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2화
“드레인. 죄를 지어서 너희에게 갈 수 없다던데.”
“드레인이 여기에 있다고?”
“그래. 여기라고 하기엔 조금 애매하지만, 아무튼 비슷한 곳에 있어. 우리가 훔쳤던 열매를 갖고 있지.”
“그 열매를 아직도 갖고 있었어?”
당연하잖아. 미엘의 질문에 밀로가 실소하듯 웃으며 대답했다. 그 열매를 어떻게 버려. 그 열매를 우리가 어떻게 사용해.
“지금부터 우리의 계획을 설명할게요. 이게 당신들의 뜻에 어긋난다면…… 킨의 사체를 가지고 돌아가도 좋아요.”
이엘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가비와 미엘을 깨웠다.
“하지만 이게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처절한 방법이라면. 어쩌면 신께 돌아가기 위한 몸부림이라고 생각한다면. 이곳에서 저를 도와주세요.”
“…….”
“저희는 모든 걸 바로잡고 싶어요. 그러려면 당신들의 도움이 필요하고요.”
연약해 보인다고 생각했는데 저 또랑또랑한 눈동자에선 여기 있는 이종족들 그 누구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는 단단함이 느껴졌다. 이곳에서 저 인간 여자가 가장 강하게 느껴질 정도로.
가비는 나타니엘이 마음에 들었다. 위압적인 상대 앞에서 기죽지 않으면서도, 무례하지 않게 상대를 배려하는 모습이.
그리고 그건 미엘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일단 산실부터 정화해야겠네. 다 나가. 아이를 받을 수 있는 의원이나 보조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인원만 남고 나가라.”
“뭐?”
미엘로부터 갑자기 축객령이 떨어지자 밀로가 당황한 듯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밀로에게 일일이 설명해 줄 시간이 없었다. 미엘이 가볍게 손짓을 하자 이엘을 중심으로 결계가 생겼고, 그 결계가 점점 넓어지면서 몰려들었던 이종족들을 밖으로 밀쳐 냈다.
“애 나올 때 정신 사나우니까 다들 나가. 아이는 나와 가비가 받을 테니 걱정 말고.”
“아악……!”
미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엘이 짧은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뒤로 꺾었다. 이전에 겪었던 통증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엄청난 고통이 제 몸을 집어삼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노아가 결계를 뚫고 뛰어와 협탁 위에 있던 약을 그녀의 입에 넣었다. 레온의 갈기로 만든 약이라 통증을 줄여 줄 것이다.
“네가 아이의 부친이구나?”
흥미롭게 지켜보는 가비에게 고개를 끄덕인 노아는, 통증이 줄어든 이엘의 표정을 보고 무너지듯 그 곁에 주저앉았다. 불안하고 걱정돼서 죽을 것만 같았다.
그때 미엘의 시선이 창밖을 향했다. 그녀에게만 느껴지는 더러운 기운. 무척 가까워진 그 더러운 것들의 기운에, 미엘은 한숨을 쉬며 가비를 향해 입을 열었다.
“가비. 밖이 소란스럽네. 안 되겠어. 여긴 내게 맡기고 넌 가서 밖을 정리하고 와. 필요하다면 위에 있는 애들에게도 부탁하고.”
“걔네까지 데려올 것 없어. 나 혼자서도 충분해.”
그와 동시에 위병이 달려와 제도의 경계에 올리세스의 반란군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며칠 전에 앤디가 아스타로를 납치해서 돌아왔기 때문에 동맹군도 그들의 행군 소식을 알고 있었다. 놈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들었지? 몇 마리만 여기 남고 나머지는 밖의 상황이나 정리해. 아무래도 이번 일은 타이밍이 중요한 것 같네.”
말을 마친 미엘은 누가 말릴 새도 없이 바로 옆에 위치한 산실에 이엘이 누워 있는 침대째로 밀어 넣었다. 그렇게 미엘과 이엘이 사라진 후, 유일하게 정신을 차리고 있던 가비가 열린 창문 밖으로 대뜸 뛰어내렸다. 그제야 다들 허겁지겁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밖은 내게 맡겨라, 노아. 넌 여기서 폐하와 아이를 잘 지키고.”
“고마워.”
