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481화 (481/488)
  • 481화

    “맞잖아! 용, 네가 말해 봐! 저 여자만 죽으면 끝 아니야?! 그럼 다시 우리는 원래 상태로 돌아가는 거 아니냐고!”

    “뭐 이딴 게 다 있어? 저가 불러내 놓고 희생하라 말하네.”

    가비가 올리세스를 향해 어처구니없다는 듯 말했다. 그러면서도 저 멍청하고 하등한 생물이 하는 말에 틀림이 없어 골이 아팠다.

    이곳은 신의 보호가 닿지 않는 곳이므로 용들의 성력이 ‘그’에게 제대로 먹히질 않는다. ‘놈’이 실제로 이곳에 제 몸을 드러낸 것도 아니었다. 죽은 자들의 피를 자양분 삼아 눈에 보이는 실체를 만든 것에 불과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파괴해도 ‘놈’은 죽지 않는다.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놈’이 이곳에 얽히게 된 이유를 제거해 버리는 것. ‘그’에게서 이 세계를 완전히 분리시켜 버리는 것. 다시는 이곳에 오지 못하게 다른 차원에 묶어 버리는 것.

    “저 하등한 놈 말이 맞아.”

    “…….”

    “‘저것’이 이곳에 집착하게 된 이유를 처리해야 돼.”

    미엘의 냉정한 말에 르네는 한쪽 눈을 감으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것’이 이 세계에 얽히게 된 이유는 단 하나뿐이다. 나타니엘. 선황과의 거래 조건이었던 나타니엘과 그녀의 아이까지. 두 사람이 ‘놈’의 손에 들어가야 이곳을 향한 ‘놈’의 집착이 사라질 것이다.

    모두의 시선이 이엘을 향했다. 이엘의 눈에도 저를 애달프게 바라보는 사람들의 얼굴이 들어왔다. 함께 연합해 싸웠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밑 빠진 독에 물을 부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제발…… 제발 이 전쟁을 끝내 달라고.

    장기간 이어지는 전쟁에 지친 이들은 더 이상 이엘에게 희생을 요구하지 않았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눈엔 여전히 간곡한 호소가 담겨 있었다.

    “안 돼, 이엘! 안 돼! 네가 아니라 나야! 아버지의 첫아이는 네가 아니라 나라고!!”

    “아냐. 이미 네 숨이 멎었던 시점에서 그건 다 깨졌어. 내가 계약을 다시 했으니까.”

    이온이 울고불고 매달리며 이엘을 설득했지만 그녀는 또다시 고개를 저을 따름이다. 이엘은 이온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 주며 제 뒤에 선 조부 피에르를 향해 눈짓했다.

    “조부님. 아르세니온을 부탁해요.”

    “폐하, 어찌……!”

    “할 만큼 했어요. 이만하면 잘 버텼다고 생각해요.”

    “…….”

    “이온이 좋은 황제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피에르는 저가 가겠다며 울부짖는 이온을 붙잡고 뒤로 당겼다. 이엘은 품속에 고이 잠들어 있던 테오도로를 마침내 밖으로 꺼냈다. 자신조차 처음 보는 아이의 얼굴이었다. 가비의 말처럼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고요하게 잠들어 있었다.

    아이의 얼굴 위로 이엘의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미안해, 아가. 어쨌든 내가 다 미안해. 넌 내 말을 못 듣겠지만, 그래도……. 이렇게 만들어서 미안해.”

    그러곤 고개를 돌려 허공 어딘가를 응시했다. 그곳에 있을 스완과 누군가에게도 작별의 인사를 남겼다.

    “무슨 짓이야, 이게! 안 돼! 나타니엘, 안 된다고!! 내가 지켜 주겠다고 했잖아! 내가 네 부모가 되어 준다고 했잖아!”

    흥분한 이카르가 고개를 흔들며 이 상황을 부정했다. 그는 이엘의 품에 안긴 테오도로에겐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오로지 이엘만 바라보며 간절히 말했다.

    “가지 마. 응? 가지 마……. 네가 죽으면 나도 죽어. 너만은 꼭 지키겠다고 리카르디스와 약속했는데, 왜…….”

    “이카르. 아이를 부탁해.”

    “무슨 소리야, 네 아이는……!”

    “괜찮아. 난 어머니와 달라. 난 줄곧 행복했고 이카르 당신을 만나 기뻤어. 당신이 내 부모가 되어 준 덕에 난 어린 시절의 결핍 같은 건 전부 잊어버렸어.”

