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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478화 (478/488)
  • 478화

    상황이 이렇게 흘러갈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노아는 허탈함에 실소했다. 할 수만 있다면 이엘을 향한 맹비난을 모조리 자신이 대신 가져가고 싶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공공의 적은 ‘그’였잖아. 처음으로 종족에 관계없이 힘을 합쳐 싸웠잖아. 근데 왜 지금은 그 공격의 대상을 나타니엘로 바꾼 거야? 그녀가 너흴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을 했는데…….

    처음부터 모른 척하고 살면 됐을 너희 인간 따위를 지키겠다고 얼마나 많은 것을 포기했는데. 우리는…… 나와 나타니엘은 사랑으로 겨우 얻은 아이를 포기하면서까지 너희를 지키려고 했는데, 왜…….

    “노아. 마음에 담아 두지 마.”

    “…….”

    “지금은 그런 감정까지 사치스럽다.”

    르네의 일갈에 노아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내 바닥을 향해 푹 숙이고 말았다. 이렇게 마음이 무너지는 것조차 ‘놈’이 의도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을 다잡게 된다. 르네의 말이 옳다. 지금 상황에선 이런 감정은 사치스러운 것에 불과하다.

    “나의 신이시여! 제가 당신을 불렀습니다. 그 마녀를 처단하고 부디 저희에게 자비를 내려 주십시오.”

    여태 기회를 엿보며 시체 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올리세스가 인파를 뚫고 나와 큰 소리로 말했다. 그의 뒤로 추종자들이 하나둘 붙어, 어느새 또 대립하던 때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기껏 후미에서 반란군의 내부를 흔들던 포레스트는 허망한 표정으로 인간들을 쳐다봤다. 왜 로빈 님이 인간들을 그렇게 싫어하시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아…….

    “이야, 여긴 아주 이단 천지구나. 저걸 신이라고 불러?”

    미엘도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드러내며 헛웃음과 함께 신랄하게 비꼬았다. 저것들이 약해 빠진 건 나도 알고 신께서도 알고 계신 일이지만, 글쎄요. 저것들은 약한 게 아니라 악한 게 아닐까요.

    ‘저놈’이 신이 아니라 악한 존재라는 걸 알면서도 신이라고 이름을 붙이다니……. 아무래도 여긴 정말 희망이 없나 보네요. 미엘은 신을 향해 그렇게 중얼거렸다.

    “우리를 구원해 줄 수 있다면 저분이 우리의 신이시다!”

    “마녀를 불러내! 마녀를 처단해!”

    “어서 마녀를 데려와라!”

    너희가 마녀라고 취급하는 단어의 정의를 정말 모르는 거니? 미엘은 제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내젓다가 바닥에 쓰러져 있던 오드 쪽을 힐끔 봤다.

    아까부터 바닥에 은은하게 깔아 뒀던 미엘의 성력이 쓰러진 오드에게로 흘러가 흡수되고 있었다. 아직 ‘목소리’는 눈치채지 못했기 때문에 미엘은 인간들로 혼란한 틈을 타 가진 성력을 오드에게 최대한 불어넣었다.

    “오, 나의 신이시여. 이곳에 당신을 위한 제단을 쌓고 제물을 바치겠습니다! 부디 저희를 살려 주십시오!”

    “저희만 살려 주십시오!”

    “더러운 이종족들은 전부 멸해 주세요!”

    “저희 인간들은 절대로 당신을 배신하지 않겠습니다. 저희에게 인간 여자를 만들어 주십시오!”

    “저희에게도 번식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레온은 아픔조차 잊어버린 채 입을 다물었다. 저게…… 저게 지금 무슨 헛소리야? 공포에 잠겨 제정신이 아닌 건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망가질 수가 있는 거야? 이렇게까지 무너질 수가 있다고?

    “그냥 유희가 필요한 거겠죠. 약자를 괴롭힘으로써 얻는 즐거움. 그런 사악한 욕심이 여과 없이 드러나는 거고요.”

    그동안은 체면 때문에, 혹은 처한 상황이 너무 참혹해서 잊고 살았던 악한 본성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그것도 ‘악’의 앞에선 너무나도 아무렇지 않은 내용이었다.

