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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475화 (475/488)
  • 475화

    앤디가 고함을 치며 올리세스를 향해 능력으로 날카롭게 벼려진 얼음 창살을 날렸으나 놈에게 닿기도 전에 세상이 또 암전됐다. 용들이 성력으로 퍼뜨렸던 빛이 도로 꺼져 버린 것이다. 밝았던 세상이 다시 어둠으로 잠식되자 동맹군은 전쟁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반면 반란군은 거침없었다. 제 손에 잡히는 게 적군이든 아군이든 관계없는 건지 닥치는 대로 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그들도 공황에 빠진 채였다. 앤디는 일방적으로 학살당하는 아군의 비명 소리를 들으며 한시라도 빨리 이 공황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일단 이 어둠에서 벗어나야 돼. 이게 갖다주는 원초적인 공포가 우릴 좀먹고 있어. 이래서는 모두 정신을 잃고 죽을지도 몰라.

    “앤디! 정신 차리고 집중해!”

    “노, 노아 님?!”

    그때 이엘의 곁을 지키고 있어야 할 노아의 목소리가 지척에서 들렸다. 어떻게 된 거지? 아기는? 황자님은 무사히 태어나신 건가? 폐하께서는? 노아 님이 지금 이렇게 전장에 나와도 되는 건가?! 짧은 순간 스쳐 지나가는 무수한 생각에 당황하여 발만 동동 구를 때였다.

    “다들 정신 똑바로 차려!”

    벼락같은 음성이 하늘에서 쏟아졌다. 앤디는 그가 레온임을 알아차렸다. 보이진 않지만 아마도 독수리 위에 올라타 있었던 듯했다. 곧이어 레온은 쿵! 소리와 함께 땅으로 떨어졌다. 동시에 그가 발로 땅을 쾅― 찍자, 그의 발끝에서 뻗어 나간 화염이 대지를 불태웠다.

    “앞이 보여…….”

    꺼지지 않는 불은 늘 위협적이기만 했는데 지금은 마치 생명 줄처럼 느껴졌다. 탄성을 터뜨린 앤디를 따라 동맹군도 하나둘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이깟 공포에 지지 마라, 앤디 경.”

    앤디는 멍한 표정으로 레온의 목소리가 들리는 쪽을 응시했다. 그곳엔 처음 보는 타이곤이 거대하게 몸집을 불린 채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레온 님? 어릴 때 이후로 본체화를 절대로 하지 않는다고 들었던 레온이 지금 타이곤의 모습을 한 채 저를 바라보고 있다.

    민숭민숭한 그의 머리를 보니 저도 모르게 탄식이 새어 나왔다. 갈기가 있어야 할 자리가 맨들맨들 했고, 극소량의 갈기만이 듬성듬성 빈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상할 정도로 그가 대단하게 보였다. 네 종족의 수장이라 그런 건지, 땅을 딛고 선 모습 그 자체로 위엄이 실려 있었다.

    “불을 쏴 줄 테니까 공격해. ‘놈’을 막는 게 우리의 목표야.”

    “알겠습니다!”

    그걸 신호로 곳곳에서 폭발적인 화염이 분사되기 시작했다. 캄캄했던 대지에 불길이 가져온 빛이 모두의 숨통을 터 주는 듯했다. 타이곤의 모습으로 변한 레온은 불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며 아군의 앞은 방패처럼 지키고 적군을 향해선 파도처럼 덮쳤다.

    “각하! 폐하께선 무사하십니까? 아기는…… 황자님은 어떻게 되셨습니까!”

    “…….”

    “각하!”

    시야를 확보한 동맹군이 다시 전쟁에 몰입하는 사이, 앤디는 노아를 붙잡고 가장 급한 사안을 물었다. 그러고 보니 저 멀리 일라이저와 하트가 전장에서 날뛰는 모습이 보인다. 하지만 하이에나로 변한 하트의 등 위엔 아무도 타고 있지 않았다. ……저 두 사람이 여기 있는 거면 대체 황궁은 누가 지키고 있는 거야?

    “앤디. ‘놈’을 쓰러트리는 건 포기해.”

    “……네?”

    “우린 ‘저놈’을 쓰러트릴 순 없어.”

    정신 차리라며 저를 혼낼 땐 언제고, 지금은 ‘놈’을 포기하라니……. 앤디는 미간을 좁힌 채 뭔가 항변하려고 했지만 갑자기 제 쪽으로 쏟아지는 공격들을 막아 내느라 잠시 대화가 끊겼다.

    앤디는 얼음으로 거대한 장벽을 쌓기도 하고 끝이 날카로운 창을 만들어 꽂기도 하며 드넓은 대지를 휘젓고 다녔다. 이런 역한 상황에서 그나마 숨통이 트이는 건 보호석이 전부 사라졌다는 사실이었다.

