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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469화 (469/488)

469화

한편 가비는 제 옆에 선 여자를 힐끗 보며 의견을 묻는 듯했다. 여자는 피곤한 듯 머리를 쓸어 올리며 단호히 고개를 저었고, 가비 역시 그 뜻에 수긍했기에 어깨를 으쓱이며 유클리드에게 거절의 의사를 표했다.

“안타깝게도 우린 인간의 일에 끼어들면 안 돼. 신의 뜻이 아니면 우리는……,”

“신의 뜻이라면요?”

유클리드가 태연한 표정으로 물었다. 신의 뜻? 뜬금없는 이야기가 나온 것에 가비가 미간을 찌푸렸다. 유클리드는 의문을 갖는 그녀를 위해 친절을 가장한 미소를 지은 채 나긋나긋 설명했다.

“신탁이 있었습니다.”

“…….”

“저희 황제께서 이 세상을 바꾸고 정화할 것이라는 신탁이요.”

신께선 이 하등한 종족들을 너무도 사랑하셔서 신탁이라는 걸 보내 주셨었지. 용들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신탁이 내려온 지 꽤 됐다는 것 또한. 그러니 저들이 언급한 신탁은 그 마지막 신탁을 말하는 것일 테다.

두 여자의 표정에 약간의 머뭇거림이 묻은 것을 확인한 유클리드는 순종적인 척 유순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지금 저희 폐하께서 금방이라도 죽으실 듯해서. 신탁이 위험한 상황입니다.”

“신탁은 깨지지 않아.”

“그렇습니다만, 보시다시피 저희는 신께 버려진 자들이 아니겠습니까.”

“…….”

“신탁 하나만 믿고 겨우 버티고 있습니다.”

유클리드의 말에 잠깐 침묵이 감돌았다. 신탁이 어그러지는 일은 없다. 이렇게 아예 끊어져 버릴지언정, 이미 내려온 신탁이 바뀌는 경우는 없었다. 그래서 유클리드는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신탁이 이뤄지기 위해, 당신들이 이곳에 온 건 아닐까요.”

유클리드의 청산유수 같은 설명에 르네는 혀를 찼다. 저런 식으로 암컷 용들을 속일 수 있을까. 그러면서도 반신반의하며 그녀들의 표정을 살펴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용들은 고민에 빠졌다. 신탁은 성력과 또 별개의 일이다. 신이 직접 내리는 신의 음성이었고, 신의 성력을 빌려 쓰는 용들도 신탁에 관해선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이따금 나자르처럼 예언하는 용도 있었지만, 신탁은 예언의 개념이 아니었다. 명명한 미래의 일을 뜻했다. 반드시 이루어지는 미래.

“가비. 저 말 어떻게 생각해?”

“응. 일단은…… 저들의 황제라는 사람을 만나 보는 게 우선인 것 같네.”

가비는 제 팔을 잡는 여자에게 그렇게 설명하고는 유클리드를 향해 황제에게 안내하라는 말을 남겼다. 그러곤 고개를 위로 올려 아직 하늘에 있는 다른 용들에게 소리쳤다.

“여기 잘 지키고 있어! 금방 돌아올게!”

유클리드는 두 여자에게 선두를 양보하며 고개만 뒤로 돌려 르네를 향해 한쪽 눈을 찡긋했다. 이런 일은 자신이 제일 잘하는 일이니 제게 맡기라는 의미였다.

*

“아스타로 님. 집결했습니다.”

“그래, 이제 시작이구나. 그동안 네가 수고가 많았단다, 포레스트.”

“아뇨, 제가 한 건 아무것도 없는걸요.”

포레스트가 무해하게 웃으니 아스타로의 입가가 경련이 일 듯 파르르 떨렸다. 말로는 포레스트의 공을 치하한다고 해 놓고, 실상은 제 입지를 좁혀 오는 포레스트의 존재가 불안한 탓이다. 그걸 잘 알고 있는 포레스트는 또다시 해맑게 웃으며 그 속에 어떤 저의도 없다는 듯 굴었다.

“다 아스타로 님 덕분이에요. 길바닥에서 전전하던 저를 거두어 주셨잖아요.”

“…….”

“이제 나가실 시간이에요, 아스타로 님.”

“아아, 그래. 나가자꾸나.”

아스타로는 포레스트의 곁을 지나치면서도 찜찜한 기운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의 말처럼 포레스트를 거두어 키운 건 자신인데도, 그래서 포레스트가 제게 절대적으로 충성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데도, 포레스트를 볼 때마다 제 목이 점점 졸려 오는 듯한 기분이 든 것이다.

