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4화
‘악.’ 이름도 성별도 외관도,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 괴이한 생명체. 그 존재를 부를 만한 호칭이 없어, 용들은 그것을 ‘악’이라고 불렀다. ‘악’은 기억도 안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신이 만든 것들을 탐내고 노려 왔다. 그래서 암컷 용들은 ‘악’과 맞붙어 신이 만든 세상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용의 기준에서 지금 이 상황은 전쟁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들이 치렀던 ‘악’와의 전쟁은 이것보다 더 치열하고 끔찍하고 처절했으니까.
딱 한 번. 암컷 용들과 ‘악’이 전쟁을 치렀고, 그 결과, 패배한 ‘악’을 바닥에 처넣어 버렸었는데……. 근데 어느새 그곳을 빠져나와 다시 신이 만든 세상을 노리고 있었다니.
“미엘은 지금 이곳에 있는 인간 여자의 아이가 태어날 수 있게 돕고 있어.”
“그 아이가 ‘그놈’과 관련이 있는 거구나?”
“그래. 어쩌면 우리가 이곳에 내려온 것도 우연이 아닐지 몰라. 이곳은 늘 신의 뜻대로 돌아가는 곳이니까.”
“그렇다면 어쩔 수 없네……. 좋아. 이번에야말로 놈을 완벽하게 처리하겠어. 다시는 대가리를 쳐들지 못하게 아예 박살을 내 버리자고.”
여자의 눈에 이채가 어린 것을 보고 가비가 웃으며 다시금 제게 돌진해 오려는 괴생물체를 처리하기 위해 손을 뻗었을 때였다.
“이 세상은 멸망뿐이다! 어차피 신에게 버려진 세상은 말로는 이런 거라고!”
저 멀리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모두가 그쪽을 향했다. 어떤 인간 남자가 나자르의 목을 한 팔로 감싼 채 칼을 들고 그를 위협하고 있었다.
“오드 님!”
“올리세스! 뭐 하는 짓이야! 오드 님을 놔줘!”
“놈을 잡아!”
하지만 자칫하다간 올리세스에게 잡힌 오드에게 문제가 생길까 다들 주저하며 공격하지 못했다. 날뛰는 괴생물체만 암컷 용 두 마리가 제압할 뿐이었고, 나머지는 아군이고 적군이고 할 것 없이 모두 정적 속에 멈춰 있었다.
올리세스는 제게 총구와 화살이 겨눠져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의 눈엔 광기가 어린 채였다. 올리세스는 이제 약으로도 고통을 견딜 수 없는 수준에 이른 제 몸뚱어리를 가만히 쳐다봤다.
이 나자르에게서 성력을 받아 겨우 견뎠지만 그것도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이런 식으로 살다가는 정말 미쳐 버릴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를 불러야겠어. ‘그’에게 거래를 제안해야겠어. 저 황궁에 있는 마녀를 넘기고, 내 목숨을 살려 달라고 하자. 내가 이 땅을 영위할 수 있게 권력을 달라고 하자. 저 빌어먹을 이종족을 전부 없애고 그냥 우리 인간끼리 좀 살게 해 달라고 하자. 어차피 난 번식 같은 건 관심도 없어. 그냥 내가 죽을 때까지 누리고 싶어. 내가 다 차지하고 싶어.
올리세스의 눈은 광기로 물들었다. 그는 뒤쪽에 있던 제 수하들을 향해 눈짓했다. 그들은 올리세스의 명령을 받고 은밀하게 움직이더니, 가지고 왔던 수레에서 가득 쌓인 유리병들을 다 바닥에 떨어뜨려 깨뜨리기 시작했다.
늑대의 기름. 독수리의 눈알. 타이곤의 갈기. 그것들을 섞은 저 한 병에 수많은 이종족들의 목숨이 들어 있다. 저 수많은 유리병을 만들기까지 얼마나 많은 개체가 목숨을 잃었을지, 오드는 올리세스에게 목이 붙잡힌 채로 눈을 감고 슬픔의 눈물을 흘렸다.
“안타깝구나, 나자르. 널 보낸 네 신이 너와 우리를 모두 버린 탓에 네가 죽게 됐으니.”
“그만…… 정신 차려요, 올리세스. 이제 그만하고 제발……,”
“닥쳐.”
열에 들뜬 숨을 내쉬던 올리세스가 순식간에 손을 쳐들었고 동시에 올리세스를 향해 누군가 총을 쏘았다.
