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0화
이런 빛을 낼 수 있는 건 오드밖에 없다. 마치 한낮이라도 된 것처럼 밝아진 시야에, 모두의 시선이 오드에게로 향했다.
“제가 결계를 치겠습니다. 저를 믿고 공격하세요.”
하늘 위로 뻗은 오드의 손에서부터 무언가 빠져나갔다. 이전에는 본 적 없는 형태의 결계가 온 대지에 광활하게 펼쳐졌다. 밀로는 멍청하게 결계를 쳐다보기만 했다. 오드의 결계는 예전에도 자주 봐 왔지만 이렇게 넓게 펼쳐진 건 처음 본다.
게다가 늘 보던 결계와는 조금 달랐다. 보통 반투명한 결계막이 돔처럼 둥글게 싼 모양이었는데 지금은 결계막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제 몸에 떨어지는 공격들이 전부 튕겨져 나가는 걸 보면 오드의 결계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는 소리였다.
마치 결계로 된 갑옷을 입은 것처럼, 모든 공격이 아군의 몸을 튕겨져 나가고 있었다.
“뭐 해, 애송이. 공격 안 해?!”
미엘의 목소리가 벼락과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넋 놓고 오드만 쳐다보던 밀로도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입을 벌려 응축된 능력을 토해 냈다. 몸속에서 끌어 올린 이능이 주변의 구름에 닿아 번쩍이더니 번개가 되어 ‘놈’의 목에 박혔다.
그와 동시에 용으로 변한 가비가 몸을 회전해 소용돌이를 만들더니, 밀로가 번개를 박은 ‘놈’의 목덜미를 뚫고 지나갔다.
쿠당탕―! 핏덩이로 만들어진 ‘놈’의 실체가 세 동강이 나는 순간이었다. 조금 전 용들의 공격으로 목이 부러졌고, 아까 이엘과 늑대의 공격으로 다리는 박살이 났으며, 지상에 있던 이종족과 인간의 공격으로 양팔은 갈기갈기 찢어졌다.
“뭐야. 싱거운데?”
가비는 비에 젖은 몸을 부르르 떨며 혀를 쯧쯧 찼다. 감히 내 피를 먹다니 배짱도 좋네. 그녀는 곧 인간의 모습으로 변하더니 지상으로 내려와 땅에 발을 딛고 섰다. 그러곤 바닥에 흥건한 피 웅덩이에 손을 집어넣어 그 속에서 제 피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이미 잘려 나간 팔은 재생되지 않았지만 가비는 그런 것 따위 상관없는 듯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올려 번쩍번쩍 빛이 나는 전장에 시선을 박았다. 어느 순간부터 총소리나 폭탄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이종족의 능력과 인간들이 손에 쥔 검이나 화살과 같은 원초적인 공격만 이어질 뿐이었다.
연합이…… 되네? 가비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연합해 달려드는 인간과 이종족을 쳐다봤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공공의 적을 향해 힘을 합쳐 공격하는 모습을 보니 살짝 허탈하기도 했다. 저렇게 할 수 있으면서 대체 왜 그렇게 치고받고 싸운 거야? 육지 놈들은 이해하려야 이해할 수가 없다.
“가비!”
“나타니엘!”
그녀의 근처에 다가온 이엘의 부름에 가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얼굴에 피를 묻힌 채 나풀거리는 머리를 대충 틀어 올린 이엘의 모습이 퍽 멋있게 느껴졌다. 가비는 활짝 웃으며 손등으로 이엘의 뺨에 묻은 피를 닦아 주며 물었다.
“아이는?”
“자고 있어요.”
“곤히 자나 보네. 숨소리도 안 들려.”
“…….”
“네 선택에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내가 네 아이에게 축복을 줬잖아.”
“알아요. 제 아이를 위해서 이럴 수밖에 없었어요.”
아리송한 말을 주고받던 두 사람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기로 했다. 가비는 손을 뻗어, 이엘이 품속에 꼭꼭 숨겨 둔 아기를 향해 축복했다.