그는 찝찝한 감정을 갈무리하고 휘장을 열어 밖으로 나왔다. 밖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저를 바라보며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반은 포필렌에 취해 제정신이 아니었고, 또 반은 진심으로 미쳐 있었다. 그들 모두 아스타로가 진짜 신의 대리자라도 된 것처럼 바라보고 있었다.

“모두 조용히 하세요.”

아스타로의 말에 군중들은 입을 다물고 두 손을 모았다. 성력을 주세요! 성수를 부어 주세요! 축복해 주세요! 전쟁에서 승리하게 해 주세요! 이종족을 몰아내 주세요! 황제를 죽여 주세요! 그들은 입을 모아 한마음으로 소리쳤다. 그들을 조용히 시킨 아스타로가 목을 가다듬고 그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악한 이종족이 사라지고 신의 뜻에 따라 인간만이 살아남을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작은 신께서 더 큰 축복을 내리실 겁니다!”

“작은 신이시여!”

“작은 신님!”

아스타로의 소개에 이어 올리세스가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들은 미쳐 있었다. 그들에겐 보이지 않는 신보다, 저렇게 눈앞에 보이는 육신을 가진 가짜 신이 더 신처럼 보였다.

군중은 광신도가 되어 바닥에 납죽 엎드렸다 허리를 펴고, 다시 납죽 엎드렸다가 허리를 펴며 절하기를 반복했다. 올리세스는 단상에서 내려가 저를 향해 엎드린 사람들을 만지고 쓰다듬으며 그들을 위로했다.

“나자르를 데려와라.”

제 얼굴을 아는 올리세스의 눈에 띄지 않도록 뒤에 숨어 가만히 상황을 주시하기만 하던 포레스트에게 아스타로가 조용히 속삭였다. 포레스트는 안으로 들어가 대기하고 있던 오드를 찾았다. 그러나 오드의 안색은 좋지 않았다.

“오드 님. 괜찮으세요?”

“괜찮아요. 이 정도는.”

제도에서 이곳으로 끌려온 뒤로 오드의 상태는 날이 갈수록 안 좋아졌다. 여긴 사특한 기운이 너무 강했고, 정화되지 않은 곳이었기에 혼자 버티는 게 힘들었던 것이다. 본래 나자르의 성력이란 신을 믿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강해지고, 신을 떠나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약해진다. 그러므로 지금 이곳은 오드에게 최악의 장소였다.

“아스타로가 오드 님을 찾아요. 나가 보셔야 할 듯한데 힘드시면 제가 가서 잘 말할게요.”

“포레스트. 그대는 이곳에 온 뒤로 많이 바뀐 것 같네요.”

“네?”

“폐하를 생각하는 그대의 마음이 내게도 잘 느껴진다는 소리예요.”

“……감사합니다.”

“제게 감사할 건 아니죠. 그대가 기회를 잘 잡은 거니까.”

오드는 포레스트에게 싱긋 웃어 준 뒤에 휘장을 지나쳐 아스타로가 선 단상에 함께 올랐다. 그 아래는 장관이었다. 사람들이 올리세스를 향해 소리를 질렀고 열광했다. 그가 정말 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발치에 닿지 못해 안달이었다. 그 모습을 오드는 씁쓸하게 지켜보았다.

“어서 성력을 사용해.”

아스타로는 오드의 등을 막대기로 쿡 찌르며 종용했다. 오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에 온 뒤로 올리세스와 아스타로에게 이제 그만 멈출 것을 숱하게 요구했지만 그들은 오드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들에겐 신은 이미 없는 존재였다. 그러니 나자르인 자신의 말을 들을 리가.

오드는 포기한 듯 손을 뻗고 성력으로 작은 돌풍을 일으켰다. 정화가 담긴 성력은 절대로 사용하지 말라고 했으므로, 보여주기 식의 능력밖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사실 이런 건 이종족의 능력과 비슷한데도 올리세스와 아스타로는 이종족은 배척하면서 그들의 능력은 탐했다. 공생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의미다.

“이제 곧 제도로 갈 거야. 거기서 허튼짓할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아. 황제에게 무슨 일이 생기길 바라는 게 아니라면.”

“…….”

“넌 조용히 올리세스 님을 따르기만 하면 돼. 어차피 네가 믿는 너의 신은 이미 이 땅을 버렸잖아? 그러니 너야말로 그만 마음을 접고 이쪽에 붙어. 그게 네가 살 길이니까.”