    “나타니엘, 제발…….”

    “그러니까 남은 생은 네 동족을 위해 살아, 이카르.”

    “…….”

    “어머니와 내 굴레에서 이제 그만 벗어나도 돼.”

    허망하게 이엘의 소매를 놓쳤다. 꿀렁이는 핏덩어리가 있는 곳을 향해 이엘은 계속해서 걸었다. 점점 더 속도를 올렸고 제 이름을 부르는 동맹군의 목소리를 외면했다. 각오했는데도 죽음의 문턱이 코앞이라고 생각하니 미련이 많아졌다.

    미련 없이 떠나려고 매일매일을 정리하는 마음으로 살았는데, 인간이란 건 정말 간사해서 이렇게 또 미련을 남기는 모양이었다.

    “가자, 아가야.”

    테오도로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아이의 턱 아래엔 투명한 무언가가 붙어 있었다. 죽지는 않지만 살아 있지도 않은, 영원히 잠들어 있는 용의 비늘을 달고.

    ― 오는 길이 꽤 힘겨웠나 보구나.

    몸통밖에 없던 핏덩어리가 꿈틀거리더니 그 몸통 한가운데에 입술과 이빨이 만들어졌다. 그곳을 통해 ‘그’는 이엘에게 대화를 걸었다. 이엘은 지척에 닿은 핏덩어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온갖 흉물스러운 것들을 다 봤는데도 이렇게 괴이한 건 정말 처음이다. 헛숨을 들이켜며 ‘그것’을 향해 손을 뻗으며 말했다.

    “네 집착을 견딜 수가 없어서.”

    ― 어떠니. 널 얻기 위해 펼쳐진 나의 능력이.

    “차라리 아버지를 잡아가지 그랬어.”

    ― 그건 이미 신에게 버려진 놈이었단다. 그런 건 맛이 없지.

    “…….”

    ― 신탁의 아이야. 나와 함께 가자. 널 얻은 것만으로도 난 신을 이긴 것과 진배없다.

    “넌 신을 이긴 게 아니야. 신은 너 따위에게 지지 않아.”

    나타니엘의 얼굴 위에 눈물이 아롱져 있었다. 전쟁 내내 눈물을 흘렸던 건지 이제는 안광마저 죽어 있었다.

    삶의 미련조차 없는 표정에, 그녀를 붙잡을 생각만 하던 레온은 이도 저도 못 한 채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며 방황했다. 나타니엘? 아니지? 아니지, 그런 거……? 그는 덜컥 겁이 났다. 이대로 이엘이 사라져 버릴까 봐.

    그 순간 ‘그것’의 몸통에서 뻗어 나온 거대한 팔이 이엘을 향해 다가왔다.

    “안 돼! 이엘, 안 돼! 오드 님! 제발 어떻게든 해 주세요! 제발요……!”

    피시의 가느다란 비명이 온 땅을 적셨다. 오드의 발끝에 매달려 간절히 외쳤지만 오드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피시는 정신없이 주변을 둘러보며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하려고 했지만 모두 똑같았다. 동맹군은 당황한 채 현실을 부정하기 바빴고, 반군은 시선을 피하며 한시라도 빨리 이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진짜로 그녀가 희생하기를 바라는 거야? 왜? 나타니엘이 왜 희생을 해야 되는 건데? 그녀는 피해자잖아. 나타니엘도 전쟁의 피해자였잖아. 너희가 일으킨 전쟁으로 가족을 잃고 목숨을 위협받았으며 성별을 숨겨야만 하는 상황에 놓였잖아. 전쟁으로 가족과 친구를 잃은 너희만큼 나타니엘도 많은 걸 잃었잖아. 근데 왜?

    하지만 피시가 아무리 질문을 던져도 그에 대한 대답을 해 줄 이는 없었다. 모두가 이 불편한 진실을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다. 나타니엘의 희생이면 자신들은 살 수 있을 테니까. 지금도 저렇게 자살하는 자들이 있잖아. 지금 이 시간에도 누군가는 죽어 가고 있다잖아. 그럼 네가 대신…….

    “어떻게 이래…….”

    피시가 분노와 슬픔을 이기지 못해 그의 능력이 폭주하고 있었다. 피시의 몸에서 뻗어진 하얀색 빛이 땅에 뿌리 내렸고, 그와 동시에 땅이 우저적 갈라지더니 위로 점점 솟구치기 시작했다.