    레온은 패티스의 설명을 들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지겹다.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너무 지겨워서 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좋아. 너희가 원하는 대로 해 줄 테니까 입 좀 닥쳐. 시끄러워서 살 수가 없네.”

    소란을 잠재운 건 귀찮다는 듯 귀를 후비던 미엘의 음성이었다. 그녀가 손을 까딱이자, 바닥에 쓰러져 있던 6마리의 용이 조금씩 위로 떠올랐다. 암컷 용 세 마리와 가비, 밀로와 킨이 미엘의 머리 높이까지 떠올랐을 때 그녀는 올리세스를 향해 차갑게 말했다.

    “내 동족은 내가 데려갈 테니까 싸우는 건 너희끼리 알아서 해. 이딴 더러운 세상은 나 같아도 갖기 싫어. 왜 신이 너흴 버렸는지 너무 잘 알겠다. 최소한의 도리도 없고 그저 겁에 질려서 아등바등하는 꼴이 볼썽사납다 못해 역겨워. 너넨 영원히 이런 더러운 곳에 처박혀서 그렇게 살아.”

    “가기 전에 마녀를 데려오고 가!”

    너무 한심해서 이젠 말도 안 나온다. 미엘은 환멸 어린 시선으로 올리세스와 그 추종자들을 보다가 말도 섞기 싫어서 손가락을 튕겼다.

    그 순간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 작은 균열이 생겼다. 동시에 무언가 찢어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허공에 생긴 균열이 일그러졌다. 마치 여러 개의 거울을 맞댄 것처럼 균열이 생긴 곳은 점차 괴이한 모습으로 변해 갔다.

    그리고 마침내 균열의 시작점 한가운데에 작은 점이 하나 나타났다. 이곳과 다른 차원을 뚫은 점이었다. 그 점은 점차 커지기 시작했고 그게 대충 성인 남자의 주먹만 한 크기가 되었을 때, 노아는 그 점 너머에 있던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스완?”

    그의 목소리에 이번엔 패티스가 미간을 좁힌 채 검은 점에 시선을 집중시켰다. 검은 점 너머에 있는 공간이 분홍빛으로 잠깐 물들었다가 사라졌다. 누가 봐도 스완의 머리카락이었다.

    “어떻게……! 드레인이 살고 있는 영역이 이렇게 쉽게 열릴 수 있습니까?”

    “‘놈’이 이곳에 있잖아. 이 세계를 형성하고 있던 규율과 질서가 다 어그러졌어. ‘저게’ 이곳에 온 순간부터 여긴 정상의 궤도에서 벗어난 거라고. 봐, 시간도 흐르지 않잖아.”

    노아가 설명해 줄 때까지 패티스는 알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흘러가는 시간이 더디게 느껴지기도 했고 빠르게 느껴지기도 했는데, 아예 시간이 멈췄을 줄은 전혀 몰랐다. 패티스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주먹을 거세게 말아 쥐었다. ……정말 버려진 세계 같네.

    “포기하지 마, 패티스 백. 지금 당장 은밀하게 움직여서 오드 님을 이곳에 데려오고, 쓰러진 종족들을 다 깨워서 마지막 일격을 준비해라. 아무것도 안 하고 넘길 순 없다.”

    “예.”

    패티스가 자세를 낮춰 오드가 있는 곳으로 사라진 걸 확인한 노아는 늑대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이 일격으로 모든 상황이 끝나면 좋겠지만 아마 그러지 못하겠지. 그래도 아무것도 안 하고 포기부터 할 순 없었다. ‘놈’을 죽이지는 못하더라도 일격은 가해 봐야지.

    “안 돼요! 가시면 안 돼요, 폐하!”

    그 순간이었다. 스완의 외마디 비명을 뒤로하고, 찢어진 틈을 가르고 이엘이 모습을 드러냈다. 주먹만 했던 점의 크기는 어느새 성인 남자의 상체만 한 크기로 커져 있었고, 이엘은 저를 말리는 스완을 뿌리치고 드레인의 영역에서 나오고 있었다.