도리어 아스타로가 오드를 회유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기만 하던 포레스트는 제 근처로 다가온 늑대에게 조용히 작전을 설명했다.

“앤디 님. 이제 곧 시작이에요. 제도로 가는 도중에 작은 소동을 만들게요. 그 틈에 앤디 님은 아스타로를 납치해서 제도로 데려가세요.”

“알겠다. 신호를 주면 곧장 그렇게 하지. 그리고 슈프가 운반책을 잘해 주고 있어서 해독제도 빠르게 유통되고 있어. 그건 걱정 말고.”

“네.”

앤디는 포레스트의 대답을 듣고는 곧장 그 장소를 빠져나왔다. 모두의 눈을 피해 수풀 속에 몸을 숨긴 그는 어마어마한 인파의 후미 쪽으로 몸을 낮춰 걸어갔다.

그동안 앤디는 이곳에서 많은 일을 했다. 그중 주 임무는 아스타로의 현란한 말주변에 현혹되거나 세뇌된 게 아닌, 포필렌 때문에 미쳐 버린 자들에겐 해독제를 조금씩 먹이는 것이었다.

그렇게 포필렌으로 인해 미쳤던 자들의 절반 정도가 정신을 차렸다. 너무 중독돼 가망이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 모든 이에게 해독제를 나눠 주었다.

그리고 그렇게 정신을 차린 이들은 무리의 가장 끝에서부터 선두 쪽을 향해 조금씩 세력을 확장시키고 있었다. 내부를 뒤흔들어 전세를 역전시키기 위해. 올리세스와 아스타로에게 대항하기 위해. 정신을 차린 자들과 아스타로에게 불만을 품은 자들. 그들이 전부 포레스트의 편에 서기 시작했다.

모든 게 앤디의 계획대로였다. 아스타로의 자리를 빼앗아 포레스트에게 주겠다는 그의 다짐이 이제 곧 실현될 것이다. 이미 아스타로를 밀어내고 포레스트를 머리에 세워야 한다는 여론이 은근하게 형성되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전세가 뒤바뀔 타이밍에 맞춰, 앤디는 아스타로를 납치해 제도로 향하면 된다. 아스타로의 목을 가져가기 위해 이곳에 잠입했다. 감히 내 수하를 이교도로 만들어 동맹군에 분열을 가져오게 했던 그 사건에 대한 죗값을 톡톡히 받아 내리라. 그렇게 다짐하며 다시 이를 갈았다.

결전의 날은 생각보다 이르게 다가왔다. 수많은 군중들이 제도로 떠난 지 나흘째 되던 날, 예상치 못한 일이 터진 것이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포레스트의 행동이 아스타로의 심기를 거스른 건지, 아스타로가 제 시중을 들던 포레스트의 뺨을 거세게 후려쳤다. 포레스트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아스타로에게 말대답을 하며 그에게서 조금 더 얻어맞았다.

“네가 요새 아주 살맛이 나지? 네가 내 자리를 노리고 있다는 걸 내가 모를 줄 알았나?”

“저를 후계자로 키우실 생각이 아니셨습니까? 전 그런 줄 알았는데요.”

“어디서 말대답을 해, 근본도 없는 놈이.”

아스타로는 그동안 올리세스의 암묵적인 허락하에 리노 윌터에게 폭력을 행사하며 스트레스를 풀어 왔다. 그러나 이제 리노 윌터는 죽었고 그의 역할을 대신할 자를 찾아야 했다.

“오늘 네 버릇을 고쳐 줘야겠구나.”

소매를 걷어붙이고 본격적으로 뺨을 때리기 시작했다. 포레스트는 이를 악물고 참아 내면서도 밖에 있는 사람들이 알아채지 못하게 은근히 아스타로의 신경을 건드렸다. 그럴수록 아스타로의 폭력은 잔혹하게 변했고 포레스트는 온몸에 성한 데가 없을 정도로 구르고 또 굴렀다.

꼭두새벽에 시작된 폭력은 해가 뜰 때까지 이어졌다. 극한의 고통을 참고 견딘 포레스트는 엉망이 된 채 아스타로의 천막에서 쫓겨났다.

그렇게 비틀비틀 걸어 나오던 포레스트를 발견한 사람들이 눈을 치떴다. 그들은 영문도 모른 채 달려와 포레스트를 부축했고, 이 어린 뱀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온몸을 벌벌 떨었다.

“저, 저 좀 살려 주세요, 여러분……. 아, 아스타로 님께서 저를……흑! 저를…… 저를 괴롭히셔서, 너무, 너무 무서워요……. 죽고만 싶어요, 저 어떡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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