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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471화 (471/488)
  • 471화

    밀로의 말에 미엘이라고 불린 여자가 미간을 좁히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럴 줄 알았다. 킨은 예전부터 자신을 놀려 먹는 데 재능이 넘쳤으니까. 이런 식으로 또 날 골리려는 건가.

    미엘은 제 앞에 무릎을 꿇은 밀로를 한참 바라보다가 쭈그려 앉아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무래도 이 어린애랑 말싸움을 하는 건 너무 유치하다고 생각하며.

    “일단 너희들의 황제라던 그 인간을 지켜보고. 그 뒤는 우리도 상황을 보고 결정할게. 대신 너도 약속해. 우리도 최대한 널 도우려고 하겠지만, 상황이 좋지 않아서 너희를 돕지 못하게 되면 더 이상 억지 부리지 마.”

    “…….”

    “킨의 사체는 내 몫이야. 그 애는 내가 챙겨 가겠어.”

    밀로는 아주 짧은 순간에 미엘의 눈에 어린 감정을 읽었다. 역시 킨을 데리러 직접 내려온 걸 보면 킨의 말이 틀리지 않은 듯하다. 밀로는 킨이 눈을 감기 직전에 했던 말을 떠올렸다.

    ‘……혹시라도 미엘이 오면, 내 이름을 들먹여서라도 꽉 붙잡아 놔. 그거면 반쯤은 성공한 거니까.’

    미엘은 킨의 반려였고, 그녀는 아직 킨에게 미련이 남은 게 분명했다. 킨이 그러하듯.

    *

    “아……. 반가워요…….”

    까다로운 검문 과정을 거쳐 어렵게 도착한 가비와 미엘은 저희를 맞아 주는 황제를 바라보며 할 말을 잃었다. 커다란 침대에 홀로 누워 있는 모습에서 지독한 외로움을 느꼈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저희를 향해 반갑다고 말한 나타니엘에게, 미엘은 무언가 말을 하려다 말고 도로 입을 다물었다.

    반면 가비는 신기하단 표정으로 이엘을 바라보다가 옆에 있던 작은 의자를 가져와 그 앞에 털썩 앉았다. 그러곤 손을 뻗어 위로 불룩하게 솟은 이엘의 배 위에 얹었다.

    “만져 봐도 되지?”

    “가비. 너 무슨……!”

    “괜찮아요. 만져도 돼요.”

    미엘이 핀잔을 주려는데 이엘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며 허락했다. 애초에 미엘의 말을 들을 생각도 없던 가비가 눈을 감고 이엘의 배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던 노아와 르네는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대뜸 이곳에 내려와 황제를 만나 보겠다며 황궁에 들어오더니, 만나자마자 인사는커녕 다짜고짜 손을 뻗어 배를 만지고 있는 모습이라니. 노아와 르네뿐 아니라 이곳에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가비는 콧노래까지 불러 가며 이엘의 배를 쓰다듬었다. 미세하게 느껴지는 태동이 그녀의 기분을 좋게 만든 것이다. 인간의 아이라니. 직접 보는 게 얼마 만이더라. 기억도 안 나는 까마득한 옛날을 떠올리다가, 가비는 입을 열어 아이에게 축복했다.

    “무럭무럭 자라서 바르고 공의롭고 현명한 인간의 왕이 되렴.”

    “가비. 너 뭐 해? 그런 말을 함부로 하면……,”

    “미엘. 너도 이리 와서 만져 봐. 신기하다니까.”

    “…….”

    “어서.”

    낙관적인 가비의 말에 미엘이 미간을 좁히다가 짧게 한숨을 쉬며 다가왔다. 조금 전까지 상대했던 수컷들과 달리, 침대에 누워 있는 이 인간 여자는 너무도 약해 보여서 자신이 손을 댔다간 뼈도 못 추릴 것만 같았다. 용들에게도 인간은 약한 존재였으니까.

    그렇게 주저하는 미엘의 손을 잡은 건 나타니엘이었다. 제 팔을 들어 올리는 것도 간신히 해냈으면서 미엘의 손을 잡아 배 위에 얹었다.

    “……축복해 주세요. 용들의 축복을 받으면 우리 아이가, 오래 살 수 있을 것 같거든요.”

    “…….”

