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3화
포레스트가 끝없는 질문을 던지는 중에도 인간들은 제도를 향해 행진했다. 가장 선두에 서서 방패 역할을 하는 건 전부 이종족과 약에 취해 시체처럼 움직이는 인간들이었다. 이 상태로 제도군과 맞닥뜨리면 저들은 모두 죽을 것이다.
“안 돼요! 이렇게 가면 우린 전부 죽어요!”
“어차피 이렇게 살아 봐야 남는 게 없어.”
포레스트가 올리세스의 추종자 중 하나를 붙잡고 설명했지만 남자는 눈에 총기를 잃은 채 고개를 저었다. 이들은 전부 희망을 잃었다. 신을 떠났으니 의지할 데라곤 저희를 이끄는 올리세스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놈이 시키는 일이 옳다고 생각하고 따르는 것이다.
“폐하는 마녀가 아니에요! 그분이 마녀라면 우리는 대체 뭔가요? 신을 떠난 우리는 그보다 더한 괴물 아닌가요?!”
“선황이 저 여자를 제때 바쳤더라면 우리가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거야! 모든 게 저 여자와 그 애비 때문이라고!”
“잘못을 저지른 건 선황이지, 폐하가 아니에요. 다들 알면서 왜 이러는 거예요? 올리세스의 계략을 몰라요? 저자는 악마를 이곳에 불러낼 생각이라고요. 봐요, 누가 마녀죠? 누가 악한 세력이라고 생각해요? 알잖아요, 다들!”
“포레스트 님. 우리는 너무 늦었어요.”
누군가 울면서 포레스트를 붙잡았다. 이들도 저희가 처한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포레스트가 준 해독제로 정신을 차리면서 그간 저희가 저지른 죄를 하나하나 떠올린 것이다.
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 봤자 달라지는 건 없었다. 이미 너무 많은 죄를 저질렀고, 지금도 그에 동조하고 있다. 이젠 정말 신께서 저희를 버리실 게 분명했다.
“포기하지 마세요! 늦지 않았어요. 이제 정신 똑바로 차리고 다시 신의 뜻대로 살아가면 된다고요. 잘못할 수 있어요. 실수할 수도 있고요. 저도…… 저도 너무 많은 실수를 저질렀어요. 당신들 말대로라면 전 이곳에 있어선 안 돼요. 하지만 저는 포기하지 않았어요. 폐하를 믿고, 신을 믿어요. 이곳을 바꿀 수 있을 거라고 저는 믿어요. 죄에 대한 처벌은 그 이후에 받으면 돼요. 잘못을 저질렀다면 지금부터 돌이켜서 바꾸고 개선할 생각을 해야지, 어쩔 수 없으니까 계속 잘못을 저지르겠다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꼬리에서부터 시작된 포레스트의 말이 조금씩 앞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가장 선두에 서 있는 올리세스와 그의 측근들은 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아직 모르는 듯했다. 이미 포레스트와 마음을 같이하기로 한 사람들이 군중 곳곳에서 같은 마음으로 소리쳤다. 제도에 가기 전에 최대한 모든 것을 돌려놓으면……,
“크아아악!”
그러나 그럴 새가 없었다. 제도의 경계를 막 넘었을 때, 올리세스가 행군을 멈추고 손짓하자마자 땅이 우저저적 갈라지더니 그 안에서 괴생물체가 튀어나왔다. 괴물들은 오로지 앞만 보고 전진하며 저 앞에 진을 친 제도군을 향해 엄청난 속도로 뛰기 시작했다.
……희망이 없어. 봐, 우린 희망이 없잖아. 포레스트의 곁에 있던 어떤 노인이 그렇게 읊조렸다. 아주 조그맣게 피어올랐던 희망의 불씨가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포레스트 역시 올리세스가 만든 저런 괴물들을 몇 번 봤지만, 저렇게 다양하고 많은 숫자를 만들었을 줄은 전혀 몰랐다.
저것들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이종족들이 희생당했을까. 또 저 앞에 있는 우리 제도군은,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러야 할까. 포레스트마저 할 말을 잃은 채 망연히 괴물들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이게 뭐람. 진짜 별걸 다 만드네.”
