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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477화 (477/488)
  • 477화

    목소리뿐이던 것이 점점 실체를 만들어 갔다. 바닥에 흥건하던 피가 딱딱하게 응고되더니 형체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응고된 혈액으로 이루어진 커다란 팔 하나가 허공에 생겼다. 그것은 거침없이 뻗어 나가 상공에서 움직이던 밀로를 붙잡았다. 조금 전 공격으로 피를 흘리고 있던 밀로의 목 위에 ‘그것’이 손톱을 박아 넣어 환부를 더 찢었다.

    “으아악!”

    괴로워하는 밀로의 목소리에 르네와 독수리들이 그를 도우려 날아들었지만 모두 튕겨졌다. 갑자기 생겨난 ‘놈’의 또 다른 팔이 날아오는 독수리들을 전부 밀친 것이다. 노아는 인상을 찌푸린 채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이제 이쪽 세계에 개입하는 게 가능해졌어.”

    “뭐?”

    “폐하의 말씀에 따르면 원래 이쪽 세계는 신께서 만드신 신의 세계이기 때문에 ‘그’가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못한다고 했다. 근데 지금은 달라. 직접적으로 힘을 쓰는데 그게 우리에게 통하고 있잖아.”

    균열이 점점 심해지고 있다. 이제 이곳은 신의 영향력에서 많이 벗어난 상태였다. 아마도 오드가 상처 입은 이유가 클 것이다. 그것도 보호석을 전부 흡수했으니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모두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로 인해 오드가 이곳에 걸었던 결계들도 미약해졌고, 성전기사단의 성력도 사라져 버렸다.

    ― 나타니엘.

    다시 한 번 이엘을 찾는 ‘목소리’는 조금 전보다 몸의 형체가 갖춰져 있었다. ‘그’는 밀로에게 볼일이 끝났다는 듯 쥐고 있던 밀로를 내던졌다. 하릴없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거대한 용은 눈을 감고 기절한 상태였다.

    “밀로!”

    “저희가 받겠습니다!”

    대기하고 있던 독수리와 매가 득달같이 달려들어 쓰러지는 거대한 용을 받아 냈다. 숨이 붙어 있다는 르네의 보고에 안도하기도 전에, 이번엔 ‘놈’이 쓰러진 여자를 잡아 올렸다. 아까 성력을 불어넣다가 쓰러진 가비였다.

    “여자를 지켜!”

    “용을 빼앗기면 안 돼!”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벗어나 ‘놈’을 향해 달려들었지만 너무 늦었다.

    “악……!”

    가느다란 비명 소리와 함께 가비의 팔이 부러진 채 뜯어졌다. 조각나듯 찢겨진 그녀의 팔이 대지에 뚝 떨어지자, ‘놈’은 그걸 자양분이라도 되는 것처럼 흡수하기 시작했다.

    아아― ‘목소리’의 탄성을 끝으로 대지엔 모래바람이 일었다. 그리고 그동안 어둠을 밝혀 주던 레온과 사자, 호랑이의 불도 모래바람에 죄 꺼져 버렸다.

    또다시 어둠이 찾아왔다. 세 번째 찾아온 어둠인데도 모두 적응하지 못했다. 도리어 더 깊은 절망에 빠질 뿐이었다. 야트막한 빛으로 맛본 희망을 우습게 짓밟아 버렸다. 마치 그 어떤 빛이 퍼져도 어김없이 어둠으로 다시 뒤엎겠다는 것처럼. 더 큰 공포와 절망으로 단숨에 모두를 집어삼켰다.

    “공격해! 멈추지 마라! 공격해!”

    라니에로의 절규에 모두가 보이지 않는 그곳을 향해 능력을 쏟았다. 인간들은 총을 쥐고 쐈고, 이종족은 온 힘을 다해 자신들의 능력을 분출했다. 그것들이 한데 섞여 섬광이 번쩍번쩍했지만 돌아오는 희망은 없었다.

    ― 신이 버린 너희들이 어떻게 날 이기겠니.

    “듣지 마! 소리를 무시해!”

    ― 너희를 살릴 수 있는 건 오직 나 하나란다.

    “헛소리 작작 해!”

    지휘하느라 목이 잔뜩 쉰 이카르가 울분을 토해 냈지만 그조차도 알고 있었다. 이건 우리의 힘으론 도저히 이길 수가 없어……. 이런 건 들어 본 적도 없고, 겪어 본 적도 없어. 이걸…… 과연 우리가 이길 수 있을까?

    어쩌면 우리의 종말이 지금 찾아온 게 아닐까? 1차 전쟁 때도, 심지어 그 이전에 재규어 학살 때도 이 정도의 무력함은 없었다.