    이엘의 녹색 눈동자가 또랑또랑하게 빛나는 걸 보며 미엘은 한숨을 쉬곤 그 배를 느리게 쓰다듬었다.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태동이 묘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용에겐 번식을 목적으로 한 짝짓기가 언제였는지도 기억이 안 날 만큼 아주 까마득한 옛날이었다.

    미엘도 마찬가지였다. 제 짝이었던 킨과의 사이에서 수많은 자식을 낳기는 했는데, 그 애들은 다 기억나지도 않았고 지금까지 살아 있는지도 알지 못한다.

    그녀가 기억하는 수컷은 킨이 유일하다. 저와 같이 최초로 신에게서 만들어졌던 수컷 용들도 다 잊어버렸다. 기억하는 건 오로지 킨 하나. 그러므로 킨의 사체는 제 것이다.

    참 아이러니한 기분이었다. 반려라는 존재가 죽어서야 만나게 된 이 상황이 기묘했다.

    “두 분은 어떻게 오신 건가요? 이렇게 이곳에 와도 되는 거예요?”

    이엘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렇게 물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미엘은 서둘러 그녀의 배에서 손을 떼고는 또 멀찍이 물러섰다. 반면 가비는 여전히 이엘의 배를 쓰다듬으며 대수롭지 않게 털어놓았다.

    “수컷이 전부 죽어서. 이제 우리가 개입할 수밖에 없게 됐거든.”

    “수컷이 전부 죽었다고요? 그게 무슨…… 용이 다 죽었나요?”

    “아, 내가 말하는 건 신께서 직접 만들었던 처음의 용들이야. 그 최초의 용들 중 수컷이 전부 죽어 버렸어. 마지막으로 숨이 붙어 있던 놈이 죽었거든.”

    “설마 킨?”

    이엘의 눈동자가 가비를 지나쳐, 조금 뒤에 떨어져 있던 밀로에게 닿았다. 밀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이엘의 물음에 긍정했다. 그에 이엘은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킨이 죽었다니? 대체 왜? 언제? 킨은 전장에 나가지도 않았을 텐데, 대체 왜 죽었다는 거야? 산실에 있느라 밖의 상황을 최소한으로 전해 들었기 때문에 전혀 몰랐던 사실이다.

    “그래서 사체를 수거하기 위해 내려왔던 건데, 네 수컷들이 이 전쟁을 돕지 않으면 킨의 사체를 주지 않겠다고 하네.”

    가비는 엄지로 제 등 뒤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직까지도 킨의 죽음에 얼떨떨한 상태이던 이엘이 달리 대답하지 못한 채 머뭇거리자, 가비는 거기서 관심을 떼고 다시 이엘의 배 속 아이에게 집중했다.

    흠, 남자아이네. 어린 게 벌써부터 똑 부러지고 강단 있고. 저가 처한 상황을 알고 모체를 괴롭히지 않으려 움직임도 최소한으로 줄였구나. 완전한 인간의 아이는 아닌 걸 보면, 아마도 저기 있는 수컷들 중 아비가 있을 것 같은데. 그러면 이 인간 여자는 출산에 목숨을 걸어야 할지도 모른다.

    가비는 뭔가 생각하는 듯하다가 검지로 이엘의 배를 장난스럽게 콕 찔렀다. 그러자 배 속의 아기가 움찔거리며 가비의 손이 닿았던 부근을 툭툭 찼다. 가비의 손가락을 타고 흐른 성력을 아기가 느낀 것이다.

    “미엘. 나 부탁 하나만 해도 돼?”

    그래서였나. 갑자기 호기심이 생긴 가비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미엘의 손을 잡아 흔들었다. 가비의 입에서 무슨 소리가 나올지 알아챈 미엘이 인상을 쓰며 반대하려 했지만 그보다 가비가 조금 더 빨랐다.

    “아기가 태어날 때까지만 여기 더 머무를래.”

    “가비!”

    “어차피 그 수컷 용의 사체를 받으려면 얘넬 도와야 하잖아.”

    “그건 우리가 그냥 강탈하면 돼. 굳이 돕지 않아도 된다고.”

    “난 이미 입으로 아기를 축복했어.”

    “…….”

    “아기가 무사히 태어나는 걸 내 눈으로 봐야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아.”