쨍쨍하고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하늘 위에서 들리더니 눈 깜짝할 새에 괴물 한 마리를 입으로 낚아채 물고 사라졌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괴물의 찢어진 사체들이 하늘에서 후드득 떨어졌다.
“저게 뭐지?!”
올리세스가 당황한 표정으로 구름 너머의 무언가를 가리켰지만 아무도 그 정체를 알지 못했다. 분명 단단한 두더지의 몸으로 만들어진 놈이기 때문에 저렇게 씹는다고 해서 씹혀질 게 아니었다. 게다가 위기에 처하면 저것들은 자폭한다. 저렇게 갈기갈기 찢어지기 전에 이미 터져서 죽었을 거라고.
“저게 뭐냐고 묻잖아!”
“모, 모, 모르겠습니다!”
“아스타로는 어디 있나! 아스타로를 데려와!”
난동을 부리는 올리세스의 모습에 모두가 우왕좌왕했다. 난생처음 보는 이종족. 푸른색 빛이 번쩍했을 뿐인데 그 누구도 쉽게 죽이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올리세스의 걸작을 하찮은 종잇조각처럼 찢어 버렸다.
포레스트는 전쟁이 한창인 전장 곳곳에서 푸른 빛이 번쩍거리는 것을 멍청하게 바라보기만 했다. 희망이 사라졌다고 믿었는데……. 제도군은 또 다른 희망을 찾아냈다. 희망은 사라지지 않아. 그건 신께서 이곳을 버리신 게 아니라는 의미와도 같았다.
*
“가비! 대체 저게 다 뭐야?”
“나도 몰라. 우리 손에 죽는 걸 보면 신께서 만든 창조물이 아니란 건데. 대체 어떤 미친놈이 저딴 걸 만든 거야?”
하늘을 지키고 있던 암컷 용 세 마리가 모두 땅으로 내려와 인간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들은 전후 상황도 알지 못한 채, 일단 가비가 시키는 대로 공격부터 퍼붓고 있었다. 하나같이 괴랄스러운 모습을 한 괴물들을 처리하면서도 기가 막혀서 말이 제대로 안 나왔다.
“이걸 인간들이 만들었다고? 그때 호되게 혼났는데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어?!”
“그러니까 인간이지.”
용들이 신랄하게 인간을 비꼬았다. 제도군에 서서 그들과 함께 싸우던 인간들은 아주 약간은 억울했지만 틀린 말도 아닌 터라 달리 반박하지는 못했다. 다만 3기사단장인 라니에로는 꽤나 화가 난 표정으로 며칠 전에 복귀한 앤디를 툭툭 치며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저놈들과 같은 취급 하는 건 좀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뭐, 아무래도 그렇죠. 근데 듣자 하니, 저쪽 용들은 인간이나 저희 이종족이나 다 똑같이 취급한대요. 자기들 수준에 못 미치는 하등한 종족이라나 뭐라나.”
앤디가 키들대며 말했다. 평생을 신의 곁에서 보좌해 왔으니 자신들 같은 존재가 마뜩잖기는 했을 것이다. 매번 되풀이되는 이런 식의 전쟁을 보며 얼마나 한심하게 생각했을지, 이종족인 앤디도 이해하는 바였다.
“그래도 전력은…… 확실히 도움이 되는군.”
떨떠름하게 말한 라니에로는 늑대의 등에 올라탄 채 다시 공격을 막기 위해 자리를 떠났다. 앤디는 그 자리에 서서 하늘 위를 점령한 밀로를 쳐다봤다. 암컷들은 공중을 아예 밀로에게 맡기고 지상에 있는 것들을 처리하려는 모양이었다.
용 한 마리가 갖는 전력은 종족 전체를 아우를 정도로 강력했다. 그동안 밀로 혼자 공중전을 처리했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암컷 용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눈을 감았다가 뜨면 위치가 변해 있었다. 감히 속도라는 것을 체감할 수가 없었다. 제도군에 속해 함께 싸우고 있는 치타들과 비교해도 용이 더 뛰어났다.
치타의 능력이 순간적인 이동인데도 불구하고, 용이 더 빠르다는 게……. 앤디는 입을 쩍 벌린 채 그들의 전투를 거의 감상하다시피 쳐다봤다.
