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6화
황당하게 중얼거린 앤디는 그제야 사위를 둘러보았다. 꾸에에엑―! 끄아아악―!! 온갖 괴성이 난무하는 가운데, 괴생물들이 무 뽑히듯 쑥쑥 뽑혀 허공을 날아오더니 조금 전 괴물이 처박힌 곳에 푹푹 꽂히기 시작했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게 강제로 끌려가 살해되고 있었다.
그들이 처박힌 곳은 정확히 말하면 세 용이 결계를 치고 있었던 곳이며, 가비가 성력을 불어넣다가 올리세스에 의해 저지된 곳이었다. 그러니까 ‘목소리’가 있을 것이라 추측되는 곳.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앤디 경. 정신 차려! 얼빠진 표정 짓지 마라!”
곁으로 다가온 라니에로의 음성에 앤디도 겨우 정신을 차렸다.
“젠장! 안 돼! 안 된다고!!”
그때 비명에 가까운 이카르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그곳엔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간 이카르가 재규어의 꼬리를 붙잡은 채 소리를 치고 있었다. 조금 전 끌려가던 괴물들처럼 재규어의 몸이 허공에 띄워진 채였다. 이카르는 제 부하가 끌려가지 않게 사력을 다해 그의 꼬리를 붙잡아 당기고 있었다.
상황 파악을 마친 노아와 하트가 이카르의 곁에 붙어 재규어의 꼬리를 함께 잡았다. 세 사람의 힘으로 겨우 바닥에 떨어진 재규어는 숨을 헐떡거리며 괴로운 신음을 냈다.
재규어뿐만이 아니다. 곳곳에서 비명이 터졌고 속절없이 허공으로 끌려가더니 용들이 결계를 쳤던 곳에 푹푹 처박혔다. 이종족이고 인간이고 가리지 않고 무작위로 끌려갔다.
살기 위한 괴성이 대지를 뒤흔들 때였다. 돌연 로날드와 슈프, 그리고 리퍼가 서로의 꼬리를 물어 연결했다.
“붙잡아요!”
로날드는 끌려가던 반란군에게 기꺼이 제 꼬리를 내주며 소리쳤다. 남자가 로날드의 꼬리를 붙잡았고, 그걸 신호로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아군과 적군은 가릴 것 없이 서로의 손과 몸을 붙잡으며 하나로 길게 몸을 이었다.
“끌려가지 않게 서로 붙잡아라!”
누군가의 목소리에 맞춰 모두가 서로를 붙잡았다. 하늘 위로 끌려가던 자들이 천천히 하강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전부 바닥에 발이 닿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 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피해는 막심했다. 산처럼 쌓인 시체들. 바닥을 흥건하게 적신 피……. 앤디는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들이 연이어 터지자 이젠 두려움조차 들지 않았다. 저건 대체 뭐지……? 상식을 뛰어넘는 것들이 끊임없이 펼쳐질수록 공포는 사라지고 절망만 남았다.
……우리가 이길 수 있는 거야? 저걸, 정말로 이길 수는 있어?
“죄다 피가 빨렸어.”
“…….”
“피가 웅덩이처럼 고여서 흡수되고 있는 걸 봐.”
이카르의 허망한 목소리에 앤디의 눈빛이 흔들렸다. 아까 오드의 피가 땅을 흘러 어딘가로 흡수되는 것 같았는데, 지금 보니 사체에서 흘러나온 다량의 피도 같은 방향으로 흘러들어 가고 있다. 가비가 성력을 불어넣던 그곳으로.
역시 저기에 ‘놈’이 있다.
“근데 왜 자꾸 피를 흡수하는 거지?”
“목숨값이 부족해서 그래.”
바람을 타고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앤디와 이카르가 고개를 돌렸다. 남자의 녹색 눈동자가 오늘따라 더 탁하게 보였다.
두 사람을 향해 여유로운 눈짓을 한 로빈은 얼굴에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이곳으로 오는 내내 올리세스가 포필렌 약으로 만든 것들을 전부 작살내느라 온몸이 피에 절었다.
