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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468화 (468/488)
  • 468화

    *

    “코드 레드! 코드 레드! 비상사태! 비상사태!”

    “코드 레드! 전달, 코드 레드!”

    독수리들이 가장 먼저 기민하게 알아채고 비상사태를 선언했다. 하늘을 쩌렁쩌렁 울리는 독수리들의 괴성에 땅에서 싸우던 동맹군과 반란군의 전투도 멎었다. 이종족의 감각으로 곧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감한 것이다.

    그와 동시에 살아 있는 시체처럼 목적 없이 공격만 퍼붓던 반란군이 소리를 내지르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다들 정렬을 바로 해라!”

    창공에서 내려앉은 르네가 독수리의 모습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와 혼란에 빠진 동맹군을 독려했다. 그날 이후 짧은 휴전이 주어졌고, 그 기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 그 괴이한 생물체를 마주했을 때의 패배감을 또다시 겪고 싶지 않았기에 제도군은 사력을 다해 준비했다.

    그럼에도 떨리는 심장은 감출 수 없었다. 어쩌면 정말로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상황이 올지도 모르기에.

    “호르난 경!”

    “예, 각하.”

    르네의 지휘에 따라 성전기사단장인 사피라가 성전기사단을 일렬로 정렬시켰다. 지금까지 요새에 결계를 치느라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던 성전기사단마저 전부 밖으로 끌어내 집결시켰다. 그것들을 처리하기 위해선 전력을 다해야만 한다.

    “결계를 쳐라.”

    “예!”

    호르난의 명령에 따라 성전기사단이 온 힘을 다해 결계를 드넓게 펼치자, 기다렸다는 듯이 동맹군 중 코끼리와 곰이 그들 앞으로 치고 나가 전투를 준비했다.

    얼음을 사용하는 늑대와 물을 사용하는 스라소니가 먼 거리에서 땅을 축축하게 적시고 얼리면, 곰이 곧장 능력을 사용해 ‘그것들’이 지상으로 올라오기 전에 질척해진 흙에 발을 묶어 둘 계획이었다. 그다음 하늘에서 독수리와 매가 화살을 쏘고, 뒤에서 대기하던 1, 2기사단이 연합해 총으로 제압하면 된다.

    이 과정을 숱하게 연습해 서로의 손발을 맞췄다. 언제 나타날지 모를 그 괴물들을 상대하기 위해 미리 준비했고 이제 실전에서 사용하면 되는 거였는데…….

    “꾸에에엑!!”

    돌연 고막을 찢을 듯한 괴성에 모두가 귀를 틀어막았다. 이렇게 땅을 타고 흘러들어 오는 굉음은 딱따구리의 능력이다. 이상한데? 딱따구리는 이번 전쟁에 참전하지 않았을 텐데 대체 어디서……! 아주 잠깐 방심하며 정렬이 흐트러졌을 때였다.

    “하늘입니다!!”

    누군가의 목소리에 르네의 시선이 위를 향했다. ……틀렸다. 저번처럼 땅을 파헤치며 올라올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번엔 다른 방식이었다. 저 멀리서 그것이 엄청난 속도로 날아들고 있었다.

    “나, 날개가 있습니다……. 매의 것이…….”

    “깃털은 여전히 공작새의 것이나, 다리는 호랑이의 것으로 보입니다.”

    “몸통은…… 코끼리 같습니다.”

    모두가 넋이 나간 듯한 표정으로 떠듬떠듬 보고를 이었다. 르네는 그 보고들을 받으며 한쪽 눈으로 능력을 집중해 다가오고 있는 놈을 샅샅이 살폈다.

    보고는 정확했다. 며칠 전에 이곳을 공격했던 그 괴물들과 또 다른 형태의 괴물이었던 것이다. 젠장, 마구잡이로 조합하고 있는 건가? 있는 대로 조합하고 그중에 살아 있는 것들만 제도로 보내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닥치는 대로 조합하고 있다는 건…… 저쪽에 붙잡힌, 혹은 포필렌에 중독되어 홀려 버린 이종족들을 마구잡이로 실험에 사용하고 있다는 의미와도 같았다. 이런 식이면 앤디에게 딸려 보낸 해독제도 소용없어진다.

    해독제를 써 보기도 전에 다 죽을 것이다. 손쓸 도리도 없이 모두 죽게 될 거라고. 르네는 점점 더 가까워지는 괴물을 바라보며 허망함에 입을 꾹 다물었다.