본 능력이 날씨를 마음대로 변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온몸으로 맞부딪치면서 번개와 우박을 순식간에 쏘아 댔다. 백발백중이었다. 아군과 적군이 맞붙은 상태에서도 아군에겐 피해를 끼치지 않고 정확하게 적군을 맞혔다.
앤디는 밀로의 전투를 많이 봐 왔다. 밀로도 번개를 주로 사용했는데 그러기 위해선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구름을 끌어모으고 필요한 요소를 만든 뒤에야 번개든 우박이든 내려칠 수 있었는데, 지금 저 암컷 용들은 그런 게 전혀 없었다. 번개와 우박을 초 단위로 확확 바꿔 가며 퍼부어 댔다.
“……저게 우리 편이 아니었으면 진짜 어쩔 뻔했냐.”
저도 모르게 탄식 비슷한 말투로 내뱉은 앤디는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자신도 전장에 뛰어들었다.
한편 빗발치는 총알 사이를 어렵지 않게 피해 다니던 가비가 다른 암컷 용 하나를 잡아 세웠다. 공격하는 것에 여념이 없던 그녀가 고개를 갸웃하며 절 붙잡은 가비에게 물었다.
“왜 그래, 가비?”
“느껴지는 기운이 심상치가 않아.”
“사실 나도 아까 느꼈어. 내 몸 안으로 더럽고 불쾌한 것들이 쏟아지는 느낌 말이야.”
“……나자르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닐까?”
가비의 추측에 다른 용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을 때, 돌연 몸 안으로 역겨운 것들이 쏟아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또 다른 용은 메스꺼움을 이기지 못하고 헛구역질까지 했었다.
나자르……. 가비는 나자르를 떠올리며 한숨을 집어삼켰다. 나자르는 신께서 인간들을 위해 보내 준 선물이었다. 이곳은 신의 세계였지만 신이 마음대로 세상을 조종하는 건 아니었다.
신은 자신이 만든 인간과 이종족에게 자유를 주었고, 그들은 자신의 선택에 따라 삶을 살아갔다. 그러나 그렇게 살면 필연적으로 잘못된 길을 갈 수도 있었기 때문에, 그걸 바로잡고자 보낸 게 나자르였던 것이다.
나자르는 처음부터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종족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인간들을 지켜 내야 했다. 어차피 그들은 죽으면 모두 신의 품으로 돌아갈 테지만, 그럼에도 인간들을 대신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자르는 거침없이 선택했다. 인간을 지키기 위해, 자신들의 종족까지도 전부 내려놓았다.
그랬는데 이제 남은 나자르가 겨우 한 명이라니. 가비는 이걸 두고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인간을 지키기 위해 온 나자르들이 인간의 손에 죄 죽고 단 하나만 남아 버렸다. 그 나자르마저 죽으면 이곳은 정말 아무 희망이 없다.
암컷 용들은 이곳에 미련이 없다. 세상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나 몇 번 오갔지, 어느 순간부터는 이 땅을 밟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 미련은커녕 한 톨의 관심도 없는 상태였다. 이곳이 멸망한다고 해도 자신과는 다른 세계의 일이다. 어차피 세계는 또 만들면 되니까.
“하지만 그게 그 악한 놈과 엮여서 망하는 거라면 말이 달라지지.”
“뭐? 그게 무슨 소리야? 가비, 이제 우리한테도 좀 설명해 봐. 미엘은 대체 어디 있고 저것들은 다 뭔데.”
“힘을 비축해 놔. 우리가 처리할 건 저깟 조무래기들이 아냐.”
“그럼 누군데.”
“우리가 이미 한 번 저 바닥으로 밀어 봤던 상대.”
가비의 말에 여자가 미간을 좁히며 인상을 찌푸렸다. 우리가 이미 한 번 바닥으로 밀어 봤던 상대? 수컷 용들과는 싸워 본 적이 없고, 그렇다고 인간이나 이종족과 맞붙은 적도 없는데 대체 누구랑…….
그렇게 생각을 덧대던 여자가 돌연 뭔가가 떠오른 건지 눈을 크게 뜨며 가비의 팔목을 붙잡았다.
“설마 그 자식이 여기 있어?!”
“곧 올 거야.”
“기어이 이곳을 점령할 생각이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