“로빈. 바깥 상황은?”
모두가 로빈의 등장에 놀라 침묵하는데 노아만은 차분했다. 그는 로빈이 도착할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건지 시야 밖에 있는 제도 밖 상황부터 확인했다.
“빠져나간 잔챙이들은 내 부하들이 처리 중이고, 큰 놈들은 전부 도륙했어. 각 영지에 있는 영주들과 이종족들도 잘 연합해서 싸우고 있고. 바깥쪽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그나마 다행이군. 근데 조금 전에 네가 말한 목숨값이라는 건 무슨 뜻이야?”
“‘놈’을 불러내려면 완전하고 순결한 피가 필요해. 그에 해당하는 건 나자르뿐이고.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가 미리 손을 쓰는 바람에 나자르를 완전히 죽이지 못했지.”
로빈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엔 쓰러진 오드가 있었다. 그의 흉부가 크게 부풀어 올랐다가 가라앉는 게 보였다. 조금 전보다 숨 쉬는 게 원활해진 걸 보면 곧 깨어날지도 모른다.
“그래서 목숨값이 모자랐던 거야. 정확히 말하면 피가 모자라지. 순결한 피가.”
하지만 오드를 제외한 이곳에 있는 모두가 순결한 피를 갖고 있지 않았다. 모두 저마다의 죄를 지었고 욕심을 냈기에 혼탁한 피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래서 저렇게 닥치는 대로 피를 흡수하고 있는 거라고 로빈은 말했다. 아무리 흡수해도 고결한 피를 채울 수 없어서.
“그러니까 지금 당장 용들을 이곳에 데려와야 해. 저러다 쓰러진 용들의 피까지 빼앗기면 그땐 정말 걷잡을 수 없게 된다.”
“러셀 후. 페루츠 후. 그대들의 기사단을 이끌어 1기사단과 연합하고, 그들을 엄호해라. 앤디. 네가 1기사단을 책임지고 이끌어서 용들을 전부 이곳에 데려와. 그리고 이카르 백. 레온 후. 그대들은 ‘놈’의 시선을 분산시켜. 르네 공과 로빈 공, 둘은 각각 하늘과 땅을 책임지고 반란군이 또 허튼짓을 하지 못하게 처리해라.”
“예.”
“그리고 피에르 론 후작.”
“예, 각하. 부르셨습니까.”
이온을 제외하면 이엘의 유일한 피붙이. 전쟁 직전에 론 후작가로 작위를 수여받은 피에르가 총을 든 채 노아의 부름에 응했다.
“후작은 아군 중 다친 자들과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자들을 전부 맡아 주시오. 반란군에서 투항해 온 자들도 받아 주시고. 후작의 곁에 하이에나를 배치해 도우라 명령하겠소. 괜찮겠소?”
“예, 각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피에르는 과거 제 가문을 멸살시켰던 하이에나에 대한 감정을 모두 지웠다. 그들이 제 손녀가 된 나타니엘의 가장 가까운 종족으로 함께하는 이상, 자신의 하찮고 해묵은 감정은 이제 버려야 할 때였다. 그 순간 노아가 피에르의 주름진 손을 덥석 잡고 말했다.
“조부님. 잘 부탁드립니다.”
“각하. 어찌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저는……,”
“폐하의 조부님이시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제 조부님이시기도 합니다.”
노아가 웃으며 말하니 피에르는 황송해 어쩔 줄 몰랐다. 이윽고 노아는 노인의 손을 꼭 붙잡으며 당부했다.
“조부님께서 노장이시란 건 알고 있지만 무리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폐하께 조부님은 어렵게 찾은 유일한 가족입니다. 그러니 조부님. 당신의 목숨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십시오. 목숨이 경각에 달리는 일이 생기면 곧장 피하셔야 합니다.”
“예, 각하.”
“전쟁이 끝나면 폐하와 긴 해후를 기쁨으로 나누셔야지요.”