    뚝뚝. 이카르는 제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손등으로 마구 닦아 냈다. 앞이 보이지 않아서 몰랐는데…… 나 울고 있었구나……. 단순히 무서워서 울고 있었다고……. 스스로의 추태에 기가 막혔다.

    “으억!”

    그때 이카르의 근처에서 단말마의 비명이 터졌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마구잡이로 공격을 퍼붓고 있었기 때문에 빗맞고 쓰러진 건가 싶었다. 그래서 재빨리 공격을 멈추라고 소리를 질렀는데…….

    “억!”

    “윽!”

    “크억……!”

    그 뒤로도 누군가의 죽어 가는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이카르는 그제야 그 소리의 원인을 알아차렸다.

    그건 보이지 않는 상대로부터 공격을 당한 게 아니었다. 스스로의 목숨을 끊는 비명이었다. 끝도 없는 어둠 속에서 희망을 잃은 자들이 자신의 목을 검과 창으로 찔러, 죽는 것을 택했다.

    “정신 차려! 동요하지 마라!”

    “침착해!”

    하지만 그 뒤로도 비명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흐느끼는 소리. 피가 분수처럼 터져 쏟아지는 소리. 땅에 고인 피가 어딘가로 흘러가는 소리. ‘그’가 곳곳을 지나가며 흐르는 피를 꿀꺽꿀꺽 삼키는 소리. 모든 게 공포였다.

    “……대장. 그동안 고마웠소.”

    이카르는 제 뒤에 있던 부하 발트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마치 마지막을 고할 것 같은 발트의 목소리에 이카르는 다급하게 손을 뻗었다. 미친 듯이 헤집어도 잡히는 게 없었다.

    “발트! 정신 차려! 허튼 생각 하지 말고 그 자리에 멈춰 서!”

    “우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찾아내 주어서 고마웠소. 난 영영 동족도 없이 평생을 떠돌이처럼 살아야 하나 싶었는데.”

    “나보다 먼저 목숨 끊으면 널 용서하지 않을 거다. 발트. 내 경고 무시하지 마라!”

    “대장. 어차피 우린 다 끝이야.”

    “…….”

    “어차피 누군가는 끝내야 하는 인생이었소. 우논인 우리는 이런 식이 아니면 생을 마칠 수가 없잖아. 그러니까 이건 어쩌면 기회일지도 모르오.”

    “…….”

    “여긴 죽은 것들뿐일 텐데, 연명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소?”

    “헛소리야. 일부러 우리를 쥐고 흔드는 거라고!”

    제발……. 제발 이러지 마. 제발 정신 차려! 발트, 네가 포기하면 그 뒤는 와르르 무너질 거야. 나 역시 무너질지 몰라. 그러니까 제발……. 이카르는 뚝뚝 흐르는 눈물을 거칠게 닦아 내며 발트의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무작정 내달렸다.

    “발트!”

    그러곤 재규어의 모습으로 돌아가 다짜고짜 들이받았다. 저가 들이받은 게 발트이기를 간절히 바라며.

    “발트, 제발!”

    “크흑……! 대장 어째서…….”

    이카르가 들이받은 쪽에서 괴로운 신음이 들리는 걸 보니, 그가 받은 게 발트가 맞는 모양이었다. 가쁜 숨을 몰아쉰 이카르는 욕을 짓씹으며 한참 씩씩거리다가 발트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죽지 마, 이 자식아! 누가 내 허락도 없이 죽으랬나! 명령 불복종은 몇 대에 걸쳐 처벌을 받는 것 모르나?!”

    “대를 어떻게 잇습니까……. 이미 우리는 끝인데.”

    “끝은 무슨 끝이야. 아직 시작도 안 했어, 헛소리 마.”

    두 사람이 실랑이를 벌이는 지금 이 순간에도 곳곳에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들의 마지막 비명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이카르는 주저앉아 머리를 땅에 처박았다. 아주 예전에 독수리들이 집단 자살을 선택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제야 그들의 처절했던 심정이 어떤 것인지 알 것 같았다. 희망이 없다는 건 이런 거구나.

    “대장.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요?”

    “그건 해 봐야 아는 일이지.”

    “끝까지 싸울 거요?”

    “당연한 소리 하지 마. 아직 폐하가 여기 계셔.”

    “…….”

    “넌 끝이라고, 대가 끊겼다고, 여긴 죽은 것들뿐이라고 했지만! 폐하는 살아 계셔. 그분의 아이가 태어났어. 새로운 생명이…… 태어난 거라고.”