    양쪽 이종족들은 태어나 처음으로 족쇄가 풀린 것처럼 날아다니고 있었다. 능력이 빠져나가는 출력 속도는 난생처음 경험해 보는 속도였다. 당연하게도 기억이란 게 존재하던 시절부터 보호석이 그들을 억압해 왔기 때문에 이렇게 제한 없이 날뛸 수 있는 건 처음이었던 것이다.

    역시 보호석이 사라져야 했어……. 이 또한 오드의 희생이 가져온 결과였다. 나자르인 그에게 너무 많은 짐을 지운 것 같아서 앤디는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런 앤디의 어깨를 두드린 건 조금 전까지 의문스러운 말을 하던 노아였다.

    “앤디. 다른 건 생각하지 말고 넌 가서 오드 님을 보호해.”

    “오드 님의 시체요? 황궁으로 옮겨 놓을까요?”

    “뭔 소릴 하는 거야. 가서 오드 님을 지키라고.”

    “예?”

    다소 얼빠진 표정으로 묻던 앤디가 대답 없는 노아의 얼굴을 보다가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러곤 조금 전에 저가 오드의 시체를 내려놓았던 곳을 눈으로 찾았는데, 아무리 찾아도 오드의 시체가 보이질 않는다. 당황한 앤디가 혼란에 빠지려던 순간이었다.

    “앤디 님!”

    저 멀리 제 몫을 톡톡히 하며 전쟁에 참전했던 로날드가 앤디를 향해 달려오는 게 보였다. 그의 등엔 축 늘어진 오드의 시체가 실려 있었다. 로날드의 옆엔 슈프와 리퍼가 엄호하듯 함께 달리고 있었다. 그렇게 퍼붓는 공격을 요리조리 피해 앤디와 노아가 있는 곳까지 도착한 로날드는 오드를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놓았다.

    “잘했어, 로날드. 슈프랑 리퍼도 수고했어.”

    “그보다 오드 님께서 살아 계세요!”

    “뭐?”

    리퍼의 말에 깜짝 놀란 앤디가 바닥에 눕혀진 오드의 목 위에 손을 댔다. 리퍼의 말대로였다. 미세하지만 분명 맥박이 뛰고 있었다.

    “비켜 봐, 앤디. 내가 보겠다.”

    앤디를 밀어 내고 오드의 곁에 앉은 노아가 거침없이 오드의 옷을 파헤쳤다. 올리세스의 검에 찔린 부위를 찾기 위해 노아가 가장 안쪽 옷까지 걷어 냈을 때, 단단한 무언가가 오드의 몸을 둘러싸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

    “로빈이 미리 손을 써 뒀어.”

    “네? 로빈이요?”

    “그래. 오드 님은 자신이 지키겠다고 호언장담을 하더니, 이런 일이 벌어질 줄 예상한 모양이군.”

    노아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오드의 몸 상태를 살폈다. 굉장히 얇지만 총알도 막을 만큼 단단한 무언가를 입고 있었다. 올리세스가 찔렀던 부분도 그것 덕분에 깊게 찔리지 않아 치명상은 피한 듯했다. 노아는 살짝 압박하듯 손에 힘을 줘 누르며 오드를 흔들어 깨웠다.

    “오드 님. 눈 좀 떠 보십시오.”

    자신은 스완처럼 성력을 기민하게 느끼진 못하지만 적어도 지금 오드의 몸에선 성력이 꺼져 가고 있다는 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 드넓은 대지에서 느껴지는 불안과 초조. 모두가 살아남기 위해 서로를 향해 무기를 겨누고 있었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노아의 흔들리는 시야에 쓰러진 용들이 잡혔다. 순간적인 폭발을 견디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진 세 마리의 용이 간헐적으로 숨을 내뱉고 있었다. 그녀들이 마지막 희망이었다. 저 괴랄스러운 혼종도 단번에 처리할 만큼 가장 강한 아군이었는데…….

    어디서 쏟아졌는지 모른 공격에 암컷 용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이제 어떡하지? 용이 저렇게 쉽게 제압당했다고? 그럼 우린……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건가.

    “노아 님. 아까 ‘놈’을 쓰러트리지 못한다는 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직 제대로 해 보지도 않았는데 왜 그런 말씀을 하신 겁니까.”

    “…….”

    “그리고 폐하는 어디 계시고요. 아기는요? 무사하십니까? 대체 하트 경은 왜 여기에 나와 있는 겁니까? 왜 황궁에 있어야 할 사람들이 전부……,”

    “희생이 불가피해.”

    “무슨……,”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도 너만큼은 이성을 잃지 마라.”

    “노아 님.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제게 조금이라도……!”

    “테오도로가 무사히 태어났어. 나타니엘도 괜찮아.”