노아의 말에 피에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앞으로 하이에나 한 마리가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그 아이가 제일 빠릅니다. 등에 올라타시고 저희와 함께 가시지요, 후작님.”
패티스가 빙긋 웃으며 피에르에게 안내했다. 그렇게 피에르와 하이에나들이 중심부에서 멀어진 외곽 쪽으로 부상자들을 옮기는 걸 확인한 노아는 손을 들어 모두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이런 상황에서도 ‘목소리’는 바닥에 흐르는 피를 꿀꺽꿀꺽 잘도 삼키고 있었다.
“각자 위치로!”
“위치로!”
꺼지지 않는 레온의 불길이 다시 한 번 대지를 덮었다. 전보다 더 활활 타오르는 불이 어둑한 세상을 밝혔다. 제도군은 그 불빛을 보며 희망을 찾았다. 포기하지 않고 노아가 명령한 대로 각자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들판을 내달렸다.
“머리 위를 조심해라!”
선두에서 호위하며 달리던 노아가 제 쪽으로 뻗어지는 무형의 기운을 향해 얼음을 퍼부었다. 날카롭고 작은 얼음 창살들이 서로 촘촘하게 엮이기 시작하더니 내달리는 기사단의 머리 위를 결계처럼 막아 주었다. 얼음막이 허공을 막아 준 덕에 하늘에서 속수무책으로 뽑히는 공격들은 피할 수 있었다.
“그대로 달려!”
“예!”
지척이다. 쓰러진 용들도 조금씩 기운을 차리는 건지, 꼬리로 바닥을 팩팩 쳐 가며 발버둥 치고 있었다. 곳곳에서 이종족들의 능력이 뒤섞여 번쩍번쩍 빛이 났다. 멈췄던 전쟁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다만 전쟁은 조금 전과 다른 양상을 보였다. 많은 수의 반란군들이 올리세스를 떠나 이쪽에 투항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중심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건 포레스트였다. 아스타로의 자리를 대신한 포레스트는 해독약을 성수인 것처럼 인간들에게 나눠 주어 정신을 차리게 했고, 그렇지 않은 자들에겐 수면제를 주어 아예 기절시켜 버렸다. 그 외에도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읽은 반군들이 무기를 버리고 투항해 왔다.
그러니 ‘그’가 있는 이쪽 중심부에 총력이 기울어졌다. 여기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시간을 최대한으로 벌어야 한다……. 노아는 버렸던 희망에 기대를 걸고 제 온몸에서 분출되는 능력을 사용해 결계가 된 얼음을 덧대고 또 덧댔다.
“노아 님! 밀로가 움직이고 있습니다!”
앞서 달리던 앤디의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시선이 하늘을 향했다. 꾸물거리던 푸른색 용이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며 입을 쩌억 벌리고 피가 그득한 곳을 향해 달려들었다.
“내가 시간을 벌 테니까 용들을 지켜!”
밀로의 간절한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노아와 기사단은 이를 악물고 달리는 속도에 박차를 가했다. 정말로 코앞이었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용들을 지킬 수 있다.
하늘에선 밀로가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향해 연신 공격을 퍼붓고 있었고, 공격이 먹힐 때마다 그곳에서 빛이 조금씩 새어 나왔다. ‘놈’이 밀로와 싸우고 있을 때를 노려서 암컷 용들을 데리고 나오면……,
― 생각보다 싱겁구나.
그 순간 힘껏 달리던 늑대들이 무릎이 꺾인 것처럼 하나둘 땅에 고꾸라지기 시작했다.
“으아아악!!”
“아아악!”
고막을 찢는 듯한 음산한 ‘놈’의 목소리에 모두가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뒹굴었다. 단지 소리를 들었을 뿐인데 몇몇은 귀에서 찐득한 피가 흘러나와 기절했다. 처음엔 빛을 없애 시각을 차단하더니, 이젠 소름 끼치는 목소리로 청력을 빼앗았다. 인간들보다 감각이 예민한 이종족들은 전부 쓰러져서 숨을 헐떡였다.
― 나타니엘을 내게 데려오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