 꿈속에 있는 건지 현실에 있는 건지 구분이 되질 않아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노아라면 이엘을 막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상황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자신이 믿었던 노아는 이엘이 아닌 아기를 선택한 것이다.
“제발 그만해요…….”
간신히 상체를 들어 올린 피시가 눈물을 후드득 떨어뜨리며 간절하게 매달렸지만 그의 작은 목소리는 그 누구에게도 닿지 않았다. 이엘과 노아가 검을 부딪치며 서로를 공격하는 모습을 보는 게 피시에겐 고역이었다.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을 볼 때면 질투를 느꼈는데, 그딴 치기 어린 감정이 얼마나 사치스러웠는지 절감하는 순간이다.
한 치의 밀림도 없었다. 그 오랜 시간을 서로가 서로의 대련 상대가 되어 훈련했으니 쉽사리 결판이 나지 않는 것도 당연했다. 조금 전 다짐처럼 노아는 봐주지 않았다. 정말 찔러 죽일 것처럼 이엘을 향해 검을 휘둘렀고, 이엘 역시 허점이 보이는 순간 끝낼 요량으로 응했다.
이윽고 노아는 끝내 마음을 먹은 듯했다. 검으로만 공격을 맞받아치던 것을 멈추고 능력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손으로는 검을 휘둘렀고 앞으로 치고 나가는 발끝에선 얼음이 솟아 이엘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이엘이 아주 잠깐 방심한 순간이었다. 노아의 얼음이 그녀의 뒤에 장벽을 세워 막다른 공간을 만들어 더 이상 물러서지 못하게 했고, 그의 검은 이엘의 손등을 깊게 찌르며 그녀가 쥐고 있던 검을 바닥에 떨어뜨리게 만들었다.
“악!”
노아는 단호했다. 그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중심을 잃는 이엘을 부축하기보다, 다시 한 번 더 검을 휘둘러 이엘의 품에 아이가 매달려 있던 끈을 잘라 냈다. 그러곤 아기가 바닥에 떨어지기 직전에 손을 뻗어 빼앗는 데 성공했다.
“이 정도면 내가 아비가 될 자격이 충분하겠지.”
“…….”
“나타니엘. 나를 용서하지 마라. 그리고 나 같은 건 그냥 잊어. 어차피 인간은…… 영원히 살지 못하니 네 사랑도 금세 식을 거야.”
자신의 검에 깊게 찔린 이엘의 손등에서 살점이 떨어져 나간 걸 보며 노아는 이를 악물었다. 그러곤 고개를 돌려 외면한 채 어딘가를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앤디! 나타니엘을 막아라!”
“……예!”
주저하는 듯한 앤디의 대답이 들렸고, 그 뒤를 이어 나타니엘의 절박한 비명 소리도 들렸으나 노아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어느새 그는 늑대의 모습으로 돌아가 아기를 감싸고 있던 천을 입에 물고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더 이상 네가 희생돼서는 안 된다. 네게 더 이상 짐을 지워서는 안 돼.
“오드 님!”
“네.”
노아가 붉은 핏덩이로 뭉쳐진 ‘그것’을 향해 달리며 오드를 불렀다. 그 순간 오드의 지팡이가 바닥에 꽂혔고 거기서 뻗어 나간 새하얀 빛이 ‘그것’을 비췄다. 여태 비축하고 응축했던 성력이 강하게 분사됐다.
― 크아아악!!
대지를 울리는 비명 소리와 함께 ‘그것’이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그리고 ‘그것’이 있던 곳에 아주 작은 틈이 생겼다. 마치 스완과 드레인이 이쪽으로 넘어올 때 생겼던 균열처럼.
저 틈 너머에 ‘놈’의 본체가 있다. 그곳에서 모든 걸 꾸미고 있으니 아예 그곳으로 들어가 ‘놈’을 작살낼 작정이었다.
노아는 아이를 묶은 천을 입에서 떨어뜨리지 않고 그곳만을 노려보며 내달렸다. 마음 같아선 이 천을 바닥에 내려놓고 아이의 얼굴을 한 번만이라도 보고 싶었다. 어떻게 생겼는지. 정말 이엘의 말처럼 아이의 눈동자 색도 그녀의 것처럼 에메랄드빛인지…….
정신없이 달리는 노아의 주변은 늑대와 하이에나의 전쟁으로 엉망이었다. 두 종족이 공격과 방어에 특화된 능력을 갖고 있는 터라 쉽게 결판이 나지 않을 싸움이었다. 몇 번이고 노아에게 달려드는 하이에나들을 앤디와 알폰스가 밀어내며 잡아끌었다.
“그, 그만해요……!”
“로니! 어떻게 해야 돼? 왜 우리끼리 싸우는 거야?”
“하논! 어른들 좀 말려 봐!”
“소용없단 말이야아!”
늑대와 하이에나의 어린 테르들은 발만 동동 구르며 눈물을 흘린 채 안절부절못했다. 특히 늑대 로날드와 하이에나 하논은 어른들을 말려 보려고 노력했으나 전력으로 맞붙는 그들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