르네는 노아의 어깨를 툭툭 쳐 주고는 이엘이 사라진 산실 안쪽 방을 힐끔 쳐다보다가 미련을 거두고 밖으로 나갔다. 용의 말처럼 이번 일은 타이밍이 정말 중요하다. 그녀가 필사적으로 지키려 했던 그 타이밍을, 르네는 반드시 맞출 생각이었다.
*
사경을 헤맨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이엘은 몽롱한 상태에서 제 몸이 공기 중에 부유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레온의 갈기 덕분인지 더 이상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온전한 정신을 차릴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정신 차려! 눈을 뜨고 버텨야 돼! 의식을 잃어선 안 돼!”
그런 와중에 카랑카랑한 여자의 목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본능적으로 손을 뻗은 이엘은 제 옆에서 저를 간절하게 바라보는 노아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그는 단단한 손으로 맞잡으며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을 맹세했다.
― 폐하! 제 말 잘 들으세요!
머릿속을 울리는 스완의 목소리에 이엘은 다시 눈을 번쩍 떴다.
― 제가 두고 온 깃을 들고 저를 찾아오세요. ‘그’가 소환되는 순간을 노려요. 그때 일시적으로 균열이 생길 거예요. 아기를 데리고 오세요. 아셨어요? 차원이 찢어지고 갈라지는 그때를 정확히 노려야 돼요!
간절한 스완의 외침에 알겠다고 대답했다. 이엘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산실엔 미엘과 노아, 패티스, 그리고 이온뿐이었다. 그녀는 멀찍이 서서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는 이온을 향해 손짓했다. 그는 한달음에 다가와 이엘의 손을 꼭 붙잡았다.
“엘…….”
“괜찮아. 네 탓 아니야. 이온, 우리 잘못이 아니야.”
“응. 알아, 우리 잘못이 아니야.”
“무슨 일이 일어나도 네 스스로를 탓하지 마. 날 미워하지 마, 이온.”
“응, 그럴게. 무슨 일이 있어도 원망하지 않을게.”
“고마워. 사실은 부탁이 있어.”
“뭐든. 무엇이든 말해.”
“내 아이……. 네 조카를 잘 부탁해.”
“왜 그런 말을 해! 아이만 남겨 놓고 떠날 것처럼 말하지 마!”
“안 떠나. 내가 아이를 두고 어딜 가겠어. 그냥 혹시 몰라서 그래.”
이온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야 이엘은 웃으며 그의 손을 놓았다. 그녀의 시선이 창밖을 향했다. 어두컴컴한 하늘은 금방이라도 악한 것들을 토해 낼 것처럼 생겼다. 그와 함께 엄청난 진통이 시작됐다.
*
포레스트는 지금 제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경악했다. 그러나 곧 제 쪽으로 오는 올리세스를 발견하곤 로브의 후드를 더 깊게 눌러쓰며 군중 속에 몸을 숨겼다. 올리세스는 자신의 얼굴을 알고 있기 때문에 절대로 들켜선 안 된다. 그 생각에 사람들 속에 몸을 더 파묻을 때였다.
“흡수해.”
“…….”
“흡수할 수 있잖아.”
저 많은 보호석을 전부 어디서 구한 걸까. 올리세스는 산처럼 쌓인 보호석들 앞에 오드를 밀어 넣었다. 저걸 흡수하라고? 그랬다가는 나자르가 죽을지도 모른다.
포레스트는 겁에 질려 발만 동동 굴렀다. 자신도 잘 알지는 못하지만, 보호석이 나자르의 수명과 성력을 갈아 넣어 만든 돌이란 건 안다.
폐하께선 오드 님이 저걸 파괴하는 것에도 괴로워하셨어. 보호석을 만드는 것도, 파괴하는 것도 나자르만 할 수 있는 일인데 그런 행위엔 항상 대가가 따랐다. 나자르의 수명과 성력…….
그런데 흡수를 하라고? 아니. 아무리 나자르라고 해도 버틸 수 없을 것이다. 보다 못한 포레스트가 쓰고 있던 후드를 벗고 앞으로 나가려고 했다.
“올리세스 남작.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이게 신의 뜻에 위배되는 행위인데도 당신은 강행하실 건가요?”
“신은 없어.”
“…….”