탕―! 탕―!! 그러나 굉음과 함께 쏜 총을 맞고 쓰러진 건 올리세스가 아니었다. 그를 추종하던 인간들 여럿이 올리세스의 앞을 막은 것이다. 올리세스는 총알 밭에서 살아남았고 그의 아래 총을 맞은 사람들이 쓰러졌다.
“안 돼! 오드 님!”
앤디가 비명을 질렀다. 바닥에 후드득 떨어진 오드의 새빨간 피가 바닥을 강물처럼 채우기 시작했다. 저렇게 피가 많이 흐를 수가 있나. 오드의 가슴팍에 꽂힌 칼에서 피가 터져 나와 바닥을 적셨다. 새빨간 피는 고이고 고여서 웅덩이를 만들었다.
“다 끝이야.”
올리세스는 잡고 있던 오드를 바닥에 내던지고 고인 피 웅덩이에 가지고 왔던 것들을 전부 쏟아 냈다. 그런 와중에도 올리세스를 향한 제도군의 공격은 멈추지 않았으나, 누구도 올리세스에게 닿을 수가 없었다. 인간으로 장벽을 세운 것처럼 그의 추종자들이 올리세스를 감싸고 막아 준 것이다.
“젠장. 저놈을 처리해야 돼! 불러내면 안 된다고!”
흥분한 르네의 목소리가 천공을 찢자, 넋을 잃고 있던 이종족들이 정신을 차리고 올리세스와 잔당들을 향해 내달렸다. 가비와 암컷 용들도 그들의 앞에서 괴물들을 처리하며 엄호했다. 그러다 가비가 멈칫하며 고개를 뒤로 돌렸다.
“왜 그래, 가비?!”
“태어났어.”
“뭐?”
“아이가 태어났는데, 대체 어디로 가는…… 다들 조심해!!”
횡설수설 말하던 가비가 무언가를 보고는 눈을 커다랗게 뜨더니 주변에 있던 동맹군을 전부 밀쳐내 보호했다. 순간 검은 빛이 번쩍이며 커지더니 온 세상에 존재하던 빛이 사라져 버렸다. 마치 모두가 어둠 속에 집어삼켜진 것처럼.
― 날 불러낸 아이가 누구니?
소름 끼치도록 음산하고 낮은 목소리가 모두의 귀에 들려왔다. 모두 눈이 먼 것처럼 새카만 시야에서 벗어나질 못한 채였다.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했던 공포가 파도처럼 덮쳐 왔다.
심지어 이종족들마저 그 자리에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얼어붙어 있었다. 죽음 앞에서도, 전쟁 앞에서도 이렇게 두렵지는 않았을 것이다.
원초적인 공포. 정말 극한의 공포가 온몸을 덮쳐 와서……. 앤디는 제 아랫입술이 바르르 떨리는 걸 느끼며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와 소름이 돋는 팔을 슥슥 문질렀다.
앞이 하나도 보이질 않는다. 청각이 예민하게 발달한 이종족인데도 불구하고 좀처럼 집중이 되질 않았다. 앤디는 아예 눈을 감고 기척을 느끼려 했지만, 겁을 먹은 인간과 이종족이 공포 속에 우왕좌왕하며 소리를 질러 대는 통에 어떤 것도 감지할 수 없었다.
“접니다! 제가 당신을 불렀습니다!”
고함 소리와 비명을 뚫고 올리세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를 부른 자가 누구냐는 ‘그’의 질문에 놓칠세라 다급하게 대답한 것이다. 올리세스 역시 목소리 속에 공포가 서려 있었다.
앤디는 이 드넓은 평야 위에 있는 모두가 공포에 질려 다리를 덜덜 떨고 있음을 느끼며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어떡하지……. 대체 어떻게 하면 좋지? 앞도 보이지 않고, 심지어 형체도 없어. 그런데도 저 목소리 하나에 모두가 겁에 질려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공황에 빠졌다고. 이렇게 무서운데 폐하께선 ‘저놈’을 몇 번씩 만났다는 거야? 나 같으면 꽁지가 빠져라 도망만 쳤을 텐데?
― 네가 날 불렀다고?
“예! 제가 당신을 불렀습니다. 당신이 이, 이곳에 있을 수 있는 건 다 제, 제가 당신을 불렀기에 가, 가능했던 일입니다……!”