“부디 네 희생이 헛되지 않길 바란다.”
“나중에 테오도로를 직접 봤을 땐 더 큰 축복을 부어 주세요.”
“자신만만이네, 황제. 좋아. 난 네 단단한 마음가짐이 처음부터 마음에 들었거든.”
그럼 살아서 다시 만나요. 그 말을 남긴 이엘은 끈으로 아이를 제 몸에 단단히 동여매고 끌어안았다. 그러곤 하이에나의 등 위에 올라타 다시 전장을 향해 돌아갔다.
가비는 멀어져 가는 이엘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그’에게 팔이 뜯기고 기절한 상태로 쓰러져 있었지만 정신만은 멀쩡했었다. 그래서 이엘이 살고 싶다며 울부짖는 목소리를 다 들었다. 그 상황이 진짜였든 가짜였든, 중요한 건 나타니엘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저 애는 정말로 살고 싶어 했다.
“가비! 거기서 뭐 해!”
하늘에서 뚝 떨어져 착지한 암컷 용 티에나가 멍하니 서 있는 가비의 어깨를 툭 치며 물었다.
“티에나. 여기에 내려온 신의 마지막 신탁이 뭔지 알 수 있어?”
“그 신탁을 받은 사람이 근처에 있어야 알 수 있는데?”
“나자르 있잖아. 그에게 집중해서 신탁 좀 알아내 봐.”
가비의 뜬금없는 요구에도 티에나는 반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눈을 감고 혼란스러운 전장에서 모두를 향해 성력을 쏟고 있는 오드의 기운을 느꼈다. 스며들 듯 그의 생각과 기억을 훑던 티에나는 그 속에서 신탁을 찾아냈다.
“……다음에 태어날 아이가 이곳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 것이다.”
“그 시기가 언제쯤이야?”
“20년도 훨씬 넘었지. 신께서 이곳을 외면하신 지 그 정도 됐으니까.”
“티에나. 넌 가서 황제의 쌍둥이를 지켜. 난 황제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을 테니까.”
“정말 황제와 황자가 신탁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하니, 가비?”
“그래, 맞아. 확실해.”
신탁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그러기 위해 우리가 이곳에 온 건지도 몰라. 가비의 표정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사실 이엘을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눴던 가비나 미엘과는 달리, 티에나와 라프, 키엔은 아직도 이 땅에 대한 희망이 없다고 보는 쪽이었다.
“내가 황제의 아이에게 축복을 담은 말을 했어.”
“뭐? 가비!”
“충동이 아니야. 뭔가…… 내 말이 아기를 지켜 줄 수 있을 것 같았거든.”
가비와 같이 최초로 만들어진 용들은 용으로서의 능력 외에도 개별적인 능력을 하나씩 갖고 있었다. 조금 전 티에나가 기억과 생각을 느낄 수 있던 것처럼, 가비도 예언을 할 수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예언이라기보다는 그녀가 하는 말이 실제로 이루어진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 것이다.
그리고 가비는 그 능력을 이엘의 배 속에 있던 테오도로에게 사용했다. 공의롭고 현명한 왕이 되라고. 그러니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신탁이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처럼.
*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아무도 가늠할 수 없었다. 시간조차 멈춘 세상에서 이종족과 인간은 끊임없이 ‘목소리’를 향해 공격하고 또 공격했다. 하지만 끝이 나질 않았다.
“실체가 없으니 공격해도 소용없어!”
피를 뒤집어쓴 레온의 울부짖음에 노아도 들고 있던 검을 바닥에 내리꽂으며 밭은 숨을 내쉬었다. 레온의 말이 옳다. 실체가 없는데 대체 무슨 공격이 통한단 말인가.
‘그’가 핏덩어리로 만든 신체는 아무리 부수고 박살을 내도 액체가 되어 뭉치고 또 뭉쳤다. 그 안에 뇌나 심장이 있는 게 아니니 아무리 죽여 봤자 소용이 없단 소리다.
