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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479화 (479/488)
  • 479화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다. 2차 전쟁 때 죽었어야 될 사람은, 선황의 아들인 나였다. 내가 그 자리에서 죽었어야 했는데 죽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나타니엘과 조카가 이렇게 된 것이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가족을 잃었다. 그런데 나는 멀쩡히 살아 있다는 게……,

    “흔들리지 마세요, 황자님.”

    가냘픈 목소리가 이온의 정신을 깨웠다. 등 뒤에서 나타난 리노가 이온을 향해 미간을 찌푸리며 강하게 말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에요. 선황의 잘못이라고요? 그게 왜 폐하와 황자님께 이어져야 하는 거죠? 제물로 바쳐져야 했던 희생양에 불과한데 어떻게 책임 전가가 되나요.”

    “……리노?”

    올리세스는 유령이라도 보는 눈으로 리노를 바라보았다. 리노가 어떻게……? 분명 그때 화재로 죽지 않았었나? 리노의 시체로 추정되는 것까지 보고받았었다. 그 화재는 안에서 빠져나갈 수가 없는 사고였기 때문에 탑에 갇혀 있던 리노는 당연히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거기다 올리세스를 충격에 빠뜨린 건 리노의 모습이 멀쩡했다는 점이다. 고문당한 뒤로 미쳐 버렸던 동생이, 처음으로 온전한 정신을 한 채 제 앞에 서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형이 무슨 말로 사람들을 홀린 건지 모르겠지만, 이곳이 이렇게 된 건 다 우리 잘못이야. 1차 전쟁을 벌인 건 인간이고 2차 전쟁을 벌인 건 이종족이야. 여기에 폐하와 황자님의 잘못이 조금이라도 있다고 생각해? 전혀.”

    “리노. 네가 제정신이 아니라서……,”

    “난 제정신이야. 형이야말로 미친 소리 그만해. 왜 이러는 거야? 이렇게까지 해서 형이 얻고 싶은 게 뭔데. 다들 알잖아, 이 파국은 결국 누구에게도 이익을 주지 않는다는 걸. ‘저것’을 부른 건 형이야! 형이 이렇게 만든 거라고!”

    씩씩거리며 소리를 내지른 리노의 말에 사람들은 혼란에 빠진 듯했다. 굳이 잘잘못을 따진다면 여기서 누구의 잘못이 더 클까. 이런 상황에서도 계산적으로 셈하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그 틈에 올리세스는 리노의 입을 막아 버렸다.

    “하지만 저 여자만 희생하면 우리 모두 살 수 있어.”

    “…….”

    “지금까지 죽은 사람들의 숫자를 봐. 저렇게 우린 다 여기서 죽을 텐데 저 여자 하나만 희생하면 다 끝난다고.”

    “…….”

    “그럼 어떤 선택을 하는 게 현명할까?”

    내가 ‘저것’을 불렀든 말든. 중요한 건 이미 전쟁은 터졌고 내가 불러낸 ‘저것’은 아무도 막지 못하는데. ‘저것’이 황제를 원하고 있다잖아. 나타니엘만 넘기면 우린 살 수 있다잖아. 비록 신은 없지만, ‘저것’이 우리의 신이 되어 준다잖아. 뭐가 나빠? 대체 뭐가 잘못됐는데? 올리세스는 눈이 뒤집힌 채 길길이 날뛰며 소리를 질러 댔다.

    그때까지 잠자코 대화를 듣고 있던 이엘은 고개를 돌려 ‘목소리’를 쳐다봤다. 죽은 자들의 피를 잘도 삼켜 기어이 형체를 완성한 ‘그’는 한쪽 눈으로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맛있는 먹잇감을 발견한 것처럼 제 품에 안긴 테오도로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하지만 나도 살고 싶어.”

    나타니엘의 물기 어린 목소리가 고요한 대지를 울렸다. 처음으로 약해진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낸 채 항변하듯이 올리세스를 쳐다보며 말했다.

    “내 잘못도 아닌데 내가 죽어야 해? 왜 내게 희생을 강요하는 거야? 내가 너희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걸 포기했는데……. 너희를 이종족의 탄압에서 구하기 위해 나는 황제가 되었던 거야. 내가 그깟 황위가 욕심나서 그랬다고 생각해? 너희가 바랐잖아. 그 끔찍한 상황에서 구원해 줄 누군가를 바랐잖아. 그래서 내가 되어 줬잖아…….”

    끝내 턱 아래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품에 안겨 잠든 테오도로를 꼭 끌어안고 고개를 흔들었다.

    “1차 전쟁이 일어났을 땐 왜 가만히 있었어? 내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버지, 그 아버지의 아버지…… 황실이 오랜 시간 이종족을 괴롭힐 때 너희는 왜 가만히 있었어. 2차 전쟁에 정말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생각해? 너희는 너희 자신이 전부 무결하다고 생각하나?”

    “…….”