    이윽고 나타니엘은 완전히 땅에 두 다리를 내린 채 꼿꼿하게 서 있었다. 노아가 멍하니 그녀만 바라보는데도 그녀의 시선은 자신이 아닌 올리세스를 향한 채였다. 매서운 눈빛이 재를 뒤집어쓴 올리세스를 위아래로 훑고 있었다. 나타니엘이 한참 만에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올리세스 남작. 뒤에서 날 마녀라고 부르고 있을 줄은 전혀 몰랐네.”

    “폐하께선 겁이 많으신가 봅니다. 이렇게 많은 당신의 사람들을 버려두고 홀로 숨으시다니요.”

    “그러게. 내가 생긴 것과 다르게 겁이 좀 많아.”

    노아는 웃으며 말하는 이엘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아이를 낳고 그녀의 안전을 확인하지 못했다. 다행히 아프거나 다친 데는 없는 듯했다.

    빠르게 그녀의 상태를 확인한 노아는 주변을 둘러보며 반군을 살폈다. ‘그’와 반란군 둘 중 하나라도 그녀에게 위해를 가하는 순간, 곧장 찢어발기리라 다짐하며 조금씩 이엘에게로 다가갔다. 그 시선을 느낀 건지 이엘의 녹색 눈동자가 노아에게 잠깐 머물렀다.

    노아는 이엘의 시선이 짧게 닿았다가 사라지자마자 그녀의 품에 들린 무언가에 눈이 고정됐다. 새하얀 천으로 돌돌 감겨 있는 저건……. 이엘은 그것을 제 품에 소중하게 안고 있었지만 겉에 걸친 로브가 가려 준 덕에 다른 이들은 그게 뭔지 알아채지 못한 듯했다. 노아만이 알아보았다.

    테오도로. 노아는 얼굴도 보지 못했던 그 아이가 나타니엘의 품에 안겨 있었다.

    “폐하. 분명 황위에 오르실 때 저희와 약속하지 않으셨습니까? 저희를 지켜 주시겠다고요. 근데 어떻게 저희를 버리고 도망가실 수 있습니까? 이게 당신이 말씀하신 군주의 모습입니까?”

    “…….”

    “나타니엘. 당신은 이종족의 왕이었지, 우리와 같은 인간들은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당신을 믿었던 수많은 인간들이 저렇게 시체가 되었는데도 혼자 숨어 목숨을 보전하지 않았습니까?”

    올리세스의 신랄한 비난에도 이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그의 말처럼 참혹하게 변한 주변을 바라보며 아랫입술을 깨물 따름이었다.

    이엘은 아이를 품에 안은 제 손이 덜덜 떨리는 걸 느꼈다. 이렇게까지 되어야 했나? 이것만은 피하고 싶어서 강한 힘을 원했던 건데, 과연 난 강한 힘을 얻긴 했던가?

    “우리 잘못이 아니잖아!”

    그때 어디선가 애달픈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저 멀리 황궁에서 뛰쳐나온 이온이 이엘의 앞을 막아서며 그녀를 붙잡고 외쳤다.

    “우리 잘못이 아니라고 그랬잖아. 나타니엘, 네가 그랬잖아. 우리 잘못이 아니야.”

    “하지만…….”

    “네가 아니었어도 이 전쟁은 일어났어. ‘저것’이 이 세계를 포기하지 않는 한, 어쩔 수 없이 일어날 전쟁이었다고. 네 잘못이 아니야, 나타니엘. 우리 잘못이 아니야.”

    “아니. 당신들 잘못이 맞습니다. 멀쩡히 살아 있었으면서 죽은 척 숨어 살던 당신이 할 소리는 아니지 않습니까, 황자?”

    기회를 놓치지 않은 올리세스가 이온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또다시 여론을 형성했다.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황자의 존재에 모두가 얼떨떨했고 믿기지 않는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엘과 똑 닮은 이온의 얼굴은 그가 황자임을 명명백백히 드러내고 있었다.

    “당신들은 선황의 잔재입니다. 그때 제일 먼저 죽었어야 했는데 당신들은 살았고 애꿎은 우리의 가족만 죽었습니다.”

    “…….”

    “이래도 잘못이 없다고 할 겁니까?”

    이온은 저를 바라보는 서늘한 시선들에 숨이 막혔다. 올리세스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제 가슴에 비수처럼 박혀 옥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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