    노아가 계속 말을 돌리기에 아기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고 생각했다. 혹은 이엘에게 안 좋은 일이 생겼거나. 그러나 노아는 불안해하는 앤디에게 희소식을 전해 주었다. 그것도 두 사람 모두 안전하다는 소식이었는데, 이상하게 노아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근데 왜 표정이 그러십니까……? 아니, 이럴 게 아니라 지금 당장 황궁에 호위병을 배로 늘려야 하는 거 아닙니까? ‘놈’이 이곳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이러다 곧장 폐하와 아기님을 향하면……!”

    “나타니엘과 아기는 이곳에 없어.”

    “그럼…….”

    “그래. 계획대로 다른 차원으로 넘어갔다.”

    여기서 말하는 다른 차원은 한 곳밖에 없다.

    “스완이 있는 곳을 말씀하시는 거죠?”

    앤디의 물음에 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정말 잘된 일인데, 우리의 계획대로 잘 진행되고 있다는 소린데. 앤디는 왜 제 주인의 얼굴에 수심이 드리워져 있는지 몰랐다. 그러나 뒤이은 그의 말에 앤디는 열었던 입을 도로 다물어야 했다.

    “얼굴을 못 봤어.”

    “…….”

    “……테오가 어떻게 생겼는지, 건강한지, 나와 그녀 중 누구를 더 닮았는지. 그 어떤 것도 확인하지 못했다.”

    노아는 그 상황을 떠올리며 주먹을 쥐었다. 산실 안엔 나타니엘과 미엘뿐이었다. 이엘이 온 힘을 다해 소리를 내지르는 순간,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밖에서 촉각을 곤두세우던 노아와 하트가 서둘러 산실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지만 미엘이 문을 막았다. 동시에 안쪽에서 이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도 들어오지 마.’

    그녀가 잔뜩 쉰 목소리로 간신히 내뱉은 문장이 충격적이었다. 들어오지 말라니? 혹시나 아기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분명 울음소리를 들었는데 밖으로 나와서 무슨 일이 생긴 건가? 그 이유를 알아야 할 것 아닌가.

    ‘보면 안 돼……. 그러면 헤어지기 힘들어.’

    눈물에 먹힌 목소리가 문 너머에서 들려왔다. 영원한 만남을 위해 아주 잠깐 헤어져야 한다. 그걸 알고 있기 때문에 이엘은 그 아픔을 자신 혼자 감당하기로 한 것이다.

    ‘테오는 건강해. 날 보고 웃고 있어……. 너무…… 너무 예뻐. 눈이 날 닮은 녹색이야. 웃을 땐 노아를 닮았어. 아주 건강하고 예뻐. 정말……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만큼 예뻐.’

    노아는 문에 손을 댄 채 똑같이 벅찬 숨을 내쉬었다. 앞으로의 일은 모르겠다. 그냥 지금 당장 아이가 보고 싶었다. 제 눈으로 테오도로가 잘 태어났는지 똑똑히 보고 싶었다.

    “그 순간 ‘놈’이 이곳에 내려왔고, 시간이 없었다.”

    노아는 그때를 회상하며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이엘은 미리 파 두었던 지하 통로를 이용해 아이와 함께 어딘가로 사라졌다. 온 세상에 내려앉은 어둠을 용들의 성력으로 일시적으로 밀어냈을 때, 정신을 차린 노아와 하트가 산실 문을 뚫고 들어갔지만 그들은 사라진 후였다.

    “스완에게 가신 건 확실합니까?”

    “지금으로선 어떤 것도 확단할 수 없다. 그냥 믿고 우리는 우리의 일을 하는 수밖에.”

    “그럼 아까 ‘놈’을 포기하라고 하신 건요?”

    “나타니엘이 그랬어. 어떻게 해도 ‘놈’을 이길 수 없을 거라고. 이 거래는 반드시 이루어져야 끝이 난다고. 그러니까 저걸 쓰러트리려 사력을 다하지 말고, 아군의 피해를 줄이는 데 집중해. 쓰러진 암컷 용들도 저곳에 두면 안 돼. 아군의 진영으로 데려온다.”

    “알겠습니다.”

    우렁차게 대답한 앤디는 엄지와 검지를 모아 둥글게 만든 후 입에 물고 휘파람 소리를 냈다. 그에 곳곳에서 물어뜯고 능력을 난사하던 늑대들이 귀를 쫑긋거리며 재빨리 앤디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앤디는 늑대의 모습으로 돌아간 뒤, 용들이 쓰러진 곳을 향해 돌진했다. 서둘러 부상자를 수습해야 된다. 그의 뒤를 수많은 늑대들이 따르며 엄호했다.

    “앤디 님! 조심하십시오!”

    용이 쓰러진 곳이 지척이었을 즈음이다. 뒤에서 들린 아군의 목소리에 앤디는 반사적으로 달리던 다리를 멈추고 몸을 아래로 숨겼다. 그 순간 뒤에서 무언가 날아와 쓰러진 용들이 있는 곳에 처박혔다.

    “……저건 괴생물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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