    “공작님! 어떠, 어떻게 합니까?!”

    모두가 공황에 빠졌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명령이 떨어질 르네의 입만 간절하게 바라보았다. 르네는 고개를 천천히 돌려 황궁이 있는 곳을 응시했다. 이제 그녀의 출산이 얼마 남지 않았다. 시간을…… 시간을 벌어야 한다.

    “뭐 해?! 명령을 내려!”

    보다 못한 유클리드가 르네의 앞까지 달려오며 소리를 질러 그의 정신을 깨웠다. 그제야 상념에서 빠져나온 르네가 고개를 끄덕이며 독수리의 모습으로 변했다. 하늘 위로 떠오른 그가 곧 있으면 저희 쪽으로 충돌하게 될 그 괴물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노려봤다. 그러곤 소리쳤다.

    “호르난 경! 경은 성전기사단과 함께 결계에 집중하게! 절대로 흐트러져선 안 돼! 창공은 신경 쓰지 말고 대지를 지켜라!”

    “예, 각하!”

    “알폰스 경, 유클리드 백! 그대들은 내가 틈을 파고들면 곧장 능력을 사용해서 놈을 얼려 땅 아래로 떨어뜨려야 한다! 놈의 깃털이 능력을 반사하지 못하게 조심해!”

    “알겠습니다!”

    독수리들도 정렬을 마쳤다. 르네는 제 주변으로 전열을 갖춘 독수리와 매를 바라보다가 심호흡을 길게 한 번 내뱉고는 다가오는 놈을 향해 순식간에 날아들었다. 그 뒤를 따라 독수리 떼와 매 떼가 한꺼번에 날았고, 땅에서 대기하던 동맹군들은 파고들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쩌어억―! 하늘이 두 쪽 나는 소리가 들렸다. 가장 앞서 달려들었던 르네와 독수리들이 번쩍거리는 섬광에 순간적으로 눈을 깜빡였고, 곧이어 알 수 없는 파장에 밀쳐져 바닥으로 패대기쳐졌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땅을 딛고 서 있던 동맹군들은 그들을 받아 낼 재간이 없었다. 동맹군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영문을 몰랐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독수리와 매가 전부 낙하했고 나머지는 번쩍였던 섬광 때문에 시야 확보에 실패한 상태였다. 모두가 눈을 끔뻑거렸지만 앞이 제대로 보이질 않는다.

    독수리와 매를 밀쳐 낸 건 저 괴물이 한 짓인가? 거리가 상당했는데 원거리에서 공격한 건가? 그렇다면 이건 대체 어떤 종족의 능력이……,

    “난장판이네.”

    하늘이 갈라지고 섬광이 번쩍였던 자리에 누군가 혀를 차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 뒤로 동족으로 보이는 것들이 몇 마리 더 있었다. 독수리와 매를 공격한 건 괴물들이 아니라 번쩍였던 섬광 속에서 나타난 그들인 듯했다.

    “이건 뭐야? 이렇게 생긴 게 있었어? 윽, 구역질 나.”

    “걘 어디 있어? 여기 있는 건 맞아?”

    “맞다니까?”

    귀찮다는 듯 투덜거리던 그들 중 하나가 조금 전에 제 몸에 부딪힌 그 괴물의 목을 한 손에 움켜쥐고 뚝 꺾어 기절시켰다. 뭐야, 별 시답잖은 놈이잖아? 그렇게 살벌한 말을 내뱉은 그들의 본체가 하늘을 메울 것처럼 상공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푸른색 비늘이 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저거 용 아니야?”

    가장 먼저 정신 차린 건 유클리드였다. 그는 쓰러져 있는 르네에게로 달려가 그를 발로 툭 차며 물었다. 르네도 조금 전부터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였다.

    용……. 진짜 용이다. 밀로의 본체와는 다른 모습이었지만, 저 영롱하고 선연한 푸른빛 비늘은 저들이 용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어림잡아 셋 정도? 아니. 다섯인가? 긴 몸이 서로 엉켜 한 몸처럼 보였으나 족히 다섯은 되어 보이는 숫자였다. 르네는 하나만 남은 눈을 느릿하게 깜빡거리며 그들을 주시했다.

    “저거 암컷이잖아.”

    “…….”

    “이봐, 공작. 무슨 설명이라도……!”