“있다고 해도 우릴 버렸잖아. 이런데도 신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해, 나자르?”
“…….”
“시간 끌지 말고 흡수해. 저 보호석들에 남은 성력까지 싹 다 흡수해야 네가 완전해지니까.”
보호석을 만들 때 들어갔던 나자르들의 성력을 오드가 도로 전부 흡수해야 오드의 성력이 더 커질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듯했다. 그게 아니란 걸 여러 차례 설명했지만 올리세스는 더 이상 말이 통하지 않았다.
오드는 그에게서 시선을 돌려 제 앞에 가득 쌓인 흉물들을 쳐다봤다. ……애초에 저런 게 만들어져선 안 됐는데.
하늘을 가만히 쳐다봤다. 이른 새벽인데도 어두컴컴했다. 깊은 밤하늘도 저렇게 깜깜하지는 않을 텐데. 시간에 의해서가 아니라 악한 기운이 모조리 이곳으로 몰려든 탓이다.
오드는 지척에 있는 제도를 바라보았다. 아주 가까이에 황궁이 있고, 이제 곧 나타니엘의 아이가 태어날 것이다. 그는 천천히 보호석을 향해 손을 뻗으며 군중 속에 섞여 있던 포레스트와 눈을 마주했다.
그냥 두세요. 괜찮아요. 입 모양으로 포레스트를 설득했다. 포레스트는 금방이라도 소리를 지르며 올리세스를 막을 태세였지만, 오드의 설득에 그 여린 뱀은 입술을 짓씹으며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오드는 주저하지 않고 보호석에 손을 댔다. 그가 눈을 감고 아무도 알아듣지 못할 언어를 주절대는 순간, 쌓여 있던 보호석에서 검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각기 제 모양을 갖고 있던 보호석들이 일시에 쪼개졌고 그게 점점 더 잘게 쪼개져 가루처럼 됐을 때, 그 검은 잿더미 같은 것들이 오드의 몸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쿨럭! 피를 토하는 오드를 향해 포레스트와 일부 인간들이 다가가려 했지만, 올리세스와 그의 사병들이 무기를 들어 그들을 치는 바람에 모두 오드에게 접근하지 못했다. 오드는 바닥에 쓰러진 상태에서도 보호석을 흡수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포레스트는 눈물이 왈칵 차올라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래도 되는 걸까? 꼭 이렇게 해야만 해?
“여러분. 이게 여러분이 믿는 신의 대리자입니까? 이렇게 약해 빠졌는데.”
“…….”
“우리는 새로운 신을 모셔야 합니다. 여러분을 지킬 수 있는 강한 신을! 저 마녀! 제 아비의 죄에 대한 값을 치를 저 마녀를 죽이고, 우리가 새로운 세상을 엽시다!”
올리세스의 일장 연설에 군중들이 환호하기 시작했다.
한편 올리세스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버린 제 심복 아스타로 때문에 본인이 직접 나서야 하는 이 상황이 못마땅했다. 그러나 최선을 다해, 저를 따르는 멍청한 인간들을 계속해서 부추기고 재촉했다. 어차피 아스타로는 언젠가 버릴 카드였으니까.
그런 일련의 과정들을 가까이서 지켜봤던 포레스트는 군중심리라는 게 참 무섭다고 생각했다. 제 원래 주인이었던 로빈도 저런 일을 잘했는데, 올리세스는 그보다 훨씬 뛰어났다. 둘을 비교 선상에 놓을 수도 없을 만큼.
나의 폐하를 마녀로 몰아가고 있어……. 아닌데. 폐하께선 우리 모두를 살리시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시려고 하는데. 왜 너희만 그걸 몰라. 다들 그 마음을 알고 어떻게든 지켜 내려고 하는데, 왜 너희는 도리어 ‘그’를 불러들이려고 해. 그렇게 해서 가져온 파멸이 과연 너희가 원하는 세상일까?
너희는 정말 그걸 원하는 거야? 이종족이 없는 세상이…… 정말 완벽한 세상이라고 생각해? 왜 그렇게 된 거야? 왜 이지를 잃고 그깟 약에 져서 세상을 바르게 보지 못하게 된 거야? 너희는 분명 신의 축복을 받아 우리보다 뛰어나고 똑똑한 종족이었으면서, 대체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