    이카르가 그 말을 하며 일어섰을 때였다. 갑자기 뜨거운 기운이 확 퍼지더니 새하얀 빛이 다시 대지 위에 얕게 깔리기 시작했다.

    “내 동족 다 어디 있어?”

    여자의 목소리가 사람들의 비명을 뚫고 이카르의 귀에 들렸다.

    이엘과 함께 사라졌던 미엘이 돌아왔다. 그녀는 잠든 킨을 품에 안은 채 저 멀리서 걸어오고 있었다. 주변을 살피며 가비와 세 용의 위치를 파악하던 미엘은 안전한 곳에 킨을 내려놓았다. 그러더니 사태 파악을 마친 건지 헛웃음을 터뜨렸다.

    “자살이라고? 지금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었어? 쟤넨 너흴 살리려다 이 꼴이 됐는데, 너흰 그냥 죽겠다고?”

    가비와 세 용이 쓰러진 곳을 검지로 가리킨 미엘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살벌하게 말했다. 이래서 육지의 것들은 이해해 주고 싶어도 이해할 수가 없다.

    하지만 저런 나약함마저 그들의 일부라는 것을 인정하곤 설득하기를 포기했다. 타고나기를 약하게 태어난 개체들이다, 인간과 이종족이란.

    그 대신 미엘은 차가운 눈으로 어느덧 형체를 거의 다 드러낸 ‘그’를 빤히 쳐다봤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피가 강물이라도 된 것처럼 바닥을 채웠고 그녀의 발목을 적셨다. 이 와중에도 형체 없는 부위가 피를 꿀꺽꿀꺽 삼켜 대며 모양을 만들고 있었다. 저 안엔 용들의 피도 일부 섞여 있겠지.

    미엘과 함께 내려온 용들은 절대로 약하지 않았다. 무려 신께서 직접 만드신 최초의 것들이다. 그런데도 제대로 된 결계를 만들기도 전에 급습을 당한 걸 보면, 역시 이쪽 세계에선 자신들이 가진 본힘을 발휘하는 게 어려운 모양이었다. 달리 방법이 없네. 미엘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이봐. 네가 원하는 그 여자를 이곳에 불러 줄게. 그걸로 타협하고 나와 내 동족은 여기서 손 뗀다.”

    “미쳤어?!”

    소리를 지르며 미엘에게 달려가려던 레온이 쿨럭거리며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의 허리에선 피가 울컥울컥 쏟아지고 있었다. 아까 접전을 벌이다가 다친 것 같은데 레온 본인조차 자신이 부상을 당한지 몰랐던 모양이었다. 자리에 쓰러진 레온을 보고 놀란 노아가 달려가 그를 부축했다.

    “레온! 괜찮나?”

    “난 괜찮아. 그보다 저 용을 막아야지! 저 미친 여자가 지금 무슨…….”

    “여기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기다리는 것뿐이다.”

    “노아! 너 대체 무슨 생각을……!”

    “폐하의 뜻이야.”

    “…….”

    “어느 정도의 희생은 감수해야 돼.”

    레온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노아를 쳐다봤지만, 끝내 그는 미엘과 ‘그’를 막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아니. 막을 수 없다는 게 맞는 표현일 것이다. 이제 모든 건 저희의 손을 떠나 능력 밖의 일이 되어 버렸다.

    ― 네가 데려오지 않아도 난 그 아이를 내 앞에 데려올 수 있단다.

    “알아. 이런 식으로 저것들을 괴롭히고 죽이면서 그 여자를 협박할 거지? 벼랑 끝까지 몰아넣어서 스스로 나오게 할 셈이잖아. 네 약은 수법은 누구보다 잘 알아.”

    미엘의 말에 ‘그’가 웃었다. 그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가 대지를 타고 전해지자, 겨우 발을 딛고 서 있던 이종족들이 허물어지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정신과 육체가 완전히 ‘그’에게 잠식되어 디딘 땅을 타고 기운이 쭉쭉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그래, 맞아! 황제만 희생하면 우리는 다 살 수 있다고!”

    “맞아……. 애초에 선황이 제때 제물을 바치기만 했어도…….”

    “우리는…… 우리는 죄가 없잖아……. 그 여자가 마녀 같은 짓만 하지 않았어도……!”

    “그 여자를 데려와! 그 여자를 죽이고 우리는 제발 살려 줘!”

    조금 전까지 힘을 합쳐 ‘목소리’를 공격했던 반란군이 다시 허튼 생각에 빠졌다. 황제의 잘못이야. 모든 게 선황이 제 딸을 바치지 않고 감싸는 바람에 우리가 이렇게 벌을 받는 거라고……. 그간 올리세스와 아스타로가 끊임없이 주입했던 세뇌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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