    유클리드마저 당황해서 르네의 깃털을 붙잡으려는데 돌연 하늘에서 천둥이 치며 귀청을 때렸다. 쏟아진 벼락은 동맹군이 버티고 선 땅을 찢고 갈랐다.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바로 코앞에서 뚝 떨어진 벼락에 모두가 긴장한 낯으로 고개를 들어 올렸을 때였다.

    “시체 찾으러 왔는데. 여기 용 없었니?”

    푸른빛 머리카락이 탐스럽게 굽이치는 여자가 하늘에서 훌쩍 뛰어내려 바닥에 착지했다. 용이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르네는 그것조차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밀로의 말에 의하면 용은 본체와 인간의 모습으로 변하는 게 다른 이종족들과 달라서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고 했는데. 하지만 지금 이 여자는 순식간에 인간의 모습으로 변했다.

    “뭐야. 벌써 바스러져 사라진 건가?”

    대답 없는 동맹군을 향해 고개를 기우뚱 기울이던 여자는 고개를 위로 쳐들며 쩌렁쩌렁하게 고함을 질렀다.

    “가비! 여기 없는 것 같은데? 네가 잘못 안 거 아니니?”

    “맞는데?”

    가비라고 불린 여자가 또 인간의 모습으로 휙 변하더니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 쿵! 대지를 뒤흔들 만큼 엄청난 충격이 있었음에도 여자의 신체엔 작은 상처도 생기지 않았다.

    그녀는 다리에 묻은 흙먼지를 대수롭지 않게 툭툭 쳐 털어 낸 뒤, 푸른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려 가며 그들을 지켜보다가 유클리드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러곤 그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넌 뭔가 아는 것 같은데. 우릴 용의 시체가 있는 곳으로 안내해.”

    “갑자기 이게 무슨 짓이지? 너희가 누군지 소속을 밝혀라.”

    정신을 차리며 일어선 르네가 동맹군을 보호하듯 제 뒤로 보내며 경고하고는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와 그들을 향해 활시위를 겨눴다.

    “아이고, 피곤하게 구네. 그냥 좋은 말로 할 때 안내하는 게 어때? 피차 같은 공간에 있는 게 싫은 건 마찬가지구만.”

    “가비. 정말 여기 있는 것 맞아?”

    “그렇대도. 여기서 숨이 꺼졌어. 걔가 마지막이라 내가 주시하고 있었다구.”

    영문 모를 대화를 이어 가는 여자들을 지켜보며 유클리드가 웃었다. 그는 이 순간만을 기다려 왔다. 암컷 용이 정말로 존재했고, 이렇게 눈앞에 나타나 주다니. 게다가 조금 전에 그 괴물을 가볍게 처리하는 것만 봐도…….

    한 마리도 아니고 다섯 마리나 이 세계에 왔다. 이건…… 이건 놓칠 수 없는 기회야. 그의 눈에 광기가 어렸다. 그는 르네를 밀치고 앞으로 나가 여자들을 향해 흔흔히 웃으며 말했다.

    “제가 그곳으로 안내하겠습니다, 레이디들.”

    “역시 얘가 알고 있었네.”

    가비는 그것 보라며 옆에 있는 여자를 향해 코끝을 찡긋거렸고, 그녀는 가비의 머리를 톡톡 건드리더니 별수 없다는 듯이 고갯짓을 했다. 얼른 수컷 용이 있는 곳으로 안내하라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 전에 부탁이 있습니다, 레이디.”

    “뭐?”

    “저것이 보이십니까?”

    유클리드가 가리킨 것은 조금 전에 가비가 목을 부러뜨린 괴물이었다. 덩치가 어마어마했기 때문에 괴물이 떨어진 곳에 큰 구덩이가 생겼다. 그걸 힐끗 보던 가비가 고개를 주억이며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저런 걸 만드니까 너희가 신께 버림을 받는 거야.”

    “예. 저건 신께서 만들지 않은 부정한 것들이죠.”

    “…….”

    “그래서 저희가 처리하려고 하는데, 조금만 도와주시면 어떨까요?”

    르네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무슨 헛소리를 하나 했는데 대화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이쪽으로 이끌어내 용의 참전을 유도하고 있다. ……난놈이군.

    유클리드의 응변을 볼 때마다 기가 막힌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데 인정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특히 저 태세가 휙휙 바뀌는 건 타고난 기질이다. 낯빛 하나 바뀌지 않고 주변에 쉽게 융화되는 꼴을 보니, 인간들과 부대껴서 오래도록 살아남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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