    “정말 내 희생으로 얻게 될 ‘저것’의 지배를 바라? 악이 가득한 세상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어? 그게 정말…… 그대들이 원하는 것인가?”

    나타니엘이 울고 있다. 노아는 심장이 내려앉고 가슴이 찢어진다는 말이 무엇인지 절감했다.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고, 아무도 네게 희생을 강요할 권리는 없다고, 넌 아무 잘못이 없다고 그렇게 말해 주고 싶었다.

    더는 두고 볼 수가 없었다. 그는 단숨에 달려가 품에 나타니엘을 끌어안고 다독였다.

    “네게 희생을 강요한 자들은 내가 가만두지 않을 거다. 아무도 네게 그럴 자격은 없어, 나타니엘. 우린 끝까지 싸워서 ‘저것’을 없애고 다시 이전으로 돌아갈 테니까 제발 그런 말은 하지 마.”

    “그럼 우리 다 여기서 죽으라고?”

    올리세스가 이엘을 바라보며 비꼬듯 말했고 노아는 두 눈을 시퍼렇게 뜬 채 그를 노려보았다.

    “올리세스. 어차피 신이 버린 땅에선 살아도 죽은 것과 다를 바 없다.”

    “싫어. 난 이렇게라도 살아남을 거다. ‘저것’을 나의 신으로 받아들여서 평생을 달고 산 내 병을 고치고 이렇게라도 살아갈 거라고!”

    악을 쓰는 올리세스의 말에 사람들은 주저했다. 이렇게라도 살고 싶은가? 이렇게라도 살아남는 게 과연 최선인가? 정말 나타니엘에게 희생을 요구하는 게 맞는 걸까?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우리도 살아야지……. 나타니엘, 너처럼 우리도 살고 싶은데. 네가 황제라면 우리를 대신해 희생해 줄 수 있는 거 아니야?

    “아, 도저히 못 들어 주겠네. 이 무능력한 것들아. 마지막까지 이런 꼴을 보여야겠니?”

    떠나겠다고 했던 미엘이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소리를 치더니 돌연 푸른 용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러곤 여태 바닥에 깔아 뒀던 성력을 거두고는 입을 쩍 벌리더니 갑자기 ‘그것’을 향해 돌진했다.

    잠시 멈췄던 전쟁을 돌연 시작해 버린 미엘 때문에 모두가 당황했다. 허둥지둥 무기를 손에 쥐긴 했는데 이젠 어디로 공격해야 할지 몰라 멍청하게 쳐다만 보고 있었다.

    “가비! 라프! 티에나! 키엔! 공격해!”

    그때까지 시체처럼 축 늘어져 공중에 떠 있던 세 마리의 용과 가비가 눈을 번쩍 떴다. 미엘의 목소리를 신호로 가비는 용으로 변해 더 높이 올라가 벼락을 쾅쾅! 내리쳤고, 나머지 세 용은 ‘목소리’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처럼 ‘그’를 둥글게 둘러싸고 결계를 만들기 시작했다.

    “멍청하게 굴지 말고 합류해, 이 하등한 종족들아!”

    미엘은 입을 벌려 응축시킨 성력을 ‘그것’의 눈알에 토해 냈다. 그 순간 ‘그것’의 팔이 미엘의 꼬리를 붙잡았고, 네 개의 다리는 각각 세 마리의 용을 짓밟았다.

    “하트!”

    그리고 모두가 어안이 벙벙해 방황할 때, 이엘은 하트를 불러 그의 등에 올라타고는 허리춤에 넣어 놨던 총을 꺼내 장전했다. 눈가에 찌득하게 눌어붙은 눈물은 달리는 동안 맞불어 온 바람에 모두 날아갔다. 그사이 하트와 이엘의 곁으로 노아가 붙었고, 늑대로 이루어진 1기사단이 그녀를 둘러쌌다.

    조금 전까지 올리세스와 대치하면서 약한 모습을 보여 일부러 빈틈을 만들었다. 그리고 눈치 빠른 미엘이 이엘의 신호를 알아보고 용들이 체력을 회복하자마자 다짜고짜 공격을 퍼부었던 것이다.

    “다리와 팔을 얼려! 저건 다 피로 만들어진 거니까 얼려서 깨뜨린다.”

    “예!”

    “살고 싶다면 정신 바짝 차려!”

    “예!”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 이번에 반드시 처리할 것이다. 그 생각 하나로 이엘은 한 손으로 테오도로를 감싸 안은 채 다른 한 팔을 앞으로 뻗어 총을 고쳐 쥐었다. 달리는 하트의 등 위에서도 자세는 흔들림이 없었다.

    “나타니엘!”

    “지금이다! 전군 공격!”

    미엘의 입에서 이엘의 이름이 튀어나오자마자 늑대들이 일제히 능력을 사용했다. 그들의 발을 타고 쩌저적 얼기 시작한 얼음은 순식간에 ‘그것’의 다리 네 개에 닿았다. 순식간에 얼기 시작한 다리를 향해 이엘은 총을 쐈다.