    하이에나는 능력을 사용하려면 눈을 써야 하기 때문에 부릅뜬 피시의 눈에선 실핏줄이 터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깜빡이지 않고 ‘그것’을 향해 능력을 사용했다.

    쾅―! 콰쾅―!! 마구잡이로 떠오른 것들이 ‘그것’을 공격했지만 역시나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딱딱한 것이 닿으면 핏덩이는 액체로 변해 흐르기 때문에 하이에나의 염력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었던 것이다.

    피시는 방향을 바꿔 ‘그것’에게 능력을 사용했다. 어마어마하게 큰 몸통을 하늘로 들어 올렸지만 이후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이걸 바닥에 내리찍는다고 죽을 리 없고, 그렇다고 ‘그것’이 원래 있던 공간으로 보낼 수도 없었다.

    “피시! 이쪽으로!!”

    그때 누군가 피시를 향해 소리쳤다. 피시는 눈으로 확인하기도 전에 그 목소리의 주인이 스완임을 알아차렸다. ……스완이 내게 말하고 있어. 스완에 대한 피시의 신뢰는 상상 그 이상이었기 때문에 피시는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채 제 능력으로 떠올린 ‘그것’을 스완이 있는 곳으로 내던졌다.

    “안 돼, 피시! 그러면 스완이 위험해!!”

    그러나 찢어질 듯한 이엘의 음성에 능력이 멈췄다. 피시가 눈을 깜빡이는 순간 능력이 풀렸고 ‘그것’은 바닥에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그 순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던 드레인이 재빨리 스완이 있던 자신의 공간 안에 들어갔다. 동시에 가비와 미엘이 드레인의 공간을 성력으로 메워 사라지게 만들었다.

    모든 게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바닥에서 꿈틀거리던 ‘그것’은 허공을 짚어 대며 드레인의 공간을 찾았지만 가비와 미엘의 기지로 허공에 생겼던 균열은 사라졌다. 그제야 피시는 이게 ‘놈’이 원하던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드레인의 공간은 그녀의 성력으로 만들어진 곳이다. 뿐만 아니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성력을 사용할 수 있었던 스완이 그곳에서 숨을 쉬고 있었다. 만약 이엘과 용들이 조금만 늦었더라면 드레인의 공간을 침투한 ‘그것’이 스완을 먹어 치웠을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스완은 기절해 있었는데……. ‘놈’이 스완의 목소리를 흉내 내 혼란을 가져왔다. 과한 힘을 사용하는 바람에 핏줄이 터져 눈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데도 피시는 제 몸보다 조금 전의 일에 더 큰 충격을 받았다.

    하마터면 나 때문에 스완이 죽을 뻔했어……. 하마터면 ‘놈’이 드레인의 영역을 먹어 치우고 더 위험해질 뻔했어…….

    “피시. 그만 정신 차려.”

    바닥에 엎드려 헛구역질을 시작한 피시의 등을 토닥이며 노아가 한숨과 함께 그를 달랬다. 이런 식으로 계속 우리의 정신을 무너뜨릴 생각이다. ‘저것’은 연합한 우리의 관계를 와해시키고 개개인의 정신을 붕괴해 밑도 끝도 없는 바닥으로 떨어뜨릴 계획인 것이다.

    노아의 위로에도 피시는 계속해서 웩웩― 헛구역질만 해 댔다. 또다시 소중한 이를 무력하게 잃어야만 하는 현실이 피시에겐 견디기 힘들었다. 제발 누가 이 상황 좀 끝내 줘……. 제발 이제 그만 멈춰 줘……. 그런 피시의 간절한 외침이 닿은 모양이었다.

    “폐하. 마지막 신탁을 알고 계십니까?”

    피시는 바닥에 쓰러진 채 입가에 흐르는 것들을 손등으로 닦고 갑자기 말을 잇는 로빈을 쳐다봤다. 그래, 당신은 나타니엘을 사랑하잖아. 그녀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것처럼 굴었잖아. 아이의 탄생을 누구보다 바랐다며. 황자를 새로운 세상의 희망으로 봤다며. 그러니까 제발 나타니엘 좀 잡아 줘.

    모로 누운 시야에 붉은 피가 뚝뚝 흐르는데도 피시는 절박하게 로빈을 쳐다보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