말을 더듬으면서도 제 공로 드러내는 것을 멈추지 않은 올리세스의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왔다. 앤디는 입술을 짓씹으며 보이지 않는 캄캄한 속에서 어떻게든 기척을 느끼려고 노력했다. 대체 어디 있지? 어디서 들리는 소리지? 아니, 이곳에 있는 건 맞아? 실체가 있긴 한 거야? 초조함에 신경이 잔뜩 예민해져 있을 때였다.
“이게 또 똑같은 수작을 벌이네.”
눈이 번쩍 뜨일 만큼 눈부신 빛이 확 퍼졌다. 가비의 목소리가 들린 쪽에서 퍼진 빛이 어둠을 집어삼킨 대지에 얕고 잔잔하게 깔리더니, 이내 폭발하듯 온 세상을 덮었다. 암컷 용들이 만들어 낸 빛은 오드가 사용하던 빛과 비슷했다. 흐려진 이지를 또렷하게 하고 공황에 빠진 정신을 붙잡는 빛이었다.
“가서 나자르의 시신을 가져와. 빼앗겨선 안 돼.”
암컷 용 중 하나가 얼빠진 앤디의 등을 툭 치며 작게 속삭였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앤디가 재빨리 눈동자를 굴려 오드의 시신을 찾아냈다. 그는 늑대의 모습으로 돌아가 자세를 낮춘 채 혼란에 빠진 군중을 파고들어 오드를 낚아챘다. 그의 몸에선 여전히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고, 바닥을 축축하게 적신 피는 어딘가로 흘러가고 있었다.
저기다. 앤디는 피가 흘러가는 쪽에 ‘놈’이 있음을 눈치채고 동맹군이 있는 쪽으로 돌아오면서도 ‘그’가 있는 곳을 놓치지 않고 응시했다.
“저쪽이야!”
앤디는 오드를 바닥에 내려놓고는 용을 향해 턱짓으로 가리켰다. 그에 용들이 소리가 나는 쪽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용을 엄호해라!”
“엄호해!”
반란군이 정신을 차리기 전에 이쪽이 먼저 선수를 쳐야 한다. 앤디와 라니에로가 거의 동시에 외치자 동맹군이 달려가는 용을 엄호하듯 반란군을 향해 공격하기 시작했다. 오드로 인해 거의 모든 보호석이 사라진 지금, 사방에선 폭탄과 이종족의 능력이 맞붙느라 굉음만 들려오고 있었다.
“우리가 결계를 칠 테니까 가비 네가 가서 놈을 막아.”
“가능할까.”
“시도는 해 봐야지. 아직 놈이 완전하게 나타난 게 아니니까.”
‘목소리’가 있는 쪽을 향해 달려가던 용들이 머리를 맞대며 작전을 짜고 있었다. 이미 한 번 붙어 본 적이 있는 상대였지만 장소가 다르기 때문에 승리를 확단할 수가 없었다.
그땐 놈이 저희가 사는 곳으로 쳐들어온 것이므로 전적으로 용에게 유리했던 전쟁이지만, 지금은 성력이라곤 전혀 없는 지상에서 벌어지는 전쟁이었다. 어쩌면 이번엔 용에게 불리할지도 모른다.
가비를 제외한 세 사람은 용의 모습으로 돌아가 앤디가 가리켰던 곳을 넓고 둥글게 에워싸고 결계를 쳤다. 그 원 안으로 들어가 오드의 피가 흥건한 곳에 멈춰 선 가비는 허리를 숙여 손을 뻗어 바닥을 짚었다. 그러곤 눈을 감으며 뭔가를 중얼거리자 땅을 짚은 손바닥에서 새하얀 빛이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 너희야말로 똑같은 수법을 쓰는구나.
음산한 목소리가 가비의 귀를 때렸다. 그녀는 집중력이 흐트러지지 않게 온 힘을 다해 성력을 쏟아부었으나 결계가 흔들렸다.
“으아아악!!”
“끄아악!”
“꺄아아악!”
세 용이 비명을 내지르며 창공에서 펄떡거리자 결계가 깨지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결계를 도맡은 세 용을 집중적으로 공격하고 있었던 것이다. 젠장! 욕을 짓씹은 가비는 그에 휘둘리지 않고 저가 가진 모든 성력을 다 쏟으려고 했다.
“안 돼!”
그러나 어디선가 튀어나온 올리세스가 흔들리는 결계를 뚫고 들어와 가비를 밀쳤고, 순간적으로 힘을 쏟고 있던 가비는 올리세스의 공격에 미처 대비하지 못해 옆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저 자식 잡아!”
“올리세스를 잡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