    탕―! 탕―! 탕탕―!! 거침없이 뻗어 나간 총알은 얼어붙은 다리 네 개에 정확히 박혔다. 그와 동시에 짓밟혔던 용들이 몸을 털며 자리에서 일어나 강철처럼 단단한 꼬리로 총알이 박힌 다리를 후려쳤고 꽝꽝 얼었던 다리 네 개는 순식간에 박살이 나 버렸다. 그러면서 다리를 잃은 ‘그것’의 몸뚱어리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스완!”

    이엘이 허공을 향해 스완의 이름을 외쳤다. 그와 동시에 찢어졌던 균열 너머에서 새하얀 빛이 나와 어딘가로 쏠렸다. 빛이 닿은 곳은 오드가 쓰러진 곳이었다. 지금 스완은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성력을 오드에게 넘겨주고 있었다.

    제발 이 성력을 받고 폐하를 지켜 주세요……. 제발……. 균열 너머에서 간절한 마음으로 제 성력을 다 넘긴 스완이 비틀거리며 주저앉았다.

    “스완!”

    곁에 있던 드레인이 스완을 불렀지만 백조는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드레인. 너도 어서 애들을 데리고 나가.”

    “하지만 너 혼자 여기서……!”

    “괜찮아, 어서 나가서 용들과 합류해. 힘이 부족해.”

    “……기다려. 여기 있으면 전쟁이 끝나는 대로 널 데리러 올게.”

    드레인의 말이 어쩐지 든든하게 들렸다. 살짝 웃던 스완은 드레인의 뒤에 서 있던 소녀들과 눈이 마주쳤다. 테런스 포르의 두 딸. 내가 살려 낸 아이들…….

    호수에 갇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아버지완 달리 나는 뭍으로 나와 내 할 일을 다 해냈어. 내가 저 애들을 살렸어. 그거 하나면 존재의 이유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스완 님…….”

    “안전한 곳에서 다시 만나자, 얘들아.”

    스완의 그 말을 끝으로 드레인은 두 아이를 데리고 균열 너머 전쟁이 터지는 곳으로 나왔다. 등 뒤로 스완이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지금은 앞을 보아야 할 때였다. 그녀가 나오자마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패티스가 하이에나 두 마리와 함께 세 사람을 맞았다.

    “아이들은 저희에게 맡기십시오. 안전한 곳에 피신시키겠습니다. 코르넬 포르가 기다리고 있으니 그에게 데려다주겠습니다.”

    “그래, 부탁해.”

    드레인은 하이에나들의 등에 아이들을 태운 뒤에야 난장판이 된 전장을 돌아봤다. 그러곤 저도 모르게 숨을 길게 들이마시며 차분히 호흡했다. 여긴…… 너무 오랜만이라 손이 자꾸 떨리네. 덜덜 떨리는 제 손끝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위로 올렸다.

    그 순간 몸이 덜 회복된 상태로 창공으로 올라가려던 밀로와 눈이 마주쳤다.

    “태워 줘?”

    드레인은 상처 입은 부위에서 피를 뚝뚝 흘리는 주제에, 저를 향해 태워 주냐고 가소롭게 묻는 밀로의 목소리에 살짝 짜증이 밀려왔다. 저게 날 얕보나. 차원을 벗어난 직후라 신체에 적응이 필요했음에도 불구하고 드레인은 순식간에 용의 모습으로 돌아가 하늘 위로 솟구쳤다.

    “네가 밀로?”

    “영광인데. 암컷이 내 이름을 알아주다니.”

    “스완이 여기에 하찮은 용이 하나 있다고 하기에.”

    “……걔가 그랬다고?”

    “근데 진짜 하찮네.”

    겨우 저딴 것도 못 견뎌서 상처가 생겼냐는 듯 밀로를 한심하게 쳐다본 드레인은 혀를 차며 그 곁을 지나쳤다.

    “아니, 뭐 저런…….”

    오랜만에 본 암컷에게서 받은 인사가 경멸이라니……. 밀로는 순간적으로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차오르는 바람에 상처 부위가 확 찢어지면서 피가 배로 쏟아지는 걸 느꼈다. 중심도 못 잡고 허공에서 휘청거리다가 겨우 몸을 바로 세운 밀로는 조금 전 드레인이 사라진 쪽을 따라 날아갔다.

    밀로의 눈앞에 펼쳐진 전장은 혼란 그 자체였다. 아무리 미엘에게서 조금씩 성력을 받아 체력을 회복했다고는 해도, 팔 한쪽을 잃은 상태로 미친 듯이 날뛰는 가비를 보니 온몸에 소름이 안 끼칠 수가 없었다. ……저 여자는 진짜 미쳤어.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아……!”

    별안간 어디선가 새하얀 빛이 폭발하듯 터져 나오더니 온 땅을 뒤덮었다. 미엘이 깔아 두었던 미미한 빛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엄청난 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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