마치 처음 어둠이 내려앉았던 것처럼 희망의 빛이 점점 더 꺼져 갔다. 이쪽은 죽어 가는데, 저쪽은 끝도 없이 살아난다. 과연 우리가 이 전쟁을 이길 수 있을까? ‘놈’을 죽이는 게 과연 가능할까.
“왠지 ‘놈’이 우리를 봐주고 있는 것 같아.”
“…….”
“가지고 노는 것 같다고.”
레온은 아래턱이 눈에 띌 정도로 덜덜 떨며 말했다. 노아는 줄곧 검을 쥐고 있던 제 손이 떨리는 걸 느꼈다. 얼마나 됐지? ‘놈’이 지상에 내려와 전쟁을 한 게, 대체 며칠이나 지난 거지?
체감으로는 몇 달이나 흐른 것 같았다. ‘그’에게 먹힌 이 세상에선 배도 고프지 않았고 졸리지도 않았다. 그렇게 뜬눈으로 며칠째 죽고 죽이는 싸움만 이어지고 있었다.
“으아아아악!!”
끝내 미쳐 버린 누군가가 소리를 지르며 바닥을 뒹굴었다. 3기사단 중 한 명이었다. 인간이었던 그는 이 끝없는 굴레를 견디지 못하고 미치고 말았다.
“정신 차려! 파커 경! 정신을 차려라!”
3기사단장인 라니에로가 그의 뺨을 후려치며 정신을 깨우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완전히 미쳐 버린 남자는 끝내 견디지 못하고 바닥에 널브러진 검을 주워 제 목을 찔러 자살했다.
“…….”
숨 막힐 정도로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한차례 있었던 자살 소동은 보이지 않는 암흑 속에서 벌어졌다면, 지금은 대낮처럼 환한 빛 속에서 벌어진 일이다. 모두의 시선이 자살한 남자에게 향했다.
“……젠장.”
이카르는 재빨리 제 부하인 발트의 손을 휘어잡았다. 아까 발트도 그 소란에 휩쓸려 죽으려 했던 게 떠오른 것이다. 이카르의 강하고 단호한 표정이 발트를 향했다. 허튼 생각 하지 말라는 이카르의 표정을 읽은 발트는 허물어진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대장이 그러지 말라고 하면 지켜야지. 안 죽을 테니 걱정 마십쇼.”
“내가 너 때문에…… 불안해 죽겠다, 발트.”
“나보다는 다른 놈들을 더 신경 쓰는 게 좋을 것 같소, 대장.”
발트의 말처럼 주변에 술렁이는 소리가 점점 더 커진다. 모두들 저희가 쥔 무기를 한 번 보고, 피로 응축된 몸통만 덜렁 남은 ‘그’를 한 번 본다.
대지는 온통 붉었다. 온갖 사체로부터 나온 피가 광활한 대지를 뒤덮었다. 이 피는 이제 또 흐르고 흘러 ‘그’에게로 향하겠지. 그래서 또 ‘놈’의 자양분이 되겠지. 아무리 노력해 ‘저놈’의 몸을 부숴 봤자…… 언제든 다시 살아나겠지.
가망이 없다. 희망이 없다. 여긴 소망이 없다. 이런 곳에서 우리는 살아남을 수 있는가. 내가 죽지 않으면 영원히 끝나지 않을 이 굴레에서 과연 벗어날 수 있을까? 신의 축복을 받은 나자르도 어쩌지 못하고, 전설 속에서나 존재하는 줄 알았던 용도 이기지 못하는데. 하물며 하찮은 미물인 우리가 ‘저것’을 이길 수 있을까.
‘저것’이 우리의 소원을 과연 들어줄까. ‘저것’이 다스리는 세계가 과연…… 살아갈 만한 세상일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생각은 곧 종결됐다. 하나둘 제 목숨을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
“네가 죽으면 다 끝나잖아!”
올리세스의 원성이 폭발했다. 그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엔 피를 뚝뚝 흘리는 이엘이 서 있었다. 상처 입은 하트의 등에서 내려 ‘그’를 상대하던 이엘이 동작을 멈추고 제게 쏠린 시선들과 마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