    그녀들의 대화를 엿듣던 유클리드가 속으로 환호하며 스스로를 칭찬했다. 어쩐지 기운이 심상치 않더라니, 암컷 용 중에서도 상당한 위치에 있는 용들이었던 모양이다.

    게다가 저 가비라는 여자가 하는 말로 미루어 보아, 나자르가 예지가 가능한 것처럼 저 여자에게도 비슷한 능력이 있는 듯했다. 예지까지는 아니어도 입으로 내뱉는 말에 힘이 있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그렇죠. 아이가 무사히 태어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한 시점이죠.”

    “유클리드. 입 다물고 끼어들지 마라.”

    갑작스럽게 유클리드가 세 여자의 대화에 끼어들자 노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놈을 잡아챘다. 하지만 그의 만류에도 유클리드의 뚫린 입은 멈출 기세가 안 보였다.

    “하지만 그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죽을 위기에 처했다면?”

    “유클리드!”

    “누군가에게 목숨이 저당 잡혀 있다면요? 레이디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노아는 저 빌어먹을 스라소니를 믿고 모든 걸 털어놨던 며칠 전의 제 모습을 후회했다. 피시로부터 유클리드가 올리세스의 마을에서 큰 활약을 했다는 증언을 듣고 조금이나마 유클리드에게 마음을 열었던 건데. 그게 이런 식으로 돌아올 줄 알았더라면 스라소니를 동맹군에 끼워 주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노아와 다른 이종족들이 유클리드의 제멋대로인 선언에 반대하는 것과 달리, 침상에 누워 있는 이엘은 이미 예상했던 것처럼 조용히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유클리드는 이엘을 힐끗 쳐다보며 한쪽 눈을 찡그려 윙크하곤 다시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당신들은 신께서 우리 이종족과 인간을 만드실 때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셨다고 했죠?”

    “그래.”

    “그렇다면 신께서 인간을, 그리고 이종족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도 잘 아시겠군요.”

    “…….”

    “또한 이 세계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도.”

    유클리드의 말에 미엘과 가비가 모두 입을 다물었다. 특히 가비는 조금 전까지 배 속의 아이와 교류했기 때문에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을 그 애로부터 전해 들은 상태였다. 그래서 이곳에 남겠다고 말한 것이기도 했고.

    “전쟁에 참여해 달라는 게 아니에요.”

    이엘이 손을 뻗어 가까운 쪽에 있던 가비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그녀의 시선이 제게 닿자, 이엘은 조금 더 힘주어 말했다.

    “전 신탁을 받았어요. 신께서 저와 제 동생을 통해 이곳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돌리실 거라고요. 새로운 세계를 만드실 거라고.”

    “알아. 네가 신탁의 아이라는 건.”

    미엘은 나타니엘을 보자마자 신께서 고른 아이가 저 아이라는 걸 단번에 알아차렸다. 신의 사랑을 받은 아이. 인간에게서 희망 같은 건 더 이상 보이지 않는데, 그런데도 신은 마지막 희망을 이곳에 남겨 놨다. 그게 나타니엘, 저 아이라는 걸 미엘은 바로 알아챘다.

    “그냥 우리가 신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신의 사랑을 받았던 그때로 돌아갈 수 있도록, 조금만 도와주면 안 될까요?”

    이엘의 목소리를 듣던 가비가 양쪽 눈썹 끝을 아래로 내려뜨리며 미엘을 쳐다봤다. 아기가 태어날 때까지 머무르겠다는 결정은 자신이 했으니, 이번 결정은 미엘이 하라는 뜻이었다. 미엘은 나타니엘의 녹색 눈동자를 가만히 쳐다봤다.

    마지막……. 저 애가 마지막 인간 여자. 신께서 남겨 놓으신 마지막 신탁. 마지막……. 우리의 마지막 수컷이자 나의 반려였던 킨의 죽음. 그것 때문에 이곳에 내려온 나와 미엘, 그리고 몇몇 암컷들. 과연 이게 우연일까?

    우리는 여기서 어떤 식으로든 선택을 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우리 또한 신께서 만든 존재니까. 우리 역시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 거야.

    “그리고 여기에 너희 동족도 있어. 암컷 용 말이야.”

    한참의 침묵을 깬 건 밀로였다. 그는 무리를 헤치고 나와 두 용을 향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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